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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천안살림교회</title>
		<link>http://salrim.net</link>
		<description>천안살림교회</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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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내게 있는 향유 옥합”(2026.4.26.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65]]></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4/song20260426.mp3"][/audio]
“내게 있는 향유 옥합”(살림의노래 56) / 이장희 교우]]></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26 Apr 2026 16:41:3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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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사랑의 기쁨 - 요한복음 15:1~8[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64]]></link>
			<description><![CDATA[2026년 4월 2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사랑의 기쁨
본문: 요한복음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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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의 비유는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고별설교의 일부로서, 이로부터 쭉 이어지는 요한복음 15장 전반의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게 일깨워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15:1~5).
우리가 이해하는 데 하나도 어려움을 느낄 이유가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마치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줄기에 달려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 뜻을 그렇게 풀이해 주고 있습니다. 각각의 개체는 각각의 개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존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에 자기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어쩌라는 이야기일까요? 포도나무의 비유가 끝난 다음 이어지는 말씀은 그 뜻을 더욱더 구체적으로 밝혀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15:9~11) 
참 포도나무의 가지가 된다는 것, 곧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을 베푸시면서 기쁨을 누린 것과 같이 우리도 그 기쁨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지상 명령은 오직 사랑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더더욱 분명하게 그 진실을 말합니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15:12~1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부릅니다. 도반으로 부릅니다. 종은 주인이 말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옳든 그르든 주인이 명하면 이의 없이 주인의 명에 순종하는 것이 종의 미덕입니다. 친구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친구 사이에서는 일방적인 명령이 통용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밑도 끝도 없이 막무가내로 명령을 행할 수 없습니다. 친구가 하는 말이 뭔지 알아야 동의를 표하고 공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제자들에게, 친구에게 말하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밝히며 그에 따를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사실 이 대목은 이렇게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본문 말씀,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요한복음 15장 말씀의 요체는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근본 요체를 일깨워줌과 동시에 사랑으로 구체화하는 그 신앙의 상호성을 일깨워줍니다. 
우리의 신앙은 두려움의 불안을 넘어 사랑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깊은 죄책의 굴레에 매여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에게 신앙은 그렇게 타락해 있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그렇게 타락한 신앙의 행태를 보여주는 구호일 뿐입니다. 그로부터 이편 저편을 가르고 배제와 혐오를 정당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은 사랑의 기쁨을 맘껏 누리는 신앙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사랑으로 구현되는 삶은 철저하게 상호적입니다. 본문 말씀은 또 하나의 중요한 초점으로 그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줄기와 가지의 비유는 생명의 이치를 깊이 생각하게 해줍니다. 이 비유는 한편으로는 가지가 줄기에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줄기에 생명력을 더해 주는 가지의 역할 또한 환기합니다.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솟아 있지만 가지가 제거되면 나무가 말라 죽는 일도 흔히 있습니다. 나무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은 여러 요인의 상호작용 결과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15장은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겠다.”(14~15) 이렇게 친절하게 해설을 덧붙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여러 지체와 더불어 완성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특별히 근대 이후 개별적 인간의 자율성에 근거한 인간문명에 대한 깊은 성찰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오늘 모든 사람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적 산업사회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인류 역사에서 근대 자본주의적 산업화 과정은 이른바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근대화의 과정은 신과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고, 또한 그것을 강화해 왔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이 특별한 존재이기에 자연적 질서의 일부라는 사실을 부정했습니다. 그것은 곧 모든 외적 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탈영성화’ 곧 ‘세속화’와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이 명제는 그 믿음을 단적으로 표현합니다. 모든 것을 대상화해 놓고 그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확보하면 그 대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저 ‘많이 알면 좋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대상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한 지식에 대한 믿음, 아는 것은 곧 지배의 의지와 동일시되는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믿음에 따라 인간은 개개인이 신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결국 나 아닌 모든 세상의 모든 대상을 객체로 떨어트렸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 조건 안에서 개개 인간은 모두가 격렬한 경쟁 관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홀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항상 불안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자신이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안정감을 누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항상 불안에 시달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나 아닌 모든 것을 그저 대상으로만 여기는 인간은 스스로 어찌할 줄 모르는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고 그 불안과 두려움을 회피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수단을 찾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내보이고 있는 많은 증상은 오늘의 자본주의적 문명이 빚어낸 불안 내지는 두려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즐겁지도 않은데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거의 유일한 길이기에 일에 매여 있는 경우, 결코 내적인 자아와 동일시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허영심을 채워주는 소유물에 집착하는 현상, 아예 어떤 쾌락에만 내맡기는 모든 형태의 중독증상 등이 그런 것입니다. 
신앙생활 또한 그 비슷한 것으로 전락하였습니다. 많은 경우 신앙생활은, 근원적 불안을 넘어 적극적인 삶을 지향하는 것이기보다는 일시적인 환각이나 중독에 빠지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가 아편이 되는 경우입니다. 끊임없이 지옥의 불안을 조장하고 그에 대한 대체재로서 천당을 희구하는 신앙생활이라면 그 전형적인 경우입니다. 놀랍게도 한국교회 현실에서 가장 평균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주류 교회가 이단시하는 신흥 종파들이 별종이 아닌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배태하였습니다. 거기서 좀 더 자극적으로 환상적인 만족을 추구할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지옥의 징벌이 두려워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아니면 구원의 희망이 주는 기쁨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안 지키면 벌 받을까 두려워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드립니까? 아니면 구원의 희망으로 함께 하는 형제자매들간에 나누는 사랑의 기쁨, 또는 내 삶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그 진실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신앙의 공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요한복음의 말씀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처럼 서로 근원에 잇대어 있고 더불어 외부와 교통하는 삶, 그리고 그 삶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삶,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친구로 인정하며 사는 삶이 그 답입니다.

우리들 각자 저마다의 삶이 참 포도나무 줄기에 붙은 가지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 공동체가 그렇게 한 줄기에 연결되어 건강하게 자라고 열매 맺는 포도나무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일 때마다 만날 때마다 사랑을 나누며 위로를 받고 힘을 얻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26 Apr 2026 13:28:3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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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17 /4.26.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63]]></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SLj1BjU8V8s

2. 오늘 오후에는 여신도회 주관 살림의 날(아나바다 장터)이 있습니다.

3. 다음 주일 공동예배는 어린이주일 예배로, 성찬과 더불어 어린이 세례식(이봄, 부모 이상명 류지혜)을 베풀 예정입니다. 다음 주일(5/3) 어린이주일, 그다음 주일(5/10) 어버이주일 연이어 어린이들과 함께 예배합니다.

4. 다음주일 공동예배후 월례 공동의회가 있습니다(안건: 4월 재정보고 및 추경예산안 편성, 주요일정 점검).

5. 5월 예배 및 봉사 담당 예정안이 준비되었습니다.

6. 5월 셋째 주일(5/17) 오후에 청년회 주관으로 전교인체육대회가 천안시 장애인 체육관에서 열립니다.

