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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천안살림교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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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천안살림교회</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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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무너진 자리에서 넓어지는 경계 - 에스겔서 47:1~23[이성철 목사 / 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27]]></link>
			<description><![CDATA[2026년 8월 2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무너진 자리에서 넓어지는 경계
본문: 에스겔서 47:1~23
이성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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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시대를 살았던 예언자였습니다.

기원전 597년, 바빌론제국이 예루살렘을 침공하면서 유다의 왕과 지도층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고,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던 에스겔도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 10년 뒤인 기원전 586년에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고 성전마저 파괴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사건은 전쟁에서 한 번 패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믿었던 땅을 잃었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왕조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흩어지면서,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설명해주던 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입니다.

에스겔은 바빌로니아의 포로 생활을 하며 이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에스겔서에는 유난히 많은 환상이 등장합니다. 골짜기에 널브러져 있던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고, 예루살렘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있는 47장에서는 성전에서 작은 물줄기가 흘러나와 마침내 큰 강을 이룹니다.

이런 환상은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스겔은 오히려 무너진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면서도, 눈앞의 현실 너머를 보며 예언한 예언자였습니다. 그 열망을 환상같은 이미지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는 본문은 에스겔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면 다시 회복될 이후에 무엇을 다시 세울 것인가. 다시 세워질 공동체는 이전과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에스겔은 이 질문을 붙들고 새로운 세계를 그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겔이 말하는 회복을 단순히 무너지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에스겔이 꿈꾸었던 것은 해방된 이후는 과거의 영광을 되돌리는 것보다는 이전과 다른 세계를 다시 세우는 일에 가까웠습니다. 무너지기 전의 이스라엘에도 이미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백성을 돌보아야 할 지도자들이 자신의 배를 채우고 약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았으며, 힘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는 현실을 고발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47장은 에스겔이 꿈꾸었던 새로운 세계를 아주 인상적인 장면으로 보여줍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데,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물이 흘러나옵니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물줄기였습니다. 

에스겔을 이끌던 사람이 손에 줄을 들고 천 규빗을 잰 다음, 에스겔에게 물을 건너보게 합니다. 한 규빗은 팔꿈치부터 손까락 끝까지 길이로 45센티미터정도 됩니다. 

처음에는 물이 발목까지 찼습니다. 다시 천 규빗을 가니 무릎까지 차오르고, 다시 천 규빗을 가니 허리까지 올라왔습니다. 다시 천 규빗을 더 가자 이제는 걸어서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습니다. 처음 성전에서 흘러나올 때만 해도 아주 작은 물줄기였는데 물은 점점 깊어집니다.

에스겔은 자신이 본 것을 환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다시 성전으로부터 시작될 생명이 흘러가면서 얼마나 풍성해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은 성전 안에 머물지 않고, 성전에서 흘러나와 광야를 지나고, 마침내 사해를 향해 갑니다.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강물이 흘러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모든 것이 살 것이다." 죽음이 생명으로 바뀝니다. 성전에서 시작된 생명이 흘러가면서 죽어 있던 것을 살리고, 사람들이 먹고 살아갈 것을 만들어내며, 아픈 것을 치료합니다. 아주 작은 물줄기에서 시작했지만 그 물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죽음의 바다까지 이르렀습니다.

12절까지는 물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13절부터 이제 에스겔은 땅을 이야기합니다. 북쪽은 어디까지인지, 동쪽과 남쪽과 서쪽은 어디까지인지 경계를 정하고, 그렇게 구분한 땅을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앞에서는 물이 경계를 넘어 흘렀는데, 그 다음으로는 오히려 땅에 선을 긋습니다. 얼핏 보면 서로 반대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두 장면을 함께 읽어야 에스겔이 꿈꾸었던 회복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두 장면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죽었던 땅에 생명이 돌아왔다면 이제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남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회복은 죽었던 것이 살아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생명이 흘러 살아난 곳에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누리며 살아갈 것인지까지 변해야했습니다. 

각 지파가 회복되어 살아갈 땅의 분배가 이어진 다음, 그 땅을 나누는 마지막 부분에 오늘 본문의 구체적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너희는 말할 것도 없고, 너희 가운데 거류하는 외국 사람들, 곧 너희들 가운데서 자녀를 낳으면서 몸붙여 사는 거류민들도 함께 그 땅을 유산으로 차지하게 하여라."

여기에서 '거류민'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가 게르입니다. 다른 본문에서 주로 ‘나그네, 이방인’이라고 표현되는 존재가 오늘 본문의 거류민, 게르입니다.

이 시기의 이방인인, 게르를 오늘날의 외국인, 난민 같은 개념으로 동일하게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고대사회에는 지금과 같은 국가도 없었고, 시민권과 국적으로 사람의 소속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제도도 없었습니다. 

게르는 대체로 자신이 속했던 친족과 지역공동체를 떠나 다른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친족과 토지는 사람을 지켜주는 중요한 보호망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은 취약한 위치에 놓이기 쉬웠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정체성 역시 혈통, 친족 만으로 설명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을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묶어준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출애굽이라는 공동의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 거류민, 이방인을 이야기할 때 이스라엘의 기억을 반복해서 불러냅니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구약의 다양한 법전은 이 기억을 꼭 상기시켰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서 안에서도 이방인을 바라보는 관점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특히 왕정시대로 나라가 생기고 통치와 제도가 생기면서 삶을 유지하고 세금을 내고 제사에 참여하는 행위들로 그것에 속한 자들과 속할 수 없는 존재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포로생활을 경험한 뒤에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경계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려는 움직임도 나타납니다. 

위기를 경험하면 경계를 좁히기 쉽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겪으며, 실존이 위태로울수록 정체성에 대해 배타적이고, 누가 우리 안에 속하는지를 더 엄격하게 정하고 싶어집니다. 그렇기에 누가 '우리'이고 누가 '그들'인지 나누는 일은 이스라엘에게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시대를 살아간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기를 살아내며 다시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고 다시 세워질 이스라엘을 그려내는 그 마지막에 오늘 본문의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너희는 거류민들을 본토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족속과 똑같이 여겨라."
"그들도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끼어서 제비를 뽑아 유산을 받아야 한다."
그들을 '똑같이 여겨라'는 말 이후 '그들도 유산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가엽게 생각하고 환대하라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동등하게 여기라고 하고, 그 동등함이 말로만 남지 않도록 실제로 앞으로 누리게 될 땅의 몫까지 나누도록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삶을 이어갈 기반이었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삶이 보장되어 있다는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 게르는 어느 날 갑자기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들도 아닙니다. 이미 "너희 가운데서 자녀를 낳으면서 몸붙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함께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의 환상에서 새롭게 달라지는 것은 그들의 존재 여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권리가 달라진것입니다.

이미 함께 살아가던 존재들이 공동체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인정되고, 본토에서 태어난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몫을 갖게 됩니다. 에스겔이 무너진 자리에서 그린 새로운 세계는 오히려 생명이 살아나고 권리와 경계가 넓어지는 세계였습니다.

경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에스겔은 땅의 경계를 지파별로 아주 자세하게 다시 그립니다. 다만 새롭게 그어진 경계 안에서 온전한 권리를 가진 사람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는 것은 모든 경계를 막연히 없애는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어떤 경계를 만들고 있는지 살피고, 그 경계 안에서 누구의 생명과 권리가 온전히 보장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에스겔이 새롭게 그린 경계 안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의 몫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합니다. 하지만 누가 차별을 받고 있는지, 무엇을 차별이라고 할 것인지를 두고서는 생각이 수없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수 많은 차이 속에서 살아갑니다. 삶의 조건과 살아가는 방식도 서로 다릅니다. 그 차이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차이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차이가 서로 다른 권리와 삶의 조건으로 이어지기 시작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당연한 권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누군가의 인정과 승인이 필요한 일이 됩니다. 그렇게 차이는 권리의 차이가 되고, 권리의 차이는 다시 힘의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우리곁의 가장 가까운 나그네, 한국사회의 이주노동자의 현실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7월 1일, 아산의 KTX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미얀마 출신 이주노동자 아웅민우 님이 작업 도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림교회도 함께 유가족을 위로하고 고인을 추모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웅민우 님은 한국사회 바깥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용할 철도를 만드는 현장에서 일했고, 이곳에서 노동하고 생활하며 이미 이 사회를 함께 이루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이주노동자는 고용허가제를 통해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 아래에서는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만으로 자유롭게 사업장을 옮기기 어렵고,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는 사유와 횟수에도 제한이 있습니다.

일터가 위험할 때 노동자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선택 가운데 하나는 그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떠날 자유가 충분하지 않다면 위험을 거부할 힘도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힘들고 위험한 노동을 하청과 비정규 노동에 넘겨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위험의 상당 부분을 이주노동자들이 감당하고 있습니다. 노동의 외주화가 위험의 이주화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체류자격 때문에 일자리에 제약을 받는 이주민들의 상황은 더 열악합니다. 뚜안 님은 유학생으로 한국에 와 대학을 졸업한 뒤 구직비자로 체류하며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직비자로 일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고, 생계를 위해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일하던 중 출입국 단속을 피해 숨어 있다가 추락해 돌아가셨습니다.

