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프레스 KBoard 피드 http://salrim.net/wp-content/plugins/kboard/rss.php 워드프레스 KBoard 피드 <![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4-51 / 12.22. 주보)]]> Fri, 20 Dec 2024 17:23:50 +0000 살림소식 <![CDATA[“모든 아픔이 나의 통증이 되어”(2024.12.15. 성가)]]> Sun, 15 Dec 2024 18:43:15 +0000 영상(음악) <![CDATA[위임받은 이의 책임 - 고린도전서 4:1~5[유튜브]]]> 어젯밤은 모두 잘 주무셨지요? 국회 앞 현장에서, 또는 2년반 동안 텔레비전 뉴스를 보지 않다가 다시 그 앞에서 극적인 장면을 마주하며 흥분한 탓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경우도 있을까요? 그렇다 해도 모처럼 안도하며 편안한 밤을 지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열흘 동안 우리는 국가의 통치자가 권력을 위임해 준 국민의 뜻을 거슬러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떤 혼란과 고통을 야기하는지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세대를 망라하여 깨어 있는 국민이 어떻게 그 사태를 수습하는지 몸소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국민 여러분, 참으로 위대합니다! 국회의원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교회 선후배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어제 12월 14일 오후 5시경 204:85로 윤석열 대통령 탄핵이 이뤄진 직후 원로인 김상근 목사님의 메시지입니다. 다들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의 한 대목을 본문 말씀으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벌어진 일을 유념하고 있지만, 어떤 공동체이든 그 안에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이의 책임적 태도와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상호관계를 일깨워주는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아주 복잡한 교회였습니다. 성서 기록상으로 볼 때 가장 골치 아픈 교회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그래서 그 골치 아픈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몇 차례 편지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 가운데 남아 있는 두 편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고린도전·후서입니다. 본문 말씀은 교회 안에서 파벌로 인한 갈등의 상황에 대한 권고에 이어집니다. 어떤 파벌이 문제였을까요?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한다고 합니다.”(고전 1:12) “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고전 3:5~8)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 지도자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갈려 있는 교회 공동체의 상황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 덧붙여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농원과 건축물에 비유한 다음 본문 말씀이 이어집니다.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신실성을 말하고 있습니다(4:1~2). 이 대목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갈등이 사도적 지도자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유념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바로 앞에서 지도자들은 공동체 속하고, 나아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바로 그 사실을 다시금 강조하며 그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종)이요 관리인으로 봐달라고 요청합니다. 일꾼과 관리인은 사실상 같은 의미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다고 밝히면서 일꾼보다는 책임을 맡았다는 의미를 지닌 관리인이라는 말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지도자들을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언급합니다. 자신과 아볼로를 명백히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까지 의식했을까요? 이 말을 하는 순간 바울이 베드로를 의식하고 있었는지 아닌지 궁금증을 자아내기는 하지만, 바울 이후의 상황에서 이 이야기는 모든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음은 두말할 것 없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관리인인 만큼, 그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일을 맡겨준 분에 대한 신실성이라는 것을 역설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아가 하나님께서 맡겨준 일을 감당하는 것이 중요하지, 지도자들의 그 밖의 어떤 요인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지도자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맡겨진 일을 얼마만큼 신실하게 감당하느냐 하는 점에서만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도자를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특정 지도자에 편향되어 있는 각자의 의견을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자신이 어떤 삶을 지향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 평가되는 삶입니다(4:3~5).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 사람들에 의해서나 아니면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평가받는 것을 중요치 않게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것도 삼간다고 말합니다. 임의적 판단을 삼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서 바울은 스스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살짝 내비칩니다. 자신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초점은 설령 자신이 스스로 거리낌 없다고 판단할 때조차도 자신의 양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판하시는 주님의 뜻에 비추어본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매 순간 판단하는 것 자체를 중단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또한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이야기인가 하는 문제를 야기합니다. 그 자체가 전적으로 무모하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다만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궁극적 판단의 차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어떤 일에 대해 이런저런 판단을 할 수 있고 그때 우리는 저마다 양심에 따라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 주장을 그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그 본뜻에 다가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스스로가 거리낌이 없다고 느끼는 것조차도 전적으로 자신의 양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신을 판단하는 주님의 뜻에 대한 신실성에 의해 확증될 수 있는 것이라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그 신실성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지 큰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마저 그저 주관적인 것 아니겠느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도 그 점을 의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것을 궁극적 차원에 내맡기는 태도를 취합니다. 