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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천안살림교회</title>
		<link>http://salrim.net</link>
		<description>천안살림교회</description>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25 / 6.21.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96]]></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SoVuzBcuwI8 

2. 청빙준비위원회가 다음 주일(6/28) 오후 2시에 열립니다.

3. 다음 주일 오후 여신도회 주관 살림의 날(아나바다 장터)이 있습니다.

4. 상반기 수요 인문강좌는 특별 프로그램을 끝으로 방학에 들어가며 가을에 다시 개강합니다.

5. 교우들의 독서모임 6월 주제는 &lt;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gt;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Thu, 18 Jun 2026 14:42:2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기쁨 슬픔 아름다운 마음” (2016.6.14.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95]]></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6/song20260614.mp3"][/audio]
“기쁨 슬픔 아름다운 마음” / 성가대]]></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14 Jun 2026 14:39:2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단순한 진실 - 마태복음 11:25~30[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94]]></link>
			<description><![CDATA[2026년 6월 14(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단순한 진실
본문: 마태복음 11:25~30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bQ1WHLATAUs?si=6VKC2gvTi1JZ66MS"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개역)
언제 들어도 절실한 말씀입니다. 저마다 짊어진 짐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수고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짐을 지지 않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삶 자체가 전적으로 고통일 수만은 없지만, 고통 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언제나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이 말씀은 기록된 배경과 관련된 역사적 맥락, 그리고 더불어 바로 이 말씀 자체의 문맥에서 그 뜻을 분명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역사적 맥락은 거시적 배경 가운데서 마태 공동체가 처했던 처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며, 말씀 자체의 문맥은 그 공동체의 자기 인식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된 정황, 그 청중이 누구였는지는 대개 분명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전쟁(66~73) 곧 로마가 유대를 완전히 멸망시킨 전쟁 직후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북부 시리아 남부의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기록되고 읽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청중이었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의 고통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 고통의 상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극한의 전쟁과 그에 이은 유대민족 국가의 멸망 상황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유대인이었기에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은 여전히 삶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건이었습니다. 사고방식, 의식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짓밟힌 민족의 백성으로서 실질적인 테러의 위협 아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소위 정통 유대인들로부터의 박해였습니다. 유대전쟁 후, 곧 나라가 사라진 후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전통을 강화함으로써 정체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무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박해받아 쫓겨납니다. 변방에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이를 계기로 해서였습니다. 복음서들은 사실 바로 그런 정황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의 극한적인 폭력 사태 이후 나라를 잃은 설움과 동시에 동족들로부터도 쫓겨나는 설움을 겪었던 것이 팔레스타인 주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상황이었습니다. 이중의 폭력에 시달린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은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공통되는 상황이었지만, 그 폭력적 상황, 특히 전쟁과 그 직후의 폭력적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서입니다. 본문 말씀은 일차적으로 그 배경 가운데서 매우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한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11:28~30) 
이 말씀이 얼마나 절실하게 다가왔을까요? 이 말씀은 바로 폭력적 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이방인들로부터 당하는 폭력, 동족들부터 당하는 폭력, 그것에서 벗어나 안식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와 같은 거시적 배경 가운데서 의미뿐만 아니라 말씀 자체의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문맥에서 보면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자의식을 지니고 있는지 드러납니다. 
본문 말씀은 크게 세 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실이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 대신에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난 것에 대한 예수님의 감사 기도(11:25~26),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구현하신 예수님의 자의식(11:27), 그리고 진정한 평화로 이끄는 당신의 길을 따르라는 말씀(11:28~30)으로 이어집니다.

처음 두 마디의 말씀은 누가복음(10:21~22)과 거의 그대로 일치하며 그 문맥도 거의 유사합니다. 
마태복음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탄식하는 말씀(11:20~24)에 이어집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는 데 반해 오히려 어린아이들이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감사하는 것으로 본문 말씀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조금 더 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파송을 받았던 일흔두 사람이 파송 결과를 보고하는 대목(누가 10:17~20)에 이어집니다. 제자들이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10:17) 그러자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10:18). 
예수님께서 감사드린 일은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사탄이 무력하게 무너진 사건입니다. ‘대적하는 자’ ‘고발하는 자’라는 뜻을 지닌 ‘사탄’은 하나님의 뜻, 예수 그리스도의 길과 다른 세상의 지배 원리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섬김의 길이었다면 사탄의 길은 지배의 길이었습니다. ‘사탄이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일’,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그 지배의 욕망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무너진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새로운 세계,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일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께 감사드린 사연은 단지 그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의 진실을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께서는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신 진실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은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와 지식에 능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밑지지 않는 영악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며 그 권력자와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그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진한 사람들입니다. 때 묻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영악한 세상의 지배 원리에 능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은 세상의 지배 원리에 능하지만 하늘의 일에는 무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도무지 모릅니다. 반면에 ‘철부지 어린아이’는 세상의 지배 원리에는 무지하지만 하늘의 뜻에는 밝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이들 앞에서 사탄은 무력해집니다. 암만 화려한 권세도 무력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감사드린 일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고귀한 몫을 맡겨주셨다는 것을 확인합니다(마태 11:27). 이 문맥에서 등장하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철부지 어린아이들이야말로 그 진실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거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현된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헤아려 알 수 있습니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이 알만한 진실이라면 그것이 결코 복잡하고 현란한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말씀(11:28~30)은 바로 그 진실을 따르는 길이 초래하는 결과와 그 요체를 밝혀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정한 안식을 누리고 싶은 모든 사람, 모든 영혼에 주는 진정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바로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길이요,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길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심리적 안정을 뛰어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현실을 벗어나 도피처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어딘가 도피하지 않고 삶 자체가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평화로운 삶, 안식을 누리는 일상의 삶을 일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마태 11:29) ‘멍에’를 내팽개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지워진 멍에와는 다른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멍에는 ‘온유’와 ‘겸손’입니다. 그것은 도피와 방기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책무, 새로운 삶의 연대성에 대한 적극적 선택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은 그렇게 짐을 가볍게, 기쁘게 나누어 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보장하는 평화와 안식의 조건과는 전혀 다릅니다. 모든 것을 움켜쥐려는 ‘강포함’과 모든 것을 지배하는 ‘군림’이 아니라 ‘온유’와 ‘겸손’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마음의 자세일 뿐 아니라 삶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강포한 세상과 군림의 욕망이 지배하는 현실을 몰라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의 원리가 그렇기에 그것을 뒤바꾸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를 따르는 한 전쟁은 끊이지 않고, 전쟁터와 같은 일상의 삶 또한 계속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보낼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마태 10:16)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진함’입니다. ‘뱀 같은 지혜’는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비둘기 같은 순진함’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물정을 너무 잘 아시기에 뱀 같이 슬기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비둘기 같은 순진함입니다. 
이 둘 모두는 그저 마음먹기에 따라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살아가면서 그 지배 질서를 넘어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부단히 노력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더불어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그 가운데 진정한 평화의 갈망과 평화의 소명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10일(수)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제39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 대한 훈장 추서와 더불어 기관에 대한 대통령 표창이 있었습니다. 시인 김남주 선생 외에 조용술 목사, 최성묵 목사, 홍근수 목사, 허병섭 목사, 신삼석 목사, 정법영 전도사, 강은기 장로 등을 비롯하여 여러 교계 인사들이 훈장을 추서받았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와 더불어 한국교회인권센터가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고난과 헌신을 대한민국 정부가 공로로 인정한 것은 그 뜻에 함께하겠다는 약속과 의지의 표현으로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 헌신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로 인해 오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평화가 이뤄진 것 또한 분명한 진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헌신의 여정에 함께한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아주 단순한 진실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의 멍에를 함께 지고자 한 뜻을 따른 데 있습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삶을 지향한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진실로 이 길을 따르는 것이 평화의 길입니다. 그 길을 따르도록 교회가 앞장서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야 합니다. 그렇게 나아갈 때 우리들 저마다 일상의 평화로운 삶 또한 찾아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의 소명에 응답함으로써 진정한 삶의 평화를 누리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14 Jun 2026 14:33:2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24  / 6.14.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93]]></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pxvD4jc2b3E 

2. 지난주일 월례 공동의회 결과 5월 재정보고가 있었습니다.

3. 오늘 예배후 청빙준비위원회가 열립니다.

4. 2026년 상반기 수요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교회 깊이 알기” 후속 프로그램으로 특강 “북간도 개신교의 역사” 더불어 영화 &lt;북간도의 십자가&gt;를 관람하는 모임이 이번 주간 토요일(6/20) 오후 2:30에 있습니다. 

5. 교우들의 독서모임 6월 주제는 &lt;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gt;입니다.

6. 지난 6월 11일 나영주 장로 어머님(전홍진 장로 장모)께서 별세하셨습니다.