올해 노동부는 산업현장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야", "너"라고 부르지 말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자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중요합니다. 한 사람을 익명의 노동력으로 취급하지 않고 온전한 존재로 대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름을 제대로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의 권리를 제대로 인정하는 데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안전하게 일할 수 있어야 하고, 위험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아침에 인사를 하고 나간 일터에서 저녁에 다시 집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아웅민우님은 정말 이례적이게도 하청과 원청에게 사과를 받고 산업재해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이주노동자의 죽음은 그 원인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2024년 연구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동안 출입국ﾷ외국인정책본부에 사망이 신고된 사람 가운데 사망 당시 미등록 상태였거나 노동 가능한 체류자격을 가진 이주노동자는 3,340명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산업재해로 공식 인정된 사망은 137명에 그쳤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주노동자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곳에서 태어나 함께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권리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차별은 노골적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배제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안정하게 일하는 것이 당연하고, 어떤 사람은 이동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당연하며,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존재와 관계를 계속 설명하고 증명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데서도 차별은 지속됩니다.

에스겔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누구에게 조금 더 친절하고 환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함께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누구의 권리는 여전히 온전한 권리로 인정되지 않고 있는가, 그 몫을 나누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 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무너진 자리에서 꿈꾸었던 회복은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렇게 살아난 생명들이, 함께 살아갈 세계를, 새롭게 만드는 데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에스겔의 마지막은 새롭게 만들어질 성읍의 이름은 ‘여호와 샴마’ 라고 하고 마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신다’라는 말입니다. 
그 새로운 성읍에서는 나그네에게도 살아갈 자리와 몫이 주어졌습니다. 더 많은 이들의 몫을 함께 넓혀가는 것이 에스겔이 보여준 진정한 회복이었습니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그려갈 현재와 미래에서 다른 이들의 몫을 늘려갈 때에 '여호와 샴마'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심을 믿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23 Aug 2026 13:34:1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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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34 / 8.23.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26]]></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dX0-e6xnX0s 

2. 다음 주일 오후에는 여신도회 주관 살림의 날(아나바다장터)이 열립니다.

3. 교회 수련회 및 주요 일정입니다: 
   교회학교 나들이(9/5) 용인 에버랜드, 청년회 수련회(9/11-12), 전교인 수련회 11월중 예정, 남신도주일(9/20) 이호택 선생(‘피난처’) 초청 신도주관 예배.

4. 담임목사
   27(목) 오전 10시 서울 민주화운동기념관 / 한국교회인권센터 운영이사회
   27(목) 오후 3시 서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 에큐메니칼 포럼 “‘무지의 충돌’을 넘어 -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의 평화로운 공존을 향하여” 토론]]></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21 Aug 2026 11:10:2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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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2026.8.16.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25]]></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8/song20260816.mp3"][/audio]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성가대]]></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16 Aug 2026 16:19:4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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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자기를 비우는 진실함 - 누가복음 18:9~14[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24]]></link>
			<description><![CDATA[2026년 8월 1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자기를 비우는 진실함
본문: 누가복음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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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합니다. 복음은 그렇게 당연한 세계, 당연한 상식을 되돌아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본문 말씀은 누구나 과오를 범할 수 있음과 동시에 그 과오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를 대비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비유라기보다는 실제 현실을 극적으로 대비하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당당하게 서서 자기가 행한 행실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기도합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돈을 밝히고, 불의를 행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을 뿐 아니라 저기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않다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을 자랑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18:10~12). 반면에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그저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18:13).
이 말씀을 마친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 가운데 의롭다 인정받고 자기 집으로 간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리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18:14).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단순하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바리새파 사람은 잘난 체했기 때문에 의롭다 인정받지 못했고 세리는 전적으로 겸손했기 때문에 의롭다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히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우리는 두 사람이 처한 정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는 그 사람의 처신과 믿음으로 보자면 거짓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 내용은 그 자신에게는 사실일 뿐 아니라 진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리새파 사람을 떠올리면 그저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떠 올리지만 당대 사람들에게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윤리적으로 모범적이었고, 종교적으로 헌신적이었습니다. 기도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일주일에 월요일과 목요일 두 번 금식하는 관례를 엄격히 지켰습니다. 또한 통상 곡식과 올리브 그리고 포도를 수확한 후 드리는 십일조 관례를 넘어 박하와 운향의 판매 수입 등 모든 수입의 십일조는 물론 심지어는 구매한 물품의 십일조까지 드리기도 했습니다. 생산자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을까 염려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모범적이고 헌신적이었던 만큼 하나님 앞에서도 감사할 조건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의 기도 또한 진실합니다. 세리는 당대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받았고 따라서 상종 못할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세리가 고백한 대로 별로 감사할 조건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리라면 경제적으로는 넉넉했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하급 세리의 경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엄밀히 말해 국가 관리라기보다는 일종의 청부업자들이었습니다. 일정한 지역의 유력자가 입찰에 응하는 방식으로 징세권을 얻어내면 하수인들을 두고 세금을 거두어들여 일정액을 상납한 것이 당대 관례였습니다. 단계별로 임의적 징수와 착복이 당연하게 이뤄졌지만, 아래로 갈수록 수입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거의 도둑이나 강도 취급했습니다. 그러니까 하급 세리들은 세상의 따가운 시선은 시선대로 받고 자기 손에 쥐는 것 또한 변변치 않았을 테니, 감사할 조건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비유의 주인공이 하급 세리인지 상급 세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급 세리였다 하더라도 늘 불의한 구조에 일조한다는 자책감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세리의 기도는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바리새파 사람이나 세리나 모두 각자 자신의 처지에서 보면 진실을 말하고 있는 셈인데, 어째서 바리새파 사람은 의롭다 인정받지 못하고 세리만 의롭다 인정받았을까요?
그것은 자기 세계에 집착하며 지키며 경계를 짓느냐 않느냐 하는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누리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것이 자랑스럽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만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별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바로 그 조건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갈라 경계를 짓습니다. 나아가 나는 옳고 나와 다른 사람은 그른 것으로 단정합니다. 자기의 가치 기준, 자기 의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고 세상을 그에 따라 질서 지으려고 합니다. 의인의 세계, 정상인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로부터 배제되는 차별 대상과 비정상인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질서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기 세계에 집착하거나 내세울 만한 어떤 조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세리가 자신의 처지를 돌아볼 때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이 저마다 금을 그어놓은 경계 안 어디에도 들어설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주류 세계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자기의 가치 기준, 자기 의에 따라 그 누구를 판단하고 세상을 질서 지을 만한 어떤 조건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멀찍이 서서 기도하였을까요? 성전 뜰 안에 들어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호소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 차이 때문에 바리새파 사람은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었고, 세리는 의롭다 인정받습니다. 자기의 업적과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느냐 않느냐에 따라 사람은 세상을 보는 태도가 달라지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헌신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된 듯했지만 자기의 판단으로 세상을 진단하고 다른 사람을 질시했습니다.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나마 동정심을 지니고 있었다면 교정과 교화의 대상으로 간주하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치부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신의 밥벌이를 위해 타인에게 거북스러운 일을 했지만, 자신과 같이 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더 많은 사람이 도덕적으로 의롭게 되고 종교적으로 신실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 경계 밖에 있는 죄인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세리와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타인에게 거북스러운 일을 해야만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와 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삶의 구조가 흔들리고 정말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겉으로 드러난 태도와 행위 이면의 진실을 그렇게 간파하시고, 이 극적인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설파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편에 가까울까요?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가 워낙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어서 그 양극단 가운데 어느 한편이라고 쉽사리 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잘 나가는 사람으로 잘난 체하는 것도 아니고, 정반대로 그렇게 가슴을 치며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해야 할 처지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누구나 바리새파 사람과 같은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삶의 환경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 사회는 능력주의 신화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자기 경영의 주체가 되어 삶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구호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주체적 인간으로서 자각을 뜻한다면 다행이지만, 그 구호는 사실상 사회적 공동체를 지속하는 데 필수적인 공동의 책임과 연대를 배제한 가치를 나타낼 뿐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참 아름다운 말처럼 들리지만, 이는 그 독단적 삶의 원리를 집약하는 구호가 되었습니다. ‘사회란 없다, 오로지 스스로 책임져라.’ 이와 같은 가치를 대변할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독단은 더욱 심각합니다. 자기의 의로움만을 주장하는 거친 목소리 가운데서만 그 독단이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만의 안락한 선민의 공동체에 안주하고자 한다면 이 또한 그 독단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르면 우선 ‘이단’으로 정죄하는 한국교회의 습성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타자를 정죄하고 배제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낯선 이를 환대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미숙한 교회의 태도는, 교회 역시 그 독단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자기 의에 빠져 타인을 정죄하는 방식으로는, 복음이 구현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건전한 신앙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진실로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고 자비를 구하는 태도가 아니면, 진실한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그 마음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겠다고 하지 않고서는 진실한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고, 과연 스스로 하나님 앞에 겸허한 자세로 임하고 있는지, 또한 이 사회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공적인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겸허한 자세로 임하고,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믿고 구현하는 데서 성취됩니다. 남을 정죄하는 데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의 삶을 구현하는 데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현되는 진실을 새겨야 합니다. 우리 모두 그 신실한 믿음의 대열에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16 Aug 2026 14:47:2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33 / 8.16.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23]]></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4VRiN9U4ZE 

2. 다음 주일 공동예배는 이성철 목사가 인도와 말씀을 맡습니다.