7. 2026년 상반기 수요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교회 깊이 알기”가 계속 진행됩니다.
  [4] 4월29일(수) 영화 &lt;개벽&gt;(1991, 임권택)
  [5] 5월06일(수) “우리교회의 공동예배형식”(최형묵)
  [6] 5월13일(수) “독일 헤른후트형제단의 성서일과”(최형묵)
  [7] 5월20일(수) “천안지역 종교문화유적”(송길룡)
  [8] 5월27일(수) “사진으로 보는 우리교회 초기모습”(송길룡)

8. 담임목사
   28(화) 오후 2~5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출강 “민중신학의 탐구”
   29(수) 오전 10:30 서울 남영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자문회의]]></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24 Apr 2026 16:28:3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한국교회인권센터 이사장 취임사]]></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62]]></link>
			<description><![CDATA[한국교회인권센터 이사장 취임사
2026년 4월 23일(목) 오후 5시 / 기독교회관 조에홀
최형묵(한국교회인권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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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인권센터’는 지난 2024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에서 그 이름을 변경하였습니다. 교회의 인권운동, 곧 인권선교의 외연을 확장하여 그 저변을 더욱 넓히자는 취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의의를 널리 알리는 기회를 갖고자 하였으나, 12.3 불법 비상계엄 사태가 발생하여 긴박한 시국대응으로 그런 기회를 별도로 갖지 못하였습니다.
소장, 그리고 이사장으로서 저는 사실 지난해부터 그 역할을 맡아왔지만, 새롭게 임기를 시작하면서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취임식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는 그 역할을 맡게 된 이들의 각오와 결의를 다지는 기회이지만, 그보다 먼저 ‘한국교회인권센터’가 맡아야 할 과제와 책임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한국교회인권센터’는 1974년 이래 한국 사회에서 인권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맡아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위원회’의 활동과 그 정신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 역사의 무게를 무겁게 느낍니다. 오늘 한국교회인권센터가 그만한 몫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편 1974년 인권위원회가 출범할 당시와 오늘의 인권 상황이 다르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1974년 인권위원회 출범 당시, 그리고 이후 오랫동안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의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자본의 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의 상황이 두드러졌고, 더불어 이른바 ‘정상적인’ 시민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여러 소수자의 배제와 혐오 현상이 과제로 부상하였습니다. 최근에는 교회에 의한, 또는 교회 안에서 배제와 혐오 등의 인권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요즘 젊은 세대는 “일상 자체가 계엄”이라며 “광장에서 골목으로” 향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금 한국교회인권센터가 떠맡아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의 상황이 극복된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는 작위에 의한 인권 유린이 심각했다면 지금은 부작위에 의한 인권 침해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일 뿐입니다. ‘국가보안법’이 버젓이 살아 있어 사람의 양심과 생각 자체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참사를 막아내고자 하는 ‘생명안전기본법’이 아직 국회에 계류중입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묘연한 상황입니다. 우리는 국가보안법 철폐, 그리고 생명안전기본법과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 사회에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차별과 혐오, 교회 안에서마저 강화되고 있는 반인권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합니다. 노동권의 보장을 위하여, 이주민·장애인·성소수자 등 여러 소수자의 정당한 권리를 위하여 함께 할 것입니다. 생명의 존엄과 인권 존중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국제적 차원에서 보편적 인권의 실현을 위한 연대를 지향합니다. 필리핀과 미얀마 등 아시아 지역에서의 인권 상황,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반인도적 상황, 주권과 인권 존중의 규범 자체를 무너뜨린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인한 야만적 상황을 주목하며 그 참담한 사태를 끝내기 위해 세계인들과 연대하고자 합니다. 

끝으로 역할을 맡은 이로서 각오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스스로 평하기는 민망한 노릇이지만, 이번 회기 책임을 맡은 이들을 보고 염려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사장, 소장, 사무국장 모두 한결같이 순해 빠진 인간들이라 이들이 어찌 엄혹한 상황을 헤쳐 나갈까 염려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진용을 짜준 이사회 책임이기는 하겠으나, ‘전투력 강한’ 부이사장단을 꾸려 주셔서 다행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순한 사람이 성나면 더 독한 법입니다. 제가 순한 사람이기는 해도 순하게 살아오지는 않았습니다. 말씀으로 용기를 얻으며 각오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시편 19:3~4)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 1:27)]]></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Thu, 23 Apr 2026 22:53:1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9"><![CDATA[논단]]></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세월호 참사 12년, 아직도 법이 없다, 생명살리는 법을 말하다]]></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61]]></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gMiP8rwJN6A?si=x_hKDtQicMg0r5BH"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19 Apr 2026 20:37:5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1"><![CDATA[토론마당]]></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우리가 새 날을 낳으리라”(2026.4.19.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60]]></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4/song20260419.mp3"][/audio]
“우리가 새 날을 낳으리라”(살림의노래 163) / 성가대]]></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19 Apr 2026 17:12:3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보편적 규범의 재구성 - 베드로전서 2:20~25[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59]]></link>
			<description><![CDATA[2026년 4월 1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보편적 규범의 재구성  
본문: 베드로전서 2: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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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는 히브리서, 요한계시록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로마 사회에서 박해를 받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교의 근본 도리가 무엇이며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떠한 삶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주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희망을 지니고 살아가라는 것을 역설합니다.
‘산 돌’의 비유(2:5)라든지, ‘나그네’로서 그리스도인(2:11)의 비유는 여전히 신앙적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그 비유에 이어지는 본문 말씀은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이자 동시에 권면에 해당합니다.

사실 본문 말씀은 그 맥락상 오늘의 시선에서 상당한 논란거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인들에게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인’(오이케테스)으로 번역된 말은 전형적인 ‘종’, 곧 ‘노예’(둘로스)를 뜻하는 개념과는 구별되고 대체로 가사에 종사하는 하인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종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노예제라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말씀의 의미를 새겨야 하는 까닭에 상당한 논란거리를 지니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노예제라는 역사적·사회적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이 말씀은 모든 차별과 위계를 부정합니다. ‘종도 자유인도 없다’고 명시합니다. 이 전망 안에서 노예제는 용인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당대의 현실 가운데서 노예제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실제로 노예제 타파 운동을 펼치지는 않았습니다. 그 운동이 일어난 것은 근세의 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노예제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엄연히 자리하고 있는 현실적 사회제도를 직접 타파하기 위한 운동을 펼치지는 못하였지만, 그대로 용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제도의 원리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도망한 노예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그대의 곁에 있을 겁니다. ··· 나를 맞이하듯이 그를 맞이하여 주십시오.”(빌레 1:16~17) 이는 주인과 종의 구도를 허무는 것입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를 형성할 것을 권합니다. 노예제도가 현존하고 있더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제도의 구속을 벗어나 형제애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제도 자체를 철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현존하는 조건들을 철폐하는 것에 앞서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내적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현실의 조건과 제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당한 제도를 안으로부터 무너뜨리는 삶의 태도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초점을 달리합니다. 하인들이 처한 실존적 정황을 주목하고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과 대비하며 의미를 부여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위로와 더불어 격려를 하고자 한 것입니다.
먼저 서신은 하인들이 겪는 부당한 현실을 주목합니다.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2:20)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부당하게 겪는 현실을 직시한 것입니다. 이는, 부당하게 겪는 고난 그 자체가 은혜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견뎌내는 것이 은혜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견뎌내는 것은 부당한 고난 그 자체에 매몰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겨내는 것을 뜻합니다. 악에 빠져 자기를 잃어버리거나, 악에 악으로 대응하면서 더 큰 죄악에 빠지지 않고, 부당한 현실을 드러내며 자신을 지키는 길입니다. 견뎌낸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를 갖습니다. 비단 종의 신분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를 따른다는 이유로 박해와 고난을 겪는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옳은 일을 하면서 부당하게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그 위로의 근거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제시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2:21a)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2:22~24)
부당한 고통을 일상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어떻게 들렸을까요? 숙명론을 강변하는 말씀으로 들렸을까요? 그보다는 자신들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닮았다는 것을 깨닫고 진정한 삶의 희망과 용기를 지니게 되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진실을 깨달았을 때 부당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과 용기가 더해졌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그대로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수난의 종과 같은 모습입니다(이사 53:1~12). 그분은 죄를 지은 적이 없고 거짓을 말한 적이 없으나 부당하게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위협하지 않으며 고난을 감내하면서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뜻도 의미도 모르며 그저 고난을 겪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명백히 부당한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당하게 고난을 가하는 이들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며 맞서지 않고 온전히 정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에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의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그 불의한 체제에 연루된 모든 이들의 잘못을 드러냄으로써, 거꾸로 사람들이 그로부터 구원받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2:24b) 이는, 죄의 유혹에 노출된 육체의 죽음으로 온전히 의를 이루게 된 진실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할 가능성이 단절되었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으로 온전히 의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죄와 타협하지 않고 온전히 의를 이루는 삶이 가능하다는 진실을 극적으로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그 삶의 가능성을 뜻합니다.