7. 담임목사
   16(화) 오후 2~5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민중신학의 탐구” 시험 종강
   17(수) 오전 8:30 [온라인] 환대와온전한포용 정기모임]]></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Thu, 11 Jun 2026 17:30:0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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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한국교회 인권센터 ‘민주주의 발전 유공 대통령 표창’ 수상소감]]></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92]]></link>
			<description><![CDATA[한국교회 인권센터 ‘민주주의 발전 유공 대통령 표창’ 수상소감
제39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2026.6.10. 민주화운동기념관)
최형묵(한국교회인권센터 이사장)

<img src="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6/2026061001-scaled.jpg" width="1200" height="1200" class="alignnone size-medium" alt="2026061001-scaled.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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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출범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위원회의 전통을 잇고 있는 한국교회인권센터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상을 받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한국교회인권센터는 멍에를 질지언정 명예를 얻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목사들이 어깨에 걸치는 스톨은 명예가 아니라 멍에를 나타냅니다. 인간 존엄이 훼손당하는 현장에서 그 당사자들과 함께하며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다면 그뿐이지 그에 대한 보상이나 명예를 기대할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상을 받게 되었으니 놀랄 일입니다.

더욱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으로부터 상을 받게 되었으니 더 놀랄 일입니다. 1974년 출범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는, 1973년 남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및 인혁당 관련자 사형 등을 계기로, 국가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대변하고 인권 유린을 막아내기 위한 취지로 구성되었습니다. 국가권력과 각을 세우며 맞서는 일을 주로 맡아 왔습니다. 그런데 국가로부터 공을 인정받게 되었으니 놀랄 일입니다.

놀라운 K-민주주의의 성취 덕분입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과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가 국가폭력에 맞서 인권을 옹호하고 민주화를 위하여 분투하였던 그 뜻이 국가적 차원에서 실현되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12.3 내란을 극복하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마땅히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국가권력의 작위에 의한 인권 유린 대신에 부작위에 의한 인권 침해 현상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생명안전기본법이 제정된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혐오와 차별을 규율하는 기본법인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았고 국가보안법은 철폐되지 않았습니다. 기본권을 강화하고 권력을 견제하는 헌법 개정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사회적으로 불평등의 해소와 노동권의 보장, 차별과 혐오의 극복이 중대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부끄럽게도 교회에 의한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는 일도 저희로서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한국교회인권센터의 수상은, 한 단체의 역할을 넘어 50여 년에 걸친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을 기억하고 기리는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나아가 대한민국이 그 뜻에 함께한다는 의지이자 약속으로 여깁니다. 또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인권 유린의 상황을 극복하는 데 함께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지난해 한국교회인권센터는 팔레스타인 지원 활동가 해초에게 제39회 인권상을 시상하였습니다. 5월 팔레스타인 난민 지원 활동가들을 구하기 위해 대통령께서 분명한 입장으로 신속히 대응하여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대한민국이 문명국가로서, 인권국가로서 그 위상을 분명히 한 것으로 여기며 자긍심을 갖습니다.

지난해 김혜경 여사께서 지역간담회로 저희 교회를 방문하셨을 때 이재명 정부를 향해 농성하는 일도 내 손으로 성명을 작성하는 일도 없기를 바라는 뜻을 전해드렸습니다. 인권을 보장하고 민주주의를 다지는 정부로서 성공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주노동자 문제 등으로 용산 대통령실 앞 농성장을 몇 번 다녀왔고, 불공정한 한미 관세 협정에 휘둘리지 말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직접 작성한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인권이 보장되는 정의로운 나라 대한민국이 세계의 민주주의를 선도하며 평화를 이루는 데 기여하기를 바라며, 수상의 기쁨을 함께합니다.*

(* 이 수상소감은 ‘대통령 표창’이라기에 대통령이 함께하는 자리를 예상하고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럽 순방으로 대통령은 참석하지 못하였고, 수상소감을 말할 기회는 따로 없었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소감을 밝힐 기회도 없었으니 원래 준비한 그대로 올립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Wed, 10 Jun 2026 19:57:0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9"><![CDATA[논단]]></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주님의 솜씨”(2026.6.7.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91]]></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6/song20260607.mp3"][/audio]
“주님의 솜씨” / 성가대]]></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07 Jun 2026 17:20:5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긍심 - 사도행전 4:32~37[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90]]></link>
			<description><![CDATA[2026년 6월 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긍심 
본문: 사도행전 4: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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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직면한 위기를 넘어서고자 할 때 흔히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의 위기가 심각하게 느껴질 때도 초기 교회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의 뜻을 환기함으로써 현재 상황을 진단하고 대안을 찾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지속되는 교회의 준거가 되는 초기 교회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본문 말씀은 그 초기 교회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초기 교회의 모습에 관한 증언은 중복되고 있습니다(2:43~47, 4:32~37). 사실상 겹치고 있는 이 증언은 특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당시 교회의 모습을 집약하여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사건을 통해서 잘 드러나지 않은 교회의 일상적 모습을 기록해 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저자가 그렇게 서술한 것으로 보입니다. 덕분에 오늘 우리는 초기 교회 생활의 요체를 간결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겹치는 두 본문은 약간 차이가 나기는 합니다. 앞의 증언(2:43~47)이 초기 교회공동체의 면모에 대해 보다 포괄적인 윤곽을 묘사하고 있다면, 본문 말씀(4:32~37)은 공통되면서도 특정한 측면에서 좀 더 구체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앞선 증언(2:43~47)의 요체를 살펴봅니다. 우리 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 출사표 삼아 창립 예배에서 새긴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사도 2:43~47)
이 말씀이 전하는 새로운 공동체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새로운 공동체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가장 낮은 이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 공동체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을 재현하는 공동체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공동체 존속의 주관적 조건입니다. 
두 번째로, 새로운 공동체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서로 필요한 것을 나누며 진정으로 사귀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등급 지우고 인간을 가르는 원천적인 조건을 철폐하고 저마다 인간 그 자체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공동체 존속의 객관적 조건입니다.
세 번째로, 새로운 공동체는 밥상을 함께 나눴습니다. 한솥밥 먹는 사이라는 말이 있듯이, 함께 밥상을 나눈다는 것은 이 공동체가 진정으로 새로운 가족으로 다시 탄생했음을 뜻합니다. 기존의 혈연으로 제한되고, 그래서 그 혈연적 이기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서로 격의 없는 가족 관계를 이뤘다는 것을 뜻합니다. 
네 번째로, 새로운 공동체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스스로 이룬 것에 자족하여 스스로 우상에 빠지는 것을 넘어 궁극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개방성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막연히 그 어떤 힘에 기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인간들의 차이가 결코 절대화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내 곁의 타인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뤄지는 공동체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서로 상처를 낫게 해주고 서로 감싸안아 주는 진정한 공동체입니다.

본문 말씀 또한 그 대의에서 앞의 증언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굳이 말한다면, 공동체성의 물질적인 기초 또는 객관적 조건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물질을 공유하는 가운데 형성된 공동체의 실상을 조금 더 분명히 드러내 줍니다. 이에 기여한 두드러진 인물로서 바나바를 명시한 점에서도 더 구체적입니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바로 앞에서 성전 당국자들과 갈등을 겪은 이후 문맥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표상하는 가치와 질서에 대립하는 공동체의 특성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굳이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본문 말씀 역시 사도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증언을 중심으로(4:33) 모든 사람이 감화받고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는 것(4:32)을 핵심 메시지로 하고 있습니다.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는 것은 다른 상상력이 허용되지 않는 이념의 경직성 내지는 획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적으로 온전히 서로를 신뢰하는 관계를 형성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서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소통과 신뢰를 말합니다. 강압적인 규율이나 불가피한 제도 이전의 문제입니다. 초기 교회는 그와 같은 규율이나 제도로 운영되지 않았습니다. 뜻을 함께하고 마음을 함께 모으는 데서 초대교회 공동체는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서로에 대한 신의, 서로에 대한 믿음, 곧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그 공동체는 시작되었고, 생명력을 유지하였습니다. 
그것은 내 곁의 형제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었고, 그 믿음이 존속되는 한 지속되는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 별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은 인간 역사의 희망에 대한 믿음과 별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구체화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은 인간 역사의 희망에 대한 믿음으로 구체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믿음,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표현으로서 함께 한 사람들에 대한 믿음은 함께 한 구성원들 사이에 상호 책임적인 관계를 형성합니다. 여기서 물질의 공유가 중요한 요건이 됩니다. 
본문 말씀의 앞 대목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4:32) 그리고 그 공동체를 지탱하는 중심 가치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 안에서 누리는 은혜를 강조하고(4:33), 이어서 다시 공동체의 구체적 모습을 전합니다. 이는 부활에 대한 믿음과 공동체의 내적 연관성을 말합니다. 부활을 믿는 믿음이 이렇게 삶으로 구체화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4:34)
언뜻 보면 같은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두 진술은 미묘한 차이가 있고, 그 차이는 공동체의 점층적인 발전 과정을 함축합니다. 어떤 미묘한 차이일까요? 앞의 진술은 개인적 소유를 전제하고 있고, 뒤의 진술은 그 개인적 소유마저 내놓은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부분의 말씀은 개인적 소유를 인정하되 그 소유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지 않고 사실상 공동선을 위해 활용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뒷부분의 말씀은, 전 재산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가진 소유 자체를 아예 공유로 내놓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개인적 소유를 인정하되 공동선을 위해 그 소유를 활용했다는 것은 그리스적인 미덕과 정의에 부합합니다.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의 근거가 되는 『니코마스 윤리학』이 말하는 이상적 상태입니다. 재산을 가진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의 이상입니다. 플라톤의 『국가론』과 더불어 『니코마스 윤리학』은 그 이상의 중요한 기초를 제시했고,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한마음 한뜻’이라고 한 표현은 구약성서에도 등장하지만(신명 6:5 등), 그리스 세계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특히 ‘한뜻’은 ‘사랑의 공동체’를 은유하는 의미로 여겨졌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말씀, 신약성서의 말씀이 그리스-로마 세계 안에서 선포되고 있는 점을 늘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증언은 그 세계가 가장 바람직하게 여기는 이상을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서 구현했다는 자긍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선도한다는 자긍심입니다.

