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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천안살림교회</title>
		<link>http://salrim.net</link>
		<description>천안살림교회</description>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30 / 7.26.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14]]></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uwjAEEKnZB0 

2. 오늘 예배 후 청빙준비위원회 모입니다.

3. 청년회 책모임이 오늘 오후 &lt;기독교 시온주의와 팔레스타인&gt;을 주제로 하여 진행됩니다.

4. 다음 주일 공동예배는 성찬예배로 드리며, 예배 후에는 월례 공동의회가 열립니다(안건: 7월 재정보고, 주요 일정 점검).

5. 8월 예배 및 봉사 담당 예정안이 준비되었습니다.

6. 담임목사
   28(화) 오후 6시 원성동공유공간100 / 미래를여는아이들 이사회
   30(목) 오전 11:30 서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 사빌 코리아(팔레스타인 연대모임)
   8/5(수)~7(금), 11(화)~13(목) 휴가 

7. 교회당 사용
   8/9(일) 오후 4시 민촌 이기영 선생 추모모임]]></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24 Jul 2026 15:36:1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유대인은 기적을, 그리스인은 지혜를 구하지만 - 고린도전서 1:18~25[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13]]></link>
			<description><![CDATA[2026년 7월 1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유대인은 기적을, 그리스인은 지혜를 구하지만
본문: 고린도전서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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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지식이 넘쳐나고 수없이 많은 주장이 펼쳐지는 오늘의 세계 가운데서 무엇이 과연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일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매순간 그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분파로 나누어져 다투고 있는 고린도교회 교우들을 향하여 애정 어린 권고를 합니다. 고린도교회에 주는 서신은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권하고 있지만, 나아가 복음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줍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가 믿는 구원의 도가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1:18) 
이어 세상에서 널리 신봉되는 지혜의 허망함을 말하고, 그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당대의 두 가지 지혜를 말하며 이와 대비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의미를 역설합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1:22~23a) 
유대인이 구하는 기적과 그리스인이 구하는 지혜, 이 두 가지는 모두 당시의 세상을 지배하고 좌우하는 통념이요 가치관이며, 동시에 사도 바울이 보기에 잘못된 가치관입니다.

유대인이 구하는 기적이 무엇일까요? 기적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게 뭔가를 해주기를 기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들 자신의 주장과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기대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신실해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요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구와 기대에 부응하는 것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사실상 자기 숭배요, 우상숭배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능력주의, 업적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여기에서 독특한 선민의식이 자리합니다. 가시적인 형태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것으로 믿는 이들은 선민이 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배제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결코 특정한 사람에게 독점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은총을 독점한 듯이 여기는 태도가 굳어집니다. 겉으로 볼 때 그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캄캄한 죄인의 세계로 내몰립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의 폐해를 집요하게 비판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믿음의 밑바탕에 사실은 자기 의에 대한 확신, 자기 능력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오셨다(마가 2:17, 마태 9:13, 누가 5:32)고 선포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스스로 신실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죄인이라 몰아 부친 사람들이 처한 형편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진실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들의 믿음은 허망하다.’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구하는 유대 바리새인들을 향해 질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과시의 표징으로서 기적을 거부하고, 오직 요나의 기적 이외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가 8:11~13; 누가 11:29~32; 마태 12:38~42). 요나의 기적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한 거듭남을 뜻합니다. 그 거듭남 없이 기적을 바라는 것은 자기과시의 욕망, 자기 의에 대한 과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태도의 함정입니다. 

그리스인들이 구하는 지혜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잘못된 지혜로서 그리스인들이 추구하는 지혜란, 한마디로 실천과 괴리된 사변적 지혜를 말합니다. 사실 세상의 어떤 종교나 사상도 그 실천적 의의를 스스로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그 지혜가 정말로 인간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보편 타당성을 지니며, 그것이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실천적 지혜로서 의미를 지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신봉되는 많은 지혜는 저마다 보편 타당성을 자임하지만, 그것은 특정한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이자 편견에 지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가 그렇게 허망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성취한 지혜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신봉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일거에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해버린 그 지혜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초기 교회에 특별히 영향을 끼친 것은 플라톤의 사상이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그리스인들의 지혜란 그것이 교회 안에서 변용된 어떤 경향을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영적 지혜’ 내지는 ‘이데아’를 추구했습니다. 현실은 허상이거나 불완전한 반면 완전한 이상 세계는 피안의 영적 세계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모순투성이의 현실이 아니라, 완벽한 질서가 조화를 이루는 이데아의 영적 세계를 추구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들어 온 것이 영지주의입니다. 육체를 지닌 인간의 삶은 허망하니 영적 지혜의 세계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우 그럴듯한 구원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육신을 지닌 예수님의 삶이 무가치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끈질기게 싸운 것이 바로 그 영지주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선언(요한 1:14)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사도 바울 역시 불가피하게 그리스적 지혜의 개념들을 사용하면서도, 영육이 동시에 깃든 존재로서 몸을 강조하고 그 몸의 변화를 말합니다. 구원은 엉뚱한 데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몸의 현실, 일상의 현실을 피해 감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새롭게 변화시켜 감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 여정을 회피하는 영적 지혜는 무가치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기만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 영적 지혜를 얻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허구적 세계 안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세속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자족적 세계관이었습니다.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로 시달려야 하는 사람이 그 세계관을 따를 경우, 그 결과는 끊임없는 자책과 모멸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이 추구하는 기적,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그저 자족적인 세계관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늘 먹고사는 문제로 시달려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희망도 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신봉되고 집요하게 강요되는 허구적인 믿음이었다는 데 그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진정한 지혜를 역설합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1:22~25) 

십자가는 하나님마저도 자신을 부정하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예수의 몸을 입었다는 진실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자기부정 행위입니다. 전지전능하고 특별한 능력을 지닌 하나님께서 평범한 인간의 일상으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모든 것이 끝장나는 십자가의 죽음에 하나님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하나님의 자기부정은 절정에 이릅니다. 이것은 오직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고만 믿던 유대인들에게는 도무지 가당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거리낌’이라 번역한 말은 ‘스칸달론’ 곧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진실이었습니다. 이 진실은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 충족 수단으로 삼아 왔던 사람들의 태도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하나님마저도 당신의 특별한 능력을 거부한 사건, 그것이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자족적인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부조리하고 처참한 세계 현실을 바라보라는 촉구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진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지혜로 볼 때 어리석은 짓입니다. 악한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이길 만한 힘을 갖추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그 상식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자기 몸을 내던짐으로써 부조리한 세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줄 뿐입니다. 약함도 강함도 없는 구원의 세계는, 지금 현실의 약함을 피해 가는 데서가 아니라 약한 것의 가장 약한 나락으로까지 나를 버리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증언합니다. 모순으로 가득 찬 육체의 현실을 내버려두고 영적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결단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십자가의 길은 보여 줍니다. 

세상에서 신봉되는 지혜의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 사건은 놀라운 신의 능력을 보여 준 사건도 아니요, 고상한 지혜를 일깨워주는 사건도 아닙니다. 그 불가해한 사건을 두고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 말하는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바울이 보기에 십자가 사건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인간 삶에 개입해 들어오는 극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주술적인 어떤 효과를 지닌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삶 가운데 개입해 들어오시는 사건입니다. 바로 그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받아들일 때 인간이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에 이른다는 것을 본문 말씀은 역설합니다. 그 뜻은 유대인이 추구하는 기적과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와 대비하여 이해할 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모순덩어리의 현실을 뛰어넘어 놀라운 일이 일어나거나 그 현실 너머 고상한 어떤 세계를 그리는 가운데 구원이 있지 않고, 십자가가 증언하는 그 말이 안 되는 사태 그 자체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는 데서 구원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정말 말이 안 되는 사건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잔혹한 인간의 처형 방식으로 사형당합니까? 어떻게 단지 사람을 사랑했을 뿐인 사람이 그렇게 처참하게 사형당합니까?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 왔던 삶의 질서가 그렇게 충격적이라는 것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그 엄연한 진실을 깨닫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이로부터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에게 이릅니다. 본문 말씀은 이 진실을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는 갖가지 지식의 홍수 가운데 헛된 지혜에 매여 있거나 강요당하는 현실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마저 그 헛된 지혜로 오염되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기보다 자기 욕망의 투사로서 만들어진 신을 숭배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세계와 인간에 관한 많은 주장들은 또 얼마나 허망합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믿음을 지향해야 합니다. 하나님마저도 자신의 몸을 던져 세상의 부조리를 드러내신 십자가 진실의 의미를 새기며 자신을 비우고 열어놓는 데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에 이를 수 있습니다. 
믿음은 그저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고 그 이치를 파악하는 것으로만 형성되지 않습니다.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는 지혜가 뛰어나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이해할 뿐 아니라 그것이 주는 의미를 깨달을 때 비로소 형성됩니다. ‘사실이 이러하니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깨달음과 결단을 동반할 때 믿음은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그 믿음이 우리가 바라는 세계를 향한 선한 행동으로 인도합니다. 
무엇이 정말 인간을 위한 길인지, 무엇이 모든 생명이 더불어 삶의 기쁨을 누리는 길인지 분별하고, 그 길에 동참하는 결단을 동반할 때 우리는 진정한 지혜를 바탕으로 하는 믿음의 동행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막연한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온갖 허망한 지혜들이 판을 치는 현실 가운데서, 어떻게 진정한 지혜로 세상을 분별하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진실을 깨닫고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로 새로운 세상을 이루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며, 교회는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 진정한 지혜로 생명의 길을 걷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19 Jul 2026 13:32:3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미얀마 이주노동자 故아웅민우 추모예배] 자기 몸과 같이 여겼다면 - 레위기 19:34]]></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12]]></link>
			<description><![CDATA[미얀마 이주노동자 故아웅민우 추모예배
7월 18일(토) 오후 3:30/천안 단국대학교병원 장례식장 6호실
주관: 한국교회인권센터, 아산이주노동자센터, 천안살림교회
제목: 자기 몸과 같이 여겼다면 / 본문: 레위기 19:34