일찍이 민중신학자 서남동 선생은 그 진실을 두고 ‘한의 속량적 성격’이라 말했습니다. 부당한 지배체제에 의해 쌓인 한을 민중이 스스로 극복해가는 한풀이에서 그 속량적 성격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한은 “민중적 저변감정으로서 한편으로는 약자의 패배의식, 허무감과 체념이 지배하는 감정상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약자로서의 삶의 집념을 담고 있는 감정”이기도 합니다(서남동). 삶의 집념으로서 그 한은 예술적으로 승화되기도 하며 혁명의 힘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이로써 한은 보복의 악순환을 벗어나 민중 자신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합니다. 원한에 쌓인 민중이 자기를 부정하고 초월함으로써 그 한을 승화시키는 가운데 그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한(恨)과 단(斷)의 변증법’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영적 쇄신과 사회적 변혁을 통합하는 지속적인 혁명의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 역사는 그 놀라운 민중의 각성으로 오늘의 민주주의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마침 4.19혁명 66주년 기념일입니다. 4.19뿐입니까? 저 지난해에서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빛의 혁명 또한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격렬한 저항 행위이지만 평화롭기까지 합니다. 불의에 내맡기지 않고 온전히 의를 이루고자 한 그 열망이 오늘의 세계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자랑스러운 역사에 도취해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는 4.16 세월호 12주기를 맞이했습니다. 불행히도 그와 같은 사회적 참사는 연이어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참사가 계속되는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잘못된 사회적 요인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연하게 여겨온 관행 가운데 그 불의의 요인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시민사회에서는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4.16 12주기 전까지 제정하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지만,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4.16 12주기 기념식에 처음으로 대통령이 참석하였고, 애초 그 법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인 국회의장이 동석하였습니다. 대통령은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을 약속하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대통령의 국정 철학이 반드시 실질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간 세월호 유족들은 얼마나 아픈 시간을 보내왔습니까? 자기 잘못으로 빚어진 일도 아닌데, 그 아픔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이 사회는 어떻게 대응해 왔습니까? 오히려 숱한 모욕을 가하지 않았습니까? 그 모욕의 대열에 교회까지 가담하였습니다. 그 모욕을 견뎌내며 모든 사람이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헌신해 온 가족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의를 이루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들이 고통과 모욕을 견뎌냈기에 우리는 더불어서 모든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 보장받는 사회에 대한 희망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습니다. 국정의 최고책임자까지 그 책임을 확인하고 결의를 다지게 만들었습니다.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지만, 그 희망을 구현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은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을 향한 이스라엘의 비인도적 행위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이의 발언이 지니는 무게는 새삼 말할 것 없습니다. 부당하게 고통을 겪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이들이 용기를 얻었습니다. 각 나라의 주권과 모든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는 규범이 무너지고 보복의 악순환에 빠진 오늘 세계 현실 가운데서 보편적 규범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뜻을 만천하에 확인한 것입니다.

“길 잃은 양과 같았으나 이제는 영혼의 목자이며 감독이신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2:25) 마침내 그 뜻이 이 세계 가운데 이뤄지기를 소망합니다.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그 세계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뜻을 신실하게 따르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19 Apr 2026 14:05:3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16 / 4.19.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58]]></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4kneZtWrbjk 

2. 오늘 예배후 청빙준비위원회, 재정위원회 회의가 있습니다. 

3. 오늘 공동식사 후 교회 경계면 사철나무 가지치기 작업 예정입니다.

4. 2026년 상반기 수요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교회 깊이 알기”가 계속 진행됩니다.
  [3] 4월22일(수) 영화 &lt;북간도의 십자가&gt;(2019, 반태경)
  [4] 4월29일(수) 영화 &lt;개벽&gt;(1991, 임권택)
  [5] 5월06일(수) “우리교회의 공동예배형식”(최형묵)
  [6] 5월13일(수) “독일 헤른후트형제단의 성서일과”(최형묵)
  [7] 5월20일(수) “천안지역 종교문화유적”(송길룡)
  [8] 5월27일(수) “사진으로 보는 우리교회 초기모습”(송길룡)

5. 남신도회 주관 전교인 나들이를 4월 25일(토)에 진천 농다리로 떠납니다. 

6. 다음 주일 오후에는 여신도회 주관 살림의 날(아나바다 장터)이 있습니다.

7. 담임목사
   21(화) 오후 2~5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출강 “민중신학의 탐구”
   23(목) 오전 11:00 서울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 면담
   23(목) 오후 12:30 서울 / 김찬국교수기념사업회 임원회의
   23(목) 오후 5:00 서울 기독교회관 / 한국교회인권센터 이사장(최형묵) 및 소장(류순권) 취임식]]></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17 Apr 2026 17:01:5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 요한복음 20:19~29[이성철 목사 / 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57]]></link>
			<description><![CDATA[2026년 4월 1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본문: 요한복음 20:19-29
이성철 목사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xaXsQJn2dK4?si=n6czOf23F1JJ0jO5"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부활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 부활절 둘째 주일에는 여러 이름이 있습니다. 부활절의 환희와 기쁨을 상징하는 희색 영대를 걸치는 날이라서 '백색주일'이라고도 하고,  또 복음서 본문으로 도마 이야기를 들려주는 주일이라고 해서 '도마 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이 도마가 부활한 예수님을 8일이 지나 만나서 '제 8일 주일'이라고도 합니다.

모든 시간 다 특별하겠지만, 고대 교회에서는 부활절 당일부터 바로 다음 주일까지 이르는 8일 동안의 시간을 매우 귀하게 여기고 활용했다고 알려집니다. 2세기 교부인 히폴리투스의 &lt;사도전승&gt;에 보면 세례교육과 세례 받는 과정이 나오는데, 최소 3년을 교육받아야하고 그동안 성경과 교리, 기도와 금식을 배우면서 세례를 준비합니다. 

이러한 과정들이 전통이 되어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세례 교육의 시간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절에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세례를 받고 일주일을 함께 공부한 다음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습니다. 그리고 이날,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20장의 도마이야기를 함께 낭독하며 신앙을 고백합니다. 비로소 부활절 둘째주일이 되면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도마를 포함한 부활의 증인들,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을 목격한 이들의 반응과 증언을 담고있습니다. 그전에 오늘 본문 이전의 예수님의 죽음의 과정에서 제자들의 행적을 따라가보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잡하시기 전 예수님과 마지막 식사에서 몇몇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화를 내거나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잡히시던 그날에 누군가는 로마 병사들을 향해 분노를 하였고 누군가는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리고 몇몇은 예수님을 재판하는 그 자리에서 예수를 잡아가라고 외치는 무리들 사이에 섞여 아무말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예수를 대면했던 제자들은 그의 삶과 행적을 모두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예수님이 했던 약속과 당부보다는 그의 죽음이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다음날 새벽 예수의 돌무덤을 찾은 것은 마리아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 곁을 지켰지만 희망과 기대는 모두 무너졌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와 함께 지내던 자신들이 같은 처지가 될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하고 문을 걸어잠가 스스로를 고립시켰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닫힌 문을 지나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무덤의 돌은 치워져 있었고, 굳게 닫힌 문은 장애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굳게 걸어 잠근 문을 지나 제자들에게 나타나 다시 한번 평화의 인사를 전하였습니다. "평화가 너희에게 있기를!"