그러나 그다음 증언, 곧 바나바가 자신의 소유를 내놓았고 공동체 안에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이야기(4:34~37)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약성서로부터 이어져 온 오랜 이상이 드디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구현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모든 사람에게 내린 은혜를 언급한 것은 그 차원을 달리하여 중요한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닙니다.
초기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는 자기 재산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다수는 갈릴리 출신의 가난한 사람들이 중심이었고, 여기에 점차 다른 지역 출신의 비교적 유력한 사람들이 결합하였는데,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키프러스 출신 바나바는 자기 소유를 내놓을 수 있을 만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이 모이는 초기 교회에 그렇게 몇몇 사람들의 기여가 큰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증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4:34) 애초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그것을 내놓은 사람들의 기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신명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당신들이 참으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신명 15:4) 사도행전의 증언은 그 하나님의 약속이 드디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초기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역사적으로 ‘사회’에 대한 관념, ‘공동체’에 대한 관념을 자극하고,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여러 역사적인 운동을 고무하였습니다. 교회만의 이상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추구하였던 모든 운동을 추동하는 끊임없는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성서로부터 비롯되는 이 정신은 오늘날 인류 공통의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의 그 보편적 정신과 메시지를 다시금 조명하며 우리 사회에 펼쳐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화의 진정한 뜻입니다. 

얼마 전 파업 위기 직전까지 치달았던 삼성전자 사태는 단지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공정한 부의 분배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해당 기업의 경영전략과 해당 부문 노동자들의 몫으로만 영업이익의 실체를 규명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국제적 분업 구조 안에서 해당 기업의 위치, 국가의 공적 지원, 하청 업체와 여러 관련 업체의 협력, 그리고 시장의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이 복합적인 관계망 안에서 달성된 영업이익은 해당 기업의 특정 부문만의 성취는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 이익을 나누는 일은 관련 당사자 모두와 관련되는 문제입니다. 국가의 공적 지원이라는 측면에서 국민 모두와 관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한 복지 전문가는 삼성전자 노조가 성과급 요구를 한 덕분에, 노동자들이 정당한 분배를 요구하면 곧바로 ‘빨갱이’로 찍히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아 다행이라 말합니다(윤흥식, “고맙다, 삼성전자 노동조합!” &lt;한겨레&gt;, 2016.6.1.). 이념의 덫을 피해 부의 공정한 분배 문제를 제대로 논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그 공정한 규칙과 틀을 만드는 것은 우리 사회와 국가의 몫이 되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능력껏 일하고 자신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오늘 중요한 시대적 과제입니다. 더불어 기후 위기로 심각한 진통을 겪고 있는 자연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 또한 중차대한 과제입니다. 이른바 ESG 경영(Environment: 환경, Social: 사회, Governance: 지배구조)은 오늘날 기업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중요한 원칙입니다. 이는 지속 가능한 기업의 경영원리를 뜻하는 것일 뿐 아니라 평화롭게 지속 가능한 사회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말씀이 일깨워주는 진실을 스스로 삶에서 구현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믿는 그 진실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도록 협력하고 헌신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그 진실을 이루고자 하는 데서 자긍심을 지니기를 바라며, 진정한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07 Jun 2026 15:26:1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23 / 6.7.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89]]></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c7Yuel8jzIk
 
2. 오늘 예배 후 월례 공동의회가 열립니다(안건: 5월 재정보고, 주요일정 점검 등).

3. 다음 주일 예배후 청빙준비위원회가 열립니다.

4. 6월 예배 및 봉사 담당안이 준비되었습니다. 

5. 2026년 상반기 수요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교회 깊이 알기” 후속 프로그램으로 특강 “북간도 개신교의 역사” 더불어 영화 &lt;북간도의 십자가&gt;를 관람하는 모임을 6월 20일(토) 오후 2:30에 할 예정입니다.

6. 교우들의 독서모임 6월 주제는 &lt;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gt;입니다.

7. 담임목사
   9(화) 오후 2~5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민중신학의 탐구” 출강
   10(수) 오전 9:30 서울 민주화운동기념관 / 제39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 참석(한국교회인권센터, ‘민주주의 발전 유공 대통령 표창’ 수상)
   12(금) 오전 10:00 서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2026년 개신교인 인식조사 연구모임]]></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05 Jun 2026 16:54:4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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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어둔 밤 마음에 잠겨”(2026.5.31.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88]]></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5/song20260531.mp3"][/audio]
“어둔 밤 마음에 잠겨”(새찬송 582) / 동부구역]]></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31 May 2026 15:28:4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경계를 넘는 바람, 성령의 사람 - 요한복음 3:1~8[이성철 목사 / 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87]]></link>
			<description><![CDATA[2026년 5월 3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경계를 넘는 바람, 성령의 사람
본문: 요한복음 3:1~8
이성철 목사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pZpSdxSURT8?si=A7cOXq4AZnENKN3h"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들보다 예수님의 사건을 상징과 은유로 복음의 참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빛과 어둠, 위와 아래, 육과 영, 생명과 죽음 같은 강한 대비가 자주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는 대비를 넘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당시 유대 사회에서 종교적 권위와 사회적 지위를 함께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율법과 신앙의 전통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 호기심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밤에 자신보다 훨씬 젊은이, 예수님에게 찾아와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본문 이전의 기적은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예수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기적과 행보가 드러난 상황은 아니었지만, 니고데모는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흔적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이 알고 있던 종교적 질서 안에서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가 아는 하나님은 성전과 율법과 제도의 승인 속에서 일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적은 전통적인 유대교와 자신의 지식 바깥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지식과 신앙의 질서 안에서 설명되기 어려운 새로운 생명의 기적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표적을 보고 예수님께 이끌렸지만, 여전히 자기 세계의 언어로 그것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이 말씀에서 “새롭게 태어나다” 또는 “다시 태어나다”으로 번역된 말은 “위로부터 태어나다”라는 뜻으로도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그리스단어 “바실레이아”를 ‘왕국’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장소를 뜻한다기보다 통치, 주권 등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남성중심주의적인 의미를 쓰지 않기 위해, “영역”이라는 번역을 쓰기도 합니다. 왕국은 장소를 가리킵니다. 영역은 보다 장소적인 차원보다는 경험적인 차원을 말합니다. 영역은 의식과 시각의 한계를 넘는 새로운 단계들을 볼 수 있는 경험이 다시 태어나 보게 될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흔히 말해 “회개”하여 나의 마음과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는것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몇 번을 다시 회개하고 태어나면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걸까요? 오히려 이런 생각들이 성숙하지 못하게 하며 신앙에 있어서 의존성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어왔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의  너의 인식을 넘어서는 변화를 경혐해야한다. 그러기 위해 네가 변화할 것을 두려워하지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위해 열려있어야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삶이 만들어온 인식과 태도는 자신을 지켜주는 옷이었으며 자신을 이루는 토대였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침을 받고 신실하게 삶과 신앙을 이어온 그의 얼굴이자, 손이며, 발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은 마치 지금까지 살아온 삶 전체를 부정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정말로 난감한 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길에 대한 답을 주십니다.

"사람이 늙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어머니의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없지 않습니까?"

이 본문을 읽을수록 이 질문은 말장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니고데모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난처한 마음을 표현한 질문이라고 느껴집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희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새로운 율법을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니고데모가 지금까지 붙들고 살아온 규칙과 질서, 그 인식의 틀 자체를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에 대해 설명해주십니다. 

성령을 뜻하는 말은 프뉴마입니다. 이 말은 영이면서 동시에 바람이고 숨입니다. 구약성서의 루아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바람이고 숨이며, 생명을 움직이게 하는 하나님의 기운입니다. 