3. 교회 수련회 및 주요 일정입니다: 청년회 및 교회학교 수련회 9월중, 전교인 수련회 11월중 예정, 남신도주일(9/20) 이호택 선생(‘피난처’) 초청 신도주관 예배.

4. 담임목사
   18(화) 오후 4시 서울 기독교회관 / 박형규 목사 10주기 추모예배
   19(수) 오전 8:30 [온라인] 환대와 온전한 포용 모임
   19(수) 오후 6시 서울 / 김찬국 교수 17주기 추모 모임]]></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14 Aug 2026 16:05:4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서시”(2026.8.9.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22]]></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8/song20260809.mp3"][/audio]
“서시”/ 성가대]]></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09 Aug 2026 15:59:0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오늘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 - 출애굽기 19:1~6[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21]]></link>
			<description><![CDATA[2026년 8월 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오늘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
본문: 출애굽기 19:1~6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E6GGNW2YN1o?si=5aCWY3VH2B8o4Kyt"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어떤 민족이나 공동체가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는 선민의식은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지켜나가기 위한 특별한 의식입니다. 그것이 주체성을 분명히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동반할 때 긍정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배타성을 강화하게 될 때 부정적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선민의식’이 긍정적 의미로서보다는 부정적 의미로 더 널리 통용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 사건을 전하는 본문 말씀은, 그 선민의식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지 일깨워줍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이 될 것이며, 나아가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는 야곱 가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19:3b~6)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 될 것이라 합니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신다는 말씀은 오경 안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주제일 뿐 아니라 성서 전반을 통하여 환기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 문제를 두고 씨름해야 할 만큼(로마 11:25~32)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도 환기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배타적 선민의식, 그리고 오늘 그와 다르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배타적 선민의식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여겨지고 있지만,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다는 점입니다(신명 7:7~8). 그것은 이스라엘의 어떤 우월한 능력이나 장점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뤄진 선택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선택받은 백성은 그에 상응하는 몫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방적 계약이 아니라 쌍무적 계약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그 과제를 감당하지 못하였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그 사명을 저버린 백성을 두고 ‘로암미’, 곧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선포합니다(호세 1:9).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진실이 망각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기억되었지만, 선택받은 백성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망각되었습니다. 진실을 진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편한 대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실존적 정황을 말해 줍니다. 
본문 말씀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선민이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언약이 무엇일까요? 본문 말씀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건을 전하는 이야기의 첫머리입니다. 언약이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십계명을 서두로 하여 일종의 법전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계약법전(출애 20:22~23:19)입니다. 구약성서는 이 밖에도 신명기법전(신명 12~26장), 성결법전(레위 17~26장)을 포함하고 있는데, 계약법전은 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법전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정착시대 초기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만, 성서의 문맥에서는 출애굽 여정 가운데 시내산에서 받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계약법전의 정신을 집약하고 있는 것이 그 첫머리에 나오는 십계명(출애 20:1~17)입니다. 그것은 이집트의 억압에서 해방된 백성, 곧 자유민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합니다. 그 어떤 것에도 예속되지 않고 해방된 백성으로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그 도리는 여러 관계의 차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크게 보면 첫 번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지켜져야 할 도리로서 종교적 차원을 함축합니다. 두 번째는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리로서 윤리적 차원을 함축합니다. 물론 더 세분화해서 말하면,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리는 직접적인 인간관계의 차원과 인간과 사물과의 차원을 동시에 함축합니다. 계약법의 정신은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져야 하는 도리와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져야 하는 도리를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신실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야 할 정의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정의는 그 두 가지 차원이 온전히 이뤄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충족될 때 해방된 자유민으로서 백성의 삶이 온전히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을 십계명은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계약법전은 그 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규율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법전들 모두 그 내용과 형식상 고대 근동의 대표적 법전들(주전 3,000여 년경 수메르의 관습, 주전 7세기의 함무라비 법전)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고 고유한 역사와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출애굽이라는 해방의 사건이 기본 출발점입니다. 고대의 모든 법전이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에 대한 보호 규정을 포함하고 있지만 대개 기존의 위계적 사회질서를 온존하는 범위 내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반면 성서의 법전은 기본적으로 백성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한 형제라는 전제를 분명히 할 뿐 아니라 특별히 약한 사람들에 대한 보호를 하나님의 친권 행위라는 차원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율법은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성서의 법전이 지닌 그와 같은 성격은 이집트에서의 억압과 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경험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법이 함축하고 있는 정의를 이룰 때, 이스라엘 백성은 진정한 선민이 되어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라고, 본문 말씀은 선포합니다. 제사장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을 가교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동시에 사람들의 염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역할을 맡은 사람입니다. 선민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정의를 온전히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그 진실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망각되었습니다. 다들 하나님이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만 기억하였을 뿐, 진정한 선민으로서 해야 할 도리는 망각하였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 곧 왕과 제사장들도 그 진실을 망각했고, 백성들도 그 진실을 망각했습니다. 그 진실이 망각되었을 때 그 진실을 일깨운 사람들이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제사보다도 정의를 외쳤습니다. 제사에는 열심이지만 정의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질타했습니다.

오늘 현실에서도 그 진실은 망각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민족들 사이에 이뤄야 할 정의와 평화의 사명을 망각하고, 오히려 정의와 평화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그대로 동일화될 수 없는 외래 집단 유대인이 거꾸로 원주민을 점령하고 말살하는 참혹한 폭력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참혹한 사태를 정당화하는 데 성서의 선민 논리가 동원되고 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오도된 선민의식은 이 땅에서까지 착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극우 세력의 광기 어린 광장 집회에 어째서 태극기와 더불어 성조기, 그리고 다윗의 별이 그려진 이스라엘 국기가 등장할까요? 오도된 선민의식의 계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 팔레스타인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의 진실을 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도된 선민의식은 세상의 근심거리일 뿐입니다. 정의를 해치고 평화를 해칠 뿐입니다. 정의와 평화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안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기초 위에서 가능합니다. 자신들만 옳다고 생각하며 타인을 배척하는 의식과 태도로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 태도로는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역행하는 것입니다. 오도된 선민의식이 초래하는 결과입니다. 교회가 이익집단이 되어 버리고 권력집단이 되어 버렸다는 사회적 지탄을 언제까지 받아야 할까요? 그렇게 지탄받는 교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언약을 지키는 백성이라야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택받은 백성이라 여긴다면 자신의 잘남을 내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겸허하게 이 땅 위에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데 헌신해야 합니다. 나의 나됨은 불가불 타인과의 관계 안에 있다는 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서는 철저하게 그 점을 강조합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의 처지에 함께 하고 그들의 처지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라고 끊임없이 일깨웁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가치 또한 그와 같습니다. 한국 사회는 놀랄 만큼 큰 자랑거리를 지니고 있는 것과 동시에 역시 놀랄 만큼 부끄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놀라운 발전과 전 세계적인 한류의 열풍,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세계적 추세 가운데서도 그 보루로서 자랑스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 그리고 그에 기생하는 정치적 양극화, 그리고 혐오와 배제 현상 또한 만연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일까요? 특별히 8·15해방 81주년을 앞두고, 평화·통일주일로 지키고 있는 오늘 우리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동학 민중운동 이래 줄기차게 이어진 정신을 다시 환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수운(水雲) 최제우 선생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정작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자기밖에 모른다고[各自爲心] 탄식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이 어찌 남의 나라를 침략하느냐 개탄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모시는 길[侍天主]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해월(海月)에게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 정신[事人如天]으로 이어졌고, 손병희에 이르러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정신[人乃天]으로 이어졌습니다.
 3·1독립선언은 숭고한 뜻을 만천하에 선포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 지난 수천 년 갈고 닦으며 길러온 인도적 정신이 이제 새로운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는구나.”
해방 정국에서 김구 선생은 아름다운 나라의 미래를 소망했습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한국 현대사가 겪었던 그 경험의 반전을 이뤄내야 하지 않을까요? 약자의 존엄한 삶을 보장하는 정의와 사회적 연대, 억압에 맞서 싸워 일궈낸 민주주의와 인권의 고양, 이념과 체제의 대립을 넘어선 평화의 실현, 그것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처구니없는 배타의 논리로 위기의식을 조장하고 나라 걱정하는 듯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삶의 위기요, 그 위기로 강퍅해져 가는 마음의 질병입니다. 
교회가 어디에 마음을 쏟아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마음을 쏟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정녕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랑을 실천하고 그 위에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데 몸과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대열에 함께 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태도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09 Aug 2026 13:28:5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32 / 8.9.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20]]></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QX7X6NPHq_o 

2. 지난 주일 공동의회 결과, 
   ① 7월 재정보고(이주노동자차별철폐네트워크 지원 보고 포함),
   ② 청년회 및 교회학교 수련회 9월중, 전교인 수련회 11월중 예정,
   ③ 향교마을회관 증축에 따른 경계 정리 상황 보고,
   ④ 9/20 남신도주일 외부강사로 ‘피난처’(난민관련) 대표 이호택 선생 초청 예정,
   ⑤ 담임목사 휴가 일정(8/5~7, 11~13) 및 외부 초청 일정(9/13 일본기독교단 코토니주오도오리교회[琴似中央通教会], 10/18 향린교회) 보고하였습니다.