평화의 인사입니다. 예수님은 삶을 통해 사랑과 평화를 몸소 실천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왔습니다. 그 죽음을 이기고 돌와서 다시한번 평화를 전핮니다. 복음서의 다양한 이야기들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는 여러 상황과 대상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평화를 이야기하는 그 대상과 상황이 특정되어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보혜사를 약속하시며 떠나시기 전 2번,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부활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총 3번 평화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평화라는 단어는 모두 제자들을 향해 사용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이 세상 통치자가 가까이 오고 있다. 그는 나를 어떻게 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내게 분부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 일어나라. 여기에서 떠나자."

마치 영화의 프리퀄에서 나올 것 같은 장면 같습니다. 이 땅에 권위와 폭력에 맞서 평화를 몸소 실천하셨던 삶의 클라이막스를 암시하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예수님은 정말 죽음을 넘어 부활 했습니다. 이제 장면이 지나가고 다시 제자들과 예수님이 등장핮니다. 
자 일어나자. 여기를 떠나 세상으로 나가자! 하고 흩어진 제자들에게, 굳게 닫힌 문을 지나 좌절해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극적인 장면입니다. 마치 "실패한줄 알았었겠지만 내가 약속했었지? 자 이제 두려워 하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자!"라고 하는 장면 같습니다. 이렇게 마무리 되고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이 문 밖을 박차고 나가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마치 히어로물의 한 장면 같습니다. 이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시간인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다시한번 장면이 전환됩니다. 그로부터 8일 후 한 사람이 더 등장합니다. 도마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두가 모여 있었던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이유는 알수 없습니다. 무서워 숨어있던 제자들과 함께 있는것 조차 두려웠을 수도 있고, 슬픈 마음에 앓아누웠을지도 모릅니다. 요한복음은 도마의 부재를 설명하지 않고있습니다. 다만 그가 없었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소식은 누군가를 빠뜨린 채 전해졌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도마에게 "우리는 보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도마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서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도마의 질문은 과하게 느껴집니다. 그의 목소리는 커다래서 순간 집안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기 충분합니다. 그러나 도마는 질문을 멈추지 않습니다. 도마는 대세에 합류하지 않습니다. 도마의 태도가 미치 판을 흐리는 사람, 찬물을 끼얹는 사람, 빌런처럼 느껴집니다. 이제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막이 내려가면 될 것 같은데 그 마지막을 삐딱하고 미끄러지게 만들었습니다. 이로인해 도마를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고, 흔들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됩니다. 

그리고 8일이 지나고 제자들과 도마가 함께 있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예수님을 목격한 제자들의 집 문은 여전히 잠겨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말은 도마를 향해 마치 날이 선 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소. 하지만 그 집의 문은 여전히 잠겨있습니다. 다시한번 예수님은 닫힌 문을 지나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평화를 말씀하시며 도마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도마가 그 손을 만져보았는지, 옆구리를 살펴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도마는 부활한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찬사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예수그리스도의 능력과 신비의 찬사는 먼저 부활을 목격하고, 우리가 보았다고 설파하는 제자들이 아니라, 부활의 소식에서 배제되었던, 그리고 대세에 합류하지 않고 판을 흐리는 것만 같았던 도마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을 확립된 자리로 이해합니다. 신앙의 경지가 있으며 도달해야 할 상태처럼 여기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질문들은 도달을 늦추고 멀어지게 만드는 부정한 상태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도마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를 견디며 떨칠 수 없는 자신의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습니다. 부활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는 그 질문을 품고 나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다는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제자들 중 누군가도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그냥 동조했을 수도 있는 그 상황에서 도마는 끝내 질문했습니다. 그 입을 통하여 우리는 진정한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과 죽음을 극복한 뒤 찾아올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2026년 부활 기억하며 오늘의 평화를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2026년의 사순절은 전쟁의 비참함과 슬픔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습니다. 더 비극적인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전쟁이 정당화되는 현실이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과 평화 협정을 맺고 휴전을 말한 당일에 이스라엘은  레바논 전역을 폭격했습니다. 누군가는 폭력을 평화라 부르고, 학살을 질서라 부르며, 전쟁이 정의로운 행동인 것 마냥 포장합니다. 평화라는 이름이 이토록 쉽게 강자의 언어가 되고, 제국의 논리가 되고, 약한 이들의 죽음을 덮어버리는 명분이 되는 현실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그런 평화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남기신 평화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외면한 채 "괜찮다"고 덮어버리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평화는 닫힌 문 안에 숨어 있는 이들에게 찾아가 죽음의 두려움과 불안과 슬픔 가운데 임하는 평화였습니다. 상처 입은 몸을 감추지 않은 채 건네는 평화였습니다. 그리고 늦게 도착한 이들, 빠뜨려진 이들, 정상성 안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을 통해 증언되는 평화였습니다.

그러므로 도마의 질문은 믿음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안과 거짓 평화에 쉽게 동의하지 않으려는 저항입니다. 다들 "우리는 보았다"고 말할 때, 도마는 자기의 불안과 질문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너무 빨리 확신하는 쪽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바로 그 머뭇거림이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너무 쉽게 우리를 자기 방식대로 바꾸려 할 때, 그 흐름 앞에서 한 번 멈춰 서는 일. 나를 살피고, 이웃을 살피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인 말과 질서를 다시 묻는 일. 그것이야말로 신앙의 모습일 것입니다.

제가 저를 성찰하고 싶을 때, 너무 거대한 세상 앞에서 내가 작아지는것만 같을 때, 메모장에서 꺼내 읽어보는 글이 있습니다. 미국의 평화운동가 애먼 헤내시라는 인물에 대한 일화입니다. 헤내시는 스물네 살 때 제1차 세계 대전 징병을 거부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사회 공동체가 전쟁으로 폭주할 때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평화 운동에 나섰습니다.

그런 그의 평화 운동은 이런 식이었습니다. 혼자서 손팻말을 들고서 "전쟁 반대"를 외치고 있는것입니다. 그를 놓고서 많은 사람이 비웃으며 타박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전쟁을 막고 더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겠느냐고.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세상을 바꾸려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나를 바꾸는 일을 막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부활의 기쁨을 지나 평화로 보냄받은 제자들과 우리에게 전해지는 믿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한순간에 두려움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경험한 뒤 찾아온 것은 두려움에 무감각해지지 않게 하고, 폭력에 익숙해지지 않게 하고, 거짓 평화를 평화라고 부르지 않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쉽게 절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좌절하더라도 더듬더듬 삶을 이어가며, 끝내 사람의 존엄과 생명의 편에 서게 하는 힘이 부활의 증언이었습니다.

의심하고 숙고하지 못하면 우리는 쉽게 휩쓸려 갑니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 강한 자기 확신과 성찰 없는 신념도 우리를 폭력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마의 질문은 중요합니다. 질문은 우리를 멈춰 세우고, 멈춤은 우리를 다시 보게 하며, 다시 보는 눈은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이끕니다. 믿음이란 모든 질문이 끝난 자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답답함과 좌절 속에서도 끝내 완성해가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려는 마음 안에 있습니다.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한 생명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교회의 일원이 되는 절차가 아니라, 예수의 길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일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를 따라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강자의 질서에 안주하지 않고, 배제된 이들의 자리를 외면하지 않고, 두려움 속에서도 끝내 생명과 존엄의 편에 서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증거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불안 속에서도 평화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자기 방식으로 바꾸지 못하게 하면서, 끝내 예수의 평화를 붙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하나님은 부활의 기쁨을 맛보게 하시며 오늘도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닫힌 문을 열고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12 Apr 2026 19:35:4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걱정 말아요 그대”(2026.4.12.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56]]></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4/song20260412.mp3"][/audio]
“걱정 말아요 그대” / 성가대]]></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12 Apr 2026 16:20:2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현대 이스라엘은 성경에는 없다? ‘성경적 명분’의 위험한 실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55]]></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76W6I32rwZA?si=n_5zpf66bHAL1OGz"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at, 11 Apr 2026 20:13:4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1"><![CDATA[토론마당]]></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15 / 4.12.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54]]></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https://youtu.be/SJU_n4SqEgU 

2. 지난 주일 베풀지 못한 유아세례는 어린이주일(5/3)로 미룹니다.