<a href="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2026071801-scaled.jpg"><img src="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2026071801-1024x683.jpg" alt="" width="821" height="548" class="alignnone size-large wp-image-26603" /></a>

<a href="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2026071802-scaled.jpg"><img src="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2026071802-1024x683.jpg" alt="" width="821" height="548" class="alignnone size-large wp-image-26605" /></a>

<a href="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2026071803-scaled.jpg"><img src="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2026071803-1024x683.jpg" alt="" width="821" height="548" class="alignnone size-large wp-image-26606" /></a>

도대체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요? “남편이 떠난 뒤 돌벽이 무너지고, 등불이 꺼진 듯 앞길이 깜깜해졌다. 어느 누구도 남편과 같은 일을 겪으면 안 된다.” 비보를 접하고 “하루하루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겪다가 2주만에 겨우 한국 땅을 밟은, 아웅민우님의 부인 친마이마이님의 절규입니다. “회사가 안전시설을 충분히 설치했다면 남편은 사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에 공감할 수 있을 뿐, 지금 당장 어떤 말로 위로의 마음을 전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일터에서 성실하게 일했고, 신실한 믿음으로 선교사의 꿈을 꿨고, “15년 동안 완벽한 남편이었고 네 아이의 최고의 아빠”였던 아웅민우님이 이렇게 떠날 줄 알았겠습니까? 그 가족에게 도대체 믿어지겠습니까? 가족에게는 그야말로 맑고 푸른 하늘에서 치는 날벼락과 같은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가족들의 그 아픔을 생각하면 더욱 부끄러워집니다. 여기 함께하고 있는 우리의 심정이 어떻습니까? 고통을 겪는 가족 앞에서 차마 말을 꺼내기 두렵지만, 언론에서 소식을 접했을 때 아마도 똑같은 탄식부터 했을 것입니다. 긴말도 아닙니다. 딱 한 마디 “또!”라고 했을 것입니다. 또 그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6년 전 1970년 11월 25일 노동자 전태일 추모예배 자리에서 김재준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 기독교도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다.” 그로부터 반세기도 넘은 시점인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은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 수없이 많은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죽어가고, 이주노동자들에게는 그 죽음의 위협이 더 가까이 있는 현실을 여전히 그대로 두고 있는 우리 사회 현실을 탄식할 수밖에 없고, 그 일원으로 모두 자책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한 백성의 길을 제시하는 성경 레위기는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 이 말씀은 레위기의 한가운데 박힌 가장 값진 보석이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그 이웃은 동족의 범위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레위 19:34)

남들이 하지 않은 궂은 일을 맡아 하는 노동자들, 그 가운데서도 더 어려운 일을 감당하며 극한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이주 노동자들을, 그 사용자들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자기 몸처럼 여긴다면 이런 비극이 반복될 수 있을까요? 아니, 자기 몸처럼 여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나와 같이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꿈을 간직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만 있어도 이런 비극은 반복될 수 없습니다.

‘위로’ 예배로 모였지만, 돌이킬 수 없는 비극 앞에서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여전히 그 적절한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야 이놈들아, 아웅민우를 살려내라!” 그렇게 외치며 함께 우는 마음으로 자리를 같이할 뿐입니다.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다면, 그 억울함이 조금이라도 풀어질 수 있도록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마땅히 책임져야 할 사람과 당국에게 그 책임을 묻는 일에 함께할 따름입니다. 그것이 지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겪고 있는 가족에게 그나마 위로가 된다면 우리의 부끄러움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지 모르겠습니다.

아픔에 공감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데 같이 목소리를 내주는 사람들이 있어 가족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나마 우리의 부끄러움이 조금이라도 감해질 것입니다. 가족에게 뭐라 해야 할지 끝내 위로의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의 다짐만 겨우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웅민우님을 죽음으로 내몬 이들이 그 진상을 규명하고 마땅한 책임을 감당할 때까지, 더 이상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을 때까지 우리 모두 함께하기를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at, 18 Jul 2026 17:04:4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16-29 / 7.19.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11]]></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d_8PhoDFAGo 

2.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에서는 베네수엘라지진 피해 지원 헌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헌금할 경우 총회를 통해 전달합니다.

3. 18일(토) 오후 3:30 ‘미얀마 이주노동자 故아웅민우 추모예배’(단국대병원 장례식장)에 한국교회인권센터, 아산이주노동자센터와 함께하였습니다.

4. 오늘 예배에 함께한 유영상 목사(향린교회 부목사)께 감사드립니다.

5. 담임목사
   21(화) 오후 5시 서울 / 종교와 마르크스 포럼 대면 모임
   22(수) 오전 8:30 [온라인] 환대와 온전한 포용 정기 모임]]></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17 Jul 2026 16:27:3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여정”(2026.7.12.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10]]></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song20260712.mp3"][/audio]
“여정” / 성가대]]></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12 Jul 2026 16:32:3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약할 때일수록 - 신명기 7:6~12[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09]]></link>
			<description><![CDATA[2026년 7월 1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약할 때일수록
본문: 신명기 7:6~12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AdxzSJY6opk?si=VEUya7Wa9aetzGCF"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흔히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은 명확히 구별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율법이 행위의 업적을 요구한다면 복음은 조건 없는 사랑을 선포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단절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아예 구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견해까지 있습니다. 율법주의의 폐해를 생각하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율법이 전적으로 그렇게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성서의 큰 뜻에 비춰볼 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율법주의의 폐해가 분명하기는 하지만, 본래 율법의 정신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본문 말씀은 그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신명기는 이른바 모세오경의 맨 마지막 책으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복지를 앞둔 상황 가운데서 모세가 설교 형식으로 선포한 말씀입니다. 
신명기(申命記, Deuteronomy)는 ‘거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 새로운 땅에서 지켜나가야 할 기본 법도를 일깨워줍니다. 이 책은 구약성서 율법의 근본정신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내용과 다양한 관점이 들어 있는 구약성서를 꿸 수 있는 근본적 정신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나아가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 성서적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정신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가운데서도 매우 핵심적인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먼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대전제를 내걸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땅 위의 많은 백성 가운데서 선택하셔서, 자기의 보배로 삼으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7:6)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에 한정해 보면 대전제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은 그 앞선 내용을 해명하는 문맥에서 등장합니다. 새로운 땅, 곧 약속의 땅에서 거주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은 기존의 주민이 따른 것과 같은 우상숭배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 까닭으로서 이 말씀이 제시됩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은 그에 걸맞게 마땅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초점은 여기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당신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은 민족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당신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들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당신들을 이집트 왕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어 주신 것입니다.”(7:7~8) 
이 말씀은 성서의 밑바탕을 형성한 일관된 동기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뜻은 그 민족이 강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힘깨나 쓰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입니다. 약해서 강대한 나라에 붙잡혀 스스로 자유로운 삶을 누리지 못하였고, 거대한 제국의 권력에 붙잡혀 억압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약한 자를 선택하신다는 이 말씀은 성서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구약성서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언행을 통해 더더욱 뚜렷하게 재확인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도 바울의 인의론을 통해서 그 정신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그 어떤 자격을 갖추고 업적이 있기에, 그래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좋은 조건에 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조건과 상관없이 누구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인의론의 핵심 요체입니다. 
앞서 말했듯, 구약의 율법은 자격과 업적을 요구하는 반면 신약의 복음은 그 모든 것을 폐기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사도 바울 역시 끊임없이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켰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바로 본문 말씀이 그 열쇠입니다. 본래 율법의 정신은 사람들을 옭아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을 제시하고 그 가운데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약하기 때문에 선택하신다는 말씀의 뜻, 그것이 율법의 정신을 형성한 기초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구약성서의 정신과 신약성서의 정신은 상통하는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를 베푸시는 동기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약을 지키시며, 또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7:9)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고, 또한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약한 백성을 선택하는 하나님의 뜻이요 동기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천 대에 이르기까지 약속을 지키며 사랑을 베푸신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7:10)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당장 벌을 내려 멸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푸는 반면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벌을 내린다는 대조입니다. 그 대조법이 흥미롭습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의 천 대에 이르게 하겠지만,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벌은 바로 그 사람에 한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같은 취지를 지닌 출애굽기의 말씀(출애 20:5~6)보다 더 극적입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벌이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미친다고 한 반면 신명기는 당사자가 그 책임을 진다고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복을 내려야 할 사람에게 복을 내리고, 벌을 내려야 할 사람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는 원칙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공정성이 폐기되지 않았지만, 추상같은 공정함보다는 무한한 자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본문 말씀의 근본 뜻입니다. 약한 백성을 선택하신 뜻, 자격과 업적을 보고 선택하지 않고 그것과 무관하게 백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 말씀을 통하여 더욱 뚜렷해집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은 다시금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 자비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당신들이 이 법도를 듣고 잘 지키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도 당신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세우신 언약을 지키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실 것입니다.”(7:12)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계명을 잘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 뜻, 곧 율법의 근본정신이 그 백성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데 있다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말씀이자 동시에 성서의 정수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 지당한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람의 자격과 업적 이전에 오직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사람을, 백성을 선택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 본문 말씀의 핵심입니다. 말씀의 그 핵심은 자격과 업적에 매인 세계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 바로 앞에서 기존의 풍요종교와 그 풍요종교를 따르는 이들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보이고 있습니다(7:1~5). 그것도 사실은 그 뜻에 비추어 헤아려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것을 종교적 배타성의 근거로 여기지만, 단지 어떤 종교와 어떤 이방 민족을 배격하는 근거가 아닙니다. 우상숭배로서의 그 종교를 문제시하는 것이며, 우상숭배로 여겨지는 그 종교적 믿음 아래서 정당화되는 삶의 양식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풍요의 종교에서 정당화되는 것은 인간의 업적입니다. 
그 풍요의 종교가 지배하는 세계의 실상이 무엇입니까? 업적의 논리로 정당화되는 권력, 그리고 끊임없이 그 업적을 내도록 몰아붙이는 권력의 힘, 과정의 중요성보다는 그 결과에 집착하는 믿음, 그리고 더 많은 결과를 낼 수 있다면 지금의 불공정함과 불평등은 도외시해도 좋다는 생각, 그리고 마침내는 그러한 삶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격이 없다고 배제하는 삶의 질서가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고 존속되는 사회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런 세계를 문제시하고 온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세계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본문 말씀은 현대적 인권과 정의의 기초가 되는 정신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배타성의 논리, 타자를 악마시하고 정죄하는 적대와 증오의 논리를 극복하고 가장 연약한 사람, 가장 궁지에 몰려 있는 사람이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당당하게 한 구성원으로서 몫을 다하는 세계에 대한 희망을,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가진 것을 자랑하고, 또한 가지지 못한 이들을 경원시하고, 불편한 것을 거부하고 정죄하는 데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오히려 드러내고 있는 종교, 기독교가 득세하는 오늘 현실에서 본문 말씀은 무엇이 진정한 신앙인지를 또한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성장주의를 신조로 여겨온 한국의 주류 기독교는 그 성장주의와 더불어 반공주의를 정체성의 근거로 삼아 왔습니다. 타자를 정죄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그릇된 태도입니다. 오늘날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을 신앙의 이름으로 강변하는 태도는 그 그릇된 신앙의 연속일 뿐입니다. 낯설다고 해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는 일은 하나님의 뜻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약한 이들을 돌보시고 약한 이들을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백성으로 선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진실을 알리려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 진실을 깨닫고, 그 진실을 구현하는 이 공동체,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약하다고 하여 그 진실을 구현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진실을 온전히 새기고 그 진실을 이루기 위해 더욱 신실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미약한 것이 옳다고 믿는 바를 실현하는 데서 유보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좋은 조건이 됩니다. 약할 때일수록 오히려 더욱 신실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10) 사도 바울이 고백한 그 역설은 그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본문 말씀의 의미를 다시금 새기며, 우리 모두 그 진실을 구현하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12 Jul 2026 14:45:5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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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28 / 7.12.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08]]></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hon17vWjCfE 

