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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천안살림교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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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천안살림교회</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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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성령이 오셨네”(2026.5.24. 성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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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5/song20260524.mp3"][/audio]
“성령이 오셨네” / 성가대]]></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24 May 2026 17:45:1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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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성령의 임재, 가장자리의 언어에 공명하는 사건 -사도행전 2:1~18[유튜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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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2026년 5월 2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성령의 임재, 가장자리의 언어에 공명하는 사건
본문: 사도행전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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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교회의 기원이 되는 계기로 지키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지 50일만에 일어난 사건이어서 오순절로 불리기도 합니다. 교회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엄밀하게 따지자면 보다 복합적인 양상을 띠겠지만, 성령강림 사건을 그 기원으로 보는 것은 그 나름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세상 안에 존재하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바로 그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서로 꽉 막혀 있던 세상 한 가운데서 어떻게 진정한 소통과 교감이 이루어졌는지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설교(2:14~42)로 이어지는 말씀은, 이 사건 후 회심한 사람이 3,000명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이 120명이었는데(1:15), 이 성령강림 사건에 이어 베드로의 설교가 선포된 이후 3,000명이 회심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성령의 인도로 시작된 교회의 역사를 전하는 본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했을 때 교회가 탄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교의 명절인 오순절에 신도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유대교 절기로서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칠칠절을 뜻합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처럼 갈라지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렸고, 사람들은 성령이 말하는 대로 방언, 곧 각기 나라말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성령강림의 모습은, 오늘의 교회들 안에서도 하나의 표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들에서는 거의 절대적인 표준이 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성령체험이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방언하는 능력을 얻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이 전하는 성령강림의 사건은 단순히 열광적인 흥분 상태에 빠진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이 전하는 성령강림 사건의 참뜻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데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말하는데,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자기의 말로 들렸다고 합니다. 사도들이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갈릴리 출신들입니다. 
그때 예루살렘에는 여러 지역 출신의 유대 사람, 또는 유대교로 개종한 여러 지역의 출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대,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이집트, 구레네 부근 리비아, 로마, 크레타, 아라비아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로마, 북쪽으로는 튀르키예,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 동쪽으로 아라비아 전역에 해당하는 지역들입니다. 이 지역들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자기 출신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사도들이 하는 말이 전부 자신들의 말로 들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놀랍니다. 저 사람들은 분명히 갈릴리 사람들인데, 저마다 자기네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하고 반문하며 놀랍니다. 
바로 이 진실이 성령강림 사건의 핵심입니다. 한마디로 성령강림 사건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소통하는 사건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방언’을 중얼중얼하는 것이 성령체험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장애없이 서로 소통하는 체험을 하는 것이 성령체험입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되는 사건입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 말이 굳어지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아주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는 서로 다른 나라 말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의사소통에 커다란 문제가 안 됩니다. 영어를 쓰는 아이는 영어로 한국어를 하는 아이는 한국어로 좋고 나쁜 감정을 표현하면 그것으로 다 소통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성장하면서 저마다 자기 고유의 문화전통과 그에 따르는 규칙에 충실하다 보니까 결국에는 서로 넘나들 수 없는 경계선이 생기고, 그 경계선을 부수지 않으면 이제는 더 이상 의사소통이 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이 전하는 성령체험의 경지는, 마치 서로 다른 나라의 어린아이들이 각기 자기 말을 하는데도 의사소통이 되는 것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그대로인데도 서로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경지를 말합니다. 이것은 특정한 가치 기준 하나로 획일적으로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개성을 다 인정해 주는 데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고 한마음이 되는 경지를 말합니다.
출신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면 달리 사는 것이 굳어진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 법칙 아래서는 높고 낮음이 있고 우월하고 열등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지역 출신이 득세하면 어떤 지역 출신은 소외를 당합니다. 높은 편, 우월한 편의 가치 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출신이 문제가 되지 않고 서로 아무런 장애가 없이 소통하는 체험을 하였다는 것은 그렇게 사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의 언어로 모두가 소통하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데도 소통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독단의 제국에 빠지지 않고, 각기 정체성을 유지하는데도 보편적 가치와 소통이 되는 사건을 말합니다. 오히려 그 정체성을 존중함으로써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성에 이르렀다는 것이 사건의 요체입니다.
그러기에 성령강림 사건은 구약성서가 전하는 바벨탑 사건(창세 11:1~9)을 정면으로 뒤집고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의 언어로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제국의 욕망이 불러일으킨 세계 분열의 실상을 성찰하고 있습니다. 각기 다른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성을 부정하고 하나의 가치 기준으로 획일적인 위계질서를 만들어 세계를 지배하고자 할 때 거꾸로 세계가 분열할 수밖에 없는 진실을 일깨우는 이야기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은 그와 정반대로 서로 정체성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모두가 함께 평화롭게 어울리며 소통할 수 있다는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갈릴리 출신 제자들의 언어가 모든 지역의 언어와 소통하고 있다는 진실입니다. 이는 어떤 가치를 기반으로 소통하는지 그 진실을 알려줍니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된 일이오?”(2:7~8) 변방 갈릴리 민중의 언어가 세계적 보편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존의 질서 안에서 가장 무시되었고 주변화되었던 사람들의 언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뜻입니다.
이를 보고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보고 베드로가 선포합니다. 그 기이한 사건에 동참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고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달리 이해할 길이 없었던 그들은 조롱하면서 술에 취한 것이라 말합니다. 베드로는 그에 대해 해명하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합니다. 
“지금 아침 아홉시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듯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2:15) 사람들이 술에 취하면 유사한 현상이 일어나기는 합니다. ‘알았어, 알아!’ ‘그래, 그래!’ 하고 다들 큰소리칩니다. 그렇게 하고도 술이 깨고 난 다음에 자신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눈지도 모르는 일이 벌어집니다. 
베드로는 지금 목격하고 있는 일이 그런 경우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일은 성서가 예언하고 있는 바로 그 사건이라 말합니다. 사도행전의 본문이 약간 변형되어 있기에 요엘서 본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주겠다.”(요엘 2:28~29) 
지금 목도하고 있는 사건이 지니는 의의입니다. 이 예언의 초점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받을 것이라 선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징표로 거론되는 이들은 이른바 표준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노인과 젊은이들, 종들에게까지 남녀 가리지 않고 영을 받게 될 것이라 합니다. 이들에게 임재하는 하나님의 영, 곧 이들이 하나님의 뜻이 이뤄졌다고 공감하는 진실을 모두가 공감하는 순간이 성령임재의 사건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사건의 현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공통언어는 곧 갈릴리 언어였습니다. 놀라운 진실은 모두가 갈릴리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한 것은 아닌데도 그 언어를 모두 다 알아들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언어 그 자체로 알아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갈릴리 사람들의 언어가 뜻하는 바를 그 깊이의 차원에서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언어, 그것은 곧 예수님의 언어였습니다. 그것은 권력을 탐하는 중심의 언어가 아닙니다. 제국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경계를 짓는 언어가 아닙니다. 갈릴리의 언어, 예수님의 언어는 바로 그 경계의 가장 끄트머리로 밀려난 사람들의 언어입니다.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언어입니다. 그 언어에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그 언어로 모든 사람이 소통하는 사건, 바로 그것이 성령강림 사건의 실체입니다.
제국의 언어는 세계에 분열을 일으키고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더합니다. 여자와 어린이에게 그 고통은 가중됩니다. 오늘 우크라이나에서, 이란에서,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그들을 돕고자 나선 이들의 뱃길을 가로막고 납치하는 이들은 그 고통에 무심한 자들입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저작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힌드의 목소리”(2025년 영화)가 사람들을 울립니다. 그렇게 감추어졌던 목소리, 고통의 절규에 공감하는 사건, 그것이 곧 성령임재의 체험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이 교회 탄생의 사건으로서 기억되는 것은, 교회가 그 뜻을 실현하는 공동체로서 몫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강림의 사건은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세상과 다른 교회의 탄생, 그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는 그 순간 사람들은 그렇게 달라집니다.

어떤 사회가, 어떤 공동체가 건강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가장 고통받고 가장 약한 지체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목소리에 공감하는 사회, 그 공동체는 건강합니다. 교회는 그 정신을 지향하고 있고, 그 정신을 세상에 구현하는 사명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그 정신을 스스로 구현하고, 나아가 우리의 사회 한 가운데 그 정신을 구현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24 May 2026 14:08:1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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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무너진 경계와 왜곡된 신앙: 정교유착 방지 법안의 정당성과 한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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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기독교사상』 2026년 6월호 특집 원고