3. 지난주일 월례 공동의회 
   ① 3월 재정보고 하였고, 
   ② 청빙준비위원회는 당회: 김광식 이지수,여신도회: 백수현, 남신도회: 김성윤, 제3신도회: 전홍진, 청년회: 박경주로 구성하였고,
   ③ 교회앞 도로 개선 방안은 운영위원회에 위임하였고,
   ④ 주요 일정으로 4/25(토) 남신도회 주관 전교인나들이는 진천 농다리로 가기로 하고, 청년회 주관 전교인 체육대회는 5/17 주일 오후에 천안시 장애인 체육관에서 하기로 하였습니다.

4. 2026년 상반기 수요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교회 깊이 알기”가 계속 진행됩니다.
  [2] 4월15일(수) 영화 &lt;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gt;(2018, 가스 데이비스)
  [3] 4월22일(수) 영화 &lt;북간도의 십자가&gt;(2019, 반태경)
  [4] 4월29일(수) 영화 &lt;개벽&gt;(1991, 임권택)
  [5] 5월06일(수) “우리교회의 공동예배형식”(최형묵)
  [6] 5월13일(수) “독일 헤른후트형제단의 성서일과”(최형묵)
  [7] 5월20일(수) “천안지역 종교문화유적”(송길룡)
  [8] 5월27일(수) “사진으로 보는 우리교회 초기모습”(송길룡)

5. 교우들의 독서모임이 18일(토) 오후 2:30에 문동환 외,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갈릴리교회 설교집』을 주제로 하여 진행됩니다.

6. 남신도회 주관 전교인 나들이를 4월 25일(토)에 진천 농다리로 떠납니다. 

7. 담임목사
   13(월) 정오 우리 교회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2026년 인식조사 연구모임
   14(화) 오전 10:30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 조곤조곤TV 녹화 “생명안전기본법”
   14(화) 오후 2~5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출강 “민중신학의 탐구”
   18(토) 오후 2시 천안박물관 / 동학도서관 건립을 위한 도올 선생 초청 강연회 참석]]></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10 Apr 2026 14:31:4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민중 신학 끝났다”던 90년대, 제3시대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53]]></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KkUOGrYXXaI?si=-VD6SXZsymHaZEDD"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10 Apr 2026 11:55:2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1"><![CDATA[토론마당]]></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영광의 주님 찬양하세"(2026.4.4.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50]]></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qufKX4Kmkm8?si=GhuEarDsiozWH90t"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영광의 주님 찬양하세" / 성가대

[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4/song20260405.mp3"][/audio]]]></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05 Apr 2026 16:09:2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죽임에 맞서는 살림의 길 - 고린도전서 15:19~28[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49]]></link>
			<description><![CDATA[2026년 4월 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죽임에 맞서는 살림의 길 
본문: 고린도전서 15:19~28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4dJosieSj90?si=BFYL7_MLVqW2TG2I"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겪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 죽음을 딛고 일어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진실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체에 해당합니다. 가장 극적으로 대비되는 모순에 담긴 진실, 그러기에 역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진실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이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 의미가 자명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그 진실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일은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직접 대면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보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다시 산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직접 경험한 바도 없고, 따라서 죽음의 의미도 헤아릴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부활은 더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부활의 의미를 누차 힘주어 설파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 또한 그 내용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본문 말씀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15:19)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이생’ 곧 ‘현재적 삶’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의 차원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전혀 다른 삶이 그야말로 통상적 의미에서 ‘저세상’을 뜻하는 것일까요? 만일 그것이 ‘저세상’으로서 천당을 뜻하는 것이라면 부활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영혼이 천당에 가면 그만이지 뭣 때문에 다시 육체를 입고 부활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일깨워주신 하나님 나라, 그리고 예수님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었던 부활은 현재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의 차원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지, 그것이 천당 갔다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동일한 하나의 실재, 곧 현재 주어진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표현하는 각기 다른 표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부활을 경험한 삶의 실재와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가 동일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극적인 대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15:21~22)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부활의 의미는 이 한 구절의 의미만 제대로 새겨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 곧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 왔다는 이야기는, 아담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낙원을 잃게 되었다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환기하고 있습니다(창세 2:17).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죄를 범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동산 안에 있는 과일 하나 따 먹은 것이 무슨 그렇게 큰 범죄였을까요? 이 이야기는 인간 삶의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 선악과였을까요? 이는 인간 사회 안에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을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올바르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끝끝내, 그 실체가 환히 드러나기까지 신비의 영역으로 두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진실을 마치 지금 완전하게 파악한 듯이 단정하고 그것으로 세상의 모든 현상을 재단해버리는 태도를 말합니다. 더 이상 궁극적인 물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모든 것은 자명하니 그대로 따르면 그만이라고 보는 태도입니다. 
누가 그렇게 합니까? 세상의 권력자들이 그렇습니다. 자신의 기준에 불과한 것을 권력자들은 보편타당한 것으로 주장하고 강요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범죄했다는 것은, 바로 그 인간의 오만, 아니 세상 권력가들의 오만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이야기입니다. 궁극적 물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지금 주어져 있고, 지금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다 결정되었다고 주장하고 강요하는 그 태도, 그것도 자신만의 판단으로 선악을 결정하는 태도,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곧 하나님 앞에서 중대한 범죄행위라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는 그로부터 인간의 고통이 시작되었고, 그 고통스러운 삶은 마치 죽음과도 같은 삶이라고 통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통찰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자연적인 죽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인위적인 죽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 죽임의 폭력에 사로잡힌 현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전혀 다른 가능성이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바울은 또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아담이 가져온 죽음과는 전혀 다른 삶을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마침내 우리로 하여금 그 생명의 대열에 동참하게 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궁극적 물음의 제기를 포기하고 거짓을 진실로 우기는 삶, 곧 죽음과 다름없는 삶의 태도와 상반되는 삶, 진정한 삶의 태도와 그 가능성을 말합니다. 죽임에 맞서는 살림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삶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에 대항하여 싸웠고, 언제나 가장 연약한 이들에게 관심을 쏟고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자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철저하게 타인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참삶을 선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이만하면 됐다’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자족할라치면 매섭게 사람들의 자기기만과 허위의식을 뒤흔들었습니다. 남의 잘못을 정죄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스스로 죄 없는지 돌아보라고 일갈하셨고, 살인하지 않았다고 자족하는 이들에게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그와 다를 바 없다고 일깨우셨습니다.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 목적을 언제나 일깨워주셨습니다. 끝내는 십자가에 매달려 자신을 버리기까지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진정한 삶, 참 생명의 가능성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종말론적 표상을 통해 진정한 생명을 누리는 삶의 현실, 곧 부활의 과정을 해명하고 있습니다(15:23~28). 그 과정은 마치 비상한 사태에 군대가 하나하나 투입되는 것과 같은 절차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 삶을 누리는 분은 그리스도요, 그다음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고, 마지막으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권위와 권력을 폐하시고, 마침내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입니다. 자연적 죽음이 원수가 아닙니다. 인위적 죽임이 원수입니다. 그 죽임이 종식된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마침내 온전한 만유의 주로서 함께 하십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삶, 곧 부활은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온전한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현실,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현실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기대했던 궁극적인 실재가 마침내 다가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인간들일 것입니다.” 그 까닭이 여기서 분명하게 해명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권세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마치 죽음과도 같은 삶을 끝내고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뤄지는 현실에서 진정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죽임에 맞서 살림의 길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임하시고, 더불어 죽음과 같은 삶을 살았던 이들이 부활하여 진정한 삶을 누리는 현실 가운데서도 아직 세상의 통치와 권위와 권세는 한동안 존속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했던 그 과오의 현실은 한동안 지속됩니다. 이것은 오늘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그것들을 완전히 폐할 때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삶이 보장되는 궁극적 현실이 이뤄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부활을 믿는 것은 바로 그 궁극적인 실재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허황한 신화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삶, 진정한 생명을 누리는 길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아직 그 온전한 실재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온전히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전혀 그것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진실,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진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진정한 삶에 동참하고 있다는 진실, 바로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이뤄질 궁극적 삶의 실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을 믿는 것은, 모든 일이 그렇게 저절로 이뤄진다는 것을 그저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적극적 의지와 믿음으로 우리의 삶의 현실을 그렇게 바꿔나가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단순히 죽음을 넘어서는 삶이 아니라, 죽임을 넘어서는 살림인 것입니다. 

