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프레스 KBoard 피드 http://salrim.net/wp-content/plugins/kboard/rss.php 워드프레스 KBoard 피드 <![CDATA[적대의 정치와 자본의 권력]]> Fri, 26 Apr 2024 22:02:24 +0000 논단 <![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4-17 / 4.28. 주보)]]> Thu, 25 Apr 2024 17:28:30 +0000 살림소식 <![CDATA[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 요한복음 14:18~24[이성철 전도사]]]> Mon, 22 Apr 2024 18:26:54 +0000 설교 <![CDATA[민중신학 이야기 마당 - 『민중신학 개념 지도』 (동연, 2023)를 중심으로]]> Mon, 22 Apr 2024 10:11:19 +0000 논단 <![CDATA[예수에게서 하나님을 만났다면 - 사 53:1~7; 고전 1:18~31; 마 25:34~40[향린교회/유튜브]]]> 자주 드낙거릴 뿐 아니라 여러 인연이 있지만, 향린 강단에 서는 일은 처음입니다. 불러 주셔서 영광이며, 감사드립니다. 설교 요청을 받을 때 특별한 주문이 있었습니다. 민중신학의 당대적 의미와 미래 전망을 이야기해 주면 좋겠다는 요청이었습니다. 사실상 강연 주제로 어울리는 요청인데, 예배 설교로 감당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강연과 설교를 늘 하지만, 그 언어와 격식을 구분해 온 입장에서 이를 통합해야 해서 조금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성서 본문 말씀은 민중신학적 모티프를 잘 보여 주는 전거들에 해당합니다. 그런 만큼 민중신학자들이 자주 인용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고난받는 종으로서 메시아를 말하고 있고, 마태복음의 말씀은 최후 심판의 맥락에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과 그리스도의 동일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민중 메시아론의 핵심적 모티프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그에 상응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나타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택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경륜을 일깨워 줍니다. 민중신학은 성서의 핵심으로서 그 말씀들이 전하는 진실을 당대의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되새기며 성찰하는 데서 형성되었습니다. 민중신학이 전태일 사건의 충격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거시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 단일한 사건의 충격에 앞서 일련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사건이 그 정치사회적 상황을 함축하는 하나의 극적인 사건이라는 점에서 전태일 사건을 계기로 민중신학이 탄생했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민중 메시아론의 출발점도 사실은 그 사건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사건이 발생한 직후 발표된 오재식의 “어떤 예수의 죽음”은 민중 메시아론의 단초를 보여 주는 의미심장한 글입니다. 추모사 형식을 빌은 이 글은 부제로 ‘고 전태일씨의 영전에’라고 명기하고 있을 뿐 정작 본문에서는 단 한 번도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새기고 있지만, 곧바로 전태일의 죽음을 떠올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거꾸로 전태일의 죽음에서 예수의 죽음을 실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1980년 광주항쟁 직후 시인 김준태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의 언덕을 넘어가는 ... 하느님의 아들”을 노래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분투하는 이들이라면 그 상상력과 절절한 마음을 교리적 잣대로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압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만났다면,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민중에게서 예수를 만나는 경험을 하는 것이 결코 낯선 것은 아닙니다. 엄혹한 시대 상황 가운데서 그 상상력은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1970년대 초반 시인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 그리고 옥중 메모 “장일담” 등은 아주 두드러진 사례였습니다. 일정한 서사 형식을 갖춘 이 이야기들을 통해 신학자들은 더욱 강렬한 자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점차 신학적 담론의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에서 예수가 ‘눌린 자들’,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 ‘멸시받는 자들’과 함께한 것처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들과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고 고백했을 때, 그것은 민중 메시아론을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인식은 성서의 증언 자체를 재조명하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역사적 상황으로부터 자극을 받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성서의 증언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분리 불가는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민중 메시아론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형성되고 구체화되었습니다. 서남동은 민중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민중은 “생활가치를 생산하고 세계를 변혁시키며 역사를 추진해온 실질적 주체이면서도 지배권력으로부터 소외·억압되어 천민·죄인으로 전락했”지만, “역사의 발전에 따라서 자기의 외화물(外化物)인 권력을 원자리로 되돌리고 하나님의 공의 회복을 주체적으로 이끌어서 그로써 구원을 성취하도록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인식을 공유한 민중신학자들에게서 민중 메시아론은 본격화되었습니다. 안병무는 특별히 민중 예수가 일으킨 사건을 주목했습니다. 안병무는 예수를 개인적 인격으로 파악하는 것을 거부하고 집단적 인격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민중 예수’는 예수 그 자신이 민중을 대표한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언제나 민중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가운데 더불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예수와 민중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주체와 객체로 분리되지 않고 혼연일체로서 주체를 형성합니다. 안병무는 혼연일체로서 그 주체가 일으킨 사건 속에서 역사적 예수의 진면목을 찾습니다. 그 사건은 이천 년 전 갈릴리 역사적 현장에서 일어난 유일회적 사건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화산맥이 분출하듯, 끊임없이 역사 가운데서 재연됩니다. 안병무가 전태일사건을 서슴없이 예수사건이라 말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안병무는 바로 그 민중사건을 증언하는 것이 민중신학의 핵심적 과제라고 천명하였습니다. 서남동의 민중 메시아론은 그의 선명한 신학적 틀로서 ‘두 이야기의 합류’ 구조 안에서 해명됩니다. 서남동은 한 맺힌 민중들의 한풀이 이야기 가운데서 ‘고난받는 민중의 메시아성’과 ‘한의 속량적 성격’을 주목하였습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신학이 말하는 죄로부터의 구원과는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한마디로 “죄란 지배자의 언어이고 한은 민중의 언어”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그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는 반면 민중의 언어로서 한은 그 자체로 속량적 성격을 지닙니다. 지배체제에 의해 쌓인 한을 민중이 스스로 극복해가는 한풀이에서 그 속량적 성격이 드러나며 그것이 곧 민중의 메시아성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민중의 한풀이는 단지 개인적 원한에 대한 복수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한에 매인 자신을 해방할 뿐 아니라 한을 쌓는 사회구조를 변화시킴으로써 세상을 구원하는 역할을 뜻합니다(恨과 斷의 변증법). 민중은 스스로가 ‘한의 사제’로서 역할을 맡습니다. 민중 스스로 해방하는 능력을 주목한 것입니다. 민중의 메시아성은 한국 민중의 이야기에서는 물론 성서가 증언하는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이사 52:13-57:12)에게서, 또한 그 메시아적 전망을 실제로 구현한 예수 그리스도(마태 25장)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나아가 서남동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누가 10장)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한의 그리스도’ 역할을 맡는 것으로 재해석하기도 하였습니다. 민중의 메시아성에 대한 통찰은 김용복에게서도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김용복은 ‘정치적 메시아니즘’과 ‘메시아적 정치’를 구별하고, 민중 가운데서 민중을 주체화하는 ‘메시아적 정치’의 본보기로서 예수의 길을 강조하였고, 그 길을 ‘종의 도’라 일렀습니다. 김용복은 이사야서의 고난의 종과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 정치의 결정적 전거로 삼습니다.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민중을 역사적으로 무력한 존재로 만들거나 비주체적인 대상으로 만듭니다. 반면에 예수의 메시아적 정치는 민중을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역사적인 주인들로 만듦으로써 민중의 역사적인 주체성을 실현하는 정치학입니다. 