본문 말씀의 마지막 구절(4:5)의 내용입니다. 주께서 오실 때에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므로 아무것도 미리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 순간 어떤 판단을 내리며 살아야 하는 인간 실존 자체를 부정한 것이라기보다는 매 순간의 판단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설령 양심에 비추어 흠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할지라도 그것마저 최종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판단과 입장을 최종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매 순간 판단하는 것을 중지하라는 뜻이 아니라 궁극적 판단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 순간의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판단이 나의 판단 범위를 넘어선 가치 기준에 부합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겸허히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너무나 평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또한 동시에 너무나 빈번히 오용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평범하다는 것은 오랫동안 교회에서 강조되어 왔기에 익숙하다는 것을 뜻하고, 오용된다는 것은 그 말이 함축하는 뜻과는 정반대로 특정한 입장을 절대화하는 논거가 되어 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주장하며 강변할 때 그것은 말씀의 뜻이 오용된 경우입니다. 너무나 빈번히 경험하는 사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의 뜻을 함축합니다. 본문 말씀이 공동체 안에서의 갈등 상황, 인간들 사이에서의 갈등 상황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갈등의 실체가 뭡니까? 각자의 주장이 절대화되고 타협의 여지 없이 충돌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보면, 각기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이 각자의 정당성만을 내세우며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판단의 최종 근거로 하나님의 뜻을 내세운 것은 각자의 주장을 되돌아볼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거리두기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상대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같은 거리에 있습니다. 이는 성찰의 여지를 두는 것이며, 역지사지의 입장에 설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갈등 해법을 위한 오랜 지혜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또한 오늘 본문 말씀은 매우 상식적입니다. 어떤 사명 또는 어떤 권한을 위임받은 자의 책임의 문제는 교회사의 오랜 과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교회가 고심했던 그 문제는 오늘날 정치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헌정주의를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실성,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지향합니다. 그러기에 세속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항상 문제의 상황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세상의 어떤 권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늘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순종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 저항해야 하는가, 또는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고 누구에게 저항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직면합니다. 그 물음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된 것은, 사도로부터 이어지는 권위를 부여받은 교황이 잘못을 범할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였습니다. 이로부터 공의회주의가 등장합니다. 교회가 공의회를 소집하여 그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랜 물음이었던 순종과 저항의 문제의식에 더하여 공의회주의가 대안으로 등장하면서 잘못된 지도자의 독단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 것입니다. 근대 정치사회에서 의회를 기반으로 하는 헌정주의는 바로 이 교회의 해법으로부터 자극을 받은 결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더불어 그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현실적 방법을 강구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에 영향을 끼쳤고, 근대의 헌정주의 국가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물론 교회의 공의회주의는 오늘날 국민주권에 기반한 헌정주의와는 다르지만, 적어도 위임받은 권력을 오용하는 권위에 저항하고 견제하는 역사적 제도로서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침해받고 불안과 고통 속에 빠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라를 지키고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도록 위임을 받은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국민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참람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헌정을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내란수괴’라는 것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명명백백한 범행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간 권력을 쥐고 저지른 악행도 몸서리칠 일인데, 헌정을 파괴하는 중대 범죄를 저질러놓고도 일말의 반성도 없이 버티는 자의 모습이 얼마나 완악하고 추악합니까? 얼마나 구질구질합니까? 21세기 이 발랄한 대한민국에서 도대체 가능한 일이라고 상상이라도 해봤습니까? 이미 겪어봤던 세대는 과거의 상처가 다시 도지는 사태로 놀라고, 겪어보지 못한 세대는 역사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일이 현실에서 벌어져 놀라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칙칙한 인간을 우리의 발랄한 세대들은 더더욱 용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10대들과 초등학생들까지도 거리에 나와 외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두 한 마음으로 그 용인할 수 없는 사태를 바로잡았습니다. 이제 첫걸음입니다. 