무모한 권력자의 독단에 따른 전쟁으로 숱한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살고자 일하는 일터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으나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는 많은 사람이 스스로 죽음에 이르거나 죽음과 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그 죽임을 거부하고 살림의 길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죽임의 힘에 저항하고 살림의 길을 열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부활의 아침, 그 진정한 삶의 의미를 재삼 깨우치고, 그 삶을 향하여 지치지 않고 나아가고자 결단하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05 Apr 2026 16:07:4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14 / 4.5.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48]]></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1ZUiaCUvM1w 

2. 오늘 견신례와 세례를 받은 교우들을 축하합니다: 견신례: 김화인 김정은, 성인세례: 김미로 이상희 이주호 오유진, 유아세례: 이봄(부모 이상명 류지혜). 

3. 오늘 예배후에는 월례 공동의회가 있으며(안건: 3월 재정보고, 청빙준비위원회 구성, 교회앞 도로 개선방안, 주요일정 점검), 공동식사는 각 구역별로 준비해온 음식을 함께 나눕니다.

4. 4월 예배 및 봉사 담당안이 준비되었습니다. 다음 주일 예배 인도와 말씀은 이성철 목사가 맡습니다.

5. 이번 주간부터 2026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인문강좌를 “종교영화 보며 우리교회 깊이 알기”를 주제로 하여 시작합니다.
  &lt;4월 종교영화 관람&gt;&gt;
  [1] 4월08일(수) 영화 &lt;사일런스&gt;(2016, 마틴 스코시즈)
  [2] 4월15일(수) 영화 &lt;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gt;(2018, 가스 데이비스)
  [3] 4월22일(수) 영화 &lt;북간도의 십자가&gt;(2019, 반태경)
  [4] 4월29일(수) 영화 &lt;개벽&gt;(1991, 임권택)
  &lt;5월 우리교회 깊이알기&gt;&gt;
  [5] 5월06일(수) “우리교회의 공동예배형식”(최형묵)
  [6] 5월13일(수) “독일 헤른후트형제단의 성서일과”(최형묵)
  [7] 5월20일(수) “천안지역 종교문화유적”(송길룡)
  [8] 5월27일(수) “사진으로 보는 우리교회 초기모습”(송길룡)

6. 교우들의 독서모임이 18일(토) 오후 2:30에 문동환 외,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갈릴리교회 설교집』을 주제로 하여 진행됩니다.

7. 남신도회 주관으로 4월 25일(토)에 전 교우 산행 나들이 예정입니다. 

8. 담임목사
   6(월) 오후 2:00 서울 조곤조곤TV 녹화/ “시온주의 이스라엘의 폭주, 한국교회의 침묵”
   7(화) 오후 2~5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출강 “민중신학의 탐구”]]></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Thu, 02 Apr 2026 16:20:1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고난의 길(via dolorosa)”(2026.3.29.  성가)]]></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45]]></link>
			<description><![CDATA[[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26/03/song20260329.mp3"][/audio]
“고난의 길(via dolorosa)” / 성가대]]></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Sun, 29 Mar 2026 14:42:3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13"><![CDATA[영상(음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영혼을 움직이는 힘 - 마가복음 14:1~9[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44]]></link>
			<description><![CDATA[2026년 3월 2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영혼을 움직이는 힘 
본문: 마가복음 14:1~9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wiM6GNyBOuA?si=xNWfw4h-ewox2HPV"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잘 알고 있지만 동시에 늘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지금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른 긴박한 여정 가운데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배층들이 예수를 죽일 흉계를 꾸미고(14:1~2), 예수의 제자 유다가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예수를 넘길 기회를 노리는(14:10~11) 그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바로 그즈음 예수께서 예루살렘 부근 감람산 언덕 베다니 마을에서 나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 머물며 식사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한 여자가 매우 값진 나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 깨트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같이 있던 사람들이 화를 내면서 말합니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14:5) 그리고 여자를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예수께서는 그 여자를 나무라는 사람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14:6~9)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니 삼백 데나리온이면 일 년 치 임금이 되는 셈입니다. 그 돈으로 차라리 자선을 할 것이지 어째 그것을 낭비하느냐는 사람들의 태도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께서는 그 행위를 칭찬하십니다. 상식적으로 얼른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상식으로 봐도 그렇고, 당시 예수님의 언행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여자의 행위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의 대비입니다. 여자의 행위는 참 무모해 보입니다. 단지 예수님 한 사람을 위해서, 그것도 아무런 효용성도 없어 보이는데, 값비싼 향유를 한순간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는 게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훨씬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자의 행위가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흔히 이 이야기는 교회에 대한 물질적 헌신을 강조할 때 그 근거로 자주 활용되지만, 과연 그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요? 전통적으로 유대교에서는 선한 일을 두 가지로 나누어 이해합니다. ‘자선’과 ‘좋은 일’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자선은 돈을 줌으로써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에 해당하고, 좋은 일은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것으로 매우 특별한 행위입니다. 죽은 사람의 장례를 위한 배려도 이 좋은 일에 해당합니다. 
이 여자가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은 것은 ‘전인격적인 자기 헌신’에 해당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손님을 대접할 때 발에 기름을 발라 주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었지만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왕이 임명을 받을 때나 행하던 아주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행위는 일상적인 손님 접대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한 특별한 행위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기회가 아니면 돌아올 수 없는 기회에 특별한 정성을 쏟아 부은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단 한 번밖에 행할 수 없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귀한 사람, 어쩌면 가장 사모하는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인 헌신이었으며 전인격적인 결단이었습니다. 그 비싼 가치를 지니는 향유도 사실은 그 여자가 가진 모든 것을 나타내는 표상일 뿐, 그 물건이 비싸다는 것이 중요한 초점은 아닙니다. 이른바 시장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을 정말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분을 위하여 사용한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이야기는, 자신의 전 존재를 드러내놓는 그 행위가 다른 어떤 선행보다도 우선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것은 자선 행위로 대치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자선을 행한다 하더라도, 아무리 도덕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종교적 계율에 맞게 행한다 하더라도,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결단과 헌신, 기꺼이 하는 마음이 없다면 한갓 겉치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자선이 중요한지 예수를 섬기는 것이 중요한지’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를 때 전인격적인 결단과 헌신을 동반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을 문제시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진심으로 마주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을 문제시합니다. 이 이야기는 “자선이 ‘아니라’ 예수를 섬길 일이다” 하는 어법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 두 가지 일을 단순히 대립시켜 양자택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원을 달리 이해함으로써 사실상 우리에게 두 가지를 모두 요구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너희 곁에 있지 않다.” 이 말씀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자선과 예수에 대한 헌신 가운데 양자택일을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내가 전 존재를 드러내놓아야 할 그분이 내 앞에 계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의 과제입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전 존재를 드러내놓을 수 있는 헌신이 없다면, 그 모든 행위는 겉치레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행위의 밑바탕을 이루는 전 존재의 개방, 전 존재의 헌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요구일까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불가능한 요구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드린 여인의 행위는 가장 진실한 사랑의 표현 행위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고하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일화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가장 존경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그분에 대한 가장 지극한 정성, 그것이 여인의 행위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인간의 삶에 그것이 빠져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지탱하는 데에는 정의와 평화, 그밖에 숭고한 가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의 바탕을 이루는 지극한 사랑, 그것이 없다면 삶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옥합을 깨트린 여인의 행위는 바로 그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정략과 이해타산을 따지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를 전하는 이야기 한 가운데 등장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이 이야기 가운데서 교환가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의 태도와 여자의 행위가 충돌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 삶을 지탱하는 것은 그 정략과 소위 합리적 이해타산, 통상적인 시장의 교환가치로 환산될 수 없는 소중한 그 무엇입니다. 옥합을 깨트린 여자는 그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떤 행위를 돈으로 보상하면 그 행위가 증가하지 않고 오히려 감소하기도 합니다. 그 행위 자체의 즐거움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삶은 그렇게 오묘합니다.