3. 오늘 예배후 청빙준비위원회 모입니다.

4. 오늘 오후 민촌 이기영 선생 42주기 추모제가 우리 교회에서 열립니다.

5. 담임목사
   11(화) 오전 10:30 [온라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평화대회 평화선언문 초안위원회 
   11(화)~13(목) 휴가 

6. 교회당 사용
   8/9(일) 오후 3시 교회에서 ‘민촌고향길 탐방’ 출발 
           오후 5시 교회당에서 민촌 이기영 선생 42주기 추모제]]></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Tue, 04 Aug 2026 15:36:4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우물가의 여인처럼”(2026.8.2.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19]]></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8/song20260802.mp3"][/audio]
“우물가의 여인처럼”/ 성가대]]></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02 Aug 2026 18:00:2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마음으로 전하는 말 - 예레미야서 1:4~10[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18]]></link>
			<description><![CDATA[2026년 8월 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마음으로 전하는 말
본문: 예레미야서 1:4~10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T_avGnK_7YY?si=E5ffrybBjG68MCE7"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늘 뭔가를 말해야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은 언제나 가벼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공적 책임을 동반하는 사안과 관련하여 그 몫이 주어질 때 그 무게감은 더합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은 그 몫을 부여받는 예언자의 심경이 어떠한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대예언자 세 사람, 곧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모두가 비범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예언자를 꼽는다면 아마도 예레미야일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몸소 가장 극적인 고난의 삶을 살았고 그 메시지 또한 심각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입으로 외친 선포 이전에 고난의 삶 자체가 이미 무거운 메시지라고 할 만큼 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유다왕국이 멸망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격랑기, 혼미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자 한 인간의 내면세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 예언자입니다. 

본문 말씀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상황을 전합니다. 예언자의 소명 기사입니다. 모든 예언서에는 그 첫머리에 소명 기사가 나옵니다. 그것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 예언자들의 특성을 잘 드러내 줍니다. 정치 지도자로서 왕이나 종교 지도자로서 제사장이 세습으로 그 역할을 이어받는 것과는 달리 예언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름으로 역할을 맡습니다. 예언자는 전적으로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지도자입니다. 그러기에 예언자들은 그 출신이 다양합니다. 귀족, 제사장, 농부, 목자 등 다양합니다. 본문 말씀의 주인공 예레미야는 지배계층에서 배제된 제사장 가문 출신입니다. 

예레미야가 소명 받는 장면을 전하는 본문 말씀은,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는 장면입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1:5)
“태어나기도 전에” 예언자로 세웠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예언자로서의 운명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깊다는 것을 나타내지만, 정황을 헤아려 보자면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여된 어떤 조건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서의 첫머리는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 아나돗 마을의 제사장 출신인 힐기야의 아들”(1:1)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여된 운명적 조건을 말합니다. 아나돗은 솔로몬왕 때 파면당한 제사장 아비아달이 추방당한 곳입니다. 솔로몬왕은 훗날 사두개파의 조상으로 알려진 사독을 아비아달 대신 제사장으로 임명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나돗은 권력으로부터 배제당한 곳입니다. 그 아비아달 제사장의 후손으로서 예레미야는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자신의 가문과 그 땅의 기풍을 체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예언은 항상 당시의 역사적 상황, 그리고 예언자 자신의 경험과 인격을 매개로 합니다. 아나돗의 몰락한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서 예레미야의 인격 형성에 조상들이 처했던 상황이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예언자 자신이 자각하기 이전의 역사적 유산이 그 자신에게 계승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자신의 삶이 있기까지 역사의 무게, 그 역사의 무게감을 받아들인 삶의 무게를 함축합니다. 지금 예언자로 소명 받는 예레미야는 기존의 체제에 대한 저항의 역사 앞에서 부름을 받고 있으며, 그 역사의 무게를 자신의 삶으로 감당할 것을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예레미야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두 번째 대목입니다. “아닙니다.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잘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1:6)
언뜻 보기에 의외의 대답입니다. 이 의외의 대답 가운데 예언자의 전형적 특성이 드러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소명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것은 마치 모세의 태도를 연상시킵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억압받는 백성을 해방하라는 하나님의 소명 앞에서 말이 어눌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고 답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말 잘하는 그의 형 아론을 대변인으로 내세웁니다.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제시해 주니 더 이상 발뺌하지 못하고 모세는 마침내 그 소명을 받아들입니다(출애 3:1~4:11).
예레미야는 말도 못하고 어리기 때문에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어리다는 것은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어리석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생애를 정확하게 연대기로 구성할 수는 없지만, 대략 주전 645년경 태어나 예언자로 부름받은 때가 주전 대략 627년경이라 추정한다면, 그야말로 약관이기는 합니다. 그렇다면 어리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기에 아직 경륜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볼 것 같으면 아직 어리석다는 것으로 새겨도 좋을 것입니다. 
예언자는 점쟁이가 아니라 대변인을 뜻합니다. 말 잘하는 사람이 맡는 몫입니다. 그 몫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 말을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상황은 확실히 의외의 사태입니다. 모세에게서, 그리고 예레미야에게서 나타난 이 현상은 사실 예수님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예상하고 ‘잔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했습니다(마가 14:36). 
위대한 인물들의 일관된 태도에서 중요한 진실을 확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며 끊임없이 자기성찰 하는 진정한 위인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감당하고자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취할 수밖에 없는 태도입니다. 지금 예언자 예레미야가 이렇게 마치 발뺌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감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인정하고 돌아보는 데서 비롯된 태도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의 역사적 무게감을 확실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오히려 정말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언제나 함께하며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시겠다고 합니다(1:7~8).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세 번째 대목입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겠다.”(1:9~10)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예 당신의 말을 예언자의 입에 맡기고 계십니다. 어떻든 예언자는 하나님을 대변해서 선포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아예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을 예언자의 입에 넣어 준다는 표현은, 이 예언자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태도, 하나님의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의 태도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들이 온갖 말재주로 현란한 말들을 꾸미고 선포하는 것과 전혀 차원이 다른 태도를 말합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예언자의 태도를 말합니다. 
말의 위력이 어디에 있는지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말의 힘은 그 현란함에 있지 않고 진실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그의 입을 통해 선포된 말을 통해 진실과 오류를 분별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달변이어서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눌변이 훨씬 설득력이 있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말은 말 그 자체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더불어, 그 진실을 체득한 삶과 인격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온갖 기인행각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말로써만이 아니라 몸소 삶으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표했습니다. 어눌한 말솜씨를 기인행각으로 보완한 것은 아닙니다. 삶으로 진실을 드러내는 그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눌하다고 고백했던 것과 달리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말씀들을 선포했습니다. 때로는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절규하기도 했지만(예레 20:14~18), 정말 사람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새 언약의 말씀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예레 31:31~34).