그가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완전히 걷히기까지 얼마나 더 인내하여야 할지 경각심을 떨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짧은 열흘 동안 벌어진 놀라운 역사를 보며 모두 희망의 등불을 꺼트리지 않고 지키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시며, 마음 속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4:5) 그저 먼 미래에 이뤄질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에 이뤄지는 일입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렇게도 노심초사했던 일이 이렇게 풀려나갈지 누가 알았습니까? 우리는 지금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놀라운 순간 가운데 있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고 있는 우리이기에 우리는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결코 그럴 리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을 허락하신 뜻, 곧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는 삶을 여일하게 지켜나가는 가운데 평화로운 삶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어둠을 물리치고 빛으로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기쁨을 누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사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Sun, 15 Dec 2024 15:24:22 +0000 설교 <![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4-50 / 12.15. 주보)]]> Fri, 13 Dec 2024 14:43:43 +0000 살림소식 <![CDATA[“희년을 향한 우리의 행진”(2024.12.8. 성가)]]> Sun, 08 Dec 2024 17:44:05 +0000 영상(음악) <![CDATA[즐거움과 기쁨이 넘치는 길 - 이사야 35:1~10[유튜브]]]> 숨가쁜 한 주간이었습니다. 여전히 놀란 가슴과 끓어오르는 분노를 진정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진실은 이 땅에 짓게 드리워졌던 어둠이 걷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둠을 물리치고 빛으로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절박하게 기다리는 마음의 절절함을 그 어느 때보다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구원의 희망을 선포하는 장엄한 이사야서의 본문 말씀을 마주합니다. 본문 말씀은 첫 번째 이사야(1~39장)가 선포한 말씀의 한 대목입니다. 첫 번째 이사야가 예언을 선포한 시기는 유다 왕국이 아직 멸망에 이르기 전이지만, 본문 말씀(35장)은 훗날 바빌론 제국에 의해 유다 왕국이 멸망한 이후 백성들이 흩어졌던 상황을 유념할 때 더욱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이 말씀이 기록되고 낭송되었을 때 포로로 붙잡혔다가 해방되어 되돌아오는 백성의 기쁨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빌론 포로기 동안 예언을 선포한 두 번째 이사야(40~55장)의 말씀과 그대로 상응합니다(이사 40장). 간절한 구원의 희망은 특별히 마지막 구절에 더욱 절절하게 함축되어 있습니다. “주님께 속량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기뻐 노래하며 시온에 이를 것이다. 기쁨이 그들에게 영원히 머물고, 즐거움과 기쁨이 넘칠 것이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35:10). 자유를 잃고 포로로 잡혀갔거나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희망을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광야에 그들이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길이 새롭게 납니다. 메말랐던 광야가 꽃으로 뒤덮이고 그 한가운데로 길이 납니다. 그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이들이 걷는 길이 될 것이며 거룩한 길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그 길을 묘사하며, 구원의 희망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특별히 두 가지 초점을 주목합니다. 첫 번째 그 광야의 길은 전혀 새로운 길이라는 점, 두 번째는 그 길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백성들이 언제나 오고 가는 길이라는 점입니다. 첫 번째로 이 광야의 길은 기존의 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길입니다. 그 새로운 길을 선포하는 예언자의 상상과 그 꿈에 공감할 수 있다면 말씀의 의미가 더욱 실감 나게 다가올 것입니다. ‘광야의 길’은 곧 ‘사막의 길’입니다. 그 길은 전적으로 새로운 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제국의 수도에 이르는 길,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기존의 길은 사막을 관통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길은 아라비아 사막 북쪽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따라 나 있었습니다. 잘 닦여 있어 익숙한 길입니다. 반면에 사막의 길은 험한 지형을 헤치고 반듯이 뚫리는 새로운 길입니다. 기존의 길은 자유를 잃고 포로로 잡혀간 이들이 수치를 겪은 길입니다. 승자에게 영광의 길이지만 패자에게는 수치의 길입니다. 광야의 길은 포로로 잡혀갔던 이들이 수치를 겪었던 그 길이 아닙니다. 전혀 새로운 길입니다. 그것은 기존의 지배자들과 통치자들이 따르는 길이 아니라 그들 때문에 수치를 겪었던 이들이 따르는 길,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뜻합니다.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35:5~6a). 광야에 꽃이 피고 새 길이 뚫릴 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아니, 광야에 꽃이 피고 새 길이 뚫린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리고, 다리를 절던 사람이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음지에 있던 사람들이 양지에 나서고, 강요된 거짓에 주눅 들었던 사람들이 진실을 깨닫고, 힘없이 살았던 사람들이 힘을 얻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외치며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극소수 사람들의 이익만을 위한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존중받는 세상으로 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두 번째로 그 길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자유를 얻고 깨끗하게 된 사람들이 언제든 오고 가는 길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은 다닐 수 없지만, 진정한 자유를 원하고 사랑을 함께 나누는 깨끗한 사람들이 항상 오고 가는 길입니다.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도 그리로 지나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 길에는 그런 짐승들은 없을 것이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갈 것이다”(35:9). 사자가 무엇이고 사나운 짐승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으르렁거리고 혈안이 된 자들을 뜻합니다. 사회적 공의보다는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자기 집단을 위해 정책을 펼치는 자들입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과 변명으로 사람을 기만하는 자들입니다. 부끄러운 역사를 바로잡으려 하기보다는 거꾸로 미화하는 자들입니다. 평화를 이루려 하기보다는 대결의 논리로 전쟁의 위험을 불러일으키는 자들입니다. 자신과 가족의 비리는 덮어두고 정치적 맞수의 흠만 들춰내어 곤경에 빠지게 하는 자들입니다. 