2. 지난 주일 공동의회 결과 
   ① 6월 재정보고, 
   ② 주요 일정으로 수련회 등은 추후 확정하기로 하였습니다. 

3.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와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간 제17회 교류프로그램(11/20.금~24.화, 일본 교토 지역, 항공료만 자부담)에 참가 의사가 있는 교우는 7월 20일 이전까지 담임목사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4.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에서는 베네수엘라지진 피해 지원 헌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헌금할 경우 총회를 통해 전달합니다.

5. 담임목사
   15(수) 정오 서울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인식조사 연구모임]]></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10 Jul 2026 15:31:3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개신교는 왜 극우의 덫에 갇혔는가 - 위기의 한국 개신교, 시민종교의 길을 묻다]]></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07]]></link>
			<description><![CDATA[*<a href="https://comngood.co.kr/">『공동선』</a> 189호(2026년 7+8) 특집: 6.3 지방선거,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다시 묻다

개신교는 왜 극우의 덫에 갇혔는가
– 위기의 한국 개신교, 시민종교의 길을 묻다

최형묵(연세대 겸임교수, 한국교회인권센터 이사장)

6.3 지방선거 결과, 제한된 극우의 영향력

6.3 지방선거 결과는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의 구도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민주당의 전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일부 경합 지역에서 지지율이 팽팽하게 맞섰는가 하면 근소한 차이로 국힘당이 우위를 보이기도 했다. 12.3 비상계엄에 의한 내란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국면에서 생각하면 다소 뜻밖의 결과였다. 하지만 찬찬히 돌이켜보면 근래 몇 가지 주요 선거에서 나타난 일관된 추세를 띠는 측면도 있었다. 근래 몇 가지 주요 선거에서 이른바 보수와 진보는 팽팽한 접전의 양상을 보였다.1) 이번 선거 결과 역시 그 추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 추세 가운데서도 한 가지 뚜렷한 현상 또한 존재하였다. 극우 정치 세력의 목소리가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선거 과정에서부터 극우에 대한 동조가 짙은 보수 정당 대표의 입장을 배척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결국 그 입장과 거리를 둔 후보들이 당선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서울시장 당선자는 당대표의 출몰을 피하느라 어려움도 있었다고 토로했다. 극우와의 거리두기가 당선의 한 요인이었다는 진단이다.
그와 관련된 추세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발생한 송파 선거구와 잠실 경기장 집회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참정권 침해’를 주장하는 젊은 세대들은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는 극우와 명확히 구별하고자 맞섰다. 지금 극우 세력이 광장을 주도하며 그에 피로감을 느낀 시민들이 주춤하였다가 별도의 광장으로 나섰다. 이는 극우 세력과는 명확히 거리를 두고자 하는 시민사회 세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뜻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 극우 세력이 결집하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현상은 우려할 만한 사태이지만, 그 영향력은 제한적이라는 것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극우 세력은 광장에서의 요란한 소리, 유튜브, 그리고 때로는 주류 언론의 과잉 보도 공간에서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을 뿐 시민사회 전반에 결정적 영향력을 지닌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극우주의에 대한 사회적 처벌,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 추락

시민사회에서 극우 세력의 영향력이 제한된 점은 극우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평판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 사회에서 극우 개신교가 곧바로 극우 세력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그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 극우 개신교를 대변하는 전광훈과 손현보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미미하였다. 손현보는 선거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고 전광훈은 사법적 절차 가운데 있어 제약을 겪은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과 입장을 공유하는 극우 개신교 인사들의 행보는 간간이 뉴스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유튜버 전한길, 그리고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면서도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고개를 갸웃둥하게 만든 황교안 등이 종종 얼굴을 내밀었다. 한국계 미국인 모스탄, 그리고 미국의 대표적 부정선거 음모론자 더글라스 프랭크 등이 선거에 맞춰 입국하기도 하였다. 선거 결과가 보여주듯이 이들이 미친 영향력 또한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었다.
흔히 개신교 전반이 극우화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이 일종의 착시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누이 확인되고 있다. 예컨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실시한 2025년 주요 사회현안에 대한 개신교인 인식조사2)에 따르면, 개신교인 극우 성향은 21.8%로 전체 국민의 극우 성향 21.0%와 크게 다르지 않다.3) 또한 12.3 이후 찬탄 집회와 반탄 집회 참석 비율도 12.6% 대 7.9%로 찬탄 집회 참석율이 높다.4)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수년간 실시한 인식 조사에서 누적된 결과를 보더라도 개신교인 전반의 정치 인식이 일반 시민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다소간 미세하게 보수 성향을 드러내는 사안들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 시민사회 평균과 유사한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개신교인 전반이 극우화한 것으로 보이는 착시 현상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과잉 대표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나는 극우의 과잉 대표 현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한국 개신교의 대표 제도가 갖는 과잉 대표 현상이라는 두 가지 층위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극우의 과잉 대표 현상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규모와 영향력에 비해 과장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 하나의 과잉 대표 현상으로서 한국 교회의 대표 제도 자체에서 비롯되는 과잉 대표 문제는 일상적 현상으로서 좀 더 심각성을 지닌다. 개신교인 전반의 구성과 달리 공적 교회의 대표는 특정한 직분의 연령과 성별에 한정되어 있다. 고령층의 남성 목사와 장로로 사실상 한정되어 있다. 그러기에 공적 교회의 입장은 개신교인의 평균적 구성 및 인식과 동떨어진 이들의 견해가 과잉 대표되고 있는 것이다. 그 입장은 보수적 성격을 띠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극우의 견해와 그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많다. 극우와 단절되지 않은 그 모호성이 문제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개신교 전반이 보수화 내지는 극우화하였다고 인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극우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고스란히 개신교 전반에 대한 평가로 직결될 수밖에 없는 요인을 개신교 자체가 안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개신교 전반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떨어지는 현상에 대해 개신교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노릇이다. 평균적인 개신교인으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교회의 공적 입장을 결정하는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들로서는 그 책임을 통감해야 하는 상황이다.
극우와 보수 사이 경계의 모호성은 그 중첩성에서 비롯된다. 극우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논의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극우란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에 기반하여 극단주의 성격을 띠는 정치 성향이라고 할 것이다. 예컨대 앞서 인용한 최영준 교수 연구팀의 분류에 따르면 ‘극(far, extreme, populism)’은 체제의 기득권층에 대한 불신을 기반으로 권위적 리더쉽과 급진적 수단을 통해 기존 질서를 재편하려는 정치 성향을, ‘우(right, conservative)’는 외부 집단에 배타적인 토착주의, 전통적 규범을 중시하는 보수주의, 한국적 맥락에서 두드러진 반공주의, 능력의 차이를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다윈주의 등의 성향을 말한다.5) 한국 개신교 안에서 ‘극’ 성향과 ‘우’ 성향 사이에 중첩되지 않는 항목이 얼마나 될까? 헌정 파괴와 임의적 폭력까지도 용인하며 급진적 수단을 추구하는 극우의 성향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공식적 교회의 입장이 극우의 성향과 사실상 겹친다고 할 것이다. 개신교 전반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추락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시민 종교의 위상을 상실한 개신교