이 점에서 메시아적 정치는 민중의 메시아적 정치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메시아적 정치는 현대의 모든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폭로하고 새로운 대안을 열어 줍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신학적 통찰과 더불어 민중신학은 신학하는 방법을 변화시키고, 신학적 지평을 확장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신학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켰습니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분리불가’(안병무), ‘두 이야기의 합류’와 ‘계시의 하부구조’(서남동) 등의 개념은 신학하는 방법의 전환을 단적으로 말해 줍니다. 이로부터 신학은 교회의 언어로 한정되지 않고 민중들이 처해 있는 삶의 현장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가치들과 소통하는 신학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적 지평의 확장과 소통의 강화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안병무의 ‘공(公)의 신학’입니다. 그것은 성서의 핵심이자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요체로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당대의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구체화하고자 한 신학적 성찰의 시도였습니다. ‘공(公)의 신학’이 1980년대 민중운동의 절정기에 반자본주의적 전략의 모색과 더불어 폭발한 사회구성체 논쟁과 긴밀히 소통하고자 한 신학적 성찰의 시도였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화로서 ‘공’(公)의 신학은 공적인 것의 소멸 현상이 노골화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더욱 절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해방과 분단 이후 한국 사회는 한편으로는 눈부신 발전을 이뤘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한국 사회는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몇 차례에 걸친 정권교체가 있었고, 2016-17년에는 촛불항쟁으로 새로운 변화가 기대되었지만, 1987년 민주화항쟁 이후 변화한 것에 비하여 과연 얼마만큼 변화되었을까요? 경제개발 시대 주도권을 쥐어왔던 지배세력은 변화되지 않았고 지금도 경제성장 제일주의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경쟁과 효율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고 있으며 사회적 정의와 평화는 뒷전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고, 그에 편승하여 사회적 차별과 혐오의 정치가 폐해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효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7년 전 촛불민의를 따라 새 정부가 구성되었을 때만 해도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는 낙관적이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우익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상황에서도 예외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에 안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촛불정부로 일컬어진 지난 정부하에서 그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재벌·금융·행정·사법·언론 등이 결탁한 기득권 카르텔이 강고하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고, 그 세력은 2022년 두 차례에 걸친 선거를 통해 다시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강화한 세력이 오히려 공정을 내세우며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그렇게 등장한 정치세력은 시장의 법칙을 전면에 내세워 능력주의와 경쟁주의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날 것의 신자유주의 기조 위에서 정책을 펼쳤습니다. 환경과 에너지 대안은 뒷걸음치고, 남북 및 국제관계에서도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검찰권력을 기반으로 하는 ‘법치주의’로 정치 자체가 실종되었습니다. 국민이 양분되어 심각한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사이 한국은 ‘독재화하는 국가’ 군으로 전락했습니다. 이번 4월 10일 22대 총선으로 그 정치세력에 대한 심판이 이뤄졌지만, 전망이 그렇게 낙관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집권세력의 폭주를 제어하고 권력구조를 개편하는 의미 있는 성과가 기대되지만, 민중의 주권을 확고히 하고 삶의 권리를 확장하는 사회구조의 개편은 아직 요원해 보입니다. 심판을 받은 집권세력은 아직도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고, 제1야당 세력이 그 집권세력과 그 이해관계를 얼마나 달리하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더더욱 주변세력으로 전락한 노동자와 소수자를 대변할 진보정당이 사실상 괴멸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향후 전망을 낙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적과 동지를 이분화하는 세계적 세력판도와 그에 편승하는 정치세력이 득세하는 세계적 형국 가운데서 어떤 세력도 문제해결의 전망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더욱 암담합니다. 한국적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형성된 비판적 성찰 담론으로서 민중신학의 문제의식은 바로 그 현실 가운데서 새삼 조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통찰은 공적인 것의 소멸 현상이 심화하는 오늘의 현실을 넘어설 뿐 아니라, 공을 사유화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체제와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을 넘어서는 실천적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어떤 신학이든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신학은 각기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진지하게 신앙의 문제에 응답하는 시도일 뿐입니다. 어떤 신학이든 각기 시대적 소임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시대적 소임을 다했다고 해서 그 신학의 생명력이 다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특정한 시대의 빛나는 통찰은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가운데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오백 년이 넘은 종교개혁의 신학은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천년이 다 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그보다 더 오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또한 여전히 재해석되는 가운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천 년이 넘었고, 구약의 지평으로 연장하면 수천 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서남동은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정신을 회복한 것이 민중신학입니다. 그 복음의 정신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던 신학의 생명력이 다 했다면 아마도 가난한 자들에게 기쁨이 되는 소식이 굳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여전히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절실한 세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갈등과 분쟁이 지속되고 있고 그 가운데서 고통을 겪는 이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민중신학의 생명력 또한 지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물론 민중신학이 표방한 몇 가지 명제를 교조화하는 것으로 이뤄질 수는 없습니다. 그때그때마다 창의적인 해석이 더해질 때 그 생명력은 지속될 것입니다. 민중신학의 소임은 다했다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그다지 변하지 않고 사람들의 고통이 여전한 상황 가운데서, 혹시라도 안락함의 유혹에 빠지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민중신학은 그 유혹에 빠진 삶을 방해하는 등에와 같은 역할로 끊임없이 일깨울 것입니다.* [파송사]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말씀의 진실과 더불어 우리의 신앙의 지표를 새삼 확인하고 정진하기를 바랍니다.*]]> Sun, 21 Apr 2024 17:02:00 +0000 설교 <![CDATA[“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2024.4.21. 성가)]]> Sun, 21 Apr 2024 16:57:47 +0000 영상(음악) <![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4-16 / 4. 21. 주보)]]> Thu, 18 Apr 2024 10:40:06 +0000 살림소식 <![CDATA[“꽃들도”(2024.4.14. 성가)]]> Sun, 14 Apr 2024 14:52:48 +0000 영상(음악) <![CDATA[더 멀리 보시는 하나님 - 창세기 16:1~16[유튜브]]]> 본문 말씀은 흥미롭고도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정실 사라와 그 아들 이삭의 이야기를 잘 기억합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소실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 이야기는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성서를 선민의 구속사에 관한 이야기로만 바라보는 시선 탓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성서는 그 시선을 벗어나는 전망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서는 사라와 그 아들 이삭에 관한 이야기뿐 아니라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에 관한 이야기 또한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 유대인과 아랍인의 기원이 되는 인물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이삭은 유대인의 조상으로, 이스마엘은 아랍인의 조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물론 성서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사라와 이삭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물론 오늘 그리스도인 역시 그 전승을 따르고 있습니다. 