권력을 움켜쥐고 국민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자입니다. 한밤중에 국민에게 총칼을 들이대는 자입니다. 더불어 그 무모한 짐승과 동행하며 부역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 짐승의 실체를 지금 눈앞에서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지난 12월 3일 한밤중, 그리고 다시 어제 7일 한밤중 우리는 그 짐승들의 실체를 너무나 분명히 보았습니다. 3일 밤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습니까? 어젯밤 또 얼마나 탄식했습니까? 속속들이 드러나듯이 그렇게 무시무시한 일들을 저질러놓고도 뻔뻔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람들의 생명과 나라의 안위를 위하는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다는 것을 거듭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길에 그들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습니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그 길을 오고 갑니다. 그 길은 기존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요 거룩한 길입니다. 예언자의 외침은 한갓 꿈에 지나지 않은 선포가 아닙니다. 그 짐승들과는 동행할 수 없는 절절한 희망, 그 희망이 기필코 이루어지라는 믿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중요한 진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맥풀린 손이 힘을 쓰게 하여라.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하여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복수하러 오신다. 하나님께서 보복하러 오신다. 너희를 구원하여 주신다’”(35:3~4). 12월 3일 밤 10:27 이전에는 이 말씀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린 그 밤 이후에 비로소 말씀의 의미가 들어 왔습니다. 자기가 살겠다고 국민에게 총칼을 들이댄 미치광이의 광분이 결국 자멸의 사태로 귀결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았습니다. 예기치 못한 성령의 역사를 실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외쳐야 할 것을 외치고, 마땅히 가고자 하는 길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하는 길을 열어주시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악인은 입술을 잘못 놀려 덫에 걸리지만, 의인은 재난에서 벗어난다”(잠언 12:13).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 ···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 16:4,9). 그 놀라운 역사는 12월 3일 하룻밤으로 그치지 않고 12월 7일 밤 이후에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내란수괴를 옹위하고 따르는 무리들, 그 부역자들은 결국 국민의 심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갈 길이 없습니다. 성서의 위대한 진실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평범한 사람들이 품고 있는 절절한 구원의 희망, 그에 대한 믿음 때문에 성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진실이 됩니다. 인간은 누구든 그 누군가에게 속박될 수 없다는 해방의 염원, 인간을 속박하는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 사회적인 정의와 평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 등 시공을 초월한 인간의 염원과 믿음을 진솔하게, 그리고 극적으로 증언하고 있기에 성서는 변함없는 진실이 됩니다. 그 진실을 믿고 따르는 오늘 우리가 걷고자 하는 새로운 길은 어떤 길일까요?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들고 우리를 숨 막히게 만든 길이 아니라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우리를 당당하게 해 주는 길입니다. 사나운 짐승 한 마리를 없애는 것으로, 그 짐승을 따르는 무리를 없애는 것으로 그 길이 저절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나운 짐승은 곧 치워질 것입니다. 그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감히 그런 짐승들이 자리할 수 없도록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갈 때 비로소 우리에게 그 길이 환히 열릴 것입니다. 지난 11월 18일(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100주년 기념대회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00주년 사회선언문 – 사회의제: 한국교회의 경청과 응답」을 발표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길을 찾고자 하는 교회의 진지한 시도 가운데 하나입니다. 함께 마음을 쏟아 준비한 처지에서 그 뜻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100주년을 맞이한 것은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그 모체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 100주년에 사회선언을 발표한 것은 1932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사회신조」를 환기하고자 하는 뜻 때문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사회신조에 대해서는 보다 비판적 입장을 갖고 있지만, 적어도 교회가 당대 사람들이 직면한 공통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입장을 천명한 뜻을 존중하여 그 정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그 신조는 하나님 안에서 온 인류가 한 형제임을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사회의 기초적 이상”이라는 믿음으로, 사회 개혁의 전망을 제시하였습니다. 특별히 인류 평등의 이상을 내세우며 여성·어린이·노동자 등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사회복지의 전망을 제시한 점을 주목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성취되지 않은 그 사회적 과제들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고, 오늘의 교회가 그보다 진전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의견을 수렴하였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00주년 사회선언문」은, “하나님께서 손수 펼치시는 선교 사역(Missio Dei)에 동참하여 이 땅에 정의·평화·생명(JPIC)을 구현하고자, 가난한 이들의 자리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의 복음(mission from the margins)을 신실하게 따르는 과정”으로서 지난 100년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정의·평화·생명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오늘 우리 사회가 직면한 15가지 사회적 의제를 제시하고 교회의 나아갈 길을 제안하였습니다. 그 15가지 사회적 의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신자유주의 세계화: 자본이 인간의 생명과 존엄보다 우위가 되는 사회에 응답한다. 2. 경제 부정의: 일한 만큼의 몫을 가져가고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정의로운 사회를 요청한다. 3. 정치 양극화: 다양한 이념과 가치가 경쟁하며 소통하는 정치 민주화가 절실하다. 4. 디지털 문명: 생명 존중과 인간 존엄을 보장하는 디지털 문명을 지향한다. 5. 노동 현실: 노동자의 안전과 권리를 보장하고 노동시장의 안정화가 시급하다. 6. 사회적 재난: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체계와 사회적 신뢰 회복이 우선이다. 7.