이 예언자의 소명 체험이 도대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늘 마음속으로 새기지만, 설교의 가장 첫 번째 청자는 바로 설교자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자가 말씀의 의미를 깨우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청중들에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 점에서 본문 말씀은 설교자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말씀으로,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다음으로 본문 말씀은, 수없이 현란한 말들과 가식적인 태도로 자신을 드러내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오늘 삶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비수와도 같은 말씀입니다. 일상의 삶에서의 소통방식이 그렇거니와, 사람들의 일상의 삶을 지배하는 여러 매체를 통한 소통의 방식이 저마다의 내적 성찰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실이 소통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주장만이 횡행하는 시대입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궤변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오죽하면 ‘팩트체크’가 진실을 대신하는 시대가 되었을까요?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언젠가 이야기했듯이 깊은 생각 끝에 이른 견해로, 본문 말씀을 대하면서 다시 환기합니다. 머리에서 입술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말,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 입술로 나오는 말, 머리에서 오장육부를 돌아 온몸으로 표현되는 말, 머리에서 오장육부를 돌고도 어떻게 표현되는지 알 수 없는 말, 이렇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머리에서 입술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말은 자기 생각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고 사실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에 가장 선명한 언어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꼭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상처를 입히는 말은 이런 말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머리에서 가슴을 통해 입술로 표현되는 말은 성찰을 동반한 말로써 성찰을 동반한 만큼 상대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때로 모호할 수도 있고 어눌할 수도 있지만, 상대에게는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말입니다.
셋째 머리에서 오장육부를 통해 온몸으로 표현되는 말은 세 치 혀끝과 짧은 입술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야말로 진정한 말일 것입니다. 행동으로서의 말, 삶으로서의 말입니다. 이 말은 때때로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말하는 사람의 언행일치를 보여주는 진정한 말입니다.
넷째 머리에서 오장육부를 돌고도 어떻게 표현되는지 모르는 말은 일종의 신비의 차원입니다. 나도 모르고 사실은 내 앞의 상대에게 표현되지는 못했지만 어딘가에 뿌려지는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알고, 하나님이 압니다.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람은 끝끝내 알지 못할지 모르지만 어딘가에 영향을 끼치는 말입니다. 표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는 그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말이며, 내 삶의 흔적입니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시편 19:3~4). 
대음희성(大音希聲) 대상무형(大象無形),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 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통합니다. 그게 도(道)라는 경지입니다(老子, 41). 그 경지는 신비의 차원이니 우리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마음으로, 삶으로 진실을 말하는 것은 할 만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부름과 진실 앞에 떨리는 마음으로 임했던 예언자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태도, 서로 진실을 나누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 사이에서의 진실한 태도를 일깨워줍니다. 
오늘 우리는 끊임없이 진실을 외면해야만 오히려 마음 편히 살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하나님을 믿는 삶이 그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면 그 길에서 도망가고 싶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래도 진실한 삶을 살겠다고, 그 진실 앞에 자신을 내맡기겠다고, 내 삶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겠다고 다시금 다짐하도록, 본문 말씀은 우리를 일깨웁니다. 
우리 모두 그 말씀의 뜻을 새기며 진실한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02 Aug 2026 16:02:2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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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31 / 8.2.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17]]></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wZbAtWo2S34

2. 오늘 예배 후 월례 공동의회가 열립니다(안건: 7월 재정보고, 주요 일정 점검).

3. 다음 주일 예배후 청빙준비위원회 모입니다.

4. 8월 예배 및 봉사 담당안이 준비되었습니다.

5. 담임목사
   3(월) 오후 3시 서울 민주화운동기념관 / 2026 민주화운동 기획전 “가장 낮은 곳에서 울린 종소리, 민주주의를 위한 기도”(전시 기간: 8.4~10.4) 개막식 참석
   5(수)~7(금), 11(화)~13(목) 휴가 

6. 교회당 사용
   8/9(일) 오후 3시 교회에서 ‘민촌고향길 탐방’ 출발 
           오후 5시 교회당에서 민촌 이기영 선생 42주기 추모제]]></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31 Jul 2026 16:16:1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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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여호와 우리 주여”(2026.7.26.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16]]></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song20260726.mp3"][/audio]
“여호와 우리 주여”/ 박영옥 인성민 교우]]></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26 Jul 2026 15:52:2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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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바로 보고, 바로 말하고 - 요한복음 9:1~7[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15]]></link>
			<description><![CDATA[2026년 7월 2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바로 보고, 바로 말하고
본문: 요한복음 9:1~7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LDkz5Il7zp4?si=tIqokMZQ2g1HmGEu"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편견에 휩싸여 있을까요? 예수님의 사역은 그 편견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일행과 함께 길을 가다가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9:2) 
이 물음은 당시로서는 명백한 하나의 세계관, 가치관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 아니 대개 전근대 사람들은 인간의 질병이나 장애를 죄의 결과로 이해했습니다. 질병이나 장애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당시 상식에서 병자나 장애인은 동시에 죄인을 의미했습니다. 육체적 질병이나 장애를 지닌 사람은 그렇게 징벌받을 만한 죄를 저지른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은 동시에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도 고통받고 소외되었습니다. 
전근대 사회에서 질병과 장애를 지닌 사람은 사회와 격리되는 경우가 흔했고, 심지어는 강제적으로 제거되는 야만의 역사도 있습니다. 교회 역시 그와 같은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습니다. 20세기 들어서야 비로소 인류는 보편적 인권 개념에 따라 장애인의 권리를 인정하게 되었지만, 오늘날이라고 해서 전근대적인 편견이 완전히 극복된 것은 아닙니다. 소위 능력 있는 사람은 뭔가 그럴 만한 자질을 애초부터 갖추고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뭔가 처음부터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상식은, 질병이나 장애가 죄의 결과라는 과거의 편견이 여전히 극복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된 사연이 누구 탓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은 바로 그런 편견에서 비롯됩니다. 당시로서는 특별한 질문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상식적인 질문입니다. 그런 편견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지닌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죄인으로 낙인찍혀 있습니다. 이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죄 때문에 그런 장애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궁금한 것은 그것이 부모의 죄 탓이냐, 아니면 자신의 죄 탓이냐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지닌 사람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면 어머니 뱃속에서 무슨 죄를 저질렀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질병이나 장애가 죄의 결과라는 편견은 그렇게 얼토당토 않는 물음까지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만듭니다. 한마디로 장애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처지는 안중에 없습니다. 질병과 장애를 안고 있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따라서 그에게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환자이기 이전에 죄인으로 봅니다. 질병을 안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보기 이전에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저질렀을까 생각합니다. 고통에 대한 공감 이전에 정죄부터 합니다.

그 편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께서 답하십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9:3a) 
예수님의 이 대답은 유대인들의 편견, 고정관념을 무너뜨립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해야 하는 물음 앞에서, 그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피함으로써 그 물음을 무가치한 것으로 돌려버립니다. ‘쓸 데 없는 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신 것입니다. 이런 답변 방식은 사실 예수님께서 늘 쓰시는 방식입니다. 편견과 고정관념을 일축하면서 문제의 초점을 다른 차원으로 돌리는 방식입니다. 예수께서는 터무니없는 사회적·종교적 편견을 그렇게 무너뜨립니다. 장애가 어째서 죄의 결과냐고 일축하신 것입니다. 이는 더 이상 장황하게 말할 가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얼토당토 않는 물음에는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으시면서, 그 장애의 의미를 밝히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9:3b)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일부러 안겨주셨다는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그 장애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겪고 있는 장애로 인해 일어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봐라, 이 사람이 겪고 있는 장애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낸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 의미는, 그 장애를 겪는 사람에게 지금 예수께서 하고자 하는 일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그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지 않고 그 사람이 겪고 있는 불편과 고통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그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곧바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앞을 볼 수 있도록 치유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침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연못에서 씻게 함으로써 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지금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얼토당토 않는 편견에서 비롯된 정죄가 아니라 그에게 다가서는 것이며 그가 장애를 극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 두 번째 의미는, 지금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들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질병과 장애가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의 불편과 고통은 안중에 없고 자신들이 의롭고 완전한 것으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은 죄인이요 자신들은 의인이라는 태도입니다. 그 사람의 불편과 고통은 자신들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바로 불편과 고통을 겪는 사람을 주목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 사람을 주목하는 것은 곧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장애를 지닌 사람은 뭔가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모든 사람 역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환기해 줍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불완전한 비정상인이요,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완전한 정상인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장애를 겪는 사람을 주목함으로써 그 상식을 파기하도록 일깨우십니다. 스스로 정상인이라고 생각하고 의롭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장애인은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환기해 주는 거울이요 빛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누구나 불편한 상황에 처하고 누구나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다는 진실을 근본적으로 깨달아야 새로운 삶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구원의 현실에 다가섭니다. 자신이 잘났기에, 자신은 완전하기에, 자신은 죄가 없기에 불편함 없이 살아간다고만 생각하면 새로운 삶의 관계 그 구원의 현실은 맛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눈먼 사람이 눈 뜬 사건을 인정하지 않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두고 예수께서는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눈먼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9:39 이하). 불편함과 고통스러움을 겪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곧 자신에 대한 배려일 수 있다는 진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말씀의 주인공 눈먼 장애인은 사람들에게 그 배려를 일깨우고 독려하는 거울이요 빛입니다. 그는 그렇게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이어 이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 사건의 주인공을 둘러싸고, 모세의 전통을 고집하는 유대 바리새파 사람들의 낡은 편견과 하나님을 드러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전망이 갈등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9:13 이하). 편견에 사로잡힌 이들이 얼마나 완고한지 잘 드러납니다. 오늘날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는 이들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이어 극적인 대비 가운데 이야기는 결론에 이릅니다. 보지 못하다가 눈을 뜬 사람은 갈등과 대결의 위기를 벗어나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진정한 믿음의 경지에 이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9:39) 
전복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9: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9:41)
눈이 멀었지만 새로 눈을 뜬 사람과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지만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마땅히 보는 사람과, 그 앞에서도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대비입니다. 편견과 고정관념을 떨친 사람과 여전히 그 편견을 고집하는 사람의 대비입니다.
캄캄한 어둠 가운데 있었던 사람에게 빛은 희망입니다. 그러나 어둠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이 세계의 전부인 양 착각하는 사람에게 빛은 혼란이며 재앙입니다. 낡은 편견을 벗어던진 사람에게 새로운 세계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낡은 편견을 고수하는 사람에게 그 세계는 혼란이며 불안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눈뜬 이야기는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 이야기 자체가 예수님의 초능력을 과시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로 인한 고통을 겪는 사람이 극적으로 그 고통에서 해방된 이 사건은, 그 고통을 가중하는 세간의 편견을 무력화함으로써 오히려 눈 뜨고도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장애는 그 자체로 고통이기보다는 장애로 여겨지는 그 현상에 대해 편견으로 대하는 사회적 시선, 그리고 그것을 예외적인 어떤 것으로 돌려버리는 사회적 질서로 인해 고통이 됩니다. 본문 말씀이 전하는 예수님의 기적 사건은, 바로 그 사회적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근본적인 초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온갖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그 편견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편견에 꽉 붙잡힌 이들이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며, 모든 사람이 서로 존중하며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가로막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현대의학이 장애나 질병으로 간주하지도 않는 성향을 두고 비정상으로 여기며 차별하고 혐오하는 현상을 어찌해야 할까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물으면 그 답은 자명해집니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성서를 근거로 하여 성차별을 정당화하고, 인종차별을 정당화해 왔습니다. 또한 장애가 있는 사람은 사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성서의 대의,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복음을 다시 새기고, 더불어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며 기존의 편견을 넘어섰습니다. 편견이 무너지는 순간 혼란과 진통을 겪을 수 있지만, 그 혼란과 진통을 겪고 나면 오히려 신앙이 깊어지고, 세계관이 확장됩니다.