반면에 무슬림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중심으로 하는 전승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이야기가 모두 기록되어 있는 성서를 보면서 우리는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두고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할 터인데, 두 이야기가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면 더더욱 그것이 뜻하는 바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성서 창세기가 전하는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를 환기해 볼까요? 나이가 들어도 자식을 갖지 못한 아브라함은 그의 부인 사라의 몸종인 이집트 여인 하갈에게서 첫아들을 얻습니다. 그가 이스마엘입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정실 사라에게서 약속의 아들을 보게 했다고 전합니다. 그 아들이 아브라함의 적통을 잇습니다. 아브라함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정실에게서 태어난 까닭에 첫째가 됩니다. 반면에 첫째 아들인 이스마엘은 종의 신분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까닭에 서자가 되고, 결국 두 모자는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대개 여기까지 기억합니다. 성서 시대 그리고 오늘의 유대인들, 또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여기까지만 기억합니다. 약속의 자식인 이삭이 첫째가 되고 따라서 그 후손이 선민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인간적 계획에 따른 자식인 이스마엘은 적자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쫓겨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오늘의 유대인과 아랍인에게도 그대로 적용합니다. 선민이 땅을 차지할 수 있는 반면 내쫓긴 민족은 유리방황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산입니다. 성서는 또 다른 기억과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또 다른 기억과 이야기를 발견해 내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는 것이요 우리의 편견을 걷어내는 길입니다. 스스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장벽을 걷어내는 길입니다. 성서는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또 다른 진실을 전합니다. 유대인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선민의식에 빠져 있는 탓에 보지 못했던 진실을 성서는 분명히 전합니다. 하갈과 이스마엘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 안에 있으며 그들 또한 하나님의 복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16:1~16, 21:8~21)는 그 진실을 증언합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환기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손에 대한 약속을 받았으나 아브람에게는 여전히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람의 가족은 ‘결손’ 상태였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심각한 결손이었습니다.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고 희망은 가시화되지 않았습니다. 바라던 바가 이뤄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요? 희망을 확증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을 찾기 위해 부심합니다. 그 때 선택하는 것은 방법은 대개 사람들에게 익숙한 방법입니다. 도통 희망이 가시화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브람과 사래는 초조해졌습니다. 그들은 결국 당대 사회에서 아주 익숙한 방법을 찾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하나님이 약속을 이뤄주시지 않는 것으로 알고 남편 아브람에게 방법을 제시합니다. 자신의 몸종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어정쩡한 아브람은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고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때가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다고 하니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은 매우 익숙한 당대의 관습을 따릅니다.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할 때는 부인이 결혼할 때부터 데리고 온 몸종을 통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부인의 친자식으로 간주되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때 몸종은 부인의 무릎 위에서 아이를 낳음으로써 그 아이가 주인의 친자식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승인하였습니다. 아마도 아브람과 사래는 그 관습을 채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희망을 이루기 위한 정도를 따르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는 사람들이 그것이 정당하고 합법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믿는 것처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 기자는 당대의 관습을 따르는 그 방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내비칩니다. 아브람과 사래 부부가 궁리 끝에 찾은 방법을 시행한 순간 그 가족은 심각한 갈등관계에 빠지고 맙니다. 사래의 몸종 하갈이 잉태했다는 사실을 안 순간 하갈은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합니다. 사래는 그 사태를 용인할 수 없었습니다. 사래는 사태 해결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남편 아브람에게 항변합니다. 자신의 몸종이었던 하갈이 종의 신분을 벗어나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당연히 취할 수 있는 태도였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그야말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합니다. ‘당신의 종이니 당신 뜻대로 처분하라’는 태도입니다. 당시 관습에서 여주인의 몸종은 여주인의 권한 안에 있었으므로 아브람의 태도가 그 관습에 비추어 잘못될 것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그 골치 아픈 상황을 스스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아내에게 떠넘긴 셈입니다. 사래는 하갈을 학대합니다. 그 학대를 견디지 못한 하갈은 결국 스스로 도망치고 맙니다. 주인의 아기를 가진 여종의 경우 부인으로 대우하지 않더라도 내다 팔거나 쫓아낼 수 없도록 한 것이 당시 관습이었습니다. 사래는 하갈을 쫓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스스로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도망치도록 유도한 셈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 또한 인간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아브람의 역할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가 이 사태를 두고 수수방관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두 여인네 앞에서 아브람은 어찌할 줄 모르는 어정쩡한 가장이었습니다. 사실상 쫓겨난 셈이지만, 도망치는 길을 택한 하갈의 모습은 그 성격이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종이 생존하는 방법은 주인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종의 처지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갈은 여주인에게 당하는 굴욕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무슨 묘책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도저히 스스로 용인할 수 없는 사태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입니다. 도망치던 하갈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 하소연합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그에게 해법을 제시합니다. 주인에게 돌아가 순종할 것을 명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되돌아갈 것만을 명하지는 않습니다. 하갈과 그 아들을 축복하는 약속을 합니다. 하갈의 하소연을 하나님께서 들었다는 의미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도록 하고 그 자손이 번성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합니다. 고통의 울부짖음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곤경에 처한 이들의 고통의 호소를 들으십니다. 성서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자식이 아니라 인간적 계획을 따른 자손이라 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저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희생자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주목하고 고통의 호소를 들어 주십니다. 그 고통의 호소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하갈은 감격합니다. 그 자리에서 하갈은 하나님을 뵙습니다. 하나님을 뵈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을 직접 뵈면 성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감격합니다. “내가 여기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 하갈은 하나님을 만난 샘물을 ‘브헬라해로이’, 곧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고 합니다(16:13~14). 