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혐오: 상대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아니라 공존과 연대의 사회를 지향한다. 8. 폭력의 일상화: 생명을 존중하고 더불어 사는 삶의 경험이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 9. 이주민: 이주민과 동행할 수 있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인식과 정책이 필요하다. 10. 인구절벽: 인구절벽은 불평등한 경제구조와 성차별적 사회구조에서 출발한다. 11. 성차별: 모두를 해방하는 정의롭고 평등한 인식과 제도가 요청된다. 12. 청년세대: 다양한 청년정책 마련과 불평등과 부조리를 완화하는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 13. 한반도 평화: 비핵화와 평화담론을 위한 책임있는 주체로 공론의 장을 마련한다. 14. 식민지 역사 청산: 과거사 청산은 이 땅에 정의와 평화 생명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다. 15. 기후위기: 인간중심적 세계관과 탐욕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생명 중심의 지속가능한 사회를 희망한다.” 오늘의 세계와 사회 안에서 교회가 마음을 쏟아야 할 과제를 집약하였습니다. 정의·평화·생명의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의 이정표를 제시하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의·평화·생명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을 소망합니다. 사나운 짐승이 도사릴 수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고자 하는 우리는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을 소망합니다. 우리 곁의 사나운 짐승이 사라지고 모두가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 신실한 소망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며, 우리 모두 기쁨에 동참하기를 기원합니다.*]]> Sun, 08 Dec 2024 17:19:13 +0000 설교 <![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4-49 / 12.8. 주보)]]> Fri, 06 Dec 2024 18:16:19 +0000 살림소식 <![CDATA[“사랑하는 자들아”(2024.12.1. 성가)]]> Sun, 01 Dec 2024 17:05:06 +0000 영상(음악) <![CDATA[사랑의 빚 - 로마서 13:8~12[유튜브]]]>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아직 충족되지 않은 상태, 곧 결여의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삶은 역설적이어서 그 결여의 상태가 오히려 삶의 의미를 더 충만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인간 삶의 한계에 대한 인식은 절망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놀라운 가능성과 희망으로 귀결됩니다. 아직 다가오지 않았지만, 다가올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대림절 첫 주일 우리는 로마서의 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두 토막으로 나눠진 말씀이지만, 하나로 연결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오늘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식과 태도를 깨닫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앞부분(13:8~10)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율법의 정신을 이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의 완성으로서 사랑을 역설합니다. 이어 구원의 때가 가까웠으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합니다(13:11~14). 아우구스티누스를 회심으로 이끈 말씀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노래소리와 같은 아이의 음성으로 들리는 “집어라” “읽어라” 하는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마침 곁에 있는 성경을 펼쳤더니 바로 이 말씀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더 이상 다른 말씀을 읽으려 하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이 이 말씀으로 곧바로 평안의 빛이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 찼고 의혹의 모든 그늘이 사라졌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극적인 깨달음이나 회심의 기회를 누릴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 깨달음의 방식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든 그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율법의 완성으로서 사랑을 역설하는 말씀과 어둠의 행실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는 말씀은 별개가 아니라 직결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본문 말씀은 바로 앞의 ‘가장 골치 아픈 본문’으로서 세상 권세에 대한 복종을 이야기하는 내용(13:1~7)과 곧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로마서가 나중에 짜깁기된 글이 아니라, 일필휘지로 쓴 바울의 편지라는 점에서 그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 권력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권력을 대할 때 어떤 관점을 지녀야 할지, 이 대목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율법의 완성으로서 사랑을 실천하는 빛의 삶 가운데서 세상 권력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 말씀은, 구원의 마지막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의 몫은 서로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욕을 채우고 육신의 일을 꾀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수양이나 경건 생활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혼자의 일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목표에 도달하면 무너져 내리고 마는 삶의 방식, 또는 하나의 목표에 도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지켜질 수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도 사랑이 빠지면 무의미해집니다. 해도 해도 다 채워지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어떤 조건에 있는 사람에게든 영원한 갈구의 대상이 되고, 그러기에 모든 사람의 진정한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가장 불가해하지만, 인간 삶에서 가장 긍정적인 가능성, 가장 적극적인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13:8) <공동번역>은 이렇게 풉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언뜻 보기에 ‘빚을 지지 말아라!’ 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 거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번역>을 인용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해도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 ‘갚아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이 있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빚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다시 들여다보겠습니다. 