아침마다 주님의 사랑으로 - 시편 90:1~17[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11-10 15:10
조회
367
2024년 11월 1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아침마다 주님의 사랑으로
본문: 시편 90:1~17
모세의 시로 전해지고 있는 시편 본문 말씀은 매우 엄숙하고 진지한 정신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무상성을 대비하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문제를 놓고 씨름하며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지구가 탄생하여 존속한 46억 년 가운데 70~80년 한평생 살다가는 인생을 생각해도 덧없이 느껴지거늘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선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면 더더욱 덧없이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아도 정말 덧없는 인생을 실감할 때도 있습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한 줌의 재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확인할 때 덧없는 인생을 새삼 실감합니다.
한 줌의 재로, 혹은 한 줌의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다소간 시간의 차이가 있고 과정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누구나 그로부터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많은 것을 누리고 많은 것을 소유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누리고 소유하는 것으로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히 행복을 보장해 줄 것처럼 애지중지하지만, 결국에는 누구나 자신을 지탱해 준 육신마저도 가지고 되돌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 엄연한 진실은, 비단 탐욕으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누리는 것과 소유한 것에 유달리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만 각성의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엄연한 진실은 누구에게나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은 특별히 모질고 특별히 탐욕스러운 삶을 살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은 누리는 것과 소유한 것에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 모두 역시 예외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삶을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소유와 업적을 위해 끊임없이 내달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가진 것을 자랑해야 하고 일해 온 것을 내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타인에게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돈도 빌려주지 않고 업적이 없으면 어디서 써 주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기회를 얻었다 해도 계속해서 업적과 실적을 내지 않으면 언제 그 지위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되지 않는 삶의 실상입니다. 결국 가진 것을 하나도 가지고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도 예외가 없듯이, 그럼에도 가진 것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점에도 예외가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한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덧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되지 않는 삶, 그 진실을 깨달을 때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새로운 삶의 용기와 희망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숙연한 마음으로 함께 한 우리에게 이 어인 비탄입니까?
그 진실을 확인하는 것은 그저 인생의 허망함을 확인하는 것일까요? 그야말로 비탄일 뿐일까요?
많은 사람은 그 엄연한 진실을 말하면 곧 인생의 허무함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 세상을 비관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라고 사람들은 종종 말합니다. 좋게 말하면 인생을 달관한 태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그러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또 많은 사람은 죄인 된 인생의 허무함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르침을 인생에 대한 비관과 염세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신앙을 가진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을 철저히 혐오하며 열광과 혼미한 상태에 빠져 살아가기도 합니다.
과연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무상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 인생에 대한 혐오와 염세를 의미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적어도 성서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르침에서 이 진실을 일깨우는 목적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진정한 믿음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을 저버린 절망으로 우리 인생을 안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믿음을 회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이 아니면 그 진실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일종의 반어법이라고 할까요? 그릇을 깨트린 아이를 보고 “참 잘했다”고 말하면 반어법입니다. 병문안 간 친구가 누워있는 친구더러 “너 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악담을 했더니 거꾸로 “내가 꼭 살아서 너 죽는 꼴 봐야겠다”고 이를 악물고 병마를 이겨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표면의 의미와 달리 반대 효과를 가져오는 표현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시적 표현으로 자주 사용될 뿐 아니라 특수한 시적 표현을 넘어 사실은 성서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강조 역시 정반대의 의미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려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인생의 허망함을 말하는 것은 염세적 비관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 말씀은 적극적인 인생관을 일깨웁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낙관적인 인생관을 가르칩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 인생이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뛰고 날라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옛 속담은 인간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계를 알 때 인간이 진정으로 가야 할 바 행해야 할 바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학교 다닐 때 한 선생님(한태동)의 말씀이 항상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선생님은 당신이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을 ‘손오공의 머리띠’와 같은 것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뛰고 날아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속담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 머리띠는 손오공이 제 잘난 줄 알고 기고만장할 때 고통을 주어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머리띠는 손오공의 한계를 지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머나먼 구도의 여행을 떠나는 스승 삼장법사를 수행함으로써 진정한 불제자가 되도록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이야기는 한계를 분명히 알 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본문 말씀의 의미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깨달으므로 절망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오히려 복된 삶을 누린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시편은 그 말미(13)에서 급격히 반전합니다. “주님, 돌아와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강력한 생의 의욕을 내비치는 외침입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는 삶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 수만큼, 우리가 재난을 당한 햇수만큼,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시오. 주님의 종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일을 드러내 주시고, 그 자손에게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십시오. 주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14~17).