무슬림들은 메카 성지순례를 할 때 꼭 행하는 의례가 있습니다. 샘물 주위를 숨가쁘게 왔다갔다 하는 의식입니다. 하갈과 사라가 목말라 했을 때 샘물을 발견하여 목을 축인 일을 환기하는 의식입니다. 그 이야기는 최종적으로 쫓겨났을 때도 나오는데, 그 장소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이슬람 전통에서는 메카 부근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호소 가운데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의 호소를 듣고 그 후손에 대해 축복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그 후손들은 마치 들나귀와 같고 모든 사람과 싸우고 자기 친척을 떠나 살 것이라 합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아라비아 사막 지대를 살아가는 베두인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 이야기는 보기에 따라서 경멸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은 경멸의 의미보다는 경탄의 의미가 강합니다. 강인한 삶을 살아가는 베두인에 대한 경탄의 의미입니다. 그것은 굴욕적인 삶을 거부한 어머니 하갈의 삶과 닮았습니다. 천사를 만난 후 하갈은 집으로 돌아왔고, 마침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날 때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대할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복합적인 심경에 빠집니다. 인간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를 먼저 연상할 수도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이해를 따라서입니다. 여러 상상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선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계획을 넘어 더 멀리 보시는 하나님의 안목입니다. 사람들의 계획에 따라 갈등이 발생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그 사태 가운데서 약자의 편에서 문제를 선하게 수습해 가시는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사람보다 더 멀리 보시는 하나님의 경륜은, 이삭이 태어나고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이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 더욱 극적으로 재연됩니다. 약간의 먹을거리와 겨우 물 한 부대로 브엘세바 광야에서 헤매던 모자가 고통으로 울부짖을 때 다시 하나님께서는 그 울부짖음을 들으십니다.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에 누어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아이를 안아 일으켜, 달래어라.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21:17~1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눈을 밝혀 샘물을 찾게 했다고 전합니다. 내쫓겨 절망의 상황에 빠진 모자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목마름을 해결해 줄 생수를 주셨으며 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삭의 이야기와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함께 보면 다소 미묘합니다. 두 이야기는 엇갈리는 두 가지 중요한 동기를 동시에 보여 줍니다. 선민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쫓겨난 이들의 탄식과 신음을 듣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는 쫓겨난 이들이 곧 선민으로 동일시될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 선민이 누군가를 배제하는 상황에 부딪히면 난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삭의 하나님을 생각하면, 이스마엘의 하나님을 전하는 본문 말씀은 그 난처한 상황을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성서 본문이 그 난처한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어서 천만다행입니다. 선민을 택하신 것이 그 밖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선민의식이 고통받는 이들의 신음을 외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과 동일화될 수 없다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잔인한 살육을 감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본문을 어찌 해석할까요? 배타적 선민의식 때문에 장벽 너머 고통받는 이들의 신음을 외면하는 현실은 세계 도처에서, 우리 삶의 현장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 적대와 갈등을 부추기는 일에 동참해서는 안 됩니다. 긴장감을 자아냈던 제22대 총선이 끝났습니다. 그 결과를 보고 여러 생각이 엇갈립니다. 다른 언급은 자제하겠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소수정당이 괴멸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커다란 숙제를 오히려 더욱 극명하게 환기해 주고 있습니다. 정치는 정치인들의 몫이라고 돌려버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적대와 증오를 극복하고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 그리스도인은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의 사태를 두고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우리 사회를 염려하며 더 멀리 보는 안목이 우리에게 요청됩니다. 그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만의 울타리 안에 안온하게 머무는 사람들에 앞서 그 울타리와 장벽 너머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먼저 들으시는 진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아니, 사람들은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장벽을 쌓기에 급급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장벽을 무너뜨리기를 원하신다는 진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진정으로 거듭난 존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Sun, 14 Apr 2024 14:29:25 +0000 설교 <![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4-15 / 4. 14. 주보)]]> Fri, 12 Apr 2024 15:39:06 +0000 살림소식 <![CDATA[“십자가의 길 따르리”(2024.4.7. 성가)]]> Sun, 07 Apr 2024 16:45:27 +0000 영상(음악) <![CDATA[보고도 믿지 못하는 세상, 보지 않고도 믿는 세상 - 요한복음 20:19~29[유튜브]]]>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건을 전하는 복음서의 기록들은 한 가지 점에서 모두 일치합니다. 그 등장인물들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부활의 첫 목격자가 한결같이 여인들이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라다니며 섬기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는 그 어디에도 이들이 열두 명의 제자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고 전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이 여인들을 향한 당시의 시선을 잘 말해줍니다. 예수님에게는 성적 차별이 없었습니다. 여자라고 해서 말씀을 배우고 전하는 역할에서 배제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던 여인들은 분명히 사도들과 다르지 않는 몫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사도의 반열에서 제외된 것은 후대 교회의 시선을 반영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이 부활의 첫 목격자로 등장합니다. 이는 그 여인들이야말로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소외된 이들이야말로 부활의 진실을 가장 먼저 깨우친다는 진실을 말합니다. 남들의 주목을 받는 사람들은 부활의 의미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유대 사회의 최고위층에 해당하는 사두개인들은 아예 부활 신앙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예수의 부활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누이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을 들어 알고 있었음에도, 정작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처음에는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여인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부활을 받아들입니다. 부활은 일상의 삶 자체가 주목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그래서 사실상 죽음과 같았던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사건이었습니다. 요한복음 역시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먼저 나타나셨다는 진실을 전합니다(20:12~18).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의 앞부분입니다(20:19~23). 부활하신 예수께서 먼저 여인들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은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놀라운 부활의 사건이 일어나는 진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 전반부, 곧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는, 죽음의 힘 앞에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있는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평화’로 임하신다는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제자들은 충격과 공포로 두려워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아예 마음의 문마저 걸어 잠그고 있었다 할 것입니다. 