우선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을 따르면,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신세진 모든 이들에게 그 신세진 것을 성실히 다 갚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법적인 차원의 의무일 수도 있고 도덕적 차원의 의무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의무를 저버리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진정한 초점은 우리 인간들의 운명적 삶의 한계, 범위를 밝혀 주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 ‘아무리 갚으려 해도 갚을 수 없는 빚’, 바로 ‘사랑의 빚’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법적이거나 도덕적인 의무 내지는 빚은 일시적으로 불가피하게 갚을 기회를 잃었다 하더라도 살다 보면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아무리 갚으려 해도 갚을 수 없습니다. 대체 ‘사랑의 빚’이 무엇이기에 갚을 수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 또는 이른바 애정의 차원만은 아닙니다. 그리스어로 굳이 에로스와 아가페를 구별해야 했던 까닭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욕구하는 에로스가 아니라 항상 꺼지지 않는 아가페”(칼 바르트)가 구별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랑에 빚진 삶은 ‘나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현실’입니다. 그것은 나 아닌 타인의 덕으로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인간이 더불어, 서로 얽혀야만 살아갈 수 있는 현실입니다. ‘너 없이 존재할 수 없는 나에 대한 인식’에 이르고, 그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것이 곧 사랑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 삶은 해도 해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랑에 빚진 삶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필요한 삶의 모든 관계에서 덕을 입은 것을 일대일로 하나하나 다 갚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갚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쓰는 물건이야 돈으로 값을 치를 수 있다고 하지만, 내가 받은 생명 그리고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누리는 안정감, 든든함, 이런 것들은 과연 무엇으로 그 값을 치를 수 있겠습니까? 흔히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은 효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식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갚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으로도 다 갚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돈으로 값을 치렀다고 생각하는 물건값 역시 다 치른 것은 아닙니다. 물건값을 치를 때 우리는 단지 그 물건을 만드는 데 드는 사회적 평균 비용만을 치릅니다. 어떤 노동자가 물건을 만들기 위해 쏟은 심혈과 정성에 대해 전적으로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안에서 물건을 만들기 위해 원료를 캐내어 온 자연에 대한 보상은 없습니다. 투여된 노동력에 대한 사회적 평균 비용만 치른 채 값을 다 치렀다고 안위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에 대한 의무 내지 빚은 일대일의 차원에서 다 갚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있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결단코 내 힘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살아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이웃에게 빚진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을 기대하는 종말론적 희망을 말하는 대목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 다른 어떤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삶의 그 어떤 목표와도 대체될 수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내 곁의 형제자매와 이웃, 또는 그 어떤 타인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몫을 다하는 것이며, 거기에서 눈에 보이는 어떤 조건이나 목표 달성에 상관없이 우리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혼란스러워하고 표류해야 할 까닭도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니면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물리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여부에 따라 우리의 삶의 성패를 판가름한다면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 우리 삶의 성패를 판가름할 수는 없습니다. 밥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없듯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어떤 조건들이 분명히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서로 사랑하는 일을 대신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완성에는 한계도 없고 경계도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그 진실을 진정으로 기억하고 산다면 언제나 우리는 빚진 느낌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또한 놀라운 진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느낌으로 산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따뜻하고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 사랑의 빚을 갚으려고 나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삶은 따뜻하고 풍요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진실은, 그러기에 인간 삶이 얼마나 큰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오히려 일깨워줍니다. 오늘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어째서 탄식하며 분노합니까? 어째서 아무개를 보고 꼴도 보기 싫다고 외면해야 합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신뢰를 무너뜨리고 인륜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입만 열면 거짓과 변명으로 일관하며 마땅히 져야 할 공적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통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나마 발버둥치며 평화롭고 따뜻한 삶을 바라는 희망마저도 무너져서는 안 되기에 우리는 오늘 현실을 통탄하며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현실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익히겠습니까? 갚아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사랑을 갚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쏟고 정성을 다하는 삶, 그 삶의 의미를 다시 새겨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 삶의 기운이 우리 안에 있고, 그 기운을 세상에 펼쳐갈 뜻이 있다면,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있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교회가 그 삶의 기운으로 넘쳐나기를 기원합니다.