오랫동안 한국 개신교는 한국 사회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요체로 하는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공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 교육, 의료, 민주화 운동, 인권 담론 등에서 개신교는 국가 권력과 시장 사이에서 시민사회의 형성에 기여해 왔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한국 개신교의 성장 과정은 단순한 종교 확산의 역사가 아니었다. 근대 교육과 사회 개혁,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개신교는 새로운 시민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특히 권위주의 시대에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언어를 제공하며 국가 권력을 비판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실상 교회 성장과 동일시되는 교회 공동체의 확장도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아노미 현상을 극복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할 만하였다.
이 과정에서 개신교는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시민 종교로서 그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는 특정 종교로서 국가를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도덕적 가치와 공공적 언어를 제공하는 기능을 뜻한다. 이때 개신교는 민주주의, 공동체, 사회적 약자 보호 등의 가치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 개신교는 그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극우와 동조하는 개신교의 정치 참여가 신앙의 공적 표현으로서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동원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해묵은 반공주의, 문화적 보수주의,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 이슈 등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가운데 종교적 언어가 정치적 갈등의 언어로 전락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 과정은 정치와 종교의 상호 관계 가운데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는 정치가 종교를 활용하는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가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 영역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측면이다. 개신교의 정치 참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 방식이 공공성을 확장하는 방향이 아니라 진영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극우 어젠더 확산 배경에는 사회적 변화에 대한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교세 감소, 민주화로 인한 전통적 권위의 약화와 반공주의의 균열에 대한 위기의식이 일부 개신교인들에게 방어적 정치 행동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대응은 단기적으로는 내부 결속을 강화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고립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여전히 많은 교회가 변화된 상황 가운데서 공공성을 강화하며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고자 분투하고 있다. 또한 이에 많은 개신교인들이 공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극우와 동조하는 개신교 현상으로 그 노력은 가려지고 있다. 그래서 오늘 시민사회에서 개신교는 독단성과 배타성, 갈등, 권위주의 등의 이미지로 비치고 있다. 이는 엄밀히 말해 개신교 자체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특정한 정치적·문화적 방향에 대한 시민사회의 평가를 함축하는 것이기는 해도, 사실상 개신교 자체에 대한 신뢰의 철회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는 과거에 누렸던 시민 종교로서의 위상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종교가 사회 전체를 위한 도덕적 언어를 제공하지 못하고 자기 집단의 정체성에 몰입할 때 사회적 신뢰의 철회는 필연적이다. 게다가 각종 음모론을 동반한 망상에 가까운 궤변으로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행태는 일종의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치부될 수 있으며, 아예 일말의 존재 자체의 정당성에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사회적 신뢰 회복을 위한 자기 갱신의 길

오늘 개신교의 위기는 교세의 감소가 아니라 시민사회로부터 신뢰의 철회라는 것이 그 본질적 요체이다. 이 엄중한 현실을 직시해야만 그 대안 또한 적절히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사회적 소통 능력을 강화하고 공공성을 회복하는 방향을 추구해야 한다. 이는 교회의 정치적 참여를 포기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어느 편에 서든 그 정치적 참여는 신앙의 한 표현이자 책임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다. 다만 그 정치 참여가 진영논리를 강화하고 따라서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로부터 벗어나 민주주의, 인권, 평화, 그리고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의 정당한 권리 옹호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지향할 때 추락한 사회적 신뢰의 회복이 가능하다.
다음으로 교회의 사회적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회 내부의 대표 제도와 권위주의적 문화 전반을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정 세력의 과잉 대표 현상은 극우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개신교의 평균적 구성과 달리 고연령층 남성 특정 직분에 있는 사람들로만 구성되는 대표 제도 자체에도 해당한다는 것을 앞서 강조하였다. 극우 어젠다가 시민사회의 호응을 받지 못하다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이 문제는 훨씬 심각성을 띠고 있다. 이는 대표 제도의 결함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로부터 파생되는 권위주의의 온존 및 강화와도 직결되어 있다. 내부 구성원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할 수 없는 구조의 제약에 매인 교회가 사회적 소통 능력을 갖추고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lt;미주&gt;
1) "2025년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는 49.42%를 얻어 41.15%를 얻은 김문수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다. 그러나 이준석 후보의 8.34%를 더하면 범보수와 범진보의 지지 규모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2022년 대선에서 범보수 대 범진보의 구도가 약 48.56% 대 50.02%였다면, 2025년 대선에서는 약 49.49% 대 50.4%로 나타난다. 비상계엄과 탄핵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통과했음에도 한국 사회의 정치적 균형추는 거의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조희연, “민주화 시대의 ‘성공의 그늘’을 직시하자,” &lt;소셜코리아&gt;(https://www.socialkorea.org), 2026.6.15.
2)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2025 주요 사회현안에 대한 개신교인 인식조사 – 개신교인의 극우성향을 진단하다』, 서울: 도서출판연하, 2026), 33.
3) 최영준, “수면 위로 떠오른 극우: 한국 사회 극우의 현주소,” &lt;한국리서치의 여론 속의 여론&gt; 주간리포트, 제331-3호, 2025.5.28.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해당 설문 결과는 이를 그대로 적용한 결과이다.
4)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앞의 책, 46.
5) 최영준, 앞의 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앞의 책,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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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CommonGood18904-scaled.jpg"><img class="alignnone size-large wp-image-26594" src="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CommonGood18904-753x1024.jpg" alt="" width="753" height="1024" /></a>

<a href="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CommonGood18905-scaled.jpg"><img class="alignnone size-large wp-image-26595" src="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CommonGood18905-738x1024.jpg" alt="" width="738" height="1024" /></a>]]></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Tue, 07 Jul 2026 23:15:2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9"><![CDATA[논단]]></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은혜”(2026.7.5.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06]]></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7/song20260705.mp3"][/audio]
“은혜” / 김광식 교우]]></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05 Jul 2026 17:31:4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예수를 만난 사람들 - 누가복음 5:1~11[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05]]></link>
			<description><![CDATA[2026년 7월 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예수를 만난 사람들 
본문: 누가복음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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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전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과 더불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만난 사람들, 특별히 제자들은 그 복음의 전파에 중심적 역할을 맡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처음 만났을 때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예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제자들을 부르고,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을까요?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신 장면을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하지만(요한 21:1~11), 그 이야기는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반면에 본문 말씀은 공생애 초반에 제자들을 부르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말씀은 마치 한편의 그림과도 같습니다. 그 배경과 정황, 그리고 그 가운데 벌어진 극적인 사건의 요체를 선명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게네사렛 호수, 곧 갈릴리 호수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는 어부들을 예수께서 제자로 부르십니다. 
말씀의 핵심(5:4~10)은 두 가지의 초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깊은 데로 나아가라”(5:4) 하는 말씀이 함축하는 바요, 또 하나는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5:10) 하는 말씀이 함축하는 바입니다. 깊은 데 그물을 던지는 행위와 사람을 낚는 것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내적으로 깊이 연관된 사건들입니다. 그 깊이에 도달한 사람, 그 깊이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인도하는 것은 강압적인 힘이나 고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뛰어들 수 있는 품이 있어야 하고 뛰어내릴 수 있는 밑바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5:4) 이 말씀이 함축하는 뜻이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 어부들, 곧 제자로 부름받기 이전 사람들은 아직 삶의 깊은 곳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의 삶은 진지하고 일상에 충실하지만 뭔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부지런히 밤새워 고기잡이를 했을 뿐 아니라 그다음 고기잡이를 위해 그물을 손질하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충족되지 않은 갈망이 있습니다. 충족되지 않은 갈망, 그것은 곧 삶의 깊이를 함축합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이 말씀은 바로 그 깊이의 차원을 일깨워줍니다. 합리적인 삶의 법칙으로만 해명되지 않은 차원입니다. 
말 그대로 그것은 저 밑바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저 꼭대기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숲속에서 하늘을 향해 뻗은 나무들을 바라보면 마치 저 깊은 우물의 심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저 꼭대기를 바라보는 시선과 저 밑바닥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그렇게 상통합니다. 높은 산이 신성의 현현 장소로 그려지듯 깊은 호수가 신성의 현현 장소로 그려지는 것은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일상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시선이 포착하는 차원입니다. 저 높은 곳과 저 낮은 곳은 그렇게 일상의 시선에서 벗어날 때 보이는 법입니다. 과거의 종교적 관념에서 그것은 천당과 지옥으로 형상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언어로 바꾸면 그것은 극치의 기쁨과 그와 상반되는 극한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깊이의 차원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기쁨과 고통의 의미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의 기쁨이 무엇이며 인생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아는 시선입니다. 내가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동시에 내가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태도입니다. 타인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겉으로 드러난 대로만 보지 않고, 저 사람의 기쁨이 무엇인지 저 사람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혜안입니다. 
그 깊이에 도달한 사람, 그 깊이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5:10)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로 그 진실을 확언하신 것입니다. 

깊은 데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 말씀과 사람을 낚을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 사이에는 극적인 반전의 계기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따라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고, 두 배에 가득해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이렇게 뜻밖의 어획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큰 소리를 외쳐야 할 것 같은데, 베드로는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5:8)
이해하기 어려운 이 고백이 뜻하는 바가 뭘까요? 베드로의 이와 같은 반응은,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의 두려움의 표현입니다. 쉽게 말하면 경이감이지만, 그 경이감을 넘어선 경외감입니다. 자신의 상식과 능력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대한 경외감입니다. 그 깊이를 깨닫고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태도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고기잡이로 치자면 목수 출신인 예수님보다 베드로가 훨씬 나을 것입니다.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어 온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그 친구들은 고기잡이의 비결을 알 만큼 다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그 상식을 벗어나는 사건이 눈앞에서 펼쳐졌습니다. 거기에서 이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가 헛 살았습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말뜻이 그것입니다.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이 고백은 말 그대로 떠나달라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사태를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베드로의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어선 그 차원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베드로와 그 친구들은 이제 뭘 어찌할 줄 모르는 상황에 처합니다. 
아마도 상식의 차원에서 판단했다면, 애초부터 깊은 데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설령 고기도 못 잡는 마당에 궁하니까 그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저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였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여전히 삶의 깊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상식적 잣대를 고집하는 데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바짝 엎드렸으며 다른 동료들도 두려워했습니다. 내가 안다고 생각해 왔던 것,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지금까지 얕은 물이 전부인 것으로 알았는데, 저 깊은 물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순간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5:10) ‘너희가 내 앞에서 그 존재의 깊이, 삶의 깊이를 알고 어찌할 줄 몰라 두려워했다면, 이제 너도 다른 사람 앞에서 그 깊이를 깨우치게 할 것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사로잡은 바와 같이 이제 너도 다른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어린 시절 길을 가다 물을 만나면 돌이라도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물론 깊은 물을 만났을 때입니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웅덩이에 돌을 던지고 마음이 일지 않습니다. 흙탕물이나 튕길 게 뻔한데 뭐하러 던지겠습니까? 그러나 깊은 물에 돌을 던지고 나면 ‘풍덩’ 가라앉는 소리도 오묘하지만 그 파장 또한 오묘합니다. 너무 새파랗고 깊게 보이면 지레 겁을 먹기도 합니다. 저 깊은 곳에 뭐가 있을까 하는 기대와 더불어 나마저 빨려 들어갈 것 느낌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함께 일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느꼈던 경외감을 그렇게 비유할 수 있을까요? 
 