바람은 사람이 만든 경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담장을 세운다고 멈추지 않고, 국경을 그어 놓는다고 방향을 바꾸지 않습니다. 어느 곳은 거룩하고 어느 곳은 부정하다는 인간의 구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바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다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우리 곁을 지나가고 우리 몸에 닿고 우리의 삶을 흔듭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 이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이 바람을 아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겼던 규율과 지식, 경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던 낡은 질서와 체제의 규율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더 넓은 세계를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평생 질서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거룩하고 부정한지,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지를 구분하며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알고 있는 그 규율만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너를 존재하게한 말과 기준만으로는 하나님의 생명을 다 담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유를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제가 최근 활동하며 가지게 된 제 안의 자유의 이미지는 김남주 시인의 ‘자유’라는 시였습니다.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누어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다들 아시는 시지요? 국가보안법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국가보안법 폐지 집회나 기도회 때면 이 시를 함께 읽고 기도했습니다. 자유를 빼앗긴 이들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 함께 외쳤습니다. 

그러다가 또 최근에 다른 자유한 성령의 사람들과 연결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가자지구로 향했던 세계의 수많은 활동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항해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해군에 의해 나포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배에 올랐습니다. 그 배 위에는 한국의 활동가들도 있었습니다. 

지난 해초의 항해 이후 한국교회 인권센터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도 팔레스타인 해방과 항해를 지지하며 저도 함께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항해 한국지부 팀에 함께 하며 이번 항해의 곁에서 함께 했습니다. 그 자유의 길을 가는 친구를 위해, 이 땅에서 조력하는 수 많은 동료들과 함께 했습니다. 배에는 가자지구에서 자랄 수 있는 씨앗들, 의료용품과 위생용품을 싣고 공해에 배를 띄워 자유로운 바다로 향했었습니다.

항해가 시작한 날부터 한국에서는 24시간 돌아가며 배의 CCTV를 통해 동료들의 모습을 확인했고, 배의 트랙킹 신호를 기록하며 나포되지는 않는지, 나포되었다면 상황을 대응하는 팀이 꾸려졌고,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수 많은 집회를 진행하고, 한국정부에 해초의 여권 무효를 취소하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리고 승준 활동가가 먼저 나포되었고, 다음날 해초와 동현활동가는 가자로 떠난 54척의 배들, 426명의 활동가들 중 마지막으로 가자지구를 100키로 정도 눈앞에 두고 이스라엘 군에 나포되었고, 배는 부셔졌습니다. 

아시다시피 대한민국 정부는 활동가들의 나포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을 향해 석방을 촉구했고, 이튿날 활동가들은 석방되었습니다. 활동가들이 풀려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마치 한국정부의 공로로 불법을 저질러 위험에 빠진 국민을 대한민국의 외교력으로 구해냈다는 입장은 다시 생각해봐야합니다. 

한국의 외교부는 작년 해초의 항해 이후 더 이상 위험지역에 가지 말라며 이미 다음 항해를 위해 해외에 있던 해초 활동가의 여권을 무효화했습니다. 그가 나포되었을 때도, 석방된 뒤에도, 여권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국가는 안전을 말했지만, 그 안전이 누구의 안전이었는지 묻게 됩니다. 그들은 국가가 지키지 못하는 생명에 닿기위해 바다를 향했습니다. 

한국이 이스라엘에게 잃기 어려운 군사ﾷ산업적 파트너였기 때문에 그 석방이 가능했다면, 우리는 그 장면을 불편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쪽에서는 석방을 요청하고, 다른 쪽에서는 무기 거래와 군사 협력이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 여전히 해초의 여권을 볼모로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 귀국한 활동가들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규탄하며 팔레스타인 해방을 외치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 나섰던 이들을 통해, 안전이라는 말 뒤에 있는 통제를 보고, 외교라는 말 뒤에 있는 이해관계를 보고, 질서라는 말 뒤에 가려진 고통을 봅니다. 세상은 그 항해를 무모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받는 현실만으로 나서기 충분했다는 그들의 말에 저는 성령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넓고 먼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을 보게 하시고, 불의와 불편함을 느끼게 하시며, 익숙한 질서와 당연하다고 믿어 온 경계 너머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셨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 안에서 서로 연결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낯설게 느끼는 사람도, 멀리 있다고 생각했던 존재도 하나님의 숨결 안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바람 앞에 우리 자신을 열어 놓고, 새롭게 보고, 새롭게 듣고, 새롭게 연결되는 자유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31 May 2026 15:18:5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22 / 5.31.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86]]></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fGt6CvpO3uU 

2. 오늘 예배후 청빙준비위원회가 열립니다.

3. 다음 주일 공동예배는 성찬예배로 드리며, 예배 후 월례 공동의회가 열립니다(안건: 5월 재정보고, 주요일정 점검 등).

4. 6월 예배 및 봉사 담당 예정안이 준비되었습니다. 

5. 2026년 상반기 수요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교회 깊이 알기”를 지난 주간 마쳤고, 후속 프로그램으로 특강 "북간도 기독교의 역사"와 더불어 영화 &lt;북간도의 십자가&gt;를 관람하는 모임을 6월 20일(토) 오후 2:30에 할 예정입니다.

6. 시몬느 드 보부아르 &lt;제2의 성&gt;을 주제로 한 교우들의 온라인 강독모임이 지난 주간 2년만에 끝났습니다. 교우들의 성경통독 모임은 수년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7. 교우들의 독서모임은 6월 27일(토) &lt;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gt;를 주제로 합니다.