*]]> Sun, 01 Dec 2024 16:44:49 +0000 설교 <![CDATA[삶으로 새기는 진실 - 이사야 54:7~8 / 김흥겸 이장 예배]]> ]]> Sat, 30 Nov 2024 19:03:48 +0000 설교 <![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4-48 /12.1. 주보)]]> Fri, 29 Nov 2024 15:54:26 +0000 살림소식 <![CDATA[윤석열의 ‘주술 정치’와 ‘개혁’이라는 주술]]> Wed, 27 Nov 2024 16:09:53 +0000 논단 <![CDATA[성소수자는 ‘네 이웃’이 아닌가?]]> ]]> Mon, 25 Nov 2024 09:26:16 +0000 논단 <![CDATA[“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출 때”(2024.11.24. 성가)]]> Sun, 24 Nov 2024 17:44:00 +0000 영상(음악) <![CDATA[모든 아픔이 나의 통증이 되어 - 시편 118:22[류형선 선생 / 유튜브]]]> ]]> Sun, 24 Nov 2024 17:09:07 +0000 설교 <![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4-47 / 11.24. 주보)]]> Fri, 22 Nov 2024 13:39:40 +0000 살림소식 <![CDATA[“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2024.11.17. 성가)]]> Sun, 17 Nov 2024 22:44:01 +0000 영상(음악) <![CDATA[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윤리 - 로마서 14:13~23[유튜브]]]> 사도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에 앞서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로서 로마서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연하게 펼치고 있습니다. 다른 서신서들이 공동체의 특수한 상황을 유념하고 그에 대처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로마서는 그에 비해 교회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일반적인 권고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로마교회 공동체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채 자신의 입장을 펼치는 것만은 아닙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로마교회 공동체의 어떤 문제를 유념하고 그에 대한 권고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권위에 대한 복종(13:1~7)을 말한 대목, 그리고 음식물을 둘러싼 교회의 상황을 언급하고 있는 대목(14:1~15:13)이 그렇습니다.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맙시다”(14:13). 이렇게 시작하는 본문 말씀은, 먹고 마시는 문제로 불화를 겪고 있는 공동체의 상황을 유념하고 그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는 말씀의 한 대목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14:17). 이 말씀은 매우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답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대한 의미를 함축합니다. 본문 말씀의 뜻을 헤아리기 위하여 그 전체 맥락을 살펴봅니다. 첫대목(14:1~4)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과 강한 사람들을 대비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과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구분은 음식물에 대한 태도에 따라 결정되는 별칭입니다. 특정한 음식을 삼가는 태도, 또는 특정한 날에 특정한 음식을 삼가는 금욕적 태도를 지키는 사람들을 일러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라 일컫고, 그것에 개의치 않는 사람들을 일러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라 일컫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교회에서 이와 같은 문제에 직면하여 답을 준 적이 있습니다(고전 8:1~13). 고린도교회에서 쟁점이 된 것은 이교 신전에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먹을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에는 조금 더 일반적인 성격을 띱니다. 아예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을 하는 사람들,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사람들과 먹고 마시는 문제에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유념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전통이든 이교의 전통을 따르든 어떤 음식에 대한 금기에 매여 있는 사람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로, 그에 개의치 않은 사람들은 믿음이 강한 사람들로 대별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첫머리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마십시오”(14:3). 서로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대개의 종교 전통은 음식에 관한 금기를 갖고 있습니다. 불교가 육식을 금하고, 유대교와 이슬람이 돼지고기를 금하는 경우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중요한 언명입니다.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서 이례적으로 술담배 문제를 중대한 사안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이 그런 것과 상관없다는 것을 천명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마가 7:15~16). 사도 바울도 같은 입장을 유지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먹고 마시는 문제에 매이는 사람을 믿음이 약한 사람, 그에 매이지 않는 사람을 믿음이 강한 사람으로 말한 사연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열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약한 사람’, ‘강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자칫 우열의 관계를 함축하는 것으로 오인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라고 합니다. 일차적으로는 강한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을 배제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있고, 나아가서는 서로 존중하라고 함으로써 서로의 차이를 용인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14:5~12)을 통해 그 취지를 강조합니다. 한마디로 믿음에는 등급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각기 자기 소신대로 하는 것일 뿐 그것이 우열의 등급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음식을 먹든 먹지 않든, 그리스도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인 자세로 살아갈 수 있으면 그뿐입니다. 각 사람의 소신이 정말로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지,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지를 따질 수 있을 뿐이지, 먹고 마시는 문제와 결부하여 그 소신을 옳고 그른 것으로 구별해서 차별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먹지 않는 사람은 먹지 않는 대로 자신의 신앙 때문에 그러하며, 먹는 사람은 먹는 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으면 그뿐이지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고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마십시다”(14:13). 