그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 문을 열고, 그들의 닫힌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스라엘에서 “평화!” 곧 “샬롬!”은 일상적인 인사말입니다. 우리말의 인사말과 똑같습니다. “안녕!”과 같은 뜻입니다. 그저 일상적인 인사말에 지나지 않은 것 같지만, 예수께서는 평소에 누누이 그 인사를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을 축복하실 뿐 아니라, 제자들을 파송할 때에도 그렇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말도록 당부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그 ‘평화’의 의미를 소중히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은 바로 그 ‘평화’를 위해 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서에서 ‘사랑’과 ‘평화’는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서에서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단 한번 밖에 사용되지 않은 반면, ‘평화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일곱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평화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도대체 어째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평화를 강조하셨고, 초대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렇게 평화를 갈망했을까요? 역사를 보면 아이러니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평생의 기간은 전쟁이 없었던 시기입니다. 옥타비아누스가 황제 아우구스투스로 등극한 그 시기는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로 일컬어지는 태평성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활동하신 기간은 바로 그렇게 로마가 태평성대를 누린 시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로마의 지배력이 세상 곳곳에 미쳐 평화가 정착되었다고 믿는 바로 그 시기에, 예수님은 ‘평화’를 기원하는 목소리를 외치고 다니십니다. 이 사실이 아니러니합니다. 평화의 시기에 평화를 외치고 다니신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평화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로마제국 영토 곳곳에 평화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데, 예수님은 “평화가 없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잘나가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평화가 아니라 하는 일마다 꼬이는 사람들, 그래서 삶 자체가 고통인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충격과 공포로 내리치는 힘 앞에서 목소리를 죽이고 있을 뿐, 그 삶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부활의 사건은, 그렇게 숨죽이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내린 평화입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내린 평화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금 그 평화의 소망을 오늘 일깨우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기원할 뿐 아니라, 그 평화를 이루는 길을 또한 제자들에게 일러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해 주면 사해질 것이요, 사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0:23). 하나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그것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받음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쌓았던 장벽을 허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의 의미는 매우 구체적입니다. 추상적인 도덕적인 죄라기보다는 사람들을 ‘죄인’의 상황으로 내모는 현실을 말합니다. 누가 그렇게 ‘죄인’으로 내몰렸습니까? 가난한 사람들과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악해서 죄인이 된 사람들이 아니라 힘이 없어서 정죄 받고 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멸시받는 사람들입니다. 살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일이 안 풀리는 사람들입니다. ‘죄를 사하라’는 말은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를 거두어 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장애를 딛고 일어서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세상에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된 사람들은 계속 남을 것이며, 따라서 평화가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 ‘죄’의 장벽을 없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곧 그 장벽이 사라지는 사건이 곧 부활사건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은 그 놀라운 이야기 다음에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의 예수 부활체험 이야기입니다. 어쩐 일인지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주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말했을 때 도마는 자신이 보지 않고 만져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여드레째, 그러니까 부활 후 일주일이 지난 후 예수께서 도마에게도 나타나십니다. 역시 문이 잠겨 있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지난번과 똑같이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다음 도마에게 자신을 만져 보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도마가 만져 보았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고서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20:28) 도마는 예수님에 대해 최고의 극적인 고백을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20:29). 흔히 이 이야기는 의심 많은 제자 도마를 깎아내리는 이야기로 해석되고 인용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그러한 이해는 의심하고 따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교회의 전통이 만들어 낸 일종의 곡해일 뿐입니다. 여기서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에 대해 최고의 고백을 하는 제자로 등장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베드로의 고백(마태 16:15, 마가 6:29, 누가 9:20)에 상응하는 고백을 하는 제자로서 몫을 맡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도마는 믿음이 부족한 제자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디지만 충직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11:16; 14:5 참조). 늦깎이 또는 대기만성형이라고 할까요? 의심이 많아서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생각이 많아서 물음이 많고, 그래서 얼른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받아들일 때 확실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서 믿은 사람은 도마뿐이 아닙니다. 여인들도 그랬고, 다른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더욱이 요한문서는 ‘보고, 듣고, 만져본 것’을 강조합니다. 요한서신은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자세히 살펴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 본 것”(요일 1:1)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직접성, 관계의 친밀성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자들이 그렇게 보고 만져 본 것처럼 생생하게 예수 그리스와 삶을 공유한 것을 큰 복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질책이 아닙니다. ‘나를 보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더 복이 있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서가 기록된 상황을 반영합니다. 빨리 잡아도 80년, 아니면 대략 100년 어간이 요한복음의 기록연대인데, 이즈음이면 실제로 예수님과 삶을 함께 나눈 세대는 다 사라진 상황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그 그리스도인을 두고 격려하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를 축복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데, 어째서 도마가 보고서야 비로소 믿었다는 이야기를 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살아계셨을 때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삶의 연속성을 말합니다. 문이 닫혀 있는데도 아무 문제 없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셨다는 것은 부활이 이전의 상태와는 다른 극적인 변화를 뜻합니다. 