8. 담임목사
   31(일) 저녁 8시 [온라인] 종교와 마르크스 포럼 정기 세미나
   2(화) 오후 2~5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민중신학의 탐구” 출강]]></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29 May 2026 12:01:1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이 오셨네”(2026.5.24.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85]]></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5/song20260524.mp3"][/audio]
“성령이 오셨네” / 성가대]]></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24 May 2026 17:45:1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의 임재, 가장자리의 언어에 공명하는 사건 -사도행전 2:1~18[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84]]></link>
			<description><![CDATA[2026년 5월 2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성령의 임재, 가장자리의 언어에 공명하는 사건
본문: 사도행전 2:1~18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jRyJUpCfPjA?si=--OKnrNFBgofZppr"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성령강림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교회의 기원이 되는 계기로 지키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지 50일만에 일어난 사건이어서 오순절로 불리기도 합니다. 교회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엄밀하게 따지자면 보다 복합적인 양상을 띠겠지만, 성령강림 사건을 그 기원으로 보는 것은 그 나름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세상 안에 존재하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바로 그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서로 꽉 막혀 있던 세상 한 가운데서 어떻게 진정한 소통과 교감이 이루어졌는지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설교(2:14~42)로 이어지는 말씀은, 이 사건 후 회심한 사람이 3,000명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이 120명이었는데(1:15), 이 성령강림 사건에 이어 베드로의 설교가 선포된 이후 3,000명이 회심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성령의 인도로 시작된 교회의 역사를 전하는 본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했을 때 교회가 탄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교의 명절인 오순절에 신도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유대교 절기로서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칠칠절을 뜻합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처럼 갈라지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렸고, 사람들은 성령이 말하는 대로 방언, 곧 각기 나라말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성령강림의 모습은, 오늘의 교회들 안에서도 하나의 표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들에서는 거의 절대적인 표준이 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성령체험이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방언하는 능력을 얻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이 전하는 성령강림의 사건은 단순히 열광적인 흥분 상태에 빠진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이 전하는 성령강림 사건의 참뜻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데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말하는데,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자기의 말로 들렸다고 합니다. 사도들이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갈릴리 출신들입니다. 
그때 예루살렘에는 여러 지역 출신의 유대 사람, 또는 유대교로 개종한 여러 지역의 출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대,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이집트, 구레네 부근 리비아, 로마, 크레타, 아라비아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로마, 북쪽으로는 튀르키예,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 동쪽으로 아라비아 전역에 해당하는 지역들입니다. 이 지역들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자기 출신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사도들이 하는 말이 전부 자신들의 말로 들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놀랍니다. 저 사람들은 분명히 갈릴리 사람들인데, 저마다 자기네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하고 반문하며 놀랍니다. 
바로 이 진실이 성령강림 사건의 핵심입니다. 한마디로 성령강림 사건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소통하는 사건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방언’을 중얼중얼하는 것이 성령체험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장애없이 서로 소통하는 체험을 하는 것이 성령체험입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되는 사건입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 말이 굳어지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아주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는 서로 다른 나라 말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의사소통에 커다란 문제가 안 됩니다. 영어를 쓰는 아이는 영어로 한국어를 하는 아이는 한국어로 좋고 나쁜 감정을 표현하면 그것으로 다 소통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성장하면서 저마다 자기 고유의 문화전통과 그에 따르는 규칙에 충실하다 보니까 결국에는 서로 넘나들 수 없는 경계선이 생기고, 그 경계선을 부수지 않으면 이제는 더 이상 의사소통이 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이 전하는 성령체험의 경지는, 마치 서로 다른 나라의 어린아이들이 각기 자기 말을 하는데도 의사소통이 되는 것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그대로인데도 서로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경지를 말합니다. 이것은 특정한 가치 기준 하나로 획일적으로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개성을 다 인정해 주는 데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고 한마음이 되는 경지를 말합니다.
출신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면 달리 사는 것이 굳어진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 법칙 아래서는 높고 낮음이 있고 우월하고 열등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지역 출신이 득세하면 어떤 지역 출신은 소외를 당합니다. 높은 편, 우월한 편의 가치 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출신이 문제가 되지 않고 서로 아무런 장애가 없이 소통하는 체험을 하였다는 것은 그렇게 사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의 언어로 모두가 소통하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데도 소통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독단의 제국에 빠지지 않고, 각기 정체성을 유지하는데도 보편적 가치와 소통이 되는 사건을 말합니다. 오히려 그 정체성을 존중함으로써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성에 이르렀다는 것이 사건의 요체입니다.
그러기에 성령강림 사건은 구약성서가 전하는 바벨탑 사건(창세 11:1~9)을 정면으로 뒤집고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의 언어로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제국의 욕망이 불러일으킨 세계 분열의 실상을 성찰하고 있습니다. 각기 다른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성을 부정하고 하나의 가치 기준으로 획일적인 위계질서를 만들어 세계를 지배하고자 할 때 거꾸로 세계가 분열할 수밖에 없는 진실을 일깨우는 이야기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은 그와 정반대로 서로 정체성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모두가 함께 평화롭게 어울리며 소통할 수 있다는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갈릴리 출신 제자들의 언어가 모든 지역의 언어와 소통하고 있다는 진실입니다. 이는 어떤 가치를 기반으로 소통하는지 그 진실을 알려줍니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된 일이오?”(2:7~8) 변방 갈릴리 민중의 언어가 세계적 보편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존의 질서 안에서 가장 무시되었고 주변화되었던 사람들의 언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뜻입니다.
이를 보고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보고 베드로가 선포합니다. 그 기이한 사건에 동참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고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달리 이해할 길이 없었던 그들은 조롱하면서 술에 취한 것이라 말합니다. 베드로는 그에 대해 해명하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합니다. 
“지금 아침 아홉시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듯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2:15) 사람들이 술에 취하면 유사한 현상이 일어나기는 합니다. ‘알았어, 알아!’ ‘그래, 그래!’ 하고 다들 큰소리칩니다. 그렇게 하고도 술이 깨고 난 다음에 자신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눈지도 모르는 일이 벌어집니다. 
베드로는 지금 목격하고 있는 일이 그런 경우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일은 성서가 예언하고 있는 바로 그 사건이라 말합니다. 사도행전의 본문이 약간 변형되어 있기에 요엘서 본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주겠다.”(요엘 2:28~29) 
지금 목도하고 있는 사건이 지니는 의의입니다. 이 예언의 초점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받을 것이라 선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징표로 거론되는 이들은 이른바 표준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노인과 젊은이들, 종들에게까지 남녀 가리지 않고 영을 받게 될 것이라 합니다. 이들에게 임재하는 하나님의 영, 곧 이들이 하나님의 뜻이 이뤄졌다고 공감하는 진실을 모두가 공감하는 순간이 성령임재의 사건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사건의 현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공통언어는 곧 갈릴리 언어였습니다. 놀라운 진실은 모두가 갈릴리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한 것은 아닌데도 그 언어를 모두 다 알아들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언어 그 자체로 알아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갈릴리 사람들의 언어가 뜻하는 바를 그 깊이의 차원에서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언어, 그것은 곧 예수님의 언어였습니다. 그것은 권력을 탐하는 중심의 언어가 아닙니다. 제국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경계를 짓는 언어가 아닙니다. 갈릴리의 언어, 예수님의 언어는 바로 그 경계의 가장 끄트머리로 밀려난 사람들의 언어입니다.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언어입니다. 그 언어에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그 언어로 모든 사람이 소통하는 사건, 바로 그것이 성령강림 사건의 실체입니다.
제국의 언어는 세계에 분열을 일으키고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더합니다. 여자와 어린이에게 그 고통은 가중됩니다. 오늘 우크라이나에서, 이란에서,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그들을 돕고자 나선 이들의 뱃길을 가로막고 납치하는 이들은 그 고통에 무심한 자들입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저작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힌드의 목소리”(2025년 영화)가 사람들을 울립니다. 그렇게 감추어졌던 목소리, 고통의 절규에 공감하는 사건, 그것이 곧 성령임재의 체험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이 교회 탄생의 사건으로서 기억되는 것은, 교회가 그 뜻을 실현하는 공동체로서 몫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강림의 사건은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세상과 다른 교회의 탄생, 그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는 그 순간 사람들은 그렇게 달라집니다.

어떤 사회가, 어떤 공동체가 건강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가장 고통받고 가장 약한 지체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목소리에 공감하는 사회, 그 공동체는 건강합니다. 교회는 그 정신을 지향하고 있고, 그 정신을 세상에 구현하는 사명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그 정신을 스스로 구현하고, 나아가 우리의 사회 한 가운데 그 정신을 구현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24 May 2026 14:08:1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무너진 경계와 왜곡된 신앙: 정교유착 방지 법안의 정당성과 한계]]></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83]]></link>
			<description><![CDATA[『기독교사상』 2026년 6월호 특집 원고