많은 시편이 탄식으로 일관하는 것 같지만, 시편은 언제나 이와 같이 급격한 전환을 동반합니다. 인생의 쓴맛을 아는 사람이라야 인생의 단맛도 아는 법입니다. 시편의 노래들은 그 진실을 일깨워 줍니다.
『거대한 전환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의 저자 칼 폴라니는, 인간의 한계,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진실이 함축하는 진정한 뜻을 새삼 일깨워 줍니다. 오늘의 시장경제를 ‘사탄의 맷돌’로 비유하며 그 폐해를 일깨운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그 책의 마지막 장은 그에 저항하여 인간의 삶을 보장하는 정신에 대해 역설함으로써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깨달음, 자유에 대한 깨달음, 사회에 대한 깨달음이 그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성서적 기원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구약성서에서, 자유에 대한 깨달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기원하였고, 사회에 대한 깨달음은 근대사회에서 등장한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초기 교회의 공동체적 연대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늘 특별히 본문 말씀의 의미와 관련하여 주목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깨달음이 갖는 의미입니다.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을 뜻합니다. 바로 그 깨달음 덕분에 인간은 오히려 지금 주어진 삶에서 의미를 쌓아 올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지금 주어진 삶이 영원할 수 없다는 엄연한 진실, 지금 주어진 사회 현상이 영원할 수 없다는 진실 앞에서 마주한 ‘체념’이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희망의 샘이 됩니다. 여기서 인간이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죽음보다 더 끔찍한 사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사태를 뛰어넘기 위해 분투합니다.
죽음보다 더 끔찍한 사태는 “절망”이며, 그것은 달리 말하면 “영혼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케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써 자기 자신의 영혼을 발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자포자기해 버리는 사태입니다. 자신도 없고 다른 사람들과의 삶의 연대성도 무너져버린 현실, 그저 사람이 하나의 부품, 하나의 기능적 존재로 전락해 버린 오늘 삶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간 우리는 영혼을 잃어버린 자의 빈말과 횡설수설로 마음 아파했고 허탈해했습니다. 권력의 무상함을 알았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요?
모든 인간이 예외없이 마주하는 죽음 앞에서 겸허히 주어진 삶에서 의미를 추구하며 죽음보다 더 끔찍한 사태를 분별할 수 있을 때, 인간은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며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병에 묶어 두는 사태에 저항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요한 11:4). 죽음보다 더 끔찍한 사태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될 삶의 의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을 비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십시오. 한 번에 하루를 살게 하시고 한 번에 한 순간을 누리게 하시며, 어려운 일들을 평화에 이르는 좁은 길로 받아들이며, 죄로 가득한 세상을, 내가 갖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그분께서 그러하셨듯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제가 그분의 뜻 아래 무릎 꿇을 때, 그분께서 바로잡으실 것을 믿게 하셔서 이생에서는 사리에 맞는 행복을 내생에서는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다함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본문 시편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일깨웁니다. 우리를 죽음에 이르는 병에 묶어 두지 않고 진정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유한하지만 오히려 의미 있는 삶에 대한 희망이요 간구입니다.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이 간구에 담긴 말씀의 뜻을 새기기 바랍니다. 아침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장중에서 누리는 인생의 참 기쁨을 노래합니다. 우리의 한 목숨을 생각하면 정말 덧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한계를 절감할 때 오히려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진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진실을 늘 새기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지만 영원에 잇대어 있습니다. 영혼을 지닌 존재로서 저마다 소중한 삶을 기쁨으로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아침마다 주님의 사랑으로
본문: 시편 90:1~17
모세의 시로 전해지고 있는 시편 본문 말씀은 매우 엄숙하고 진지한 정신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무상성을 대비하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문제를 놓고 씨름하며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지구가 탄생하여 존속한 46억 년 가운데 70~80년 한평생 살다가는 인생을 생각해도 덧없이 느껴지거늘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선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면 더더욱 덧없이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아도 정말 덧없는 인생을 실감할 때도 있습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한 줌의 재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확인할 때 덧없는 인생을 새삼 실감합니다.