지난번 월드컵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1:0으로 졌을 때, 우리 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기 위해 저작과 여러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홍성수 교수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던졌습니다. 우스갯소리이기는 하지만 뼈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축구 1:0으로 졌다고 슬퍼하지 마시라. 평등을 보장하는 헌법 조문으로 비교하자면 100:0쯤 된다. 그것으로 위로가 되지 않은가.’ 이런 취지로 SNS에 글을 올렸습니다.
오늘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헌법은 가장 훌륭한 헌법으로 여겨집니다. 지독한 인종차별주의를 끝내고, 1996년 제정한 헌법은 다양성 속에서 하나 됨을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요건을 촘촘히 규정하였습니다. 하나의 차별 철폐는 모든 차별의 철폐를 뜻한다는 것을 구현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제정되지 못한 차별금지법에 담고자 하는 내용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헌법에 촘촘하게 명기되어 있습니다. 덕분에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규범으로 역할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우리 사회에서 온 국민을 상대로 하는 업체가 역사의 아픈 기억을 상술로 삼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질까요? 어떻게 배재고 학생들이 광주일고 학생들을 조롱하는 사태가 버젓이 일어납니까? 어떻게 누군가에게 심각한 상처를 안기는 혐오 발언을 놀이 삼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차별과 혐오를 금지해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이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종교적 편견 때문에 보편적 가치 기준이 확립되지 못한 탓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성서는 사실 하나님에 의해 끊임없이 인간의 편견이 무너지는 과정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편견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까요? 성서의 대의에 비추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진실, 더불어 사람들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의 진실에 비추어보면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진실을 깨달아 진실을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말하기를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26 Jul 2026 15:40:5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30 / 7.26.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14]]></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uwjAEEKnZB0

2. 오늘 예배 후 청빙준비위원회 모입니다.

3. 청년회 책모임이 오늘 오후 &lt;기독교 시온주의와 팔레스타인&gt;을 주제로 하여 진행됩니다.

4. 다음 주일 공동예배는 성찬예배로 드리며, 예배 후에는 월례 공동의회가 열립니다(안건: 7월 재정보고, 주요 일정 점검).

5. 8월 예배 및 봉사 담당 예정안이 준비되었습니다.

6. 담임목사
26(일) 오전 8시 [온라인] 낙골교회 낙골학당 강의  
28(화) 오후 6시 원성동공유공간100 / 미래를여는아이들 이사회
29(수) 오후 9시 [온라인] 한국교회인권센터 임원회
30(목) 오전 11:30 서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 사빌 코리아(팔레스타인 연대모임)
8/5(수)~7(금), 11(화)~13(목) 휴가

7. 교회당 사용
8/9(일) 오후 4시 민촌 이기영 선생 추모모임]]></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24 Jul 2026 15:36:1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유대인은 기적을, 그리스인은 지혜를 구하지만 - 고린도전서 1:18~25[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13]]></link>
			<description><![CDATA[2026년 7월 1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유대인은 기적을, 그리스인은 지혜를 구하지만
본문: 고린도전서 1:18~25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cXSrDdxJ0e0?si=zg3YdXDQV_rHYblN"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온갖 지식이 넘쳐나고 수없이 많은 주장이 펼쳐지는 오늘의 세계 가운데서 무엇이 과연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일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매순간 그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분파로 나누어져 다투고 있는 고린도교회 교우들을 향하여 애정 어린 권고를 합니다. 고린도교회에 주는 서신은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권하고 있지만, 나아가 복음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줍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가 믿는 구원의 도가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1:18) 
이어 세상에서 널리 신봉되는 지혜의 허망함을 말하고, 그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당대의 두 가지 지혜를 말하며 이와 대비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의미를 역설합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1:22~23a) 
유대인이 구하는 기적과 그리스인이 구하는 지혜, 이 두 가지는 모두 당시의 세상을 지배하고 좌우하는 통념이요 가치관이며, 동시에 사도 바울이 보기에 잘못된 가치관입니다.

유대인이 구하는 기적이 무엇일까요? 기적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게 뭔가를 해주기를 기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들 자신의 주장과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기대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신실해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요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구와 기대에 부응하는 것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사실상 자기 숭배요, 우상숭배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능력주의, 업적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여기에서 독특한 선민의식이 자리합니다. 가시적인 형태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것으로 믿는 이들은 선민이 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배제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결코 특정한 사람에게 독점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은총을 독점한 듯이 여기는 태도가 굳어집니다. 겉으로 볼 때 그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캄캄한 죄인의 세계로 내몰립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의 폐해를 집요하게 비판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믿음의 밑바탕에 사실은 자기 의에 대한 확신, 자기 능력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오셨다(마가 2:17, 마태 9:13, 누가 5:32)고 선포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스스로 신실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죄인이라 몰아 부친 사람들이 처한 형편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진실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들의 믿음은 허망하다.’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구하는 유대 바리새인들을 향해 질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과시의 표징으로서 기적을 거부하고, 오직 요나의 기적 이외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가 8:11~13; 누가 11:29~32; 마태 12:38~42). 요나의 기적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한 거듭남을 뜻합니다. 그 거듭남 없이 기적을 바라는 것은 자기과시의 욕망, 자기 의에 대한 과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태도의 함정입니다. 

그리스인들이 구하는 지혜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잘못된 지혜로서 그리스인들이 추구하는 지혜란, 한마디로 실천과 괴리된 사변적 지혜를 말합니다. 사실 세상의 어떤 종교나 사상도 그 실천적 의의를 스스로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그 지혜가 정말로 인간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보편 타당성을 지니며, 그것이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실천적 지혜로서 의미를 지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신봉되는 많은 지혜는 저마다 보편 타당성을 자임하지만, 그것은 특정한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이자 편견에 지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가 그렇게 허망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성취한 지혜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신봉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일거에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해버린 그 지혜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초기 교회에 특별히 영향을 끼친 것은 플라톤의 사상이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그리스인들의 지혜란 그것이 교회 안에서 변용된 어떤 경향을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영적 지혜’ 내지는 ‘이데아’를 추구했습니다. 현실은 허상이거나 불완전한 반면 완전한 이상 세계는 피안의 영적 세계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모순투성이의 현실이 아니라, 완벽한 질서가 조화를 이루는 이데아의 영적 세계를 추구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들어 온 것이 영지주의입니다. 육체를 지닌 인간의 삶은 허망하니 영적 지혜의 세계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우 그럴듯한 구원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육신을 지닌 예수님의 삶이 무가치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끈질기게 싸운 것이 바로 그 영지주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선언(요한 1:14)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사도 바울 역시 불가피하게 그리스적 지혜의 개념들을 사용하면서도, 영육이 동시에 깃든 존재로서 몸을 강조하고 그 몸의 변화를 말합니다. 구원은 엉뚱한 데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몸의 현실, 일상의 현실을 피해 감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새롭게 변화시켜 감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 여정을 회피하는 영적 지혜는 무가치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기만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 영적 지혜를 얻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허구적 세계 안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세속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자족적 세계관이었습니다.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로 시달려야 하는 사람이 그 세계관을 따를 경우, 그 결과는 끊임없는 자책과 모멸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이 추구하는 기적,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그저 자족적인 세계관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늘 먹고사는 문제로 시달려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희망도 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신봉되고 집요하게 강요되는 허구적인 믿음이었다는 데 그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진정한 지혜를 역설합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1:22~25) 