무너진 경계와 왜곡된 신앙: 정교유착 방지 법안의 정당성과 한계

최형묵


일탈

한국 보수 기독교가 정치 행동에 나선 것은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과거 유신 독재 체제에 저항하며 진보 기독교가 정치 행동에 나섰을 때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현상이다. 물론 그 시절에도 표면상의 명분과 달리 실제로는 ‘정교유착’이라 할 만한 정치적 거래를 해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만큼 자신들과 가치를 달리하는 정권이 들어섰을 때 그에 대해 저항하며 정치 행동에 나선 것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민주화가 진전되고 평화 체제를 지향하는 전반적 추세에 역행한 탓에 사회적으로 지탄받기는 했어도 적극적으로 가시화한 하나의 정치적 입장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24년 12.3 비상계엄 이후 그 양상은 달라졌다. 극우 집회를 이끈 전광훈과 손현보를 중심으로 하는 극우 기독교 세력은 헌정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과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2025년 1.19 서부지법 사태는 그 단적인 사례였다. 윤석열의 구속을 결정한 서부지방법원에 침입한 난동 사태는 헌정질서를 부정한 행위였다. 전광훈은 광화문 광장 집회를 통해 명백히 이를 사주하였다. 더불어 난동에 적극 참여한 이들 가운데 전광훈과 연결된 이들도 있었다. 결국 2026년 1월 전광훈은 ‘서울서부지법 난동 사태’의 배후 혐의(특수주거침입교사 등)로 구속되었다. 현재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재판은 계속되고 있다. 손현보는 서부지법 난동 사태와 직접 연루되지는 않았지만 2025년 6.3 대통령 선거와 그 외 교육감 선거 등에서 선거법을 위반하여 실형을 선고받았다. 종교의 자유를 빌미로 설교 강단에서 특정 후보에 대한 저주와 악담을 반복해 왔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발언과 행위를 종교의 자유를 근거로 정당화하고 있지만, 사회적 시선은 명백히 헌정질서를 부인하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법당국 또한 명백히 위법한 행위로 여겨 그 책임을 묻고 있다.
전광훈과 손현보가 내란 정국에 광장에서 소란스럽게 목소리를 냈다면,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 행위에 나선 종교 세력도 있었다. 신천지와 통일교의 경우이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보수 정당을 지지하며 정교유착을 시도하였다. 전광훈과 손현보가 진보적 사회 및 정치 의제, 그리고 이를 옹호하는 정 치세력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면, 신천지와 통일교는 보수 정치 세력을 지원하며 정교유착을 시도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윤석열의 내란 사태가 평정되는 가운데 이들의 행보가 드러났고 현재 수사와 더불어 사법적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근래 수년 사이 신천지는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 왔다. 기존 교회에 침투하여 교회를 접수하거나 신자를 빼 내가는 전도 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기존 교회에서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교회 내 문제일 수 있었다. 신천지가 사회적으로 문제시된 것은 코로나 팬데믹 현상의 와중에서였다. 코로나가 시작된 초기 급격한 감염 확산의 매개자가 신천지 교인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부의 방역 조치를 따르지 않은 집회 방식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손현보 역시 정부의 방역 조치를 따르지 않았지만 요란하게 종교의 자유를 외치는 가운데 대중적으로 부상한 반면, 신천지는 정부의 방역 조치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집회를 이어가는 가운데 물의를 빚은 것으로 여겨졌다. 행정당국은 강경하게 대응하였고, 특히 당시 경기도지사 이재명은 그 본부에까지 직접 출두하여 방역을 위한 행정조치를 따르도록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빌미가 되었던 것일까? 신천지는 이후 보수 정당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고 신도들이 당원으로 가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대선 후보 지원에도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5년간 5만여 명의 신도들이 집단적으로 가입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당내 경선과 선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신도들에 대한 강압과 자금 운용의 문제로 현재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통일교 역시 정치권과 부적절한 유착을 시도한 것이 드러나 현재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통일교가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해 정교유착을 시도해 온 사례는 널리 잘 알려져 있다. 오래전에서 미국에서도 문제시된 적이 있거니와, 근래 일본에서는 아베 총리 암살 사건의 배경이 되었을 만큼 통일교의 정교유착 시도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급기야 일본에서는 통일교의 종교법인 해산 절차까지 이뤄졌다. 일본에서의 종교법인 해산 심판은 통일교에 위기 상황으로 인식되었고, 이에 따라 한국에서 입지 강화를 위한 정교유착의 시도를 강력하게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통일교는 교단 현안 청탁을 목적으로 정치인에게 금품을 제공하고, 교단 자금을 활용해 정치후원금을 불법으로 제공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에 따라 총재와 주요 인사가 구속되었고 이에 관한 전반적인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신천지와 통일교의 경우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과 정당 민주주의의 근간을 허무는 행위로 여겨져 사법적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헌법상 정교분리의 원칙이 뜻하는 바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이들 교단의 행위가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신천지의 경우 주로 정당법에 저촉되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통일교의 경우는 형법상 뇌물죄와 정치자금법 위반 행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종교의 자유를 명분으로 헌정질서를 부정하는 행위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정교유착을 시도하는 행위는 일단 구별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안은 민주적 헌정 국가 안에서 바람직한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민주적 헌정 국가 안에서 정교분리의 의미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국가와 교회, 곧 정치와 종교의 문제는 처음부터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 왔다. 그 관계 설정은 신학의 중심 과제라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 까닭은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향과 더불어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서도, 사도 바울에게서도 이는 문제가 되었다. 예수의 핵심 선포로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 목적으로서 종말론적 성격을 지녔고 그 나라와 지상의 나라는 화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마가 10:42, 요한 18:36, 마가 12:13~17 등 참조). 사도 바울 역시 종말론적 이상으로서 그리스도의 주권에 의한 세상의 통치를 주장하였지만(고전 15:24, 골로 2:10 등 참조), 동시에 권위에 대한 복종을 주장하기도 했다(로마 13:1~7). 이로부터 로마의 ‘황제숭배’는 거부하지만 제국 내의 ‘공공질서’는 용인하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태도가 결정되었다. 초기 기독교 시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방대한 저서 『하나님 나라』는 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세속국가는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하나님 나라 실현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두 왕국론’, 그리고 칼뱅의 ‘하나님의 주권’ 또는 ‘그리스도의 주권’ 개념 등이 모두 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였다. 이는 모두 각기 시대적 맥락 가운데서 양자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답을 제시하는 성격을 띠었다.
양자의 관계 문제는 근대의 정치적 혁명 과정을 통하여 분기점을 맞이한다. ‘정교분리’의 원칙이 확립된 것이다. 그 원칙은 일차적으로는 종교로부터 국가의 분리를 뜻하며 또한 역으로 국가에 의한 종교의 간섭을 배제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중세적 질서의 종식을 뜻하는 것으로, 세속적 주권 국가의 입장에서 종교적 권위로부터 정부를 분리하고자 하는 요구와 종교의 입장에서 국가로부터 신앙의 자유가 침해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요구가 합치된 결과였다. 
이 원칙은 정치와 종교가 무관하다는 것을 뜻한다기보다 정치의 종교화 또는 종교의 정치화를 배제하려는 뜻을 지닌 것으로 해석된다. 곧 정치적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하거나 간섭하는 행위를 배제하는 한편 종교가 정치권력에 기대어 특권적 지위를 노리는 것을 배제해야 한다는 뜻을 지닌다. 그것은 정치와 종교의 자율성을 인정함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한편 독단적인 종교적 세계관에 좌우되지 않는 투명한 민주적 헌정질서를 지향하고자 하는 뜻을 지닌다. 그것이 정교분리의 요체이다. 이는 오늘날 이란과 같은 일부 신정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민주적 헌정 국가 안에서 준수되는 원칙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와 국가 모두 세계 안에 존재하고, 또한 그 안에 사는 사람은 종교인이자 동시에 시민으로서 존재하기에 그 ‘분리’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계속되는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종교인은 정치에 무관심해도 되는지, 거꾸로 국가는 사회적 공공성을 해치는 종교를 방치해도 되는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여기서 우리는 양자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 전제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공동선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점에서 양자는 분리되어 있으되 협력할 수 있으며, 역으로 양자 가운데 어느 편에서 그 목표를 저해한다면 피차간에 저항과 간섭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은 사회적으로 용인되거나 용인될 수 있는 각자의 역할을 분명히 하면서 피차간 부당한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헌법에 정교분리와 신앙의 자유를 명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양자의 관계를 적절히 규율하는 법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정교분리 정신에 따르면 정치와 종교는 양자 모두 엄격한 공동의 책임을 지니고 있다. 국가가 자신의 권력을 임의로 남용함으로써 정당한 사유 없이 특정 종교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 다른 한편 종교가 사회적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고자 할 때 그 표현 방식은 자신의 신앙에 근거를 두되 민주적 헌정 국가 안에서 보편적 가치와 그 소통방식에 부합하여야 한다. 이는 종교적 독단에 따라 입장을 개진하는 것을 지양하고 각기 다른 세계관을 지닌 사회 구성원을 존중하고 그 가운데서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신앙의 요청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의 요청을 당대의 역사·문화적 환경 가운데서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또 다른 한편 각 종교는 사회 안의 다종교 상황을 유의해야 한다. 특정 종교가 국교의 지위를 가짐으로써 외부적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시민사회 안에서 각 종교가 스스로 신뢰도를 높여야 하는 조건 가운데 있다. 종교적 믿음의 체계는 그 자체로 자기완결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독단에 빠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가치체계와 접촉을 통해 오히려 자기 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여기서 각 종교가 사회적 신뢰를 얻기 위하여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지는 분명하다. 배타적 진리 주장과 독단적 행위에 몰입하는 종교보다는 포용력을 지닌 종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높은 현실을 유의해야 한다.


정교분리법 취지의 정당성과 한계

오늘 민주적 헌정 국가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정교분리의 취지를 따를 때 지금 우리 사회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종교들의 정치 행위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전광훈이나 손현보는 광장이나 교회당에서 노골적으로 헌정질서 자체를 부정하거나 실정법을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신천지나 통일교는 은밀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특정 정당을 지원한다든가 금품을 제공함으로써 실정법을 위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수사와 사법적 절차를 통해 일련의 일탈 사태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도 충분하다.
제22대 국회에서 이른바 ‘정교분리법안’으로 불리는 ‘민법 일부개정법률안’(2026.1.9.)이 발의된 것도 그러한 사회적 공감대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는 헌법적 원칙과 보편적 가치 기준을 따르는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특정 종교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 적절한 규율이 필요하다는 취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더불어 종교법인을 포함한 비영리법인에 대한 행정관청의 감독 권한과 절차를 명문화함으로써 행정권의 임의적 행사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재 발의된 법안은 그 취지를 충분히 이해한다 하더라도 법안으로서 취약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교계에서 여러 의견이 제기되었거니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그 법안 제기의 배경과 취지를 이해하면서도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개정안이 여전히 또다른 측면에서 행정관청의 자의적 법 집행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장치가 없다는 점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법인의 위법성과 책임을 판단하는 일은 행정명령이나 행정결정이 아니라, 법원의 판결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설립허가 취소가 곧바로 법인의 해산과 재산 귀속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한 구조는 종교의 자유와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침해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정권의 성격에 따라 정치적으로 오용·남용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통일교, 신천지에 대한 신속한 수사를 촉구한다 – 비영리법인의 공익성 제고를 위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입장」 2026.2.4. 참조.)
       