‘그 경외감을 가진 네가 이제 다른 사람에게도 그 경외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내 앞에 선 존재의 그 깊이를 깨닫는 것은 양 측면을 함축합니다. 내 앞에 선 존재의 알 수 없는 심연을 깨닫는 것을 함축하는 동시에 그 깨달음으로 나 역시 그 누군가에게 그와같이 깊은 심연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진실을 깨닫는 것을 함축합니다. 그러기에 비로소 ‘사람을 낚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잔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은 그 꼼수가 다 드러나 보이기에 끌리지 않습니다. 반면에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뭔가 알 듯 모를 듯한 깊이가 느껴지는 사람에게는 끌리는 법입니다. 저 사람에게는 뭔가가 있다는 기대감과 함께 그에게 이끌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낚을 수 있는 깊이를 가진다는 것은 그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교 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의 관계를 세 가지 형태로 나눴습니다. ‘나와 그것’과의 관계, ‘나와 그이’와의 관계,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나와 그것’과의 관계는 나와 물질적 대상과의 관계입니다. 물질적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기계적입니다. 그저 관조하는 관찰자의 시선일 뿐입니다. ‘나와 그이’와의 관계는 그보다 한 단계 발전한 형태입니다. 하지만 그 경우 역시 나는 제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인격의 관계, 말 그대로 ‘관계’는 ‘나와 너’ 사이에 형성됩니다. 상대를 인격으로 대할 때 나 역시 진정한 인격으로 등장합니다. 피상적인 관찰자의 시선을 넘어 진정한 교류가 형성되고 서로 인격의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수없이 많은 표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인격적 호칭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삼자 혹은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나와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고 나를 변화시키는 존재로 인식하는 방식입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그렇게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 말씀은 단지 예수님께서 놀라운 초능력을 발휘해 그것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전도에 나서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겉으로 알고 있던 것을 넘어선 삶의 깊은 차원, 존재의 깊은 차원에 대한 깨달음이 사람들을 진정으로 구원의 길로 인도하게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그 깊이의 차원을 추구합니다. 그 깊이의 차원에 이르게 되면 세상의 오묘함을 더 깊이 느낄 수 있고, 인간 존재,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감각적 만족과 쾌락이 지배하고,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더 나아가 시장의 가치로만 모든 것을 평가하는 오늘의 세계 현실에서 인간은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로부터 삶의 평화가 가능하며,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진정한 삶의 경외감 없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모든 것이 시장의 가치로 환산되고, 모든 것이 가시화된 양적 지표로 평가받는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마저 그렇게 평가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마저 그런 가치에 오염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교리를 믿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과 생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다르다는 것 때문에 혐오하고 배척하는 태도는 인간에 대한 이해, 생명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말 한마디로 정나미가 다 떨어지게 만들 수 있습니까? 복음을 전파한다는 사람들, 진리를 지킨다는 오늘의 사람들이 세간에 비치는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한 해의 절반을 보내고 또 새로운 절반의 시간을 맞이하는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삶의 자세로 지난 시간을 보냈는지 돌이켜 보기를 바라며, 또 새로운 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진실로 삶의 깊이를 추구하며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의 마땅한 삶의 태도입니다. 그 삶으로 이 세상에 함께하는 모든 생명과 더불어 진정한 삶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05 Jul 2026 15:03:1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27 / 7.5.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04]]></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sgK_4FZUfuo 

2. 오늘 예배 후 월례 공동의회가 열립니다(안건: 6월 재정보고, 주요일정 점검). 

3. 7월 예배 및 봉사 담당안이 준비되었습니다.

4.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와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간 제17회 교류프로그램(11/20.금~24.화, 일본 교토 지역, 항공료만 자부담)에 참가 의사가 있는 교우는 7월 20일 이전까지 담임목사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5. 지난 주간 담임목사 사택 수리(지붕 누수로 인한 덧씌우기 공사)를 마쳤습니다.

6.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에서는 베네수엘라지진 피해 지원 헌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헌금할 경우 총회를 통해 전달합니다.

7. 담임목사
   7(화) 오후 3:30 서울 디아스포라교회 / 필리핀인권연대 
   7(화) 오후 5시 기독교회관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와 교계 중진 간담회
   8(수) 오후 7:30 [온라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인식조사 연구모임

8. 교회당 사용
   10(금) 저녁~11(토) 오전 /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동문모임]]></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03 Jul 2026 12:32:3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2026.6.28.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03]]></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6/song20260628.mp3"][/audio]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 성가대]]></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28 Jun 2026 15:19:1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의 공적 역할 - 로마서 12:17~21[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02]]></link>
			<description><![CDATA[2026년 6월 2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교회의 공적 역할
본문: 로마서 12:17~21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SIlmSZDMWp8?si=CzqywDEG_Mzh2I_-"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로마제국의 변방 유대 땅에서 그 제국이 가장 혐오하고 경멸하는 방식으로 처형당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신앙이 도대체 어떻게 거꾸로 로마제국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을까요? 
놀랍도록 일관되고 집요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윤리를 빼놓고는 그 현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따라 하게 만든, 세계관과 그에 따른 실천적 윤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세상의 질서에 매여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인간이 마땅히 살아야 할 길을 일깨워주고, 불가능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게 삶을 살아간 사람들의 모범이 결국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게 된 것입니다. 복음의 보편성은 그렇게 실현되었습니다.
로마서의 본문 말씀은, 바로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의 삶에서 지향한 윤리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체로 사도 바울의 서신들은 구체적인 공동체의 상황에 대응하여 변화무쌍한 언어로 이런저런 권면을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저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어의 편차가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일관된 신학적 입장에 따라 구체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로마서의 말씀은, 여기저기 서신에서 말했던 내용을 정제된 형태로 정리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바울이 다른 교회 공동체에 보낸 서신의 경우는 스스로 공동체를 세웠거나 방문하고 지도한 적이 있어 그 상황을 알고 있고, 그런 만큼 구체적 사안에 대한 권면을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아직 로마교회에 방문해 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전한 편지입니다. 그러기에 이 서신은 일종의 자기소개서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고, 그런 만큼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제된 언어로 가다듬어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전반부(1~11장)가 주로 믿음을 주제로 한다면, 본문 말씀이 포함된 후반부(12:1~15:13)는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가 주로 믿음을 주제로 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은 믿음의 요체로서 사랑을 역설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부차적 효과로서 윤리를 말한다기보다 신앙의 요체로서 사랑의 윤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12:17~21)은 공동체 내부의 윤리(12:9~13)에 이어 공동체 외부를 포함하는 보편적 윤리(12:14~21)를 말하는 대목의 후반부입니다. 심지어 적대자들까지 유념하는 가운데 지향해야 할 윤리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공동체 내외부 모두 공통되는 윤리의 기초는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환난 가운데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12:9~13)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윤리적 덕목을 말할 때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 스토아철학의 윤리적 덕목을 수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수용하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서 변용하거나 덧붙입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 가운데 하나가 모든 윤리적 덕목의 기초로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궁극적 지평을 함축하는 동시에 구체적인 인간관계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바울의 임의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서 그 사랑이야말로 가장 근본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권면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그 느낌이 어떨까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그래야 하고, 나도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겠다 하고 다짐할 만합니다. 가능성의 윤리입니다. 

권면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한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12:14~16) 
이 권면 역시 사랑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며, 서로 한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 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실체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것은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공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황금률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모든 위대한 정신세계가 가르치고 있는 그 태도가 어떻게 가능한지 분명한 어조로 말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는 태도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굳이 줄여 말하면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겸손의 미덕은 그리스도교가 배경으로 하는 유대교나 그리스-로마의 가르침에서는 권장되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에서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강제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졌고,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그것이 노예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자유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겸손, 곧 낮아짐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바울의 깨달음에서 비롯됩니다.

적대자들에게도 그와 같이 하라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점입니다. 본문 말씀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신 32:35) 하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잠 25:21~22)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12:17~21)
이 말씀을 들으면 그 느낌이 어떻습니까? 옳은 말씀인 것 같기는 하지만, 과연 가능할까 하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불가능성의 윤리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했던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울에게서 이와 같이 변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의에 대한 분노를 접으라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며, 불의와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고전 13:6). 
줄여 말하면,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할지언정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합니다. 불의와 악을 미워하기에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악을 척결하겠다는 것이 더 큰 악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 악순환을 넘어서기 위한 길로서 원수들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할까요? 흔히 말하기를 죄는 미워할지언정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문제는 그 말뜻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 그 불가능성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12:18) ‘할 수 있는 대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당장 그렇게 하기 쉽지 않지만, 그렇게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바울은 다시 강조합니다. 원수 갚는 일을 스스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라 합니다. 심지어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잠언 25:21~22). 여기에 머리 위에 숯불을 얹는다는 것은 언뜻 보기에 ‘뜨거운 맛을 보여 준다’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고대 근동, 특히 이집트에서 참회 의식을 유념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참회할 때 그 표시로 머리에 숯불을 얹는 관습을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는 행위를 보며, 원수가 스스로 낯 뜨겁게 느끼며 참회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는 회의가 나올 법합니다. 선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벌어지는데, 악의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선의를 베풀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이 교훈은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바라는 궁극적 가르침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덕목을 실천할 때 우리는 자신감을 얻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자기 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실천하고자 할 때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진정한 초월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가능한 것만 하고 산다면 우리에게 새삼스러운 어떤 목표가 필요 없습니다. 지금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마땅히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는 데 절실히 요구되는 것, 그것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여정입니다.