십자가는 하나님마저도 자신을 부정하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예수의 몸을 입었다는 진실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자기부정 행위입니다. 전지전능하고 특별한 능력을 지닌 하나님께서 평범한 인간의 일상으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모든 것이 끝장나는 십자가의 죽음에 하나님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하나님의 자기부정은 절정에 이릅니다. 이것은 오직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고만 믿던 유대인들에게는 도무지 가당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거리낌’이라 번역한 말은 ‘스칸달론’ 곧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진실이었습니다. 이 진실은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 충족 수단으로 삼아 왔던 사람들의 태도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하나님마저도 당신의 특별한 능력을 거부한 사건, 그것이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자족적인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부조리하고 처참한 세계 현실을 바라보라는 촉구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진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지혜로 볼 때 어리석은 짓입니다. 악한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이길 만한 힘을 갖추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그 상식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자기 몸을 내던짐으로써 부조리한 세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줄 뿐입니다. 약함도 강함도 없는 구원의 세계는, 지금 현실의 약함을 피해 가는 데서가 아니라 약한 것의 가장 약한 나락으로까지 나를 버리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증언합니다. 모순으로 가득 찬 육체의 현실을 내버려두고 영적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결단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십자가의 길은 보여 줍니다. 

세상에서 신봉되는 지혜의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 사건은 놀라운 신의 능력을 보여 준 사건도 아니요, 고상한 지혜를 일깨워주는 사건도 아닙니다. 그 불가해한 사건을 두고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 말하는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바울이 보기에 십자가 사건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인간 삶에 개입해 들어오는 극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주술적인 어떤 효과를 지닌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삶 가운데 개입해 들어오시는 사건입니다. 바로 그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받아들일 때 인간이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에 이른다는 것을 본문 말씀은 역설합니다. 그 뜻은 유대인이 추구하는 기적과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와 대비하여 이해할 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모순덩어리의 현실을 뛰어넘어 놀라운 일이 일어나거나 그 현실 너머 고상한 어떤 세계를 그리는 가운데 구원이 있지 않고, 십자가가 증언하는 그 말이 안 되는 사태 그 자체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는 데서 구원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정말 말이 안 되는 사건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잔혹한 인간의 처형 방식으로 사형당합니까? 어떻게 단지 사람을 사랑했을 뿐인 사람이 그렇게 처참하게 사형당합니까?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 왔던 삶의 질서가 그렇게 충격적이라는 것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그 엄연한 진실을 깨닫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이로부터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에게 이릅니다. 본문 말씀은 이 진실을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는 갖가지 지식의 홍수 가운데 헛된 지혜에 매여 있거나 강요당하는 현실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마저 그 헛된 지혜로 오염되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기보다 자기 욕망의 투사로서 만들어진 신을 숭배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세계와 인간에 관한 많은 주장들은 또 얼마나 허망합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믿음을 지향해야 합니다. 하나님마저도 자신의 몸을 던져 세상의 부조리를 드러내신 십자가 진실의 의미를 새기며 자신을 비우고 열어놓는 데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에 이를 수 있습니다. 
믿음은 그저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고 그 이치를 파악하는 것으로만 형성되지 않습니다.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는 지혜가 뛰어나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이해할 뿐 아니라 그것이 주는 의미를 깨달을 때 비로소 형성됩니다. ‘사실이 이러하니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깨달음과 결단을 동반할 때 믿음은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그 믿음이 우리가 바라는 세계를 향한 선한 행동으로 인도합니다. 
무엇이 정말 인간을 위한 길인지, 무엇이 모든 생명이 더불어 삶의 기쁨을 누리는 길인지 분별하고, 그 길에 동참하는 결단을 동반할 때 우리는 진정한 지혜를 바탕으로 하는 믿음의 동행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막연한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온갖 허망한 지혜들이 판을 치는 현실 가운데서, 어떻게 진정한 지혜로 세상을 분별하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진실을 깨닫고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로 새로운 세상을 이루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며, 교회는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 진정한 지혜로 생명의 길을 걷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19 Jul 2026 13:32:3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미얀마 이주노동자 故아웅민우 추모예배] 자기 몸과 같이 여겼다면 - 레위기 19:34]]></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12]]></link>
			<description><![CDATA[미얀마 이주노동자 故아웅민우 추모예배
7월 18일(토) 오후 3:30/천안 단국대학교병원 장례식장 6호실
주관: 한국교회인권센터, 아산이주노동자센터, 천안살림교회
제목: 자기 몸과 같이 여겼다면 / 본문: 레위기 19:34

<a href="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2026071801-scaled.jpg"><img src="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2026071801-1024x683.jpg" alt="" width="821" height="548" class="alignnone size-large wp-image-26603" /></a>

<a href="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2026071802-scaled.jpg"><img src="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2026071802-1024x683.jpg" alt="" width="821" height="548" class="alignnone size-large wp-image-26605" /></a>

<a href="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2026071803-scaled.jpg"><img src="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2026071803-1024x683.jpg" alt="" width="821" height="548" class="alignnone size-large wp-image-26606" /></a>

도대체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요? “남편이 떠난 뒤 돌벽이 무너지고, 등불이 꺼진 듯 앞길이 깜깜해졌다. 어느 누구도 남편과 같은 일을 겪으면 안 된다.” 비보를 접하고 “하루하루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겪다가 2주만에 겨우 한국 땅을 밟은, 아웅민우님의 부인 친마이마이님의 절규입니다. “회사가 안전시설을 충분히 설치했다면 남편은 사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에 공감할 수 있을 뿐, 지금 당장 어떤 말로 위로의 마음을 전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일터에서 성실하게 일했고, 신실한 믿음으로 선교사의 꿈을 꿨고, “15년 동안 완벽한 남편이었고 네 아이의 최고의 아빠”였던 아웅민우님이 이렇게 떠날 줄 알았겠습니까? 그 가족에게 도대체 믿어지겠습니까? 가족에게는 그야말로 맑고 푸른 하늘에서 치는 날벼락과 같은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가족들의 그 아픔을 생각하면 더욱 부끄러워집니다. 여기 함께하고 있는 우리의 심정이 어떻습니까? 고통을 겪는 가족 앞에서 차마 말을 꺼내기 두렵지만, 언론에서 소식을 접했을 때 아마도 똑같은 탄식부터 했을 것입니다. 긴말도 아닙니다. 딱 한 마디 “또!”라고 했을 것입니다. 또 그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6년 전 1970년 11월 25일 노동자 전태일 추모예배 자리에서 김재준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 기독교도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다.” 그로부터 반세기도 넘은 시점인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은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 수없이 많은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죽어가고, 이주노동자들에게는 그 죽음의 위협이 더 가까이 있는 현실을 여전히 그대로 두고 있는 우리 사회 현실을 탄식할 수밖에 없고, 그 일원으로 모두 자책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한 백성의 길을 제시하는 성경 레위기는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 이 말씀은 레위기의 한가운데 박힌 가장 값진 보석이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그 이웃은 동족의 범위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레위 19:34)

남들이 하지 않은 궂은 일을 맡아 하는 노동자들, 그 가운데서도 더 어려운 일을 감당하며 극한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이주 노동자들을, 그 사용자들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자기 몸처럼 여긴다면 이런 비극이 반복될 수 있을까요? 아니, 자기 몸처럼 여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나와 같이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꿈을 간직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만 있어도 이런 비극은 반복될 수 없습니다.

‘위로’ 예배로 모였지만, 돌이킬 수 없는 비극 앞에서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여전히 그 적절한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야 이놈들아, 아웅민우를 살려내라!” 그렇게 외치며 함께 우는 마음으로 자리를 같이할 뿐입니다.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다면, 그 억울함이 조금이라도 풀어질 수 있도록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마땅히 책임져야 할 사람과 당국에게 그 책임을 묻는 일에 함께할 따름입니다. 그것이 지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겪고 있는 가족에게 그나마 위로가 된다면 우리의 부끄러움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지 모르겠습니다.