이 말씀으로 시작하는 본문 말씀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이 따로 없다(14:13~18)는 것을 강조하며,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신앙의 대의를 밝히고 있습니다. 믿음에 등급이 없을 뿐 아니라,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또한 따로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차별을 무의미하게 한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입니다. 바울은 그 진실을 막연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추상적인 진리나 형이상학적인 진리를 말하기 위하여 바울이 이러한 말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매우 구체적인 판별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형제자매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마음 상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신이 형제자매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마음 상하게 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저마다 양심과 소신에 따라 옳다고 여기는 것, 선하게 여기는 것이 도리어 비방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의를 위해 일하다 박해받는 경우도 있으니, 바울의 이와 같은 주장을 다시 도그마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만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그 기준으로 타인을 배제하는 경우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지금 하나의 공동체를 유념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기본 원리는 이타적인 사랑에 있습니다. 그 사랑에 거스르게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느냐는 외적인 표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으로 판별됩니다(14:17). 정의와 평화, 그리고 기쁨, 그것이 사랑의 실체입니다. 바꿔 말해 사랑은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가운데 기쁨을 누리는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표징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대의를 따를 것을 강조합니다(4:19~23). “하나님이 이룩해 놓으신 것을 음식 때문에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모든 것이 다 깨끗합니다”(14:20). 믿음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외적인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무엇을 먹느냐 무엇을 마시느냐, 아니면 무엇을 먹지 않느냐 무엇을 마시지 않느냐 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을 드러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것들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구별해주는 자기만의 소신과 생활방식을 옳다고 주장하며 타인에게 강제를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각자 신앙 양심과 소신에 따라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대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14:22). 이 말씀은 그 신앙 양심의 고귀함을 말합니다. 다만 바울은 공동체의 유익함을 위하여 사리를 분별해야 필요성을 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형제자매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포기할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을 향해 권고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다면 절제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약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에 대한 배려를 강조합니다. 여기서도 대전제가 있습니다.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씁시다”(14:19).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역설하는 한편 동시에 공동체의 윤리를 더불어 역설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보기에 먹고 마시는 문제는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지만, 바로 그 사소한 문제에 얽매여 왈가왈부하며 신앙의 대의를 망각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상황을 두고 매우 깊은 통찰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대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신학자이자 동시에 구체적인 공동체를 돌보는 목회자로서 바울의 위대한 통찰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통찰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대한 교훈을 일깨워 줍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로 형제자매를 정죄한다면, 색깔이 다른 신앙을 두고 서로 정죄한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일깨우고자 했던 그 진실을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14:10). 저마다 신실한 믿음대로 행하면 하나님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실하게 믿고 행한 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책잡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소신을 유일한 진리로 알고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며 그것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그 소신의 진정성 자체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판단 받아야 할 신앙 양심의 문제를 함부로 침범하는 것을 뜻합니다. 걸핏하면 이단 운운하며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정죄하려는 사람들의 잘못입니다. 이들은 대개 자신들의 흠을 가리는 수단으로 타인을 정죄하는 데 몰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정의와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한 사랑의 실현입니다. 그 대의를 잊고 형제자매를 책한다면 신실한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우리의 교회가 그 믿음에 신실하게 응답하기를 기원합니다.*]]> Sun, 17 Nov 2024 13:16:45 +0000 설교 <![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4-46 / 11.17. 주보)]]> Fri, 15 Nov 2024 17:55:26 +0000 살림소식 <![CDATA[“때로는 그를 통하여”(2024.11.10. 성가)]]> Sun, 10 Nov 2024 15:30:36 +0000 영상(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