한 줌의 재로, 혹은 한 줌의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다소간 시간의 차이가 있고 과정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누구나 그로부터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많은 것을 누리고 많은 것을 소유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누리고 소유하는 것으로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히 행복을 보장해 줄 것처럼 애지중지하지만, 결국에는 누구나 자신을 지탱해 준 육신마저도 가지고 되돌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 엄연한 진실은, 비단 탐욕으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누리는 것과 소유한 것에 유달리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만 각성의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엄연한 진실은 누구에게나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은 특별히 모질고 특별히 탐욕스러운 삶을 살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은 누리는 것과 소유한 것에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 모두 역시 예외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삶을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소유와 업적을 위해 끊임없이 내달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가진 것을 자랑해야 하고 일해 온 것을 내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타인에게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돈도 빌려주지 않고 업적이 없으면 어디서 써 주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기회를 얻었다 해도 계속해서 업적과 실적을 내지 않으면 언제 그 지위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되지 않는 삶의 실상입니다. 결국 가진 것을 하나도 가지고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도 예외가 없듯이, 그럼에도 가진 것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점에도 예외가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한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덧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되지 않는 삶, 그 진실을 깨달을 때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새로운 삶의 용기와 희망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숙연한 마음으로 함께 한 우리에게 이 어인 비탄입니까?
그 진실을 확인하는 것은 그저 인생의 허망함을 확인하는 것일까요? 그야말로 비탄일 뿐일까요?
많은 사람은 그 엄연한 진실을 말하면 곧 인생의 허무함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 세상을 비관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라고 사람들은 종종 말합니다. 좋게 말하면 인생을 달관한 태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그러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또 많은 사람은 죄인 된 인생의 허무함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르침을 인생에 대한 비관과 염세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신앙을 가진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을 철저히 혐오하며 열광과 혼미한 상태에 빠져 살아가기도 합니다.
과연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무상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 인생에 대한 혐오와 염세를 의미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적어도 성서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르침에서 이 진실을 일깨우는 목적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진정한 믿음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을 저버린 절망으로 우리 인생을 안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믿음을 회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이 아니면 그 진실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일종의 반어법이라고 할까요? 그릇을 깨트린 아이를 보고 “참 잘했다”고 말하면 반어법입니다. 병문안 간 친구가 누워있는 친구더러 “너 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악담을 했더니 거꾸로 “내가 꼭 살아서 너 죽는 꼴 봐야겠다”고 이를 악물고 병마를 이겨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표면의 의미와 달리 반대 효과를 가져오는 표현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시적 표현으로 자주 사용될 뿐 아니라 특수한 시적 표현을 넘어 사실은 성서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강조 역시 정반대의 의미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려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인생의 허망함을 말하는 것은 염세적 비관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 말씀은 적극적인 인생관을 일깨웁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낙관적인 인생관을 가르칩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 인생이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뛰고 날라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옛 속담은 인간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계를 알 때 인간이 진정으로 가야 할 바 행해야 할 바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학교 다닐 때 한 선생님(한태동)의 말씀이 항상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선생님은 당신이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을 ‘손오공의 머리띠’와 같은 것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뛰고 날아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속담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 머리띠는 손오공이 제 잘난 줄 알고 기고만장할 때 고통을 주어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머리띠는 손오공의 한계를 지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머나먼 구도의 여행을 떠나는 스승 삼장법사를 수행함으로써 진정한 불제자가 되도록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이야기는 한계를 분명히 알 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본문 말씀의 의미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깨달으므로 절망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오히려 복된 삶을 누린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시편은 그 말미(13)에서 급격히 반전합니다. “주님, 돌아와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강력한 생의 의욕을 내비치는 외침입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는 삶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 수만큼, 우리가 재난을 당한 햇수만큼,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시오. 주님의 종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일을 드러내 주시고, 그 자손에게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십시오. 주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14~17).