그렇지만 제자들, 그리고 도마가 보고서 믿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 목격한 예수가 다른 예수가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삶을 살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바로 그 예수라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은 실제 역사 한 가운데서 사랑의 삶, 평화의 삶을 보여주셨던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비로소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확고하게 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첫 세대는 자신들이 직접 목격하고 만져 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삶 가운데 되살아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 적이 없는 그다음 세대는 어떻게 그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요? 결국 이들은 첫 세대, 곧 첫 번째 증언자들의 증언의 진정성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이 보고 만져 본 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게 된 구체적 경로는 첫 번째 증언자들의 증언의 신실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증언은 단순히 말이 아니었습니다. 언행이며, 곧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는 이중의 상황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보지 않고도 믿는 복을 누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 번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믿는 바를 삶으로 증거해야 하는 증언자의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신뢰의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 근거들이 없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내가 보지 않아도 누군가는 마땅히 해야 할 몫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 없으면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보고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들 또한 숱하게 경험합니다. 보니까 더더욱 믿을 수 없는 일들 천지 아닙니까? 10년 전 우리는 생중계되는 TV 화면을 통해 세월호가 서서히 잠겨가고 있는데도 단 한 사람도 구하지 못하는 믿기지 않은 현실을 보았습니다. 보니까 믿을 수 없는 우리 사회 모든 현상의 가장 선명한 본보기입니다. 그 어처구니없는 일은 10년이 지나는 동안 숱한 형태로 재연되었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우리의 삶이 가까이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 없거니와 먼 곳에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아도, 진실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그런 존재, 그런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Sun, 07 Apr 2024 16:20:19 +0000 설교 <![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4-14 / 4.7. 주보)]]> Fri, 05 Apr 2024 15:14:35 +0000 살림소식 <![CDATA[산업화·민주화 역동적 모순관계 안에서의 한국 근대화]]> ]]> Thu, 04 Apr 2024 09:42:22 +0000 논단 <![CDATA[총선을 앞두고 진보정당의 역할을 말한다?]]> 총선을 앞두고 진보정당의 역할을 말한다? 최형묵(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1. 총선 국면에서 진보정당의 역할을 말한다? 1-1. 총선 선거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국면에서 진보정당의 역할을 묻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이미 게임의 규칙이 확정되고 그 규칙대로 경기가 진행중인 상황에서 선전을 기대하며 응원하는 것 말고 뭘 더할 수 있을까? 1-2. 더욱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양상을 볼 것 같으면 그나마 그 기대와 응원도 민망한 상황이다. 이미 정해진 거대 양당의 대결구도에 ‘조국혁신당’의 돌풍까지 겹치면서 진보정당의 입지는 더욱 위태로워지고 있다. 결과는 지켜봐야겠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면 그야말로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그레고리 헨더슨) 양상이 곧바로 떠올려진다. 그 거대한 소용돌이 가운데 진보정당의 존재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정당의 역할을 묻는 것은 부질없는 것으로 보인다.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1-3. 그럼에도 진보정당의 역할을 묻는 의미는 무엇일까? 진지하게 마련된 이 자리에서 초 치는 소리를 할 수 없으니 그 의미를 다시 캐묻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언제나 힘쓰는 자세로 그 역할을 확인하고자 하는 데 오늘 논의의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현재 총선을 코앞에 둔 단기적 국면에서는 별 의미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중장기적 국면에서는 충분히 따져봐야 할 과제이기에 바로 그 점에서 오늘 논의가 의미 있다고 할 것이다. 2.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2-1. 2016년 촛불 항쟁에 이어 2017년 새로운 정부가 등장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는 낙관적이었다.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퇴행 현상이 현저해진 상황에서도 한국 민주주의는 예외적으로 진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2-2. 그러나 그 평가와 기대가 무너진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22년 제20대 대선에서 비로소 그 위기가 감지된 것은 아니었다. 2020년 제21대 총선 이후부터 그 기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기본권을 확대하여 탄탄한 민주주의 공화국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집권 거대 여당의 무능을 확인하는 데서부터 무너졌다. 제20대 대선 결과는 사실상 그 필연적 결과일 수도 있다. 2-3. 우리는 그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국 사회 기득권 세력의 강고한 지배구조를 확인하였고, 그것은 기존의 거대 정당에 의한 정권교체만으로 쉽사리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른바 재벌, 금융, 행정, 사법, 언론 등 여러 분야의 선출되지 않은 전문가들이 선출 권력을 제약할 뿐 아니라 통제하고 있는 실상을 확인하였다. 그에 대응하여 민주주의적 규율을 확대하여야 할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고스란히 보존하면서 정권 장악을 위한 당리당략에 몰입하는 현상을 지켜봐야 했다. 국민의 기본권과 대표권을 확장할 수 있는 정치는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한국 민주주의가 위태로운 기반 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2-4. 지금 우리가 진보정당의 역할을 묻는 것은 그와 같이 위기에 처해 있는 한국 민주주의 상황 가운데서 그 위기를 돌파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정치세력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에 다름 아닐 것이다. 과연 그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이는 긴 호흡으로 마주해야 하는 과제일 수밖에 없다. 3. 한국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진단과 대안 3-1. 오늘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는 입장에서 과연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고 어떻게 그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까? 이는 그저 객관적인 정세분석이 아니라 현재의 위기 상황을 돌파하고자 하는 뜻을 지닌 이들에게 주어진 주체 형성의 과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두 가지 입장을 주목하고 싶다. 3-2-1. 사회학자 백승욱은 그 위기를 돌파하려는 세력에게서 나타나는 ‘분석의 부재’와 ‘의지의 과잉’을 지적하고 있다(백승욱, 『1991년 잊힌 퇴조의 출발점 – 자유주의적 전환의 실패와 촛불의 오해』, 2022). 단순하게 요약하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위기의 상황을 낳은 구조적 요인에 대한 분석 없이 그저 민중의 결집된 의지로 그 상황을 돌파할 수 있다는 의지의 낙관주의만 넘쳐난다는 진단이다. 3-2-2. 백승욱은 1987년 이후 한국 역사를 단순히 ‘위대한 민중 승리의 역사’와 ‘계속 지속돼야 할 적폐 청산의 역사’로 보는 관점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며, 1987년의 위기를 ‘자유주의적으로 전환’하며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한 1991년을 주목한다. 정태춘이 ‘92년 종로, 장마에서’ 노래한 그 어간의 시점이다. 지배구조의 측면에서 보자면 준전시 체제하에서 위로부터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한 유신체제를 개방 지향적 자유주의적 경제구조로 전환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던 시점이었다. 3당 통합은 그런 시도의 일환으로 등장했고 재벌개혁의 시도가 부분적으로 시작되었다. 사회운동 세력은 그 상황에서 ‘PD 3파 통합’과 ‘전노협 해소’를 거치며 노동운동 현장에서 철수하고 합법적 혁신정당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이 시기는 제도적 측면에서 두 가지 변화를 특징으로 한다. 경제 관리 측면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종료되고 자유주의적 시장 관리 방식이 자리를 잡았고, 또한 공권력의 중심이 안기부에서 검찰로 이동하면서 ‘법치’의 제도화가 이뤄졌다. 요컨대 1991년은 한국 자본주의 축적구조를 유지하는 통치성의 수선기로서 경제적 자유주의와 법률 자유주의가 제도적 수선을 거쳐 새롭게 결합한 계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불안정한 체제였다. 3-2-3. 백승욱은 오늘의 정치적 위기가 그 유산의 기반 위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로부터 나타나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 돌파는 그 구조에 대한 분석에 기반하고 그것을 내파할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3-3-1. 