흔히 ‘거룩한 낭비’라고 일컬어지는 이 여인의 행위는 예부터 논란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초기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은, 이 말씀을 빌미로 예수를 섬기는 것과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을 구분하려는 태도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누가 거룩한 물건들을 만들거나 봉헌하는 것을 보거든 그리고 교회 벽과 바닥을 장식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보거든 ··· 그의 열성에 찬물을 끼얹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누가 일을 하기 전에 묻는다면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령하라.” 이렇게 지혜로운 해법을 던져 주기도 했습니다. 그 정성의 소중함을 인정하고 존중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정성을 어찌 표해야 할지 묻는다면 그때 합리적 대안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현명한 해법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자족적인 조건들을 생각하면서 그 조건들을 충족함으로써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서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지적이거나 교리적인 이해와 승인, 도덕적인 행위나 사회적 정의의 실천, 또는 금욕이나 경건, 아니면 열광을 동반하는 종교적 행위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요건들 모두 아니면 그 가운데 하나라도 제대로 충족되면 신앙생활은 온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많은 신앙인들은 그 어느 것 가운데 하나를 신앙의 전부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장 밑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드러내놓는 헌신이며 전인격적인 결단입니다. 진정으로 간절히 뭔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그 모든 것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다고 느끼는 헌신과 정성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 환원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마음과 정성입니다. 신앙은 그것으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완결됩니다. 아니,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앙은 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쏟는 정성, 믿을 만한 사람과 삶이 있고 그 믿을 만한 사람과 삶에 쏟는 정성, 그것이 잊혀져서는 안 되는 삶의 정수라는 것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옥합을 깨트린 여인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여러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lt;세상의 모든 아침&gt;이라는 영화는 아름다운 음악과 더불어 그 내용이 인상적입니다. 프랑스 영화로서 바로크 시대 비올을 연주하는 고음악가 이야기입니다. 
초야에 묻혀 살아가는 비올 연주의 대가에게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찾아와 제자 삼아 달라 요청하기에 연주를 시켜보는데, 스승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작곡이나 연주 모두 뛰어나 음악으로 충분히 밥벌이할 수 있겠지만, 결코 음악가는 아니어서는 못 받겠다고 선언합니다. 절규하다시피 간청하여 받아들여지기는 하지만, 제자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원하던 궁정 음악사가 되어 스승 곁을 떠납니다. 주인공은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서야 스승의 말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재능이 탁월한 자신이 어째 음악가일 수 없었을까 평생 화두 삼아 왔는데, 자신의 음악이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됩니다. 여차저차해서 스승과 협연하고 마침내 인정을 받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판소리를 주제로 한 우리 영화 &lt;서편제&gt; 또한 비슷한 문제를 던집니다. 소리가 단지 기교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웁니다. 영혼을 움직이는 힘, 옥합을 깨트린 여인의 정성을 그렇게 이해하면 조금 이해할 만할까요? 
기능적인 역할과 효율성이 중시되는 오늘의 세태 가운데서 그 뜻이 우리에게 얼마나 실감될지 의문이기는 합니다. 일찍이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논하면서, 그 진품성, 곧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 예술작품의 의의에 대해 심각한 물음을 던졌습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이르러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단지 인간의 기능적 역할을 대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마음을 흉내 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인간 삶의 진정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 교회가 처해 있는 현실적 조건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처해 있는 현실적인 조건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생활을 하는 것은 도무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도 피하면 안 될 것 같은 모종의 부담감이 있어 함께하고자 하면 편하게 접근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저마다 믿고 있는 가치를 실현하는 방편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하는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며 삶의 진정성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온 생명을 부여하여 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모였다면, 서로의 영혼을 울리는 삶의 교감을 나누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모두 그 믿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세상 널리 펼쳐나가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29 Mar 2026 14:38:5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3"><![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천안살림교회 알림(2026-13 / 3.29. 주보)]]></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42]]></link>
			<description><![CDATA[1. 오늘 주일 실시간 온라인예배 링크입니다. 수고하는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유튜브채널: “천안살림교회”). https://youtu.be/AOeOlRhX7fU

2. 다음 주일 부활절 공동예배는 성찬예배로 드리며, 예배후에는 월례 공동의회가 있습니다. 공동식사는 각 구역별로 준비해온 음식을 함께 나눕니다.

3. 다음 주일 부활절 예배중 세례식을 베풀 예정입니다. 지난 주에 이어 세례자 교육이 오전 9:50에 진행됩니다(견신례: 김정은 김화인, 성인세례: 김미로 오유진 이상희 이주호, 유아세례: 이봄[부모 이상명 류지혜]).

4. 4월 예배 및 봉사 담당 예정안이 준비되었습니다.

5. 오늘 오후에 원예반은 꽃나무를, 작목반은 감자를 심습니다.

6. 교우들의 독서모임이 18일(토) 오후 2:30에 문동환 외,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갈릴리교회 설교집』을 주제로 하여 진행됩니다.

7. 남신도회 주관으로 4월 25일(토)에 전 교우 산행 나들이 예정입니다.

8. 지난 주일 이장희 교우(김 선 교우) 어머님께서 별세하셨습니다. 

9. 담임목사
   30(월) 오후 6:30 원성동공유공간100 / 천안너나들이마을협동조합 정기총회 
   31(화) 오후 2~5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출강(“민중신학의 탐구”)
   1(수) 오후 4시 서울 기독교회관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와 간담회
   3(금) 오후 2시 서울 인사동 송현광장 / 제주 4‧3 78주년 ‘아픈 역사의 정의로운 해결과 치유를 위한 개신교 추모기도회’]]></description>
			<author><![CDATA[살림교회]]></author>
			<pubDate>Fri, 27 Mar 2026 16:41:4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alrim.net/?kboard_redirect=8"><![CDATA[살림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문 밖의 그리스도 - 히브리서 13:12~16[유튜브]]]></title>
			<link><![CDATA[http://salrim.net/?kboard_content_redirect=9237]]></link>
			<description><![CDATA[2026년 3월 2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성문 밖의 그리스도   
본문: 히브리서 13:12~16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PhBczRjBOfQ?si=r51C81ICd-sg4R55"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삶을 지탱시켜 주는 어떤 것입니다. 그것을 자각하고 있든 아니든 그것이 사라지면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무력감에 빠지게 되는 어떤 것입니다. 흔히 ‘마음의 지성소’라고도 합니다. 
지성소(至聖所)란 일 년에 딱 한 번 모든 백성을 대표해서 대제사장이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 안의 가장 깊은 장소를 말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에서 볼 때 지성소는 하나님과 백성을 연결하는 중심이었고, 그것은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것을 보증해 주는 지표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각자 어떤 마음의 지성소를 갖고 있습니까?