비영리법인에 대한 감독 권한을 행사하는 절차와 그 효력에서 모두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지적이다. 법인의 취소가 곧바로 해산의 효력을 지니는 것으로 되어 있어 사실상 행정관청이 전권을 가지고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게다가 그 권한은 사실상 어떤 견제도 받지 않은 채 정권의 성격에 따라 오용되거나 남용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행정관청의 임의적 판단을 배제하려는 법 조항이 오히려 임의성을 안게 되는 모순이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해당 법안에서 법인의 설립허가의 취소 요건 가운데 헌법상 정교분리의 원칙을 위반하거나 공직선거법 등을 위반한 경우만을 특정하고 있는 점도 문제이다. 그 밖에도 다양한 위헌적 또는 반사회적 행위 등이 있을 수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명시하지 않은 채 특정 사안만을 명시함으로써 균형을 잃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는 해당 법안이 바로 그 특정한 사안을 겨냥하여 성급히 만들어졌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로써 오히려 법안의 신뢰성과 합리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결국 현재 국회에 발의된 법안은 사안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여론을 환기하기 위한 일종의 불쏘시개 역할을 맡은 것 정도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정교분리의 정신을 훼손하는 정치 행위에 대한 규율 방안은 좀더 충분한 검토와 숙의를 필요로 한다.
먼저, 민주적 헌정질서를 부정하는 정치적 선동이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요구를 관철하려는 정교유착이든 이를 법률로 규율하고자 한다면 해당 법안이 충분한 합리성과 균형을 갖추어야 하고 정교해야 할 것이다. 법률적 규율은 쉬운 방법이지만, 그 쉬운 방법을 따르기 위해서는 입법 과정 자체가 충분한 의견 수렴을 동반하여야 하고 그 결과로서 법안이 합리성과 균형을 잃지 않아야 한다. 행정의 권한만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이는 종교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 더욱 근본적인 대안은 우리 사회에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관한 규범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는 쉽지 않은 과제이기는 하지만, 법과 제도가 순기능을 담당하도록 하기 위한 필수적 요건이다. 사회적 규범이 빈약한 토대 위에 세워진 법과 제도는 취약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2025년 4월 4일 대통령 탄핵 선고에서 헌법재판관도 인용했듯이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규범의 요체라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의 위기 신호』 2018, 132.) 이는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서도 유의해야 할 규범적 성격을 지닌다. 상호 관용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를 말하며, 제도적 자제는 법과 제도가 보장하는 권한이라 하더라도 그 권한을 남용하지 않는 절제를 뜻한다. 
그 규범이 지켜질 때 사회는 신뢰가 유지되고 안전해진다. 반면 그 규범이 무너질 때 사회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 규범을 지켜야 할 책무는 우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 편에 더 강하게 요구되는 것일 수 있지만, 종교 편에 또한 그 무게와 다르지 않게 요구된다. 오히려 종교 편에서 그 책무를 더욱 무겁게 느껴야 할 것이다. 종교는 권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규범을 통한 교화력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그 본령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at, 23 May 2026 12:43:4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9"><![CDATA[논단]]></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21 / 5.24.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82]]></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oJoNvGStlkM 

2. 청빙준비위원회가 구성 완료하였습니다(위원장 이지수, 위원: 김광식 김규희 김성윤 박경주 박수환 백수현 선재원 전홍진).  

3. 2026년 상반기 수요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교회 깊이 알기”가 이번 주간 마칩니다. 주제와 관련하여 특별 프로그램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8] 5월27일(수) “사진으로 보는 우리교회 초기모습”(송길룡)

4. 다음 주일(5/31) 공동예배 인도와 말씀은 이성철 목사가 맡습니다. 

5. 담임목사
   25(월) [온라인] 향린교회 공부모임 『민중신학 개념 지도』 저자와의 대화
   26(화) 오후 2~5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민중신학의 탐구” 출강
   26(화) 오후 6시 제3시대연구소 이사회
   27(수) 정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에큐메니칼포럼 운영위원회
   30(토) 오후 12:30 홍천 풍천리 / 녹색교회네트워크 “우리가 풍천리 나무다”]]></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22 May 2026 16:51:1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바위섬”(20265.17.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81]]></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5/song20260517-1.mp3"][/audio]
“바위섬” / 성가대]]></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17 May 2026 19:59:3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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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인간의 길 - 예레미야 31:31~34[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80]]></link>
			<description><![CDATA[2026년 5월 1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인간의 길
본문: 예레미야 31:31~34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2m5FYj6sgkg?si=rDdnB6bxey3wNBJt"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면서 주체로서 자기를 의식한다는 것 아닐까요?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더불어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를 이루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인간의 도드라진 특징은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 점이 인간을 운명적 질서의 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주체로 세워주는 요체일 것입니다. 창조 이야기 가운데서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 인간의 능력은 오랜 문명의 축적 결과이지만, 특별히 인류 정신사에서 볼 때 인간이 자신의 내면적 성찰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시기가 있습니다. 정신사의 차축(車軸)이 형성된 시기로, 성서의 정신세계를 비롯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고전적인 정신세계가 형성된 시기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겪은 갈등과 고통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갈등과 혼란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인간의 내면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극복하고 빛을 드러내게 할 것인가 하는 성찰로 이어진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의 본문 말씀은 성서 전반을 통해 가장 심오한 말씀 가운데 하나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빛나는 통찰입니다.
이 말씀은 멸망한 이스라엘과 유다를 보고 위로와 희망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죄값을 치른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그 나라를 회복하여 주겠다는 말씀에 이어 옛 계약과는 다른 새로운 계약을 맺으리라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구약’과 구별되는 ‘신약’이라는 말의 기원이 되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은 새 계약(31:31)이 모세의 계약과 다르다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31:32)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31:33) 또한 덧붙여 말합니다. “그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31:34)

새 계약이 과연 어떤 점에서 모세와 맺은 계약과 다를까요? 본문 말씀은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말씀이 그 차이를 드러냅니다. 
모세의 시내산 계약은 돌판에 새겨졌습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의무감으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그 계약의 내용은 다른 자세한 설명과 함께 문자화되어 있기에 해석을 필요로 하고, 그 해석에 따라 악용되기도 합니다. ‘율법주의’는 그 율법의 정신이 악용된 결과입니다. 지키지 않아 파기되고, 악용됨으로써 사실상 파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 돌판에 새겨진 계약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계약은 ‘가슴속’에 ‘마음’에 새길 것이라 했습니다. 형체가 없습니다. 그것을 전해 주는 돌판이나 문서와 같은 매체가 없습니다. 곧바로 마음에 새겨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쿵저러쿵 따질 필요가 없어지고, 자신의 마음 가운데서 깨닫는 사람이 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져 억지로 지켜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지키는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경지입니다. 
새 계약에 따라 바뀌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요 마음입니다. 근대의 철학자 칸트가 내면적 도덕률을 강조하여 인간 삶의 보편적 법칙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기원이 되는 통찰이 본문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 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lt;공동번역&gt;의 표현이 그 경지를 아주 실감나게 번역하였습니다. 우리가 굳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 뜻을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물론 개별 사람들의 마음만이 그렇게 바뀐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자체가 그렇게 바뀐다는 뜻입니다. 너의 뜻이 나의 뜻이 되고, 우리 모두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되는 세계입니다. 그러기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갈등을 겪거나 고통을 겪는 일이 없는 세계입니다.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 되는 세상입니다.

본문 말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에게도 계속 이어집니다. 단지 ‘신약’이라는 말의 기원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신약’의 핵심을 미리 보여 준 말씀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체제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진실입니다. 그들에게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더 이상 사람을 옭아매는 체제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희생자들에게 먼저 다가가셨고, 그 체제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을 향하여 준엄한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마가 2:27)
안식일의 조문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식일이 제정된 뜻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안식일이 제정된 뜻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금기사항(39×6=234)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깨달음이 중요하고, 그 깨달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정신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끊임없이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 5:1)
율법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법에 매여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자유인이 아닙니다. 법이 있든 없든 마땅히 해야 할 바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하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타율적인 규율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그렇게 말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요체입니다. 그 신앙의 기원, 그 정신의 기원을 오늘 본문 말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오늘 이 시대는 그 말씀이 일깨워주는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현대 사회 국가는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민의 정치적 대표자들이 입법부를 구성하여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가 있고, 그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지 사람들이 법을 제대로 따르는지 판결하는 사법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 삼권분립이 법치주의의 근간입니다. 언뜻 보기에 그 틈새에 어떤 내면의 동기나 마음이 자리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현대 법치주의가 사실은 민중들의 요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요구였고, 달리 말하면 자율성의 발로였습니다. 곧 정치적 자유 의지에 따른 요구였습니다. 여기에서 법치주의의 중요한 성격이 결정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함으로써 온전한 자유를 구현하려는 뜻을 지닙니다. 그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인간 사회 공동체의 범위가 확대되고 복잡해진 현실 가운데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킴으로서 자유를 실현하려는 사회적 계약으로서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에 기반한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보편적 윤리 규범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 구성원의 권리를 인정하는 성숙한 문명국가의 법이라면 그래야 마땅합니다. 법을 만들어놓고 시행하면서도 그 법의 타당성을 따지는 헌법소원 절차를 두고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법이든 그 자체로 절대화되기보다는 끊임없이 그 근본 취지를 확인할 수 있고, 그 집행의 정당성을 제대로 검증할 수 있는 절차를 동반하고 있다면, 인간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보편적인 도덕률 내지는 윤리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동일한 사안을 두고도 다른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을 보면 그 내면의 동기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법치주의의 근본 취지는 말씀이 일깨워주는 진실과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법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은 과거처럼 한정된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직접적 대면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복잡한 사회적 현실 때문입니다. 오늘날 복잡한 사회적 관계 안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온전한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인간적 각성과 윤리적 요구가 배제될 수 없습니다. 법적 장치는 사회에서 공유되고 있는 윤리의식에 기반한 위임의 정당성과 그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지 단순히 권력으로부터 부여되는 명령의 목록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어떤 사회가 어떤 법을 갖고 이행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회 공동체의 성숙함에 달려 있다고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충분하고, 그것이 생활윤리로 자리하고 있는 사회에서 그에 반하는 법이 통용될 수는 없습니다.