다른 한편 진보정당에 몸담은 이력을 지닌 철학자 김상봉은 오늘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근원으로 ‘영성의 부재’를 꼽고 있다(김상봉, 『영성 없는 진보 –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 2024). 그 영성의 요체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사랑,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으로 집약된다. 그 믿음이 병들었기에, 현존하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부정에만 머물렀을 뿐 한국 민주주의가 공화국으로서 자기를 형성하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3-2. 김상봉은, 동학혁명 이래 우리의 역사가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져들지 않고 의미 있는 진보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에 응답하고, 모두의 선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이 이 땅에 많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그렇게 해서 이뤄진 한국 민주주의가 오늘 심각한 위기 증상을 드러내고 있다. 정치가 상대를 폭력적으로 제거하거나 제압하려는 대결로서 사실상 내전 상태로 퇴행하였다. 마치 한국전쟁 이전의 적대적 대립 상태를 방불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승패의 전략·전술만 남은 정치 현실을 꼬집는 지적이다. 3-3-3. 정치를 영성과 관련시키는 문제의식은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솔깃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신학자가 해야 할 말을 철학자가 대신해 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특정한 신앙을 가진 이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공동선을 위한 보편적인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는 정치적 주체들을 향한 주장이라는 점에서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3-4-1. 두 주장은 언뜻 보기에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상반된 의견을 제기한 것처럼 보인다. 한편은 ‘의지의 과잉’을, 한편은 ‘의지의 결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지’와 ‘영성’이 서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단순 대립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서로 완전히 다른 접근방법을 취하는 두 입장은 오히려 서로 접목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그 제안자들의 동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3-4-2. 두 입장에서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놀랍게 일치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 정치가, 적과 동지를 이분법으로 가르는 칼 슈미트적 정치구도에 가깝다는 진단이다(백승욱, 16; 김상봉, 30). 다만 한편에서는 ‘분석의 부재’를, 한편에서는 ‘영성의 부재’를 지적하고 있는 점에서 그 차이가 확연하게 다르다. 여기서 민주주의 위기 현상을 진단하는 원인으로서 분석의 부재와 영성의 부재가 동일한 수준에서 서로 맞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석’은 현상에 접근하는 방법을 의미하고, ‘영성’은 문제시되는 현상을 넘어 대안을 지향하는 정신적 지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를 종합하는 관점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냉철한 현실분석에 기초하여 그 지향하는 바를 뚜렷이 제시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3-4-3. 이는 매우 장기적인 과제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다급한 선거 국면에서 그 누구에게든 귀에 잘 들어올 리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 위기라고 불릴 만큼 심각한 문제를 노정하고 있는 현재의 정치구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의해야 할 과제이다. 4. 다시 총선 국면에서 진보정당의 역할을 말한다 4-1. 거듭 뼈아프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소수 진보정당들에게 제22대 총선을 앞둔 오늘의 상황은 참담하다. 이와 같은 상황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국민 대표성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선거제도 개혁이 이뤄졌어야 했다. 물론 이에 앞서 국민적 주권을 강화하는 헌법 개정과 더불어 국가보안법의 폐지 또한 이뤄졌어야 했다. 어느 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거대 양당 구도에서 소수 진보정당의 역부족을 자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불행하게도 제22대 총선이 끝난 이후에도 그 선거제도 개혁이 이뤄질지는 매우 불투명해 보인다. 앞서 문제시한 정치구도가 당분간 상당한 생명력을 지닐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혹 의미있는 변화와 더불어 다른 가능성이 있을까? 4-2. 그러나 거대 양당 구도하에서의 진보정당의 역부족을 탓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진보정당 스스로 존재의의를 드러낼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회 저변의 의지를 드러낼 뿐 아니라 그것이 보편적 공공선을 지향한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는 정책 제시의 과제를 포함한다. 더불어 여러 정파들로 갈라져 있는 진보정당의 현실 또한 돌아봐야 할 것이다. 유권자들이 혼란스러워하다 못해 외면해 버리는 현실적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평범한 유권자들은 정파의 차이를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가능한 한 대강의 정책에서 합의할 수 있는 진보정당들이 통합하는 것이 그나마 존재감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 될 것이다. 자유주의의 한계를 돌파해내고자 분투하는 중량감 있는 진보정당의 등장을 기대한다. 4-3. 현재 소용돌이의 국면에서조차도 거시적 전망을 견지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예컨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조국혁신당’ 돌풍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피차간의 내로남불이 빚어내는 ‘복수혈전’의 판타지로 볼 것인지(강희철, “총선을 전쟁터로 만드는 ‘복수혈전’의 판타지”, 「한겨레신문」, 2024.3.25.), 아니면 공정성 문제를 다루는 방식의 공정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계기로 볼 것인지(박용현, “‘조국당 돌풍’에 실린 ‘메타 공정’이란 질문”, 「한겨레신문」, 2024.3.22.)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유권자들을 훈계하기보다 유권자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지만 돌풍을 일으킬 만큼 환호하는 그 사태가 함축하는 뜻을 읽어내고 대안을 제시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미 판이 그렇게 표출할 수밖에 없도록 짜여진 현실에서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점을 헤아리고, 그 판을 넘어선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전망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의도하거나 의식하지 않은 가운데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현실의 역동성을 포착하고 실천적 전략을 모색하는 지혜 또한 절실하지 않은가?*]]> Mon, 01 Apr 2024 22:49:49 +0000 논단 <![CDATA[제7문서 의제 6. “불평등의 극복과 경제정의 실현” 해설]]> Sun, 31 Mar 2024 23:02:22 +0000 논단 <![CDATA[“할렐루야 예수 다시 사셨다”(2024.3.31. 성가)]]> Sun, 31 Mar 2024 16:49:19 +0000 영상(음악) <![CDATA[부활하는 산하 - 사무엘상 2:1~10[유튜브]]]> 예수께서 죽음을 딛고 일어선 부활의 아침입니다. 죽임의 힘이 세상을 짖누르고 있지만, 결코 그 죽임의 힘에 의해 소멸될 수 없는 삶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찬미하는 아침입니다. 그 부활의 아침에 우리는 한나의 기도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가 대체 부활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찬가(누가 1:46~55)의 원형이 되는, 아주 오랜 송가입니다.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요 송가입니다. 이것은 단지 한 개인의 염원이 아닌, 아주 오랜 민중의 염원을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사무엘이 태어났을 때 그 어머니가 불렀던 노래로 전해지는 이 기도는, 예수님이 잉태되었을 때 그 어머니 마리아가 부른 노래와 그 내용에서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질긴 생명력을 가진 민중들의 염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무엘이 부여받았던 기대, 예수님이 부여받았던 기대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며, 그 기대가 끊임없는 민중들의 희망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사시대 말기 에브라임 지파에 속하는 엘가나라는 사람이 산간지방 라마다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 사람이 한나요 또 한 사람이 브닌나였습니다. 브닌나에게는 여러 자녀가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엘가나는 특별히 자식이 없는 한나를 챙겼습니다. 한나에게 엘가나는 정말 온 정성으로 대했습니다. “당신이 열 아들을 두었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만큼 하겠소?” 