무너진 경계와 왜곡된 신앙: 정교유착 방지 법안의 정당성과 한계

최형묵


일탈

한국 보수 기독교가 정치 행동에 나선 것은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과거 유신 독재 체제에 저항하며 진보 기독교가 정치 행동에 나섰을 때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현상이다. 물론 그 시절에도 표면상의 명분과 달리 실제로는 ‘정교유착’이라 할 만한 정치적 거래를 해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만큼 자신들과 가치를 달리하는 정권이 들어섰을 때 그에 대해 저항하며 정치 행동에 나선 것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민주화가 진전되고 평화 체제를 지향하는 전반적 추세에 역행한 탓에 사회적으로 지탄받기는 했어도 적극적으로 가시화한 하나의 정치적 입장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24년 12.3 비상계엄 이후 그 양상은 달라졌다. 극우 집회를 이끈 전광훈과 손현보를 중심으로 하는 극우 기독교 세력은 헌정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과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2025년 1.19 서부지법 사태는 그 단적인 사례였다. 윤석열의 구속을 결정한 서부지방법원에 침입한 난동 사태는 헌정질서를 부정한 행위였다. 전광훈은 광화문 광장 집회를 통해 명백히 이를 사주하였다. 더불어 난동에 적극 참여한 이들 가운데 전광훈과 연결된 이들도 있었다. 결국 2026년 1월 전광훈은 ‘서울서부지법 난동 사태’의 배후 혐의(특수주거침입교사 등)로 구속되었다. 현재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재판은 계속되고 있다. 손현보는 서부지법 난동 사태와 직접 연루되지는 않았지만 2025년 6.3 대통령 선거와 그 외 교육감 선거 등에서 선거법을 위반하여 실형을 선고받았다. 종교의 자유를 빌미로 설교 강단에서 특정 후보에 대한 저주와 악담을 반복해 왔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발언과 행위를 종교의 자유를 근거로 정당화하고 있지만, 사회적 시선은 명백히 헌정질서를 부인하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법당국 또한 명백히 위법한 행위로 여겨 그 책임을 묻고 있다.
전광훈과 손현보가 내란 정국에 광장에서 소란스럽게 목소리를 냈다면,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 행위에 나선 종교 세력도 있었다. 신천지와 통일교의 경우이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보수 정당을 지지하며 정교유착을 시도하였다. 전광훈과 손현보가 진보적 사회 및 정치 의제, 그리고 이를 옹호하는 정 치세력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면, 신천지와 통일교는 보수 정치 세력을 지원하며 정교유착을 시도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윤석열의 내란 사태가 평정되는 가운데 이들의 행보가 드러났고 현재 수사와 더불어 사법적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근래 수년 사이 신천지는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 왔다. 기존 교회에 침투하여 교회를 접수하거나 신자를 빼 내가는 전도 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기존 교회에서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교회 내 문제일 수 있었다. 신천지가 사회적으로 문제시된 것은 코로나 팬데믹 현상의 와중에서였다. 코로나가 시작된 초기 급격한 감염 확산의 매개자가 신천지 교인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부의 방역 조치를 따르지 않은 집회 방식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손현보 역시 정부의 방역 조치를 따르지 않았지만 요란하게 종교의 자유를 외치는 가운데 대중적으로 부상한 반면, 신천지는 정부의 방역 조치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집회를 이어가는 가운데 물의를 빚은 것으로 여겨졌다. 행정당국은 강경하게 대응하였고, 특히 당시 경기도지사 이재명은 그 본부에까지 직접 출두하여 방역을 위한 행정조치를 따르도록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빌미가 되었던 것일까? 신천지는 이후 보수 정당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고 신도들이 당원으로 가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대선 후보 지원에도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5년간 5만여 명의 신도들이 집단적으로 가입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당내 경선과 선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신도들에 대한 강압과 자금 운용의 문제로 현재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통일교 역시 정치권과 부적절한 유착을 시도한 것이 드러나 현재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통일교가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해 정교유착을 시도해 온 사례는 널리 잘 알려져 있다. 오래전에서 미국에서도 문제시된 적이 있거니와, 근래 일본에서는 아베 총리 암살 사건의 배경이 되었을 만큼 통일교의 정교유착 시도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급기야 일본에서는 통일교의 종교법인 해산 절차까지 이뤄졌다. 일본에서의 종교법인 해산 심판은 통일교에 위기 상황으로 인식되었고, 이에 따라 한국에서 입지 강화를 위한 정교유착의 시도를 강력하게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통일교는 교단 현안 청탁을 목적으로 정치인에게 금품을 제공하고, 교단 자금을 활용해 정치후원금을 불법으로 제공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에 따라 총재와 주요 인사가 구속되었고 이에 관한 전반적인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신천지와 통일교의 경우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과 정당 민주주의의 근간을 허무는 행위로 여겨져 사법적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헌법상 정교분리의 원칙이 뜻하는 바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이들 교단의 행위가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신천지의 경우 주로 정당법에 저촉되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통일교의 경우는 형법상 뇌물죄와 정치자금법 위반 행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종교의 자유를 명분으로 헌정질서를 부정하는 행위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정교유착을 시도하는 행위는 일단 구별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안은 민주적 헌정 국가 안에서 바람직한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민주적 헌정 국가 안에서 정교분리의 의미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국가와 교회, 곧 정치와 종교의 문제는 처음부터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 왔다. 그 관계 설정은 신학의 중심 과제라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 까닭은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향과 더불어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서도, 사도 바울에게서도 이는 문제가 되었다. 예수의 핵심 선포로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 목적으로서 종말론적 성격을 지녔고 그 나라와 지상의 나라는 화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마가 10:42, 요한 18:36, 마가 12:13~17 등 참조). 사도 바울 역시 종말론적 이상으로서 그리스도의 주권에 의한 세상의 통치를 주장하였지만(고전 15:24, 골로 2:10 등 참조), 동시에 권위에 대한 복종을 주장하기도 했다(로마 13:1~7). 이로부터 로마의 ‘황제숭배’는 거부하지만 제국 내의 ‘공공질서’는 용인하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태도가 결정되었다. 초기 기독교 시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방대한 저서 『하나님 나라』는 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세속국가는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하나님 나라 실현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두 왕국론’, 그리고 칼뱅의 ‘하나님의 주권’ 또는 ‘그리스도의 주권’ 개념 등이 모두 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였다. 이는 모두 각기 시대적 맥락 가운데서 양자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답을 제시하는 성격을 띠었다.
양자의 관계 문제는 근대의 정치적 혁명 과정을 통하여 분기점을 맞이한다. ‘정교분리’의 원칙이 확립된 것이다. 그 원칙은 일차적으로는 종교로부터 국가의 분리를 뜻하며 또한 역으로 국가에 의한 종교의 간섭을 배제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중세적 질서의 종식을 뜻하는 것으로, 세속적 주권 국가의 입장에서 종교적 권위로부터 정부를 분리하고자 하는 요구와 종교의 입장에서 국가로부터 신앙의 자유가 침해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요구가 합치된 결과였다. 
이 원칙은 정치와 종교가 무관하다는 것을 뜻한다기보다 정치의 종교화 또는 종교의 정치화를 배제하려는 뜻을 지닌 것으로 해석된다. 곧 정치적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하거나 간섭하는 행위를 배제하는 한편 종교가 정치권력에 기대어 특권적 지위를 노리는 것을 배제해야 한다는 뜻을 지닌다. 그것은 정치와 종교의 자율성을 인정함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한편 독단적인 종교적 세계관에 좌우되지 않는 투명한 민주적 헌정질서를 지향하고자 하는 뜻을 지닌다. 그것이 정교분리의 요체이다. 이는 오늘날 이란과 같은 일부 신정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민주적 헌정 국가 안에서 준수되는 원칙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와 국가 모두 세계 안에 존재하고, 또한 그 안에 사는 사람은 종교인이자 동시에 시민으로서 존재하기에 그 ‘분리’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계속되는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종교인은 정치에 무관심해도 되는지, 거꾸로 국가는 사회적 공공성을 해치는 종교를 방치해도 되는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여기서 우리는 양자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 전제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공동선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점에서 양자는 분리되어 있으되 협력할 수 있으며, 역으로 양자 가운데 어느 편에서 그 목표를 저해한다면 피차간에 저항과 간섭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은 사회적으로 용인되거나 용인될 수 있는 각자의 역할을 분명히 하면서 피차간 부당한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헌법에 정교분리와 신앙의 자유를 명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양자의 관계를 적절히 규율하는 법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정교분리 정신에 따르면 정치와 종교는 양자 모두 엄격한 공동의 책임을 지니고 있다. 국가가 자신의 권력을 임의로 남용함으로써 정당한 사유 없이 특정 종교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 다른 한편 종교가 사회적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고자 할 때 그 표현 방식은 자신의 신앙에 근거를 두되 민주적 헌정 국가 안에서 보편적 가치와 그 소통방식에 부합하여야 한다. 이는 종교적 독단에 따라 입장을 개진하는 것을 지양하고 각기 다른 세계관을 지닌 사회 구성원을 존중하고 그 가운데서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신앙의 요청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의 요청을 당대의 역사·문화적 환경 가운데서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또 다른 한편 각 종교는 사회 안의 다종교 상황을 유의해야 한다. 특정 종교가 국교의 지위를 가짐으로써 외부적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시민사회 안에서 각 종교가 스스로 신뢰도를 높여야 하는 조건 가운데 있다. 종교적 믿음의 체계는 그 자체로 자기완결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독단에 빠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가치체계와 접촉을 통해 오히려 자기 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여기서 각 종교가 사회적 신뢰를 얻기 위하여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지는 분명하다. 배타적 진리 주장과 독단적 행위에 몰입하는 종교보다는 포용력을 지닌 종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높은 현실을 유의해야 한다.


정교분리법 취지의 정당성과 한계

오늘 민주적 헌정 국가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정교분리의 취지를 따를 때 지금 우리 사회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종교들의 정치 행위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전광훈이나 손현보는 광장이나 교회당에서 노골적으로 헌정질서 자체를 부정하거나 실정법을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신천지나 통일교는 은밀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특정 정당을 지원한다든가 금품을 제공함으로써 실정법을 위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수사와 사법적 절차를 통해 일련의 일탈 사태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도 충분하다.
제22대 국회에서 이른바 ‘정교분리법안’으로 불리는 ‘민법 일부개정법률안’(2026.1.9.)이 발의된 것도 그러한 사회적 공감대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는 헌법적 원칙과 보편적 가치 기준을 따르는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특정 종교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 적절한 규율이 필요하다는 취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더불어 종교법인을 포함한 비영리법인에 대한 행정관청의 감독 권한과 절차를 명문화함으로써 행정권의 임의적 행사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재 발의된 법안은 그 취지를 충분히 이해한다 하더라도 법안으로서 취약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교계에서 여러 의견이 제기되었거니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그 법안 제기의 배경과 취지를 이해하면서도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개정안이 여전히 또다른 측면에서 행정관청의 자의적 법 집행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장치가 없다는 점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법인의 위법성과 책임을 판단하는 일은 행정명령이나 행정결정이 아니라, 법원의 판결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설립허가 취소가 곧바로 법인의 해산과 재산 귀속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한 구조는 종교의 자유와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침해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정권의 성격에 따라 정치적으로 오용·남용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통일교, 신천지에 대한 신속한 수사를 촉구한다 – 비영리법인의 공익성 제고를 위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입장」 2026.2.4. 참조.)
       