저 지난 주간 국회에서 생명안전기본법이 제정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문에 5.18정신을 명기하는 것을 포함한 헌법개정안은 통과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개정안은 비상계엄의 요건을 강화하는 내용도 포함하였습니다. 숙의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나중에 개정할 것을 전제로, 우선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공감대를 갖고 있는 정신만큼은 새겨넣고자 하는 시도마저 일부 정치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5.18 광주민중항쟁 46주년을 기념하는 주일 우리는 그 뜻을 새삼 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민군의 좌절을 겪은 후 시인 김준태는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탄식하며 노래했습니다(1980.6.2.)
“···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을 뒤집어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예수는 한 번 죽고
한 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백 번을 죽고도
몇백 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우리가 바라는 것은 법문 몇 글자 더하는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 정신, 그 뜻을 새기자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아니 인류가 나아갈 길을 새기자는 것입니다. 다시는 권력에 의해 인간이 도륙당하는 무참한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진실, 해와 달이 입 맞추듯 장엄한 사랑을 나누는 일의 숭고함을 새기자는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가 선포하고 있는 진실은 단지 한가로운 목가적 시대의 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칫하면 중요한 진실을 놓쳐버리기 십상인 오늘의 현실에서 더더욱 중요하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누가 뭐라 해서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깨달아 새기고 있는 진실을 따름으로써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평화를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우리 모두 그 길을 따르는 가운데 참 자유를 누리기를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17 May 2026 13:02:4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20 / 5.17.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79]]></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xfUpvU_H6bM 

2. 오늘 예배후 운영위원회 엽니다(안건: 청빙준비위원회 추가 추천).

3. 오늘 오후에 청년회 주관으로 전교인운동회가 천안시 장애인 체육관에서 열립니다.

4. 2026년 상반기 수요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교회 깊이 알기”가 계속 진행됩니다. 주제와 관련하여 특별 프로그램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7] 5월20일(수) “천안지역 종교문화유적”(송길룡)
  [8] 5월27일(수) “사진으로 보는 우리교회 초기모습”(송길룡)

5. 교우들의 독서모임이 23일(토) 오후 2:30에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을 주제로 하여 진행됩니다.

6. 담임목사
   19(화) 정오 서울 연동교회 / 녹색교회네트워크 신입교회 환영회
   19(화) 오후 2~5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민중신학의 탐구” 출강
   19(화) 오후 7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 에큐메니칼공동신학세미나
   20(수) 오전 8:30 [온라인] 환대와 온전한 포용 정기 모임]]></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15 May 2026 15:56:3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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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우리 교회의 직제와 의사결정 구조]]></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78]]></link>
			<description><![CDATA[2026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 교회 깊이알기
2026.5.13.(수) 오후 7:00시 / 최형묵 목사

우리 교회의 직제와 의사결정 구조

1. 현실 교회 구조의 상대성

한국 기독교의 교회 구조는 철저하게 위계화되어 있다. 그 위계화된 구조 안에서 능동적 주체로서 목회자와 피동적 대상으로서 평신도의 관계가 당연시되고 있고, 신도들 사이에도 일정한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가톨릭교회는 사도직의 적법한 계승자로서 성직자의 역할을 강조하고 성직자 중심의 위계적 교회구조를 갖추고 있다. 개신교는 교파마다 다양한 교회 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대부분 평신도의 대표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러한 교회 구조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장로교를 들 수 있다. 장로교는 평신도의 대표성을 반영한 당회의 구조를 갖춘 점에서 가톨릭의 성직자 중심의 교회 구조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지만, 여전히 소수의 권한을 보장하는 과점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성직자 중심의 독점체제에서 소수 대표들의 과점체제로의 변화는 진일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넓은 의미의 독점체제의 문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 교회의 구조는 시대적 산물로서 상대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다. 항구적으로 영속할 수 있는 교회 구조란 없다. 가톨릭교회는 봉건적 위계구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고, 개신교는 근대의 대의정치 구조를 구현하고 있다. 오늘날 대의정치도 과연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는 것인지 의문시된다. 교회 역시 평신도의 주체성 강화를 통한 수평적 교회 구조를 만들고 누구나 동등한 참여를 보장하는 구조를 갖추는 과제를 안고 있다.

2. 회중의 대표성을 보장하는 교회 정치 구조

한국 교회가 경직화된 교회 구조를 고수하고 있는 동안에도 에큐메니칼 세계 교회 기구들은 오래 전부터 교회 안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세계교회협의회(WCC) 등 대부분의 에큐메니칼 세계 교회 협의체들은 성직자 중심의 대표권을 지양하고 비례대표제를 통해 평신도의 참여를 보장하는 추세다. 예컨대 해당 협의체의 총회를 구성할 때 그 가맹 교단의 총대를 목사, 청년, 여성 순으로 안배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도 세계 에큐메니칼 협의체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의 교회들 가운데서마저도 그와 같은 교회 정치 구조를 갖춘 교단은 전혀 없다. 아직도 여성 안수를 인정하는 교단보다는 인정하지 않는 교단이 더 많고, 교회 정치에 목사와 장로를 제외한 여타 평신도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교단도 거의 없다. 기장이 수 년 전 소수의 평신도 대표권을 인정한 경우가 드문 사례일 뿐이다. 대체로 특정한 위원회에 전문가로서 평신도들이 참여하는 정도이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기본적으로 당회-(시찰회)-노회-총회 구조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 더해 협의체로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있다. 이 정치 구조에서 그 대표권이 사실상 특정한 연령대의 특정한 남성 목사와 장로 등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 교회의 대표권, 그 정치 구조는 불변의 정당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오늘의 추세에서 보거나 하느님 앞에서 공평한 은사의 선용이라는 신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마땅히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3. 공평한 은사의 배분으로서 교회 직제

신약성서가 반영하고 있는 사도시대 전후의 교회 직분은 비교적 단순하다. 사도시대, 곧 예수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말씀을 전파하는 사도와 주로 구제 임무를 담당하는 집사가 있었다. 사도시대 직후에는 집사 외에 감독과 장로가 혼재되어 있었다. 이후 감독은 사제를, 장로는 평신도 회중 가운데 원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물론 성서의 근거 여부만 가지고 교회 내 직분의 정당성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교회의 제도화가 불가피한 것이었다면 그 불가피한 현실 안에서 어떤 합리성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성서가 애초 지향했던 은사의 공평한 배분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인지 따져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교파의 특성에 상관없이 남용되는 직분들은 은사의 효율적 배분 수단으로서 의미를 지니기보다는 그 위계의 등급을 세분화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사실상 서열 관계를 정당화하는 직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안들이 모색되고 있다. 
우리 교회가 직분을 최소화하고 호칭을 ‘교우’로 통일한 것도 그런 시도 가운데 하나이다. 전통적인 기존 교회의 직제를 수용하면서도 직분을 공평한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운용하려는 것도 같은 뜻을 지닌다. 장로의 임기제, 또는 비례대표 원리를 적용한 장로 선출등이 그러한 예이다. 또한 대표권의 행사 방식 및 의사 결정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들도 이에 해당한다. 현재 대개 장로교의 경우 헌법상 당회(堂會)는 목사와 장로로, 제직회(諸職會)는 집사 이상의 직분을 받은 회중들로, 공동의회(共同議會)는 세례를 받은 모든 회중들로 구성된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가능한 한 전교인의 총의를 모을 수 있는 공동의회를 사실상 최고 의결기구로 재설정하였다. 만일 교회의 규모상 전교인의 총의를 상시적으로 모으는 것이 어려워 의사결정을 대의기구의 효율성에 상당 부분 의존해야 한다면 그 대의기구 자체를 기존의 직분 중심과는 달리 활동 단위 중심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 교회가 운영위원회를 둔 것도 그 예이다. 
이러한 변화의 시도들은 교회의 규모와 무관하지 않다. 대부분의 대형 교회는 목회자의 제왕적 카리스마에 의존하기 때문에 목회자와 신도들 사이의 수직적 관계가 고착되어 결과적으로 교회 구성원들은 침묵하는 다수로만 머물러 있다. 그 안에서 교회의 변화 필요성에 대한 문제의식도 희박하다. 오늘 현실에서 대형화된 교회들이 권력을 향한 욕망을 부추기는 반면, 의미 있는 변화들은 작은 규모의 교회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4. 능동적 주체로서 평신도의 자각

교회의 권위주의를 강화하는 여러 기제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교회 구성원 자체의 자각이 필수적이다. 그 자각은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문제시되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권력화 현상은 특정한 목회자들의 권력 욕망 때문에 빚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화된 교회 질서 안에서 목회자와 평신도의 공모 관계 안에서 빚어진 현상이다. 따라서 권력을 향한 공모의 구조를 해체하고 공평한 관계 형성을 향한 연대의 구조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교회 구성원 전체의 자각과 노력이 따라야 한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Wed, 13 May 2026 18:13:2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7"><![CDATA[인문교양강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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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개신교의 탈을 쓴 극우세력 대 해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77]]></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_NunaeeFOQg?si=nGcOG0WHh1dZwZ2t"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Mon, 11 May 2026 22:13:0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1"><![CDATA[토론마당]]></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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