많은 시편이 탄식으로 일관하는 것 같지만, 시편은 언제나 이와 같이 급격한 전환을 동반합니다. 인생의 쓴맛을 아는 사람이라야 인생의 단맛도 아는 법입니다. 시편의 노래들은 그 진실을 일깨워 줍니다.
『거대한 전환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의 저자 칼 폴라니는, 인간의 한계,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진실이 함축하는 진정한 뜻을 새삼 일깨워 줍니다. 오늘의 시장경제를 ‘사탄의 맷돌’로 비유하며 그 폐해를 일깨운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그 책의 마지막 장은 그에 저항하여 인간의 삶을 보장하는 정신에 대해 역설함으로써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깨달음, 자유에 대한 깨달음, 사회에 대한 깨달음이 그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성서적 기원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구약성서에서, 자유에 대한 깨달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기원하였고, 사회에 대한 깨달음은 근대사회에서 등장한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초기 교회의 공동체적 연대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늘 특별히 본문 말씀의 의미와 관련하여 주목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깨달음이 갖는 의미입니다.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을 뜻합니다. 바로 그 깨달음 덕분에 인간은 오히려 지금 주어진 삶에서 의미를 쌓아 올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지금 주어진 삶이 영원할 수 없다는 엄연한 진실, 지금 주어진 사회 현상이 영원할 수 없다는 진실 앞에서 마주한 ‘체념’이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희망의 샘이 됩니다. 여기서 인간이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죽음보다 더 끔찍한 사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사태를 뛰어넘기 위해 분투합니다.
죽음보다 더 끔찍한 사태는 “절망”이며, 그것은 달리 말하면 “영혼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케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써 자기 자신의 영혼을 발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자포자기해 버리는 사태입니다. 자신도 없고 다른 사람들과의 삶의 연대성도 무너져버린 현실, 그저 사람이 하나의 부품, 하나의 기능적 존재로 전락해 버린 오늘 삶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간 우리는 영혼을 잃어버린 자의 빈말과 횡설수설로 마음 아파했고 허탈해했습니다. 권력의 무상함을 알았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요?
모든 인간이 예외없이 마주하는 죽음 앞에서 겸허히 주어진 삶에서 의미를 추구하며 죽음보다 더 끔찍한 사태를 분별할 수 있을 때, 인간은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며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병에 묶어 두는 사태에 저항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요한 11:4). 죽음보다 더 끔찍한 사태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될 삶의 의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을 비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십시오. 한 번에 하루를 살게 하시고 한 번에 한 순간을 누리게 하시며, 어려운 일들을 평화에 이르는 좁은 길로 받아들이며, 죄로 가득한 세상을, 내가 갖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그분께서 그러하셨듯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제가 그분의 뜻 아래 무릎 꿇을 때, 그분께서 바로잡으실 것을 믿게 하셔서 이생에서는 사리에 맞는 행복을 내생에서는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다함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본문 시편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일깨웁니다. 우리를 죽음에 이르는 병에 묶어 두지 않고 진정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유한하지만 오히려 의미 있는 삶에 대한 희망이요 간구입니다.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이 간구에 담긴 말씀의 뜻을 새기기 바랍니다. 아침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장중에서 누리는 인생의 참 기쁨을 노래합니다. 우리의 한 목숨을 생각하면 정말 덧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한계를 절감할 때 오히려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진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진실을 늘 새기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지만 영원에 잇대어 있습니다. 영혼을 지닌 존재로서 저마다 소중한 삶을 기쁨으로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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