그렇게 애틋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한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고대사회에서 여인에게 자식, 그것도 아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물론 아들로 이어지는 상속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이런 주제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절실한 문제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나는 간절히 기도했고, 그 결과 기도의 응답을 받아 마침내 자신의 품 안에 사무엘을 안게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기쁨을 하나님 앞에서 노래합니다. 대개 소원이 이뤄지면 곧바로 성소에 가 하나님께 감사의 의식을 치르는데, 한나는 어린 사무엘이 젖을 뗄 때까지 집에서 함께 하다가 마침내 서원한 대로 하나님께 사무엘을 바치며 기뻐합니다. 먼저 이 노래는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이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기쁨으로 주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삶을 가로막은 원수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원수들이란 꼭 인격적인 존재를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 바라는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므로 어떤 장애물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교만한 말을 늘어 놓지 말아라. 오만한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참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 보시는 분이시다. 용사들의 활은 꺾이나, 약한 사람들은 강해진다. 한때 넉넉하게 살던 자들은 먹고 살려고 품을 팔지만, 굶주리던 자들은 다시 굶주리지 않는다. 자식을 못 낳던 여인은 일곱이나 낳지만, 아들을 많이 둔 여인은 홀로 남는다.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오게도 하신다. 주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2:3~8)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고 있는 이 내용을 잘 음미하기 바랍니다. 이 노래는 개인적인 감사의 기도라기보다는 너무나 원대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가지지 못한 여인으로서 한나의 처지를 반영하는 내용은 딱 한 구절뿐입니다. 그 밖의 모든 내용은, 항상 불가능한 상황에 맞닥뜨려 좌절해야 했던, 약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마침내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노래가 단지 개인의 노래가 아니라 민중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노래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한 시대를 이끌게 될 인물의 탄생에 그와 같이 중대한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역사의 전환에 대한 갈망입니다. 이 기도의 결말은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마침내 악인들 가운데서 승리를 거두리라는 것을 염원합니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는 모두 주님의 것이다. 그분이 땅덩어리를 기초 위에 올려놓으셨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며, 악인들을 어둠 속에서 멸망시키신다. 사람이 힘으로 이길 수가 없다. 주님께 맞서는 자들은 산산이 깨어질 것이다. 하늘에서 벼락으로 그들을 치실 것이다. 주님께서 땅 끝까지 심판하시고,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부어 세우신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다.”(2:8~10)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기본적 지식을 갖고 있다면 여기서 의아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왕이 없던 시절이요, 더욱이 사무엘은 왕을 세우는 일을 극구 반대했던 인물인데, 주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의 승리를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여기서 왕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왕이요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실현하는 왕을 말하는 것이지만, 아직 사무엘의 시대에는 그런 왕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무엘에게 기대되었던 희망이 왕이 존재하는 상황 가운데서도 지속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무엘 당대보다 훨씬 후대에 기록된 성서는 민중들 가운데 지속된 그 희망을 그렇게 기록으로 남겨두었습니다.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원사건에서 비롯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곧 이스라엘 민중의 염원은 끊임없이 역사를 관통하는 희망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200여 년 동안 왕이 없이 해방된 자유민으로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끝자락에 사무엘이 태어납니다. 사무엘이 그 자유민 공동체의 마지막 지도자로 등장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강력한 왕권체제를 바랐습니다. 성서는 애초 그 사실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배신행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극구 반대하지만, 마지못해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으로써 민중의 주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 왕권체제가 형성되고 난 후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왕권체제가 형성되어 경제발전의 논리가 지배하고 정치권력이 강화되는 현상이 현저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백성 가운데 구현되어야 할 평등의 이상, 정의의 이상을 외쳤습니다. 그것은 단지 어떤 이념의 대치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희망의 표현이었습니다. 그것이 성서의 기저를 이뤘고, 그 희망이 더더욱 가혹한 죽음의 시대를 경유하고 난 다음 더욱 극적으로 표현된 것이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에게 이어진 성서의 중심 기저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봉착하는 불가능의 현실에서도 그 불가능의 장벽을 넘어서 누구나 진정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희망으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 말씀을 마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부활사건의 의미를 새겨볼 수 있는 것도 본문 말씀이 지니는 그 깊은 뜻 때문입니다. 부활사건은 거대한 화산맥과 같이 분출하는 일련의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역사의 변화를 뜻하며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변화를 뜻합니다. 억압의 시대에서 자유의 시대로, 불의의 시대에서 정의의 시대로, 갈등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 죽임의 시대에서 살림의 시대로 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그 변화와 더불어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기쁨으로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 변화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우리는 너무나 깊이 절감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현상이 세계적으로 현저해진 상황 가운데서도 한동안 한국 민주주의는 전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은 ‘독재화하는 국가’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대파 한 단이 어째 일파만파 파문을 일으키는 파급력을 지닐까요? 민생이 파탄 지경에 이르러도 그에 대해 파악도 못하고 파국을 자초한 정치권력의 파렴치함 때문입니다. 창당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정당이 돌풍을 일으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복수혈전 앙갚음 심정 때문이 아니라, 공정성 문제를 다루는 방식의 공정성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기 때문입니다. 증오와 적대의 논리는 죽임의 악순환을 만들어냅니다. 그 증오와 적대의 논리로 국민을 편 가르고, 나라와 나라를 갈라 전쟁위기를 고조시키는 정치세력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약자들도 더불어 안전하게 저마다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세상, 개발과 약탈로 신음하는 자연이 되살아나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우리는 비로소 부활의 역사를 누리게 됩니다. 2천 년 전 한 분이 죽음에 이르렀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진실이 왜 중요합니까? 그것은 죽음과 같은 삶을 사는 모든 사람이 그 죽음을 딛고 일어나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의 선취요 표징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활의 아침, 그 진실을 새기며 우리 모두 진정한 부활사건의 증언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진정한 부활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Sun, 31 Mar 2024 16:23:56 +0000 설교 <![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4-13 / 3.31. 주보)]]> Fri, 29 Mar 2024 15:45:05 +0000 살림소식 <![CDATA[[도마복음 다시읽기 15] 세상에 편재하는 하나님 나라]]> Wed, 27 Mar 2024 17:09:18 +0000 성서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