일본 군국주의 전범들을 분석한 정신과 의사의 심층 보고서 『전쟁과 죄책』(노다 마사아키)은 전쟁범죄자들이 자신들의 죄를 어떻게 인지하게 되는지 깊이 있게 다룹니다. 뜻밖에도 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자신들이 한 일을 꼼꼼히 기록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신들이 타인을 비인간으로 여기며 저지른 죄의 실체를 인식하게 됩니다.

본문 말씀에서 바울 역시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윤리를 극한까지 확장합니다. 그것은 망상이 아닙니다. 그 통찰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성찰의 핵심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성찰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성찰과 공감으로 이어지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타인, 심지어는 적대자에게까지도 확장될 때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기왕에 자신들의 범위에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신앙의 위대함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사랑의 위대함은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놀라운 사랑의 힘, 믿음의 힘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여전히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교회들이 많지만, 오늘 우리 사회에서 교회는 신뢰받고 있지 못합니다.
한국 개신교는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공적 역할을 담당해 왔습니다. 교육, 의료, 민주화 운동, 인권의 신장 등에서 개신교는 국가 권력과 시장 사이에서 건강한 시민사회의 형성에 기여해 왔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한국 개신교의 성장 과정은 단순한 교세 확장의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근대 교육과 사회 개혁,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개신교는 한국 사회의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사실상 교회 성장과 동일시되는 교회 공동체의 확장도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아노미 현상을 극복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할 만하였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도덕적 가치와 공공적 언어를 제공하며 안전한 공간이 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때 개신교는 민주주의, 공동체, 사회적 약자 보호 등의 가치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개신교는 그 역할을 상실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극우와 동조하는 개신교의 정치 참여가 신앙의 공적 표현으로서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동원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묵은 반공주의, 문화적 보수주의,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 이슈 등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가운데 종교적 언어가 정치적 갈등의 언어로 전락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오늘 개신교의 위기는 교세의 감소가 아니라 시민사회로부터 신뢰의 철회라는 것이 그 본질적 요체입니다. 이 엄중한 현실을 직시해야만 그 대안 또한 적절히 찾아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사회적 소통 능력을 강화하고 공공성을 회복하는 방향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는 교회의 정치적 참여를 포기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느 편에 서든 그 정치적 참여는 신앙의 한 표현이자 책임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정치 참여가 진영논리를 강화하고 따라서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로부터 벗어나 민주주의, 인권, 평화, 그리고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의 정당한 권리 옹호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지향할 때 추락한 사회적 신뢰의 회복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그 가치를 실현하고 체험할 때 우리는 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28 Jun 2026 15:04: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26 / 6.28.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01]]></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CDYmJKRI9Wg

2. 재정위원회가 오늘 공동식사후, 청빙준비위원회가 오후 2시에 열립니다.

3. 오늘 오후 여신도회 주관 살림의 날(아나바다 장터)이 있습니다.

4. 다음 주일 공동예배는 성찬예배로 드리며, 예배 후에는 월례 공동의회가 열립니다(안건: 6월 재정보고, 주요일정 점검). 

5. 오늘은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와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간 선교협약 28주년 기념 공동기도주일입니다. 첨부한 공동 기도제목을 따라 함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11월 20(금)~24(화) 일본 교토 지역(항공료만 자부담)에서 진행되는 제17회 교류프로그램 참가자를 모집하니 참가 의사가 있는 교우는 담임목사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6. 7월 예배 및 봉사 담당 예정안이 준비되었습니다.

7. 목회자 일정
   부목사(이성철 목사)
   28(일) 서울 한백교회 예배 설교   
   담임목사(최형묵 목사)
   28(일) 저녁 8시 [온라인] 종교와 마르크스 정기 세미나
   30(화) 오후 2시 서울 기독교회관 / 글리온 회의 40주년기념 평화신학 포럼


*** 2026년 6월 28일 한일 공동기도주일 기도제목 ***

1) 한일 공동기도 제목
①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하여, 전 세계 평화를 위하여
② 차별을 넘어 다문화(多文化) 공생사회(共生社會)를 위하여
③ 교류 28주년을 맞으며, 나아가 교류 30주년(2028년)을 앞두고, 대전노회와 교토교구의 관계의 성숙과 공동선교의 새로운 발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2) 2026년 교토교구 기도 제목
교토교구와 함께 기도해 주는 친구인 대전노회 여러분이 계심을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① 일본의 침략지배와 전쟁에 대해 반성하는 입장에서, 역사 왜곡과 헌법 개악, 군비증강에 의한 지배와 전쟁의 길을 용납하지 않고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오키나와(沖縄)의 고통을 마주하며 계속 기도합니다.
② 교토교구가 사회에서 제기되는 차별과 인권 문제에 대응하여, 헤이트스피치(혐오발언) 등 차별선동을 용인하지 않고, 격차와 빈곤 가운데서 사람들의 유대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③ 교회의 교세가 약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선교의 역사가 이뤄지고 교회가 지속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④ 교토교구 모든 교회(75교회)의 선교의 진전과 연대의 심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3) 2026년 대전노회 기도 제목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는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해 온 교회의 지체로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형제교회로서 협력하고 있는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와 함께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①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을 넘어 누구나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누리며, 정치적 양극화를 극복하여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하기를 기도합니다. 
② 한반도에서 남북간 긴장이 해소되어 평화로운 공존이 이뤄지고,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평화가 이뤄지기를 기도합니다. 
③ 심화되는 생태위기 가운데 자연을 훼손해 온 삶의 방식을 반성하며, 교회가 생명의 보전을 위한 삶에 앞장설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④ 인구감소와 고령화 시대에 대전노회의 모든 교회(77교회)가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더욱 성숙하여 세상을 향한 선교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26 Jun 2026 16:17:0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가장 보통의 교회'가 살아내는 가장 친밀한 공적 사역]]></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300]]></link>
			<description><![CDATA[『월간목회』창간 50주년 기획특집 한국교회 목회 백서 / (2026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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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6/Pastoral-Monthly_2607_chm06-scaled.jpg"><img src="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6/Pastoral-Monthly_2607_chm06-772x1024.jpg" alt="" width="772" height="1024" class="alignnone size-large wp-image-26580" /></a>

인권과 교회: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공적 사명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한국교회인권센터 이사장)

생명과 인권을 옹호하는 교회

새천년 첫 주일 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교회가 지향하는 바를 공표하였다. “우리는 이런 교회를 지향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표방한 교회의 지표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으로서 ‘영적 공동체’와 ‘선교하는 교회’ 두 가지 목적을 제시하고, 이어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할 목표로서 ‘생명과 인권을 옹호하는 교회’, ‘연대하는 교회’, ‘민주적인 교회’, ‘공부하는 교회’, ‘친밀한 공동체’ 등 다섯 가지 과제를 명시하고, 마지막으로 ‘희망이 있는 교회’로 결론을 삼았다.
이는 처음 교회를 시작하기 전 지역사회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나눈 후 집약한 것이었다. 이후 2019년 말 교회 창립 20주년을 앞두고 다시 가다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를 통해 처음부터 교회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고, 현재 교회 구성원은 그 가치에 기본적으로 공감하고 있다.
여기서 첫 번째 실현 과제로 꼽은 ‘생명과 인권을 옹호하는 교회’는 그 내용을 이렇게 집약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모든 생명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 모두가 존중받는 가운데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출신이나 성별, 또는 성적 지향 등을 구실로 하여 차별하지 않고 환대하는 공동체를 이룰 뿐 아니라 동시에 세상에서도 이를 이루기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2019년 수정 보완할 때 가장 심혈을 기울인 대목이었다. 처음 내용은 생명과 인권이 존중받는 가운데 평화로운 삶을 이루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원칙적 선언 수준이었다. 수정한 내용은 차별이 일어나는 현실의 맥락을 짚고 대표적인 차별금지 사유 몇 가지를 명기하는 것으로 보완하였다. 그것으로 한정하는 의미가 아니라 대표적인 사유를 적시하는 의미였다.
가장 심사숙고했던 것은 ‘성적 지향’이었다. 때마침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교회에서는 이미 2017년에 여덟 차례에 걸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권리: 국민주권 시대에 다시 읽는 성서”라는 주제로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는 인권 사안에 대한 공부를 마친 터였다. 수요일에 진행된 강좌에 참여하지 못한 교우들이 주일 오후 ‘앵콜 강연’을 요청하였다. 그 주제는 성소수자 인권에 관한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주일 예배 가운데서도 인권운동과 관련된 학자나 운동가 등을 초청하여 말씀을 듣는 기회도 지속되었다. 교우들은 그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인권 상황을 공유하게 되었고, 당대에 첨예한 쟁점이 된 사안을 명기하는 것을 매우 의미있게 받아들였다. 명기된 사안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사안을 명기한 것은 당대의 인권에 대한 중요한 이해의 지표를 드러내는 의미를 지녔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는 교회

천안살림교회는 이른바 ‘특수선교’를 지향하는 교회는 아니다. 특정한 과제를 중심으로 하거나 특정한 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모인 공동체는 아니라는 뜻이다. 가장 보통의 교회를 지향한다고 할까? 평범하면서도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는 셈이다.
연령별 구성에서 고령자에서 유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가 어울리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가 고령화하는 추세 가운데서도 청년들이 자체의 역동성으로 활발히 움직일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계층별 구성에서는 지역 시민사회 활동가도 있지만 여러 직종에 종사하는 교우들이 함께하고 있다. 고학력층이 많은 편이기는 해도 이른바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라고 할 만한 교우들 또한 적지 않다. 기존 교회에서 만족하지 못하거나 상처를 입고 찾아온 교우들이 다수이다. 특히 극단적으로 치우친 정치적 편향과 혐오 선동을 견딜 수 없어 피난처이자 안식처로 여기고 찾아온 경우가 많다. 그렇게 다양한 이들이 서로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니 커다란 은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런 모습이 교회 공동체의 이상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한다.
선교적 과제 역시 특정한 문제에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과 인권을 옹호하는 교회’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것은 교회가 지향하는 여러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사실은 이 지표만으로도 단일한 과제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이라는 가치는 인권의 밑바탕이 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모든 피조물을 함축하는 뜻 또한 지니고 있다. 그것은 곧 자연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 과제는 창조세계의 보전을 뜻한다. 이는 특별히 기후 위기 시대에 새삼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천안살림교회가 ‘녹색교회네트워크’의 일원으로 함께하는 것도 그 가치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인권 옹호를 중요한 과제로 삼는 교회의 몫이 돋보인다면 아마도 많은 교회들이 인권의 문제에 무심한 탓인지도 모른다.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창조신학,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옹호한 예언자들의 선포, 그리고 버림받은 이들과 함께하며 한 영혼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오늘의 인권 인식과 직결된다고 믿는다. 그러기에 인권의 문제를 교회의 과제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많은 교회가 인권 옹호를 신앙의 과제이거나 교회의 과제로 받아들이지 않은 탓에 우리가 상식으로 여기는 그 태도가 두드러지게 보일지도 모른다.