비영리법인에 대한 감독 권한을 행사하는 절차와 그 효력에서 모두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지적이다. 법인의 취소가 곧바로 해산의 효력을 지니는 것으로 되어 있어 사실상 행정관청이 전권을 가지고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게다가 그 권한은 사실상 어떤 견제도 받지 않은 채 정권의 성격에 따라 오용되거나 남용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행정관청의 임의적 판단을 배제하려는 법 조항이 오히려 임의성을 안게 되는 모순이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해당 법안에서 법인의 설립허가의 취소 요건 가운데 헌법상 정교분리의 원칙을 위반하거나 공직선거법 등을 위반한 경우만을 특정하고 있는 점도 문제이다. 그 밖에도 다양한 위헌적 또는 반사회적 행위 등이 있을 수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명시하지 않은 채 특정 사안만을 명시함으로써 균형을 잃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는 해당 법안이 바로 그 특정한 사안을 겨냥하여 성급히 만들어졌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로써 오히려 법안의 신뢰성과 합리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결국 현재 국회에 발의된 법안은 사안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여론을 환기하기 위한 일종의 불쏘시개 역할을 맡은 것 정도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정교분리의 정신을 훼손하는 정치 행위에 대한 규율 방안은 좀더 충분한 검토와 숙의를 필요로 한다.
먼저, 민주적 헌정질서를 부정하는 정치적 선동이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요구를 관철하려는 정교유착이든 이를 법률로 규율하고자 한다면 해당 법안이 충분한 합리성과 균형을 갖추어야 하고 정교해야 할 것이다. 법률적 규율은 쉬운 방법이지만, 그 쉬운 방법을 따르기 위해서는 입법 과정 자체가 충분한 의견 수렴을 동반하여야 하고 그 결과로서 법안이 합리성과 균형을 잃지 않아야 한다. 행정의 권한만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이는 종교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 더욱 근본적인 대안은 우리 사회에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관한 규범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는 쉽지 않은 과제이기는 하지만, 법과 제도가 순기능을 담당하도록 하기 위한 필수적 요건이다. 사회적 규범이 빈약한 토대 위에 세워진 법과 제도는 취약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2025년 4월 4일 대통령 탄핵 선고에서 헌법재판관도 인용했듯이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규범의 요체라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의 위기 신호』 2018, 132.) 이는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서도 유의해야 할 규범적 성격을 지닌다. 상호 관용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를 말하며, 제도적 자제는 법과 제도가 보장하는 권한이라 하더라도 그 권한을 남용하지 않는 절제를 뜻한다. 
그 규범이 지켜질 때 사회는 신뢰가 유지되고 안전해진다. 반면 그 규범이 무너질 때 사회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 규범을 지켜야 할 책무는 우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 편에 더 강하게 요구되는 것일 수 있지만, 종교 편에 또한 그 무게와 다르지 않게 요구된다. 오히려 종교 편에서 그 책무를 더욱 무겁게 느껴야 할 것이다. 종교는 권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규범을 통한 교화력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그 본령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at, 23 May 2026 12:43:4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9"><![CDATA[논단]]></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21 / 5.24.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82]]></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oJoNvGStlkM 

2. 청빙준비위원회가 구성 완료하였습니다(위원장 이지수, 위원: 김광식 김규희 김성윤 박경주 박수환 백수현 선재원 전홍진).  

3. 2026년 상반기 수요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교회 깊이 알기”가 이번 주간 마칩니다. 주제와 관련하여 특별 프로그램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8] 5월27일(수) “사진으로 보는 우리교회 초기모습”(송길룡)

4. 다음 주일(5/31) 공동예배 인도와 말씀은 이성철 목사가 맡습니다. 

5. 담임목사
   25(월) [온라인] 향린교회 공부모임 『민중신학 개념 지도』 저자와의 대화
   26(화) 오후 2~5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민중신학의 탐구” 출강
   26(화) 오후 6시 제3시대연구소 이사회
   27(수) 정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에큐메니칼포럼 운영위원회
   30(토) 오후 12:30 홍천 풍천리 / 녹색교회네트워크 “우리가 풍천리 나무다”]]></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22 May 2026 16:51:1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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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바위섬”(20265.17.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81]]></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5/song20260517-1.mp3"][/audio]
“바위섬” / 성가대]]></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17 May 2026 19:59:3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인간의 길 - 예레미야 31:31~34[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80]]></link>
			<description><![CDATA[2026년 5월 1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인간의 길
본문: 예레미야 31:31~34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2m5FYj6sgkg?si=rDdnB6bxey3wNBJt"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면서 주체로서 자기를 의식한다는 것 아닐까요?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더불어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를 이루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인간의 도드라진 특징은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 점이 인간을 운명적 질서의 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주체로 세워주는 요체일 것입니다. 창조 이야기 가운데서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 인간의 능력은 오랜 문명의 축적 결과이지만, 특별히 인류 정신사에서 볼 때 인간이 자신의 내면적 성찰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시기가 있습니다. 정신사의 차축(車軸)이 형성된 시기로, 성서의 정신세계를 비롯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고전적인 정신세계가 형성된 시기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겪은 갈등과 고통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갈등과 혼란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인간의 내면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극복하고 빛을 드러내게 할 것인가 하는 성찰로 이어진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의 본문 말씀은 성서 전반을 통해 가장 심오한 말씀 가운데 하나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빛나는 통찰입니다.
이 말씀은 멸망한 이스라엘과 유다를 보고 위로와 희망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죄값을 치른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그 나라를 회복하여 주겠다는 말씀에 이어 옛 계약과는 다른 새로운 계약을 맺으리라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구약’과 구별되는 ‘신약’이라는 말의 기원이 되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은 새 계약(31:31)이 모세의 계약과 다르다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31:32)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31:33) 또한 덧붙여 말합니다. “그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31:34)

새 계약이 과연 어떤 점에서 모세와 맺은 계약과 다를까요? 본문 말씀은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말씀이 그 차이를 드러냅니다. 
모세의 시내산 계약은 돌판에 새겨졌습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의무감으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그 계약의 내용은 다른 자세한 설명과 함께 문자화되어 있기에 해석을 필요로 하고, 그 해석에 따라 악용되기도 합니다. ‘율법주의’는 그 율법의 정신이 악용된 결과입니다. 지키지 않아 파기되고, 악용됨으로써 사실상 파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 돌판에 새겨진 계약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계약은 ‘가슴속’에 ‘마음’에 새길 것이라 했습니다. 형체가 없습니다. 그것을 전해 주는 돌판이나 문서와 같은 매체가 없습니다. 곧바로 마음에 새겨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쿵저러쿵 따질 필요가 없어지고, 자신의 마음 가운데서 깨닫는 사람이 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져 억지로 지켜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지키는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경지입니다. 
새 계약에 따라 바뀌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요 마음입니다. 근대의 철학자 칸트가 내면적 도덕률을 강조하여 인간 삶의 보편적 법칙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기원이 되는 통찰이 본문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 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lt;공동번역&gt;의 표현이 그 경지를 아주 실감나게 번역하였습니다. 우리가 굳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 뜻을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물론 개별 사람들의 마음만이 그렇게 바뀐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자체가 그렇게 바뀐다는 뜻입니다. 너의 뜻이 나의 뜻이 되고, 우리 모두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되는 세계입니다. 그러기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갈등을 겪거나 고통을 겪는 일이 없는 세계입니다.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 되는 세상입니다.

본문 말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에게도 계속 이어집니다. 단지 ‘신약’이라는 말의 기원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신약’의 핵심을 미리 보여 준 말씀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체제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진실입니다. 그들에게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더 이상 사람을 옭아매는 체제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희생자들에게 먼저 다가가셨고, 그 체제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을 향하여 준엄한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마가 2:27)
안식일의 조문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식일이 제정된 뜻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안식일이 제정된 뜻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금기사항(39×6=234)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깨달음이 중요하고, 그 깨달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정신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끊임없이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 5:1)
율법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법에 매여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자유인이 아닙니다. 법이 있든 없든 마땅히 해야 할 바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하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타율적인 규율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그렇게 말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요체입니다. 그 신앙의 기원, 그 정신의 기원을 오늘 본문 말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오늘 이 시대는 그 말씀이 일깨워주는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현대 사회 국가는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민의 정치적 대표자들이 입법부를 구성하여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가 있고, 그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지 사람들이 법을 제대로 따르는지 판결하는 사법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 삼권분립이 법치주의의 근간입니다. 언뜻 보기에 그 틈새에 어떤 내면의 동기나 마음이 자리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현대 법치주의가 사실은 민중들의 요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요구였고, 달리 말하면 자율성의 발로였습니다. 곧 정치적 자유 의지에 따른 요구였습니다. 여기에서 법치주의의 중요한 성격이 결정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함으로써 온전한 자유를 구현하려는 뜻을 지닙니다. 그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인간 사회 공동체의 범위가 확대되고 복잡해진 현실 가운데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킴으로서 자유를 실현하려는 사회적 계약으로서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에 기반한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보편적 윤리 규범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 구성원의 권리를 인정하는 성숙한 문명국가의 법이라면 그래야 마땅합니다. 법을 만들어놓고 시행하면서도 그 법의 타당성을 따지는 헌법소원 절차를 두고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법이든 그 자체로 절대화되기보다는 끊임없이 그 근본 취지를 확인할 수 있고, 그 집행의 정당성을 제대로 검증할 수 있는 절차를 동반하고 있다면, 인간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보편적인 도덕률 내지는 윤리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동일한 사안을 두고도 다른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을 보면 그 내면의 동기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법치주의의 근본 취지는 말씀이 일깨워주는 진실과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법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은 과거처럼 한정된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직접적 대면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복잡한 사회적 현실 때문입니다. 오늘날 복잡한 사회적 관계 안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온전한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인간적 각성과 윤리적 요구가 배제될 수 없습니다. 법적 장치는 사회에서 공유되고 있는 윤리의식에 기반한 위임의 정당성과 그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지 단순히 권력으로부터 부여되는 명령의 목록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어떤 사회가 어떤 법을 갖고 이행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회 공동체의 성숙함에 달려 있다고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충분하고, 그것이 생활윤리로 자리하고 있는 사회에서 그에 반하는 법이 통용될 수는 없습니다.