히브리서는 구약성서 시대의 제사와 지성소 관념을 전제하고 있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형태와 의미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 가운데서 최고 수준의 헬라어를 구사하는 히브리서는 유대인의 전통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사 종교로서 유대교의 전통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화해자로서 진정한 제사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이 지닌 믿음의 연장선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상식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통념을 빌어 말하되 그것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말합니다. 전통적인 관념을 뒤집어엎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이루는 제사에 빗대어 말하지만, 유대교의 제사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의미의 제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내적 위기에 응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서도 무엇을 믿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하고 회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믿음을 역설합니다. “여러 가지 이상한 교훈에 끌려다니지 마십시오. 음식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마음이 튼튼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튼튼해지는 것이 좋습니다. 음식 규정에 매여서 사는 사람들은 유익을 얻지 못했습니다.”(13:9) 이 말씀은 그 의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청중들은 유대교의 전통에는 익숙합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는 아직 불완전합니다. 그러기에 유대교의 상식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의미를 말하되, 그 의미를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하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13:12~13)
안병무 선생은 한국 민중신학의 의의를 이 한마디로 집약하기도 했습니다. 본문 말씀의 핵심이자 동시에 히브리서의 대미에 해당하는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제사의식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기 위해 제사를 드릴 때, 속죄 제물을 잡아 피를 성전 안 지성소에 바치고 그 몸은 성 밖에서 태워버렸습니다. 지성소는 일 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희생제물이 되는 동물의 부정한 몸은 성문 밖에서 태워버리고 오직 순결한 피만 지성소에서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온 백성이 순결에 이른다고 믿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에서는 지성소만이 거룩한 곳이고 성문 밖은 부정한 곳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문 밖’ 곧 ‘진영 밖’으로 나아가자는 말씀은 그 통념을 뒤집어엎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것은 지성소를 뒤바꾸는 말씀입니다. 성문 안에 있는 성전,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있는 지성소에서 드려지는 피로써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성문 밖에서 고난을 겪으시고 세상의 화해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정한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제 지성소는 성문 안이 아니라 성문 밖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제사 종교와 그 추종자들이 지니는 위선과 허위의식을 질타하며 진정한 구원의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순수하다고 여겨지는 피만 지성소에 드리고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희생 동물의 몸뚱어리를 소각하는 장막 밖으로 나가자는 말씀은 놀라운 가치의 전도를 뜻합니다. 희생제물의 피를 드리는 것으로 인간 사회의 짐이 덜어질 수 있을까요?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본문 말씀은 선포한 것입니다. 더불어 무엇이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인지 선포한 것입니다.

‘성문 안’과 ‘성문 밖’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성은 하나의 확고한 질서와 체제를 의미합니다. 성벽이 둘러 있고 궁전이 있고 성전이 있고 지성소가 있어 조직화된 질서가 절대시되는 곳입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의 삶은 그 격에 맞는 법도와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그 성문 안에 사는 것은 그 질서와 체제가 보장해 주는 삶의 안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문 밖은 성벽도 울타리도 없고 반듯한 길도 없고 화려한 집도 없습니다. 성문 안의 질서를 따르는 시각에서 보면 무질서한 곳입니다. 사람들도 보잘것없습니다. 살아가는 방식도 다릅니다. 그래서 성문 안의 사람들은 그 성문 밖을 부정한 곳으로 여깁니다.
성문 안과 성문 밖은 그렇게 대조됩니다. 성문 안에는 지체 높은 사람들이 안락하게 살아가지만 성문 밖에서는 항상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소박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성문 안 사람들은 항상 성문 밖 사람들 덕분에 살아갑니다. 성문 밖 사람들의 고단한 노동과 소출 덕분에 성문 안 사람들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문 안 사람들은 군림하고 영광을 누리는 반면 성문 밖 사람들은 섬기며 희생합니다. 
‘성문 밖의 그리스도’는 비단 십자가가 세워진 골고다 언덕이 성문 밖에 있다는 사실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성문 안 사람들과 달리 성문 밖 사람들을 대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문 밖 갈릴리 민중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했지만, 성문 안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로마의 총독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고 결국 성문 밖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성문 밖 사람들을 표상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성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합니다.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성문 밖에서 사셨고, 그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치욕을 겪으신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자는 뜻입니다. 그것은 성문 안의 질서와 가치에서 볼 때 치욕일 뿐입니다. 그 치욕은 우리를 파멸에 이르게 하지 않고 진정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이것은 곧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선을 행함과 가진 것을 나눠주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13:14~16)
성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주어진 것들에서 안녕을 누리는 삶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주어진 삶의 질서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이 다가오리라는 믿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런 뜻입니다. 성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은 도피가 아닙니다. 성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얻으려면 너무 고단하기에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새로운 삶을 위한 선택이요 결단입니다. 
성문 안에서는 누군가의 힘에 의뢰하여 자신의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손에 들리어진 희생제물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단 한 사람의 제사장 말고는 모든 사람이 자기 운명을 자기가 선택하지 못합니다. 통치자이든 제사장이든 나보다 힘 있는 누군가에게 내 몫을 넘겨야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성문 밖의 삶은 다릅니다. 제도가 보장하고, 제사장이 대신해 주는 어떤 의례를 따라야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구원을 보장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입술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스스로 선을 행하고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진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바로 거기에서 진정한 구원의 희망을 맛봅니다. 눈에 보이는 건축물로서 지성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입술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스스로 선을 행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자리가 지성소가 되고, 바로 그 일을 행하는 때가 지성소를 찾는 순간이 됩니다. 성문 밖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성문 밖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그것을 뜻합니다. 

저마다의 마음의 지성소는 과연 무엇일까요? 스스로 물음을 던지며 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 진정한 지성소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성문 안 성전 안에 있지 않습니다. 성문 밖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한복판이 곧 그리스도인의 지성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미하고, 선을 행하며 가진 것을 나누기로 결단하고 그렇게 행하는 것이 곧 진정한 예배요 그 일이 이뤄지는 자리가 곧 지성소입니다.

그 명쾌한 진실이 어째서 각별한 의미를 지닐까요? 어째서 히브리서는 그 진실을 힘주어 강조했을까요? 오늘 우리는 왜 그 진실을 거듭 새겨야만 할까요? 세상은 여전히 자기의 아성을 쌓는 일에 급급해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전쟁의 파국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각 나라의 주권과 모든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는 규범이 무너진 현실에서 겪고 있는 고통입니다. 왜 그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그 규범 대신 자신의 힘만 믿는 패권의 논리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미국의 트럼프 정권은 자신들만의 협약에 따라 패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전략을 실행중입니다. 트럼프의 사저 이름을 딴 ‘마라라고 플랜(Mar a Lago Plan)’에 따른 전략입니다. 미국 달러 패권의 유지, 관세 및 대미투자 압력, 경제와 안보의 교환 논리로 집약되는 자신들만의 계획입니다. 흥미롭게도 스페인어 ‘마라라고(Mar a Lago)’는 ‘바다에서 호수로’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나마 세계의 번영과 평화를 유지해 온 밑바탕이 된 공공재를 희생시켜 자기 나라의 이익을 지키겠다는 전략을 절묘하게도 상징합니다. 우리말로는 ‘제 논에 물 대기’ 정도의 의미를 지닐까요? 지금 벌어지는 전쟁 또한 그 전략이 극단화한 한 형태일 것입니다. 자기만의 아성 쌓기가 불러일으키는 불행입니다. 
역설적으로 그 극단적 선택이 마침내 자신들이 추구하는 패권 질서 자체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이 그나마 희망적일까요? 마치 2024년 12월 3일 아무개의 비상계엄 선포와 같다고 할까요? 
하지만 지금 세계는 혼돈의 어둠 가운데 빠졌고, 온 세계가 얼마나 더 극심한 고통에 처하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강고한 자기만의 성을 쌓고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 질서가 빚어내는 파국입니다. 그 파국의 현장을 목도하고 있다면, 마땅히 그 질서 밖의 세계에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우리 눈에 더더욱 자명해집니다.

성문 밖에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은, 소수만이 삶의 안위를 보장받는 체제와 삶의 방식을 넘어 모든 생명이 진정한 삶을 누리는 길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그 진실을 새기며 그 길을 따르기를 기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최형묵]]></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17:27:31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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