안팎으로 인권 존중의 정신을 구현하는 공동체

물론 인권 감수성을 갖추기 위한 의도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감수성은 우선 교회 공동체 안에서부터 길러지고 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하나의 원칙이 있다. ‘친밀한 공동체’를 표방한 것이다. 이로써 대형교회 지향을 명시적으로 거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예 200명 이내로 그 구성원을 한정하고 있다. 모든 교우가 직접 인격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적정한 규모라 여기기 때문이다. 누구든 직접적으로 얼굴을 마주할 때 상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 적어도 교회 안에서 그런 직접적인 인간관계가 깊어지는 경험을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그 가운데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의 경험을 쌓아가야 한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 경험을 쌓으며 밖을 향하여 자신을 열고 마땅히 함께해야 할 이들과 동행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교회가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하고자 하면 오히려 그 몫이 한정되지만, 자신을 열어두고 십시일반의 정신으로 함께하고자 하면 많은 몫을 감당할 수 있다.
천안살림교회는 개척 시점부터 지역사회 어린이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방과후 학교 공간으로 개방하였고, 지금까지도 지역시민 단체인 ‘미래를여는아이들’과 더불어 지역아동센터와 그룹홈을 지원하는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장애인 단체에 공간을 개방하여 활용하도록 하기도 하고, 독거노인을 위한 밑반찬사업 등을 위해 주방시설을 개방하기도 한다.
지역사회를 벗어나 우리 사회에서 노동권이 침해받고 생명과 안전이 위협받는 현장, 차별이 일어나는 현장에 함께하거나 지원 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세월호참사 유족들과 함께하는 예배에 참여하기도 하고, 성차별과 성폭력을 막아내고 성소수자 차별을 금지하는 활동에도 연대한다. 최근 제정된 생명안전기본법에도 뜻을 같이하였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서도 함께 마음을 모으고 있다. 지난해 25주년을 맞이하여 열린 수련회에서는 교우들이 30주년을 맞이할 때는 차별금지법이 있는 나라에서 온전한 성평등을 이루는 교회의 모범을 제시하자는 포부를 밝히기도 하였다.
그 연대는 국내로 제한되지 않는다. 국제적 차원에서 참혹한 인권 침해의 현장에 연대의 손길을 펼치기도 한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올리브나무 심기 운동에 동참하기도 하고, 필리핀 인권 개선을 위한 지원 활동에도 참여한다. 시시때때로 연대하는 활동을 열거하자면 그 목록은 더 늘어난다. 지역사회를 벗어난 인권 현안과 관련된 활동은 많은 부분 담임목사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교우들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뜻을 같이하고 함께한다. 담임목사의 활동이 교회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지만 역으로 교우들의 공감과 지지가 없다면 담임목사의 그 활동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상호 관계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삶

우리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교회의 사명을 특별하다기보다는 그저 마땅한 과제로 여긴다. 근대적 문제의식으로서 인권에 대한 인식이 제기되었을 때 한동안 교회가 이를 거부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인권을 내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배반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에 대한 신학적 인식은 달라졌다.
창조 이야기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인간 존엄의 신학적 근거에 해당한다. 하나님께서 인간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이들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한 사람 한 사람 영혼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하였다.
성서의 그 가르침은 오늘날 인간 존엄을 보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따라서 교회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마주하며,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도록 헌신하는 것은 마땅한 사명일 수밖에 없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Wed, 24 Jun 2026 14:02:3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9"><![CDATA[논단]]></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2026.6.21.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99]]></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6/song20260621.mp3"][/audio]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찬송 86) / 성가대]]></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21 Jun 2026 17:24:2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신실한 하나님을 닮는 믿음의 의지 - 미가서 7:18~20[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98]]></link>
			<description><![CDATA[2026년 6월 2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신실한 하나님을 닮는 믿음의 의지 
본문: 미가서 7: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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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부단히 추구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저마다의 허물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유대 안에서 진정한 삶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신실한 삶의 희망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언자 미가의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은 그 진실을 선포합니다.

성서에는 그 출신이나 인격적 개성이 다양한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인격적 개성은 저마다 다 다르기에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출신이 다양한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언자의 지위가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은 세습 지도자가 아니라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 그야말로 하나님의 부름에 응한 사람들이기에 그 출신이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출신에 따라 메시지의 색깔도 다릅니다. 
오늘 우리는 미가서의 말씀을 함께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미가는 아주 인상 깊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현실의 불의를 질타하는 예언자 미가의 직설적인 언어는 정말 놀랍습니다. 예언자 아모스와 더불어 미가의 선포는 종교적·사회적 불의를 향한 질타에서 정말 놀랍습니다. 지금 그대로 적용해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선포입니다.
예언자 미가는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와 함께 주전 8세기에 활동하였습니다. 문서로 예언을 남긴 초기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번영을 구가하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불의와 부패, 특히 국가 지도자 및 종교 지도자들의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역설한 점에서 공통적이었습니다. 특별히 그 출신 신분 자체가 미천한 아모스와 미가의 질타는 직설적입니다. 당대의 예언자 가운데 이사야가 귀족 출신으로 그 언어 또한 현란하다면, 아모스는 목동 출신으로, 미가는 농사꾼 출신으로 그 언어가 매우 직설적이고 통렬합니다.

본문 말씀은 미가서의 결론으로서 그 신랄함이 잘 느껴지지 않지만, 사실은 매우 선명한 미가서 전반의 맥락에 비춰볼 때 그 절실한 의미가 제대로 드러납니다. 본문 말씀은 단적으로 말해 신실한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자체로 한정해 말하면, 그 뜻이 간결 명료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백성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용서하여 주신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와 죄를 보고 진노하시지만, 끝까지 노여움을 지속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본문 말씀의 문맥에서 보면 불의를 보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도 실은 백성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잘못에 대해 진노하시고 그에 대한 책임을 묻지만, 끝내 죄의 수렁에 내버려두지 않고 그로부터 건져 내어 백성들에게 평화로운 삶을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의 요체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 고백은, 그 고백을 하는 사람의 믿음의 신실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지니는 신실한 희망의 표현입니다. 끝내 정의가 회복되어 모든 백성이 평화로운 삶을 누리게 되리라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 예언은 사실 이미 파국에 이른 공동체를 전제로 하고 그로부터 회복을 선언한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예언자 미가의 활동 시기에 부합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유다 공동체의 파국은 587년 멸망을 말하는데, 미가 예언자가 활동한 시기는 그보다 200여 년 앞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모든 성서 내용이 그렇지만 하나의 문학 단위로 편집되어 있을 경우 그 의미는 그 자체의 문맥에서 구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특정한 성서 본문의 메시지는 상황적 맥락에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기록으로서 책의 문맥에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 자체로 따로 떼어놓고 볼 것 같으면 사실 그 어떤 예언자의 메시지와도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위로와 희망의 선포입니다. 모든 예언의 결론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이어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예언서의 기본 구조입니다. 그 공통적인 성격만을 전제하고, 본문 말씀을 주목하면 특별한 메시지의 성격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 메시지의 생생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역시 그 문맥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미가의 이 예언은 그가 선포한 전반적인 예언의 맥락에서 조명할 때 그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미가가 농사꾼 출신이고, 그 책이 간결 명료하기도 하여 그 메시지의 직설적 성격이 도드라지기는 합니다. 하지만 미가가 같은 시대 다른 예언자들에 비해 어떤 식견이나 혜안이 빈약하지는 않았습니다. 미가는 동시대 예언자 아모스와도 많은 부분 닮아 있을 뿐 아니라, 출신으로 봤을 때 비교되는 이사야와도 많은 부분 시대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미가 역시 장대한 스케일로 장차 이뤄질 평화를 그리고 있습니다(4:1~5). 그 비전을 &lt;새번역&gt;은 “주님의 통치로 이뤄질 우주적 평화”라고 소제목을 붙이고 있습니다. 과연 ‘우주적 평화’라고 할 만큼 원대한 희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한 대목입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미가 4:3)
익숙한 선포입니다. 이사야의 말씀과 거의 같습니다. 국제연합(UN) 본부 앞에 새겨진 말씀입니다(이사 2:4). 그만큼 미가는 당대의 다른 예언자들과 시대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농사꾼 출신다운 예언은 그다음 이어지는 선포 가운데 드러납니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미가 4:4)
이것은 자기가 땀 흘려 가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에서 거둔 소출을 바로 그 나무 아래서 누린다는 소망입니다. 그렇게 거둔 소출을 빼앗길 염려도 없고 평화스러운 삶이 침해받을 염려도 없는 삶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것은 성서적 정의의 요체를 함축하고 있으며, 평화의 구체적인 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흔히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로 여겨지지만 그것은 소극적 의미의 평화이며, 적극적인 의미의 평화는 일상적 삶의 평화입니다. 그것은 곧 정의로운 일상의 삶입니다. 정의로운 평화의 모습입니다. 