저 지난 주간 국회에서 생명안전기본법이 제정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문에 5.18정신을 명기하는 것을 포함한 헌법개정안은 통과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개정안은 비상계엄의 요건을 강화하는 내용도 포함하였습니다. 숙의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나중에 개정할 것을 전제로, 우선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공감대를 갖고 있는 정신만큼은 새겨넣고자 하는 시도마저 일부 정치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5.18 광주민중항쟁 46주년을 기념하는 주일 우리는 그 뜻을 새삼 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민군의 좌절을 겪은 후 시인 김준태는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탄식하며 노래했습니다(1980.6.2.)
“···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을 뒤집어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예수는 한 번 죽고
한 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백 번을 죽고도
몇백 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우리가 바라는 것은 법문 몇 글자 더하는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 정신, 그 뜻을 새기자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아니 인류가 나아갈 길을 새기자는 것입니다. 다시는 권력에 의해 인간이 도륙당하는 무참한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진실, 해와 달이 입 맞추듯 장엄한 사랑을 나누는 일의 숭고함을 새기자는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가 선포하고 있는 진실은 단지 한가로운 목가적 시대의 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칫하면 중요한 진실을 놓쳐버리기 십상인 오늘의 현실에서 더더욱 중요하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누가 뭐라 해서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깨달아 새기고 있는 진실을 따름으로써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평화를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우리 모두 그 길을 따르는 가운데 참 자유를 누리기를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17 May 2026 13:02:4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20 / 5.17.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79]]></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xfUpvU_H6bM 

2. 오늘 예배후 운영위원회 엽니다(안건: 청빙준비위원회 추가 추천).

3. 오늘 오후에 청년회 주관으로 전교인운동회가 천안시 장애인 체육관에서 열립니다.

4. 2026년 상반기 수요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교회 깊이 알기”가 계속 진행됩니다. 주제와 관련하여 특별 프로그램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7] 5월20일(수) “천안지역 종교문화유적”(송길룡)
  [8] 5월27일(수) “사진으로 보는 우리교회 초기모습”(송길룡)

5. 교우들의 독서모임이 23일(토) 오후 2:30에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을 주제로 하여 진행됩니다.

6. 담임목사
   19(화) 정오 서울 연동교회 / 녹색교회네트워크 신입교회 환영회
   19(화) 오후 2~5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민중신학의 탐구” 출강
   19(화) 오후 7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 에큐메니칼공동신학세미나
   20(수) 오전 8:30 [온라인] 환대와 온전한 포용 정기 모임]]></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15 May 2026 15:56:3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우리 교회의 직제와 의사결정 구조]]></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78]]></link>
			<description><![CDATA[2026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 교회 깊이알기
2026.5.13.(수) 오후 7:00시 / 최형묵 목사

우리 교회의 직제와 의사결정 구조

1. 현실 교회 구조의 상대성

한국 기독교의 교회 구조는 철저하게 위계화되어 있다. 그 위계화된 구조 안에서 능동적 주체로서 목회자와 피동적 대상으로서 평신도의 관계가 당연시되고 있고, 신도들 사이에도 일정한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가톨릭교회는 사도직의 적법한 계승자로서 성직자의 역할을 강조하고 성직자 중심의 위계적 교회구조를 갖추고 있다. 개신교는 교파마다 다양한 교회 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대부분 평신도의 대표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러한 교회 구조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장로교를 들 수 있다. 장로교는 평신도의 대표성을 반영한 당회의 구조를 갖춘 점에서 가톨릭의 성직자 중심의 교회 구조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지만, 여전히 소수의 권한을 보장하는 과점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성직자 중심의 독점체제에서 소수 대표들의 과점체제로의 변화는 진일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넓은 의미의 독점체제의 문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 교회의 구조는 시대적 산물로서 상대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다. 항구적으로 영속할 수 있는 교회 구조란 없다. 가톨릭교회는 봉건적 위계구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고, 개신교는 근대의 대의정치 구조를 구현하고 있다. 오늘날 대의정치도 과연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는 것인지 의문시된다. 교회 역시 평신도의 주체성 강화를 통한 수평적 교회 구조를 만들고 누구나 동등한 참여를 보장하는 구조를 갖추는 과제를 안고 있다.

2. 회중의 대표성을 보장하는 교회 정치 구조

한국 교회가 경직화된 교회 구조를 고수하고 있는 동안에도 에큐메니칼 세계 교회 기구들은 오래 전부터 교회 안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세계교회협의회(WCC) 등 대부분의 에큐메니칼 세계 교회 협의체들은 성직자 중심의 대표권을 지양하고 비례대표제를 통해 평신도의 참여를 보장하는 추세다. 예컨대 해당 협의체의 총회를 구성할 때 그 가맹 교단의 총대를 목사, 청년, 여성 순으로 안배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도 세계 에큐메니칼 협의체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의 교회들 가운데서마저도 그와 같은 교회 정치 구조를 갖춘 교단은 전혀 없다. 아직도 여성 안수를 인정하는 교단보다는 인정하지 않는 교단이 더 많고, 교회 정치에 목사와 장로를 제외한 여타 평신도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교단도 거의 없다. 기장이 수 년 전 소수의 평신도 대표권을 인정한 경우가 드문 사례일 뿐이다. 대체로 특정한 위원회에 전문가로서 평신도들이 참여하는 정도이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기본적으로 당회-(시찰회)-노회-총회 구조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 더해 협의체로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있다. 이 정치 구조에서 그 대표권이 사실상 특정한 연령대의 특정한 남성 목사와 장로 등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 교회의 대표권, 그 정치 구조는 불변의 정당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오늘의 추세에서 보거나 하느님 앞에서 공평한 은사의 선용이라는 신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마땅히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3. 공평한 은사의 배분으로서 교회 직제

신약성서가 반영하고 있는 사도시대 전후의 교회 직분은 비교적 단순하다. 사도시대, 곧 예수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말씀을 전파하는 사도와 주로 구제 임무를 담당하는 집사가 있었다. 사도시대 직후에는 집사 외에 감독과 장로가 혼재되어 있었다. 이후 감독은 사제를, 장로는 평신도 회중 가운데 원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물론 성서의 근거 여부만 가지고 교회 내 직분의 정당성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교회의 제도화가 불가피한 것이었다면 그 불가피한 현실 안에서 어떤 합리성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성서가 애초 지향했던 은사의 공평한 배분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인지 따져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교파의 특성에 상관없이 남용되는 직분들은 은사의 효율적 배분 수단으로서 의미를 지니기보다는 그 위계의 등급을 세분화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사실상 서열 관계를 정당화하는 직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안들이 모색되고 있다. 
우리 교회가 직분을 최소화하고 호칭을 ‘교우’로 통일한 것도 그런 시도 가운데 하나이다. 전통적인 기존 교회의 직제를 수용하면서도 직분을 공평한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운용하려는 것도 같은 뜻을 지닌다. 장로의 임기제, 또는 비례대표 원리를 적용한 장로 선출등이 그러한 예이다. 또한 대표권의 행사 방식 및 의사 결정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들도 이에 해당한다. 현재 대개 장로교의 경우 헌법상 당회(堂會)는 목사와 장로로, 제직회(諸職會)는 집사 이상의 직분을 받은 회중들로, 공동의회(共同議會)는 세례를 받은 모든 회중들로 구성된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가능한 한 전교인의 총의를 모을 수 있는 공동의회를 사실상 최고 의결기구로 재설정하였다. 만일 교회의 규모상 전교인의 총의를 상시적으로 모으는 것이 어려워 의사결정을 대의기구의 효율성에 상당 부분 의존해야 한다면 그 대의기구 자체를 기존의 직분 중심과는 달리 활동 단위 중심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 교회가 운영위원회를 둔 것도 그 예이다. 
이러한 변화의 시도들은 교회의 규모와 무관하지 않다. 대부분의 대형 교회는 목회자의 제왕적 카리스마에 의존하기 때문에 목회자와 신도들 사이의 수직적 관계가 고착되어 결과적으로 교회 구성원들은 침묵하는 다수로만 머물러 있다. 그 안에서 교회의 변화 필요성에 대한 문제의식도 희박하다. 오늘 현실에서 대형화된 교회들이 권력을 향한 욕망을 부추기는 반면, 의미 있는 변화들은 작은 규모의 교회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4. 능동적 주체로서 평신도의 자각

교회의 권위주의를 강화하는 여러 기제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교회 구성원 자체의 자각이 필수적이다. 그 자각은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문제시되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권력화 현상은 특정한 목회자들의 권력 욕망 때문에 빚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화된 교회 질서 안에서 목회자와 평신도의 공모 관계 안에서 빚어진 현상이다. 따라서 권력을 향한 공모의 구조를 해체하고 공평한 관계 형성을 향한 연대의 구조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교회 구성원 전체의 자각과 노력이 따라야 한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Wed, 13 May 2026 18:13:24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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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개신교의 탈을 쓴 극우세력 대 해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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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Mon, 11 May 2026 22:13:01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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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해”(2026.5.10. 성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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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해” / 교회학교]]></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10 May 2026 16:43:52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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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 마태복음 6:5~15 [유튜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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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2026년 5월 1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본문: 마태복음 6: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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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며, 과연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올바를까요? 본문 말씀은 그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올바른 자선(6:1~4) 및 금식(6:16~18)과 더불어 올바른 기도에 관해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길게 이어지는 산상수훈(마태 5~7장)의 한 내용으로서, 팔복선언(5:1~12)과 함께 그 핵심이 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앞부분은 기도의 방법 내지는 자세에 관한 것이고(5:6~8), 그다음 부분은 그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5:9~13).
의례화된 형식에 매인 종교를 비판하셨던 예수님의 평소 언행으로 볼 때 격식화된 어떤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 법도 하지만, 본문 말씀은 평소 예수님의 가르침과 잘 부합합니다.