아픔에 공감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데 같이 목소리를 내주는 사람들이 있어 가족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나마 우리의 부끄러움이 조금이라도 감해질 것입니다. 가족에게 뭐라 해야 할지 끝내 위로의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의 다짐만 겨우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웅민우님을 죽음으로 내몬 이들이 그 진상을 규명하고 마땅한 책임을 감당할 때까지, 더 이상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을 때까지 우리 모두 함께하기를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at, 18 Jul 2026 17:04:4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16-29 / 7.19.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11]]></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d_8PhoDFAGo 

2.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에서는 베네수엘라지진 피해 지원 헌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헌금할 경우 총회를 통해 전달합니다.

3. 18일(토) 오후 3:30 ‘미얀마 이주노동자 故아웅민우 추모예배’(단국대병원 장례식장)에 한국교회인권센터, 아산이주노동자센터와 함께하였습니다.

4. 오늘 예배에 함께한 유영상 목사(향린교회 부목사)께 감사드립니다.

5. 담임목사
   21(화) 오후 5시 서울 / 종교와 마르크스 포럼 대면 모임
   22(수) 오전 8:30 [온라인] 환대와 온전한 포용 정기 모임]]></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17 Jul 2026 16:27:3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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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여정”(2026.7.12. 성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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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song20260712.mp3"][/audio]
“여정” / 성가대]]></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12 Jul 2026 16:32:3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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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약할 때일수록 - 신명기 7:6~12[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09]]></link>
			<description><![CDATA[2026년 7월 1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약할 때일수록
본문: 신명기 7:6~12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AdxzSJY6opk?si=VEUya7Wa9aetzGCF"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흔히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은 명확히 구별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율법이 행위의 업적을 요구한다면 복음은 조건 없는 사랑을 선포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단절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아예 구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견해까지 있습니다. 율법주의의 폐해를 생각하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율법이 전적으로 그렇게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성서의 큰 뜻에 비춰볼 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율법주의의 폐해가 분명하기는 하지만, 본래 율법의 정신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본문 말씀은 그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신명기는 이른바 모세오경의 맨 마지막 책으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복지를 앞둔 상황 가운데서 모세가 설교 형식으로 선포한 말씀입니다. 
신명기(申命記, Deuteronomy)는 ‘거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 새로운 땅에서 지켜나가야 할 기본 법도를 일깨워줍니다. 이 책은 구약성서 율법의 근본정신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내용과 다양한 관점이 들어 있는 구약성서를 꿸 수 있는 근본적 정신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나아가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 성서적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정신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가운데서도 매우 핵심적인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먼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대전제를 내걸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땅 위의 많은 백성 가운데서 선택하셔서, 자기의 보배로 삼으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7:6)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에 한정해 보면 대전제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은 그 앞선 내용을 해명하는 문맥에서 등장합니다. 새로운 땅, 곧 약속의 땅에서 거주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은 기존의 주민이 따른 것과 같은 우상숭배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 까닭으로서 이 말씀이 제시됩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은 그에 걸맞게 마땅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초점은 여기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당신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은 민족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당신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들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당신들을 이집트 왕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어 주신 것입니다.”(7:7~8) 
이 말씀은 성서의 밑바탕을 형성한 일관된 동기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뜻은 그 민족이 강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힘깨나 쓰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입니다. 약해서 강대한 나라에 붙잡혀 스스로 자유로운 삶을 누리지 못하였고, 거대한 제국의 권력에 붙잡혀 억압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약한 자를 선택하신다는 이 말씀은 성서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구약성서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언행을 통해 더더욱 뚜렷하게 재확인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도 바울의 인의론을 통해서 그 정신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그 어떤 자격을 갖추고 업적이 있기에, 그래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좋은 조건에 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조건과 상관없이 누구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인의론의 핵심 요체입니다. 
앞서 말했듯, 구약의 율법은 자격과 업적을 요구하는 반면 신약의 복음은 그 모든 것을 폐기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사도 바울 역시 끊임없이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켰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바로 본문 말씀이 그 열쇠입니다. 본래 율법의 정신은 사람들을 옭아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을 제시하고 그 가운데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약하기 때문에 선택하신다는 말씀의 뜻, 그것이 율법의 정신을 형성한 기초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구약성서의 정신과 신약성서의 정신은 상통하는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를 베푸시는 동기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약을 지키시며, 또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7:9)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고, 또한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약한 백성을 선택하는 하나님의 뜻이요 동기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천 대에 이르기까지 약속을 지키며 사랑을 베푸신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7:10)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당장 벌을 내려 멸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푸는 반면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벌을 내린다는 대조입니다. 그 대조법이 흥미롭습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의 천 대에 이르게 하겠지만,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벌은 바로 그 사람에 한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같은 취지를 지닌 출애굽기의 말씀(출애 20:5~6)보다 더 극적입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벌이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미친다고 한 반면 신명기는 당사자가 그 책임을 진다고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복을 내려야 할 사람에게 복을 내리고, 벌을 내려야 할 사람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는 원칙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공정성이 폐기되지 않았지만, 추상같은 공정함보다는 무한한 자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본문 말씀의 근본 뜻입니다. 약한 백성을 선택하신 뜻, 자격과 업적을 보고 선택하지 않고 그것과 무관하게 백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 말씀을 통하여 더욱 뚜렷해집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은 다시금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 자비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당신들이 이 법도를 듣고 잘 지키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도 당신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세우신 언약을 지키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실 것입니다.”(7:12)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계명을 잘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 뜻, 곧 율법의 근본정신이 그 백성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데 있다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말씀이자 동시에 성서의 정수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 지당한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람의 자격과 업적 이전에 오직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사람을, 백성을 선택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 본문 말씀의 핵심입니다. 말씀의 그 핵심은 자격과 업적에 매인 세계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 바로 앞에서 기존의 풍요종교와 그 풍요종교를 따르는 이들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보이고 있습니다(7:1~5). 그것도 사실은 그 뜻에 비추어 헤아려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것을 종교적 배타성의 근거로 여기지만, 단지 어떤 종교와 어떤 이방 민족을 배격하는 근거가 아닙니다. 우상숭배로서의 그 종교를 문제시하는 것이며, 우상숭배로 여겨지는 그 종교적 믿음 아래서 정당화되는 삶의 양식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풍요의 종교에서 정당화되는 것은 인간의 업적입니다. 
그 풍요의 종교가 지배하는 세계의 실상이 무엇입니까? 업적의 논리로 정당화되는 권력, 그리고 끊임없이 그 업적을 내도록 몰아붙이는 권력의 힘, 과정의 중요성보다는 그 결과에 집착하는 믿음, 그리고 더 많은 결과를 낼 수 있다면 지금의 불공정함과 불평등은 도외시해도 좋다는 생각, 그리고 마침내는 그러한 삶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격이 없다고 배제하는 삶의 질서가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고 존속되는 사회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런 세계를 문제시하고 온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세계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본문 말씀은 현대적 인권과 정의의 기초가 되는 정신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배타성의 논리, 타자를 악마시하고 정죄하는 적대와 증오의 논리를 극복하고 가장 연약한 사람, 가장 궁지에 몰려 있는 사람이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당당하게 한 구성원으로서 몫을 다하는 세계에 대한 희망을,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가진 것을 자랑하고, 또한 가지지 못한 이들을 경원시하고, 불편한 것을 거부하고 정죄하는 데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오히려 드러내고 있는 종교, 기독교가 득세하는 오늘 현실에서 본문 말씀은 무엇이 진정한 신앙인지를 또한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성장주의를 신조로 여겨온 한국의 주류 기독교는 그 성장주의와 더불어 반공주의를 정체성의 근거로 삼아 왔습니다. 타자를 정죄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그릇된 태도입니다. 오늘날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을 신앙의 이름으로 강변하는 태도는 그 그릇된 신앙의 연속일 뿐입니다. 낯설다고 해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는 일은 하나님의 뜻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약한 이들을 돌보시고 약한 이들을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백성으로 선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진실을 알리려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 진실을 깨닫고, 그 진실을 구현하는 이 공동체,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약하다고 하여 그 진실을 구현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진실을 온전히 새기고 그 진실을 이루기 위해 더욱 신실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미약한 것이 옳다고 믿는 바를 실현하는 데서 유보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좋은 조건이 됩니다. 약할 때일수록 오히려 더욱 신실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10) 사도 바울이 고백한 그 역설은 그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본문 말씀의 의미를 다시금 새기며, 우리 모두 그 진실을 구현하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12 Jul 2026 14:45:5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28 / 7.12.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08]]></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hon17vWjCfE 

2. 지난 주일 공동의회 결과 
   ① 6월 재정보고, 
   ② 주요 일정으로 수련회 등은 추후 확정하기로 하였습니다. 

3.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와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간 제17회 교류프로그램(11/20.금~24.화, 일본 교토 지역, 항공료만 자부담)에 참가 의사가 있는 교우는 7월 20일 이전까지 담임목사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4.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에서는 베네수엘라지진 피해 지원 헌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헌금할 경우 총회를 통해 전달합니다.

5. 담임목사
   15(수) 정오 서울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인식조사 연구모임]]></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10 Jul 2026 15:31:3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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