미가서의 마지막 결론은 바로 이와 같은 메시지의 핵심에 비추어 그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죄를 사하여 주시고, 사랑을 베푸신다는 것의 참뜻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지극히 제한된 범위로 한정해 버립니다. 그저 자기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전부인 줄로 압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곳에서 저마다 땀 흘린 결과를 스스로 누림으로써 정의가 이뤄지고 진정한 삶의 평화가 이뤄지기를 바라고 이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미가 예언자가 선포한 신실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은 바로 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인정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단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허물과 한계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절실히 부를 때 내가 어떤 삶을 지향하며 어떤 세계를 바라느냐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요체입니다.
본문 말씀은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의 발로 밟아서, 저 바다 밑 깊은 곳으로 던지십니다.”(7:18~19)
이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한결같은 사랑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죄와 허물을 씻어내고 평화로운 삶을 누리겠다는 삶의 지향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신실한 믿음이 필요한 진짜 이유입니다.

인간 역사의 놀라운 점은 사실의 세계에 매몰되지 않고, 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은 그 가능성을 극대화합니다. 그 믿음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관계, 그 사회와 그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관계, 그 사회는 확연한 차이를 지닙니다.
한국전쟁 76주년을 맞이하지만 분단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채 사실상 두 국가 체제로 착잡한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전쟁불사’를 외칠 때와 ‘평화정착’을 외칠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상황은 객관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의지와 실천으로 변화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자연과는 다른 역사의 의미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할 때 우리는 그 신실한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우리의 의지를 다지는 것입니다. 그 신실한 믿음으로 사람들 가운데 사랑을 나누고 평화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21 Jun 2026 15:18: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북간도 개신교의 역사]]></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97]]></link>
			<description><![CDATA[2026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인문강좌 특강: 2026.6.20(토) 오후 2:30 / 최형묵 목사

북간도 개신교의 역사

1. 한국 교회의 다양한 신앙 형태

1. 한국 교회의 다양한 신앙 형태는 대체로 일제 강점기에 그 원형을 형성하였다. 그것은 교회 안의 신앙으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나라 만들기로서 근대화의 구상과 연결되었다.
1-1. 주로 부흥회를 통해 형성된 교회 대중의 신앙은 내세 지향적 성격을 뚜렷이 지니게 되었다. 위기가 일상화된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 신앙은 가장 일반적인 경향이 되었다. 
1-2. ‘자아개조 민족주의’(Kenneth Wells)로 일컬어지는 민족의식에 투철한 서북지역 기독교 선각자들(이승훈, 안창호 등)은 반공주의와 미국적 자유주의를 이상으로 삼았다. 이 흐름은 훗날 『사상계』를 중심으로 결집하며, 한국 근대화 구상에 가장 뚜렷한 유산을 남겼다.
1-3. 간도지역의 민족운동과 주로 캐나다 선교사들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형성된 신앙의 전통(김약연, 김재준, 강원용, 윤동주,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등)은 한국적 근대화에 대한 대안으로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에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1-4.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그 선구자가 된 기독교인(이동휘, 여운형 등)의 전통도 재조명되어야 한다.
1-5. 『성서조선』그룹(김교신, 함석헌 등)과 그 후예들(유달영, 이찬갑, 장기려 등)의 신앙도 한국사회에 의미있는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반국가주의와 함께 자율적 신앙 공동체를 추구한 이들의 실천은 조합운동과 대안적 삶의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2. 북간도 지역의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

2-1. 북간도 명동촌은 일제에 의한 조선 강점이 노골화되고 있던 1899년 1월 함경도 회령과 종성에 살던 네 가족 142명의 이주로부터 시작되었다. 김약연, 남도천, 문병규, 김하규 네 집안의 이주였다. 윤동주 가문은 1886년 이미 종성에서 간도로 이주하였다. 이 가운데 문병규는 문익환 목사의 할아버지, 김하규는 외할아버지가 된다. 이들은 모두 실학의 후예들이었으며, 김하규는 동학에도 가담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이 가족들의 이주 동기는, 젊은이들을 교육하여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일으킬 인재를 기르려는 뜻이었다. 처음에 이들은 서당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쳤으나 신학문의 필요성을 느껴 근대식 학교로서 명동학교와 명동여학교 등을 세웠다. 이 근대식 학교를 세운 것이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젊은 교사 정재면이 부임 조건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가문의 지도자들은 고심 끝에 그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로써 명동촌에는 중요한 또 하나의 정신적 기둥으로서 기독교 신앙이 자리하게 되었다. 
2-2-1. 명동촌의 첫 번째 기둥으로서 민족주의의 색채는 어떤 것이었을까?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운명을 다시 일으켜 세울 인재를 양성하고자 북간도로 이주하여 명동촌을 설립한 동기가 말해주듯, 민족주의는 명동촌을 이끌어간 가장 중요한 기둥이었다. 문익환의 어머니 김신묵 권사의 증언에 의하면, 작문시간에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다는 말이 없으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었다고 할 만큼 그 정신은 압도적이었다. 학교의 체육시간마저 독립을 위한 군사훈련의 기회가 될 정도였다. 실제로 명동촌은 숱한 독립지사들이 드낙거리는 중요한 민족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2-2-2. 명동촌을 세운 기둥으로서 민족주의는 실학과 동학에 그 젖줄을 대고 있었다. 이주 가문을 대표하는 이들이 체화한 유학은 봉건체제를 뒷받침하는 고루한 성리학이 아니었다. 이들은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넘어 민중의 실생활을 개선하는 데 관심을 둔 실학의 후예들이었다. 그 가문의 지도자들은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시간 외에는 실제로 농민들과 다르지 않은 생활을 몸소 실천하였다. 땔감을 등짐으로 나르고, 물지게를 짊어지고, 외양간의 쇠똥을 치우고, 집의 온돌을 고치고 벽을 바르는 일을 모두 손수 감당하였다. 
2-2-3. 이러한 실생활 속에서 형성된 명동촌의 민족주의를 ‘민중적 민족주의’라 부르는 데 주저할 까닭은 없다. 이 개념은 같은 명동촌의 경험을 공유한 안병무 선생에 의해 훗날 정착된 것이지만, 명동촌의 기둥으로서 민족주의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2-3-1. 명동촌의 또 하나의 기둥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성격은 어땠을까? 처음 명동촌에 기독교 신앙을 전해 준 정재면 선생은 서울 상동청년학원에서 기독교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근대 학문을 익히고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의 파송으로 명동촌에 오게 되었다. 명동촌의 지도자들은 신학문의 필요성에 절감하여 정재면 선생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기도 했지만 그의 능력과 인품에 대한 신뢰 또한 그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몫을 하였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명동촌에는 점차 신앙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고, 명동촌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의 주요 가치들을 받아들여 내면화하게 되었다. “성서 안에 담긴 사랑, 정의, 평등, 해방과 같은 사상이 애국심에 불타고 있는 청년들에게 크게 감명을 주었다.” 여기서 북간도 명동촌의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은 매우 자연스럽게 결합하였다. 
2-3-2. 여기에 더하여 명동촌의 기독교 신앙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또 하나 중요한 변수는캐나다 선교부의 영향력이었다. 이는 1894년 황해도 소래교회에서 굵고 짧게 선교한 매켄지 의 영향으로 1898년부터 캐나다 장로교가 선교를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동학군을 만난 매켄지는 동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선교사로서 드물게 신뢰 관계를 형성하였다. 초기 한국 선교에서 선교사들간의 경쟁을 조정하기 위해 선교지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었고, 그에 따라 캐나다 선교부가 함경도와 북간도 지역을 맡았다.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이 대체로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하였던 반면 캐나다 선교사들은 자유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들의 개방적 신앙과 신학은 교육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여러 동학들이 은진중학교에서 김재준 목사의 가르침을 받은 것도,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캐나다 유학으로 근본주의 신학에서 탈피하게 된 것도 그 영향이었다. 그 개방적 신앙과 신학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앙의 보편적 가치들을 삶의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참여신학으로서 한국의 진보신학은 중요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명동촌의 선구자들에게서 기독교 신앙은 세계를 향한 문이자 동시에 수난당하는 민중을 향한 해방의 복음으로 인도하는 길이었다. 

3. 북간도 지역 신앙의 유산

3-1. 북간도 명동촌의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이 어떤 관계를 형성하였을까? 문익환 목사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어른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을 때 그들은 종교를 조국광복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기독교에 진지한 자세로 다가선다. 그들에게는 어떤 새로운 가르침이라도 진지하게 알아보려는 구도 정신이 있었다. 신교육의 모체인 기독교를 소화하다 보니 기독교와 유교를 민족애라는 용광로 속에 완전히 녹여서 새로운 세계관, 인간상을 찍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3-2. 훗날 민중신학을 정초한 또 한 분인 서남동 목사는 ‘두 이야기의 합류’를 말했다. 성서와 기독교 역사의 민중전통과 한국 민족사의 민중전통이 당대 한국 그리스도인의 실천 가운데 합류한다는 의미였다.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의 민중현실로부터 형성된 것이지만, 그와 같은 고유한 신학적 통찰을 가능하게 했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바로 이와 같은 명동촌의 선각자들에게 그 뿌리가 닿아 있다. 문익환을 비롯해 문동환, 안병무 등 민중신학을 정초한 이들의 공통 경험은 오랜 기원을 두고 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at, 20 Jun 2026 20:45:4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7"><![CDATA[인문교양강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25 / 6.21.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96]]></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SoVuzBcuwI8 

2. 청빙준비위원회가 다음 주일(6/28) 오후 2시에 열립니다.

3. 다음 주일 오후 여신도회 주관 살림의 날(아나바다 장터)이 있습니다.

4. 상반기 수요 인문강좌는 특별 프로그램을 끝으로 방학에 들어가며 가을에 다시 개강합니다.

5. 교우들의 독서모임 6월 주제는 &lt;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gt;입니다.

6. 담임목사
   25(목) 오후 2:30 서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인식조사 연구모임]]></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Thu, 18 Jun 2026 14:42:2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기쁨 슬픔 아름다운 마음” (2016.6.14.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95]]></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6/song20260614.mp3"][/audio]
“기쁨 슬픔 아름다운 마음” / 성가대]]></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14 Jun 2026 14:39:2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chan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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