성서에는 또 다른 주기도문이 나옵니다. 누가복음(11:2~4)에 나오는 주기도문입니다. 그 기도문은 마태복음의 그것과 거의 일치하지만 보다 간결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고,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성서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짧은 편집문이 긴 편집문 속에 완전히 다 실려 있다면 짧은 것이 더 원래적인 것이라 간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의 것보다는 누가의 것이 더 원래적인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주기도문보다 간결한 형태로 되어 있던 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서 전승되는 가운데 그 본래 뜻의 왜곡 없이 적절하게 보완되고 다듬어진 셈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예수님의 말씀으로서 기도의 내용이 전승되고 있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형태로 최종 기록된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앞부분은 진정한 기도의 태도와 방법을 일깨워 주십니다. 형식화된 종교를 비판하신 예수님의 입장이 아주 잘 드러나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할 때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회당과 큰길 모퉁이 곧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장소에서, 그야말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의 태도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정치적 성격을 띤 집회에서 영어로 기도하기도 합니다. 조찬 기도회에서는 권력자를 앞에 두고 찬사를 늘어놓으며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은밀히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내밀한 소통 행위입니다. 기도는 일방적인 자기 욕망의 표출이 아닌 하나님과의 내밀한 상호 교통입니다. 요란하게 떠들며 기도할 때 과연 내밀한 소통이 가능할까요? 자기의 큰 목소리 때문에 상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그것은 상호 소통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깊은 내면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기도가 됩니다. 
세 번째,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이방인들처럼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이방인들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세네카는 그렇게 자신의 욕망을 채워달라고 떼를 쓰며 내면의 평온을 찾지 못한 채 외부 환경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모습을 두고 “신들을 지치게 만든다”고 꼬집었습니다. 인간에게 언어가 의사소통의 결정적인 수단이지만, 혀끝을 통해 드러난 언어가 의사소통 수단의 전부는 아닙니다. 눈빛만 보아도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일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알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신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깊은 신뢰 가운데 내면의 깊은 대화야말로 진정한 기도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주신 다음에 예수께서는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내용을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늘 되풀이하고 있는 주기도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교회가 시작된 첫해, 그러니까 2000년 7월 30일에 국어학자 박창해 장로께서 주기도문의 의미와 더불어 우리말답게 번역한 주기도문을 제시해 준 이래 그 주기도문을 따르고 있습니다. 2003년도에는 수요 성서연구의 일환으로 주의 기도를 석 달간 12회에 걸쳐 공부한 적도 있습니다. 그때도 마지막 특강은 박창해 선생께서 맡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2004년 8월 22일 주일부터, 그 가사에 김삼락 교우가 우리 가락으로 곡을 붙인 ‘주기도문송’을 예배에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전통을 형성해 왔습니다. 그렇게 함께 애써온 헌신이 우리의 신앙을 형성하는 데 얼마나 소중한 유산이 되고 있는지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무려 12회에 걸쳐 그 뜻을 나눴던 과정을 재연할 수는 없습니다. 단 한 번으로 간결하게 그 뜻을 새겨야 합니다. 
주의 기도는 한 가지 부름말과 일곱 가지 비는 말과 한 가지 기리는 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비는 말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셔야만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세 가지와, 우리가 필요한 것을 비는 말 네 가지와, 기리는 말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박창해). 오늘은 그 의미를 하나하나 새길 수 없기에 그 기도문의 큰 뜻을 집약하여 헤아리고 새길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주의 기도는 아버지 앞에서 그 자녀들이 기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성적 역할을 함축하는 말이기보다는 ‘부모’, ‘어버이’로 관계를 맺는 분을 표상합니다. 다시 말해 주의 기도는 어버이와 자녀의 대화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대의 관념에 비추어 볼 때 놀라운 전환을 함축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도 놀랍지만, 그 뜻을 따르는 모든 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는 것은 신앙의 질적 전환을 뜻합니다. 위엄과 두려움으로 다스리는 분이 아니라 전적인 사랑과 신뢰 가운데 함께하는 분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주의 기도의 밑바탕입니다.
시인 윤동주는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하고 목이 메인 듯 호흡을 멈추었다가, ‘어머니’를 떠올리며 아름다운 삶의 기억을 고스란히 되살려냅니다. 주의 기도의 밑바탕은 그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 믿음의 바탕 위에서 주의 기도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의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땅의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전반부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달라는 기도입니다(9~10). 이 기도는 곧바로 땅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할 소망으로 연결됩니다. 일용할 양식과 용서를 구하고 아울러 유혹과 악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로 이어집니다(11~13).

사실상 산상수훈의 핵심에 해당하는 주의 기도는 예수님의 믿음을 드러내 주며,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정체성을 제시해 줍니다. 이 기도는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의 분리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곧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할 희망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마음 한켠에서 고고하게 지키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드는 사람은 그 뜻이 땅 위의 사람들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기를 염원해야 합니다. 
주의 기도는 그 진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늘을 향한 뜻과 땅을 향한 뜻은 그렇게 긴장 관계 속에서 얽혀 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 기도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사 밖을 바라다보면서도 동시에 역사 안을 향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현실의 굴레를 뛰어넘어 모든 것을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합당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그와 같이 주의 기도는 온전한 인간의 해방을 염원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민중신학자 문동환 목사는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주의 기도를 입에 올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독한 독설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주의 기도가 바로 그와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주의 기도는, 유식한 신학자의 신학적 담론도 교리주의자의 교리도 아닙니다. 바로 구체적인 땅의 현실을 처절한 아픔으로 느꼈던 이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 때문에 늘 허덕이는 현실, 서로 물고 물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 언제나 떨치기 어려운 유혹을 겪어야 하는 현실, 마음은 원이로되 도무지 선을 행할 수 없게 만드는 악의 현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실존적 체험이 주의 기도의 밑바탕입니다. 
그 현실은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고, 하나님의 뜻이 가로막힌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느꼈던 그 현실, 그리고 모두가 느끼고 있는 그 현실을 회피해서 위선적인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주의 기도는, 그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 진실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주의 기도가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의 기도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희망의 외침입니다. 그 믿음이 없이는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이 점에서 주의 기도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첫째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자각 없이 드릴 수 없는 기도요, 둘째 그러나 희망 없이 드릴 수 없는 기도, 그것이 주의 기도입니다. 
주의 기도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사건을 염원하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땅의 현실 가운데 평화스러운 하늘의 실재가 임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곧 주의 기도입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드리는 주의 기도는 빈말이 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삶 가운데서 그렇게 하늘과 땅이 만나는 체험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역사의 현장 가운데서 그 놀라운 사건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안에서 그 체험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하늘의 뜻이 땅에 이뤄지기를 바라는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이 땅의 삶 안에서 어버이로 부르고 자녀로 부르는 그 관계 안에서, 내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서, 신실한 믿음으로 함께하는 공동체 안에서 그 체험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그 모든 것들을 감사히 여기고 신실한 믿음으로 함께할 때 우리에게 그 놀라운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버이에게서, 자녀에게서, 함께하는 동반자에게서, 동료와 이웃에게서, 뿐만 아니라 전혀 낯선 이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면 놀라운 일이요 감사할 일입니다. 주의 기도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주의 기도를 반복할 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 가운데서 진정한 하늘의 평화를 누리고자 하는 소망을 다시금 확인하고, 그 놀라운 사건에 동참하기 위한 결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10 May 2026 14:31:4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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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추모사 - 기독교민주인사 온라인추모관 봉헌에 붙여]]></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74]]></link>
			<description><![CDATA[제2회 기독교민주인사 추모의 날 공동추모예식
사)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기독교민주인사 추모위원회
2026년 5월 7일(목) 오후 4시 / 한국기독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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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5/2026050702-scaled.jpg"><img class="alignnone size-large wp-image-26531" src="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5/2026050702-1024x768.jpg" alt="" width="821" height="616" /></a>

추모사 - 기독교민주인사 온라인추모관 봉헌에 붙여

최형묵(한국교회인권센터 이사장)

추모사를 해야 한다는 권유를 받고, 곧바로 한 일은 ‘기독교민주인사 온라인추모관’을 둘러보는 일이었습니다.(https://kochdemo.imweb.me/27)
기록되어 있는 분들의 면면을 일일이 살펴보았습니다. 대부분 어른들과 선배들이었습니다. 상당수는 저와 가장 가까웠던 친구 김흥겸을 포함하여 동년배들도 있었습니다. 더러 젊은 후배들도 있었습니다. 친구와 선생님, 여러 어른을 포함 가까이 뵐 수 있었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일부는 직접 뵙지 못했어도 대부분 그 이름을 기억하고 삶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번에 떠오른 것은 ‘동시대성’이었습니다. 그 숭고한 삶을 사셨던 분들과 같은 시대를 지나왔다는 느낌입니다. 동시에 아마도 그분들의 옷자락이라도 만져본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다가왔습니다. 생생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그분들의 삶을 기록하여 후대에 넘겨주는 일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였습니다.

“망각은 노예의 길이지만, 기억은 구원의 신비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경구입니다. 우리가 ‘기독교민주인사’를 추모하는 것도 그 뜻과 같습니다. 그분들의 삶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들의 삶이 지니는 의미를 오늘 계승하고 내일로 이어가기를 바라는 뜻입니다. ‘기독교민주인사’라는 말이 제한된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쉽지만, 사실은 그 말이 미처 포함하지 못한 훨씬 깊은 의미를 담고 있을 것입니다. 정치적 사건의 맥락에서 드러나는 삶의 의미만을 포착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삶의 의미, 곧 민주화를 위하여, 뿐만 아니라 인권의 신장을 위하여, 평화를 위하여 헌신한 분들의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계승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를 올곧게 실현하고자 한 숭고한 삶을 기리며 이어받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남동 선생님과 안병무 선생님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교는 ‘죽음’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죽임’을 문제시한다고 했습니다. 부활신앙은 그 ‘죽임’에 맞서 ‘살림’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추모하는 분들의 삶이 바로 그 살림의 길이었습니다. 국가의 폭력과 일상화된 구조적 폭력에 의해 삶이 죽임당할 때 그에 맞서 진정한 삶을 회복하고자 하는 숭고한 뜻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분들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것은 바로 그 삶을 이어받고자 하는 뜻을 지닙니다.

온라인추모관을 둘러보면서 새삼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잘 알지 못했던 분들의 대부분은 여성들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아내였고 누군가의 어머니였던 분들입니다. 물론 홀로였던 분도 계십니다. 정치적 사건의 표면에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단지 조력자로서뿐 아니라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고, 때로는 길거리에서 큰소리를 외친 분들입니다. 그간의 시선과 기억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습니다.
그 편향된 시선에서 포착되지 않았던 분들의 삶을 기록하고 추모함으로써, 그 추모의 뜻은 깊어졌습니다. 우리가 추모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삶, 그리고 이어받고자 하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 그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모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해야지” 시인 윤동주의 그 다짐은 죽어가는 것들을 살려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살림의 의지였습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그 역할을 맡아준 여성들의 그 숭고한 삶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시선이 더욱 넓혀지기를 바랍니다. 소수자의 삶을 몸소 겪었거나 대변한 이들도 더불어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마음 깊이 추모할 분들이 계시고, 기억할 수 있는 그 삶의 유산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커다란 축복입니다. 우리는 그로 인해 자긍심을 지니고 희망을 주는 교회의 일원으로 지금 현실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 유산이 박제화된 기록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뜻으로 이 땅에 진정한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Thu, 07 May 2026 21:58:2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9"><![CDATA[논단]]></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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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트럼프와 교황은 왜 싸우나?]]></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73]]></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042G1ha66OY?si=x3efA072vNhFf0CL"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Wed, 06 May 2026 22:47:3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1"><![CDATA[토론마당]]></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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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우리 교회의 공동예배 형식]]></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72]]></link>
			<description><![CDATA[2026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 교회 깊이알기
2026.5.6.(수) 오후 7:00시 / 최형묵 목사

우리 교회의 공동예배 형식

1. 예배의 의미

예배는 신앙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직접적 계기라는 측면에서든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라는 측면에서든 예배는 교회공동체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2. 천안살림교회 예배 형식의 기본 틀과 취지

천안살림교회 예배양식은 세계의 모든 교회가 공통으로 드릴 수 있는 예배를 지향한 리마예식의 취지를 따르되, 그것을 간소화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리마예식(Lima Liturgy)은 1982년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 총회에서 채택한 “세례, 성만찬, 사역”(Baptism, Eucharist, Ministry)의 ‘리마문서’중 예식 부분을 뜻한다. 그것은 말씀과 성만찬을 동등한 비중으로 삼는 것을 요체로 하며, 이를 따르는 것은 에큐메니칼한 세계교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공통의 예배정신을 따르려는 취지를 지닌다.
이에 더하여 우리 교회는 가능한 한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공동체 참여’를 중심으로 하는 예배를 지향한다.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오늘 시대 상황에 대해 예민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뜻하는 한편 역사적으로 주어진 문화적 유산을 향유하고 그로부터 형성된 감성을 예배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뜻한다. 그 바탕 위에서 회중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드려 참여하는 예배를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예배는 마땅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그러기에 예배의 그 기본정신을 구현하되, 그 뜻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는 오늘의 예배를 구현하려고 한다. 가톨릭교회가 ‘영성체’를 중심으로 하고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가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를 구현해 왔다면, 오늘의 교회가 새로운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공동체 참여’를 중심으로 하는 예배를 드리지 못할 까닭은 없다.     
 
3. 천안살림교회 예배의 고유한 내용들

우리 교회를 처음 찾은 이들은 찬송가 밖의 노래들과 전통 악기를 사용하는 점을 낯설게 느낀다. 2014년에 발간한 우리의 고유한 찬송가 &lt;살림의 노래&gt;는 애초 찬송가를 대체하는 취지로 엮어낸 것이지만 기존 찬송가와 병행하고 있다. 새로운 찬송가가 필요했던 것은 기존의 찬송가가 오늘 우리의 신앙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찬송가는 그 가사가 지나치게 타계지향적이고 개인주의적 기복신앙에 치우쳐 있다. 다른 나라의 교회들도 꾸준히 새로운 찬송가를 엮어내고 있는 것도 한 자극의 계기였다. 그래서 엮어진 찬송가 안에는 민중적 복음성가 및 전통가락으로 만들어진 찬송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전통악기로 반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lt;살림의 노래&gt;가 출간된 지도 10여 년이 지나 더 보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찬식은 세례와 상관없이 예배에 참석하는 회중 누구나 모두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것이 세례와 상관없이 누구나 동등하게 참여하는 개신교의 예배정신에 부합한다. ‘개방(open)’의 전통이든 ‘제한(closed)’의 전통이든 각기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겠지만, 한 자리에 참여하고 있는 회중이라면 누구나 차별 없이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교회공동체의 정신을 온전히 구현하는 길이다. 
공동체 참여의 정신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예배의 구성요소는 직분에 제한받지 않는 회중기도와 평신도 설교이다. 
우리 교회의 공동예배중 대표기도는 장로 등 특정한 직분에 한정되지 않는다. 정제된 언어로 준비된 기도는 맡은 당사자에게는 스스로 삶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며, 회중 모두에게는 큰 감동이 되기도 한다. 아마도 천안살림교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시대와 호흡하며 일상의 경험을 신앙적으로 성찰하고 있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예배요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예배에서 평신도의 적극적 참여와 능동성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평신도 설교이다. 안수받은 목회자의 말씀만 배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된다는 관념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평신도의 설교를 배제해야 할 이유는 없다. 집사 직분으로 불리는 스데반도 설교하였다(행 7장). 물론 신학적 소양을 갖춘 목회자의 설교와 평신도의 설교 성격이 같을 수는 없다. 평신도 설교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신앙고백적 성격을 띠고 있어서 맡은 당사자에게는 더 깊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며 회중들에게는 삶에의 공감 속에서 큰 감동을 누리는 계기가 된다. 이를 통해 평신도는 목회자의 입장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고, 신도들간 서로 삶에 대한 이해 또한 깊어져 공동체성을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지닌다. 

4. 예배에서 목회자의 역할과 설교

다른 교회에서 일반화되지 않은 예배 형식과 내용을 일정 부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파격적인 것만은 아니다. 여전히 예배에서 목회자의 비중은 크고, 그만큼 목회자의 책임 또한 무겁다. 한국교회에서 목회자의 설교 비중은 지대하다. 대개 교회를 처음 찾는 이들이 목회자의 설교를 최우선하는 판단기준으로 삼듯 우리 교회를 처음 찾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공동체 참여 중심의 예배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목회자의 설교 비중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우리 교회 예배 설교 본문은 헤른후트 형제단의 성서일과를 따르고 있다. 성서일과(聖書日課)는 매일 말씀을 묵상하기 위하여 구약성서, 시편, 서신, 복음서 순으로 성서를 읽도록 안내하는 전례를 뜻한다. 여러 전통이 있지만, 그 가운데 우리 교회는 헤르후트 형제단의 성서일과를 따르고 있다. 헤른후트 형제단은 체코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전통과 1457년 결성된 보헤미아 형제단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독일로 이주한 형제단은 친첸도르프 백작을 만나 헤른후트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공동체 생활과 세계 선교가 시작되었다. 헤른후트 성서 일과는 1728년 친첸도르프가 공동체에 전한 짧은 영적 문구에서 비롯되었으며, 1731년부터 매년 출간되었다. 친첸도르프는 이를 ‘주님과 공동체 사이의 지속적인 대화’라 불렀다.
우리 교회의 예배 설교는 기본적으로 성서 본문주석에 충실한 편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적용되는 현실의 사건들에 대한 통찰이 덧붙여진다. 물론 언제나 완전하게 준비된 원고에 근거하여 선포된다. 설교자의 입장에서는 예민한 시대정신으로 말씀의 뜻에 접근하고 있으니 만큼 언제나 양자의 균형을 맞추고자 애쓰고 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이라고 하였다.

5. 과연 얼마나 다른가?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공동체 참여 중심의 예배를 온전히 구현하고 있을까? 여전히 전통적인 색채가 강한 것은 아닐까? 하나님을 섬기는 회중들의 예배의 정신을 지키는 한에서 좀 더 우리의 신앙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예배를 구현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나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Wed, 06 May 2026 16:50:5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7"><![CDATA[인문교양강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북간도 명동촌 이야기]]></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71]]></link>
			<description><![CDATA[2026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 교회 깊이알기 – 반태경, &lt;북간도의 십자가&gt;(2019)
2026.4.22.(수) 오후 7:00시 / 최형묵 목사

북간도 명동촌 이야기

1. 한국 교회의 다양한 신앙형태

1. 한국 교회 안에는 다양한 신앙 형태가 있고, 그것은 대체로 일제 강점기에 그 원형을 형성하였다. 그것은 교회 안의 신앙으로 그치지 않았다. 새로운 나라 만들기 또는 한국 근대화의 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1. 주로 부흥회를 통해 형성된 교회 대중의 신앙은 내세지향적 성격을 뚜렷이 지니게 되었다. 위기가 일상화된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 신앙은 가장 일반적인 경향이 되었다. 
1-2. ‘자아개조 민족주의’(Kenneth Wells)로 일컬어지는 민족의식에 투철한 서북지역 기독교 선각자들(이승훈, 안창호 등)은 반공주의와 미국적 자유주의로 한국사회를 구상하였다. 이 흐름은 훗날 『사상계』를 중심으로 결집하며, 한국 근대화 구상에 가장 뚜렷한 유산을 남겼다.
1-3. 간도지역의 민족운동과 주로 캐나다 선교사들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형성된 신앙의 전통(김약연, 김재준, 강원용, 윤동주,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등)은 한국적 근대화에 대한 대안으로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에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1-4. 오늘날 잊혀진 전통이 되었지만,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그 선구자가 된 기독교인(이동휘, 여운형 등)의 전통도 재조명되어야 한다.
1-5. 소수이지만 『성서조선』그룹(김교신, 함석헌 등)과 그 후예들(유달영, 이찬갑, 장기려 등)의 신앙은 여전히 한국사회에 의미있는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반국가주의와 함께 자율적 신앙공동체를 추구한 이들의 실천은 오늘날 조합운동과 대안적 삶의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2. 북간도 지역의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

2-1. 북간도 명동촌은 일제에 의한 조선 강점이 노골화되고 있던 1899년 무렵 함경도 회령과 종성에 살던 네 가족의 이주로부터 시작되었다. 김약연, 남도천, 문병규, 김하규 네 집안의 이주였다. 이 가운데 문병규는 문익환 목사의 할아버지, 김하규는 외할아버지가 된다. 이들 가문은 모두 실학의 후예들이었으며, 김하규는 동학에도 가담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이 가족들의 이주는 단순히 호구지책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을 교육하여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일으킬 인재를 기르자는 뜻이 이주의 주요 동기였다. 처음에 이들 가족은 서당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쳤으나 신학문의 필요성을 느껴 근대식 학교로서 명동학교와 명동여학교 등을 세웠다. 이 근대식 학교를 세운 것이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젊은 교사 정재면이 부임 조건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가문의 지도자들은 고심 끝에 그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로써 명동촌에는 중요한 또 하나의 정신적 기둥으로서 기독교 신앙이 자리하게 되었다. 
2-2-1. 명동촌의 첫 번째 기둥으로서 민족주의의 색채는 어떤 것이었을까?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운명을 다시 일으켜 세울 인재를 양성하고자 북간도로 이주하여 명동촌을 설립한 동기가 말해주듯, 민족주의는 명동촌을 이끌어간 가장 중요한 기둥이었다. 문익환의 어머니 김신묵 권사의 증언에 의하면, 작문시간에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다는 말이 없으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었다고 할 만큼 그 정신은 압도적이었다. 학교의 체육시간마저 독립을 위한 군사훈련의 기회가 될 정도였다. 실제로 명동촌은 숱한 독립지사들이 드낙거리는 중요한 민족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2-2-2. 명동촌을 세운 기둥으로서 민족주의는 실학과 동학에 그 젖줄을 대고 있었다. 이주한 가문을 대표하는 이들은 모두 유학에 정통하였지만 그들이 체화한 유학은 봉건체제를 뒷받침하는 고루한 성리학이 아니었다. 이들은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넘어 민중의 실생활을 개선하는 데 관심을 둔 실학의 후예들이었다. 그 가문의 지도자들은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시간 외에는 실제로 농민들과 다르지 않은 생활을 몸소 실천하였다. 땔감을 등짐으로 나르고, 물지게를 짊어지고, 외양간의 쇠똥을 치우고, 집의 온돌을 고치고 벽을 바르는 일을 모두 손수 감당하였다. 
2-2-3. 이러한 실생활 속에서 형성된 명동촌의 민족주의를 ‘민중적 민족주의’라 부르는 데 주저할 까닭은 없다. 이 개념은 같은 명동촌의 경험을 공유한 안병무 선생에 의해 훗날 정착된 것이지만, 명동촌의 기둥으로서 민족주의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2-3-1. 명동촌의 또 하나의 기둥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성격은 어땠을까? 처음 명동촌에 기독교 신앙을 전해 준 정재면 선생은 서울 상동청년학원에서 기독교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근대학문을 익히고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의 파송으로 명동촌에 오게 되었다. 명동촌의 지도자들은 신학문의 필요성에 절감하여 정재면 선생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기도 했지만 그의 능력과 인품에 대한 신뢰 또한 그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몫을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명동촌에는 점차 신앙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고, 명동촌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의 주요 가치들을 받아들여 내면화하게 되었다. “성서 안에 담긴 사랑, 정의, 평등, 해방과 같은 사상이 애국심에 불타고 있는 청년들에게 크게 감명을 주었다.” 여기서 북간도 명동촌의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은 매우 자연스럽게 결합하였다. 
2-3-2. 여기에 더하여 명동촌의 기독교 신앙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또 하나 중요한 변수가 있었다. 그것은 캐나다 선교부의 영향력이었다. 초기 한국 선교에서 선교사들간의 경쟁을 조정하기 위해 선교지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었고, 그에 따라 캐나다 선교부가 함경도지역과 북간도지역을 선교지역으로 맡게 되었다.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이 대체로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하였던 반면 캐나다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은 자유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들의 개방적 신앙과 신학은 교육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문익환 목사를 비롯하여 여러 동학들이 은진중학교에서 김재준 목사의 가르침을 받은 것도,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캐나다 유학으로 근본주의 신학에서 탈피하게 된 것도 그 영향하에서였다. 그 개방적 신앙과 신학의 영향하에서 기독교 신앙의 보편적 가치들을 삶의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참여신학으로서 한국의 진보신학은 중요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명동촌의 선구자들에게서 기독교 신앙은 세계를 향한 문이자 동시에 수난당하는 민중을 향한 해방의 복음으로 인도하는 길이었다. 

3. 북간도 지역 신앙의 유산

3-1. 여기서 우리가 새삼 확인해야 할 것은 북간도 명동촌의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이 어떤 관계를 형성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문익환 목사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어른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을 때 그들은 종교를 조국광복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기독교에 진지한 자세로 다가선다. 그들에게는 어떤 새로운 가르침이라도 진지하게 알아보려는 구도 정신이 있었다. 신교육의 모체인 기독교를 소화하다 보니 기독교와 유교를 민족애라는 용광로 속에 완전히 녹여서 새로운 세계관, 인간상을 찍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3-2. 훗날 민중신학을 정초한 또 한 분인 서남동 목사는 ‘두 이야기의 합류’를 말했다. 성서와 기독교 역사의 민중전통과 한국 민족사의 민중전통이 당대 한국 그리스도인의 실천 가운데 합류한다는 의미였다.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의 민중현실로부터 형성된 것이지만, 그와 같은 고유한 신학적 통찰을 가능하게 했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바로 이와 같은 명동촌의 선각자들에게 그 뿌리가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익환을 비롯해 문동환, 안병무 등 민중신학을 정초한 이들의 공통 경험은 오랜 기원을 갖고 있는 것이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Wed, 06 May 2026 16:49:5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7"><![CDATA[인문교양강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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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종교영화 보며 우리 교회 깊이알기 – 마틴 스코시즈, &lt;사일런스&gt;(2016)]]></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70]]></link>
			<description><![CDATA[2026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 교회 깊이알기 – 마틴 스코시즈, &lt;사일런스&gt;(2016)
2026.4.8.(수) 오후 7:00시 / 최형묵 목사


마틴 스코시즈, &lt;사일런스&gt;(2016)


1. 영화 &lt;사일런스&gt;
 
1-1. 마틴 스코세이지의 2016년 영화. 엔도 슈사쿠의 1966년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근세 일본의 가톨릭 탄압 속에서 고뇌하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종교적 성찰을 그렸다.
1-2. 영화는 일본으로 파견된 포르투갈 예수회의 선교사인 페레이라 신부의 서신으로부터 시작된다. 나가사키를 비롯한 일본 전역에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고 있는 현장에 대한 보고인 서신. 그리고 발리냐노 신부는 그 서신이 마지막 보고였음과,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수사 로드리게스와 수사 가르페에게 전한다. 이 두 수사는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들이었기에, 풍문으로 들려오는 페레이라의 소식, 배교했음을 믿지 못하겠다며 자신들을 일본으로 파견해 달라고 간청한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하던 발리냐노 신부는 이 두 젊은 성직자들의 간청을 들어주며, 마지막 선교사로 이 두 신부를 일본으로 보낸다.


2. 작품이 그리고 있는 내용의 역사적 배경

2-1. 16세기 오다 노부나가의 치세 때 성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신부에 의해 일본에 가톨릭이 전해졌다. 오다는 애초에 종교에 부정적인 사람이라, 불교든 가톨릭이든 신경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에 이르러 가톨릭의 교세가 커지면서 불교나 신토와 충돌하는 양상을 보이자 도요토미는 이를 막으려고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다.
2-2. 하지만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유럽과 교류하고 있었던 탓에 히데요시는 기독교를 탄압하지는 않았으며 묵인하는 수준이었고, 고니시 유키나가 같은 기리시탄 다이묘도 있었다. 
2-3.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 막부가 성립하면서 달라진다. 특히 에도 막부는 점차 가톨릭을 일본 사회를 위협하는 요소로 보게 되었고, 이는 박해로 이어진다(1614년부터). 시마바라의 난(1637년) 이후 대규모 박해가 이어지면서 일본의 가톨릭 신자는 위축되었고 ‘카쿠레키리시탄’과 같이 음지로 숨어들어 활동하게 된다. 영화는 1638년 선교사들이 항해를 시작한 것으로 시작한다.
2-4. 이후 200년이 넘게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이 이어졌고 기독교는 가혹한 탄압을 당하여 지하에서 활동해야 했다. 나중에 에도 막부가 종식되고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개화하여 종교의 자유가 생기면서 가톨릭이 다시 합법화되고, 그즈음에 ‘카쿠레키리시탄’(숨은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발견된다(1865년).
 

3. 소설 『침묵』

3-1. 작가 엔도 슈사쿠는 세상을 떠나기 4년 전  『침묵』 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수필  『침묵의 소리』를 간행했다. 이 수필에서 엔도는 원래의 제목이 “햇살의 향기”라는 사실을 밝혔다. 제목만을 보고 독자들은 신의 침묵을 그린 작품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던 점으로 미루어 엔도는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침묵의 소리”라는 의미로서의 침묵이었다고 부연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3-2. 엔도의 신 이해, 즉 하나님 이해는 인간을 초월한 능력의 존재로서 배반하고 버리고 방탕하고 거부하는 의지박약자들을 향해서 위에서 아래로 사랑의 햇빛을 쏟아 내려주는 존재로 인식된다고 할 수 있다(최순육). 
3-3. “역사에서도 말살당했던 그리스도교인들, 그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lt;침묵&gt;하고 있었으나 나는 그 오랜 침묵 속에서 신의 음성을 듣고 싶었다. 역사 속에서 그 침묵의 그리스인들의 고통을 되살리고 그 속에 나 자신의 마음을 투영하는 것이 이 소설을 써냈던 동기이다.”(엔도 슈샤쿠)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고독과 두려움, 육체적 고통, 이들을 함께 치유한 것은 타자로부터의 감각적인 응대였다(최순육).


4. 영화보기

어떻게 볼까요?]]></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Wed, 06 May 2026 16:48: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7"><![CDATA[인문교양강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19 / 5.10.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69]]></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X-dhkz94dec

2. 오늘 오전 10:20에 당회 모입니다.

3. 오늘 어버이주일 공동예배에 함께한 어린이들과 청소년, 그리고 교사들에게 감사합니다.

4. 지난주일 공동의회 결과
① 추경예산안 편성(부목사 목회자연금 추가 외 일부 항목 금액 조정),
② 4월 재정보고,
③ 5/17 전교인 운동회 일정을 확인하였습니다.

5. 다음 주일(5/17) 오후에 청년회 주관으로 전교인운동회가 천안시 장애인 체육관에서 열립니다.

6. 2026년 상반기 수요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교회 깊이 알기”가 계속 진행됩니다. 주제와 관련하여 특별 프로그램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6] 5월13일(수) “우리 교회 직제와 의사결정 구조”(최형묵)
[7] 5월20일(수) “천안지역 종교문화유적”(송길룡)
[8] 5월27일(수) “사진으로 보는 우리교회 초기모습”(송길룡)

7. 교우들의 독서모임이 23일 오후 2:30에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을 주제로 하여 진행됩니다.

8. 담임목사
11(월) 오후 4시 ‘서울의 소리’ 유튜브 생방송 “내란세력 대해부”
12(화) 오후 2~5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민중신학의 탐구” 출강
14(목) 오전 11시 한샘교회 / 대전노회 국제협력선교위원회
14(목) 오후 6:30 원성동공유공간 / 미래를여는아이들 이사회]]></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Wed, 06 May 2026 16:45: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축복의 씨앗”(2026.5.3.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68]]></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5/song20260503.mp3"][/audio]
“축복의 씨앗” / 교회학교 교사]]></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03 May 2026 17:00:4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 누가복음 19:37~40[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67]]></link>
			<description><![CDATA[2026년 5월 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본문: 누가복음 19:37~40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ntPeDmvHe1I?si=HfjkZeyuKSUi82NM"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갈릴리 민중들과 함께하셨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장면은,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지향하셨던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 가운데는 여러 가지 기대가 뒤섞여 있고 서로 엇갈리기도 하지만 적어도 예수에게서는 지향하는 바가 분명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그 뜻을 세상에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 일행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전합니다(마태 21:1~11; 마가 11:1~11; 요한 12:12~19). 큰 뜻에서 일치하고 그 세부 사항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복음서가 그 사건을 전합니다. 나귀를 타고 환호를 받으며 입성하는 장면입니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는 일화를 의미심장하게 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 자아내는 긴장된 장면입니다.
제자들이 환호합니다.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19:38) 이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천사들의 찬양과 같습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2:14) 
누가는 의도적으로 유사한 찬양구로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를 일관하는 의미를 드러냅니다. 만천하에 당신의 삶이 뜻하는 바를 드러내는 정점에 이른 순간 누가는 탄생의 의미로 부여했던 그 내용을 다시 환기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방향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 탄생 때 천사들의 노래는 하늘의 영광이 땅 위에 평화를 이루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예루살렘 입성 때 제자들의 환호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땅의 평화가 하늘의 영광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탄생의 뜻이 삶으로 구현되었다는 것을 누가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그 환호가 이어진 다음 뜻밖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서 말합니다. 대화의 분위기로 보아 여기서 등장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딱히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부 바리새파 사람들과 식사를 종종 나눴습니다(7:36; 11:37; 13:31~33; 14:1). 그만큼 예수님과 친분이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정색하며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19:39) 그러자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19:40)
이 수수께끼 같은 대화 내용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언뜻 생각하면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하고, 깊이 생각하면 오히려 도무지 그 깊은 뜻이 무엇인지 아리송해집니다. 

먼저 바리새파 사람들의 요청은 어떤 뜻을 담고 있을까요? 제자들의 환호를 중단시켜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 의중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신변이 위험에 처할까봐 걱정해서 한 소리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어떤 의미에서든 왕으로 떠받는 것 자체가 가당치 않다는 자신들의 믿음 때문이었는지 딱 꼬집어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왕으로 떠받드는 것 자체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예수님과 친분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삶으로부터 중요한 지혜를 깨우치고 따라서 존경받을 만한 선생님으로 여겼지만 감히 왕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환호성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제법 현명한 사람들인 것은 분명하지만 자신들의 지식과 지혜의 세계 안에서 그저 예수님의 삶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세상의 권력자들과 어떻게 질적으로 다른지, 바로 그 점에 대해서는 미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셈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환호성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그런 말은 입에 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그런 맥락에서 봐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들은 할 말을 하고 있다. 말 못할 까닭이 없다. 만약 저들이 말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예수님의 이 답변은 제자들이 해야 할 소리, 할 수 있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제지해야 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저들이 말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이 말씀은 생각하기에 따라 그 뜻이 자명한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마땅히 말해야 할 사람이 말하지 않으면 뜻밖의 사람, 심지어는 미물을 통해서라도 그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통상 그렇게 이해하고 있고, 이 말씀을 관용적으로 사용할 때도 그런 뜻을 유념합니다. 매우 시적인 은유라고 할까요? 이와 유사한 용례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후 뜰에서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고쳐 주었을 때 아이들이 ‘호산나!’ 외치는 것을 보고 어른들이 화를 내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게 하셨다.”(시편 8:2) 이 말씀으로 응수합니다(마태 21:16).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지적으로 탁월한 사람보다도 오히려 무지렁이 취급받는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 또는 어린아이가 사태의 진실을 훨씬 잘 꿰고 있는 경우도 흔합니다. 심지어 세상 만물이, 어떤 미물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어마어마한 탄식을 외칩니다. 오늘 이른바 인류세라는 불리는 시기에 자연의 탄식이 그렇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2) 사도 바울의 이 통찰이 함축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만큼 예민한 감각을 지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또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 1:28) 복음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그 뜻을 새기며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누가복음은 어찌 보면 매우 평범한 그 진실을 더 심각하게 새기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이 등장하는 누가복음의 문맥은 매우 긴장감이 돕니다. 앞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바로 앞에는 ‘열 므나의 비유’(19:11~21)가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마태 25:14~30)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곡해되고 있지만, 사실 그 비유는 포악한 권력자 헤롯 대왕의 첫아들 헤롯 아켈라오스가 명령을 순순히 따르지 않는 이들을 처단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19:28)면서 벌어진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예루살렘 도성을 보면서 우시는 장면이고(19:41), 이어 성전을 정화한 사건(19:45~48)이 이어집니다. 폭력으로 지배하며 민중의 고혈을 짜내서 세운 도성과 성전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탄식하는 내용입니다. 그 맥락에서 보면, 그 웅장했던 성벽과 집들이 무너져 내리고, 허망하게 나뒹구는 돌들을 보게 될 때야 비로소 진실을 알아차리겠느냐 하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누가복음은 그 사건이 일어난 주후 70년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 이 표현은 예언서 하박국에서 등장하고 있고, 그 맥락 또한 심각합니다. “담에서 돌들이 부르짖으면 집에서 들보가 대답할 것이다.”(하박 2:11) 하박국의 이 예언은 자신들의 집안을 부유하게 할 목적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높은 곳에 좋은 집을 짓고 사는 지도자들을 질책하는 맥락에서 등장합니다. 민중의 고혈이 배인 그 집이 울부짖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은 이렇게 긴장된 맥락 안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수님의 대화를 의도적으로 배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훨씬 심각한 의미를 지닙니다.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 그 말이 함축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배제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누가복음의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특정한 사태를 유념하고 하신 말씀이라면 그 말씀은 더욱 심각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 파국에 이르러서야 알겠느냐? 그 파국에 이르기 전에 진실을 깨우치고 외치는 제자들을 나무라야 할 까닭이 무엇이냐?’ 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그 내용상 대비의 초점은 진정한 삶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민중들의 고혈을 짜내며 폭력으로 침묵의 평화를 유지하는 권력체제가 어떻게 다른지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그나마 힘의 우위에 의한 평화의 허울마저 벗겨지고 벌거벗은 지배의 욕망이 일으킨 전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오늘의 세계 가운데서 이 말씀은 더욱 절절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놈들아,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이 사람들아, 더 이상 속지 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절규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아이들과 온 가족이 잔해 밑에서 끌려 나오는 모습을 목격했다. 우리는 구조대원들이 잔해 속에서 살아 있는 사람을 찾으려 애쓰는 모습을 보며 고통스러워했고, 실종된 자녀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 있기를 바라는 부모의 절규에 함께 울었다. ··· 우리는 뼈만 남은 듯한 굶주리는 아이들의 모습에 마음이 무너졌고, 발전기 연료가 떨어지면 죽을 위험에 처한 인큐베이터 속 아기들의 사진에 분노했다. ··· 우리는 마취 없이 수술을 받는 이야기, 마취 없이 절단 수술을 받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우리는 포격으로 부모와 헤어진 아이들이 병원에서 부모를 찾아 이름을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 수천 명의 난민이 텐트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그들이 폭격을 피해, 혹은 드물게 나타나는 식량 트럭을 향해 절박하게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슬퍼했다.”(문터 아이작, 『왜 세계는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에 침묵하는가? - 잔해 속의 그리스도』, 40~42)
돌들의 외침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외침입니다. 그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전쟁을 계속하는 이들을 두고 사람이라 불러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어떤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할까요? 고귀한 생명을 지닌 우리의 어린아이들이 평화로운 세계에서 꿈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떤 길을 따라야 할까요? 
돌들이 소리칠 때야 비로소 화들짝 놀랄 만큼, 우리의 능력은 미약하지 않습니다. 파국에 이르러서야 사태의 진실을 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진실을 조금 더 가까이 깨닫고, 그 길을 신실하게 따름으로서, 저마다 삶의 평화를 누리고,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03 May 2026 14:37:5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18 / 5.3.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66]]></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noCjrHjPiFo 

2. 오늘 어린이세례를 받은 이봄 어린이(부모 이상명 류지혜)를 축하합니다!

3. 오늘 어린이·청소년주일 공동예배에 함께한 어린이들과 교사들에게 감사합니다. 다음주 어버이주일에도 함께합니다.

4. 오늘 공동예배후 월례 공동의회가 있습니다(안건: 4월 재정보고 및 추경예산안 편성, 주요일정 점검).

5. 5월 예배 및 봉사 담당안이 준비되었습니다.

6. 5월 셋째 주일(5/17) 오후에 청년회 주관으로 전교인체육대회가 천안시 장애인 체육관에서 열립니다.

7. 2026년 상반기 수요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교회 깊이 알기”가 계속 진행됩니다.
  [5] 5월06일(수) “우리교회의 공동예배형식”(최형묵)
  [6] 5월13일(수) “독일 헤른후트형제단의 성서일과”(최형묵)
  [7] 5월20일(수) “천안지역 종교문화유적”(송길룡)
  [8] 5월27일(수) “사진으로 보는 우리교회 초기모습”(송길룡)

8. 담임목사
   5(화) 오후 2~5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민중신학의 탐구” 공휴일 휴강
   7(목) 저녁 8시 [온라인] 녹색교회네트워크 임원회의
   9(금) 정오 서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 2026년 인식조사 연구 모임]]></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01 May 2026 15:57:1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chan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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