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선한 능력으로 - 시편 31:19~24[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2-11 16:13
조회
663
2024년 2월 1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선한 능력으로
본문: 시편 31:19~24



하나님을 향한 호소와 찬양으로 이뤄진 시편은 다른 성서의 내용과는 명확히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말씀이 아니라 하늘로 올리는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그러기에 시편은 누구든 각자의 처지에서 그 뜻을 음미하며 자신의 깊은 내면세계를 돌아볼 수 있는 여지를 열어줍니다. 물론 세계에서 고립된 채 별도로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분투하며 고통을 겪는 사람 자신의 처지에서입니다.

오늘 시편은 한 편의 시 가운데 그 후반부의 일부입니다. 한 편의 시로서 31편은 크게 두 부분(1~8, 9~24)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두 부분 모두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며 드린 기도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증하며 감사 찬양을 드리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첫째 부분이 개략적이라면 둘째 부분은 훨씬 구체적입니다.

더욱 생생한 둘째 부분 첫대목을 볼까요?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울다 지쳐, 내 눈이 시력조차 잃었습니다. 내 몸과 마음도 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는 슬픔으로 힘이 소진되었습니다. 햇수가 탄식 속에서 흘러갔습니다. 근력은 고통 속에서 말라 버렸고, 뼈마저 녹아 버렸습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한결같이 나를 비난합니다. 이웃 사람들도 나를 혐오하고, 친구들마저도 나를 끔찍한 것 보듯 합니다. 거리에서 만나는 이마다 나를 피하여 지나갑니다. 내가 죽은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으며, 깨진 그릇과 같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 옵니다. 사방에서 협박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나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내 생명을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밉니다.”(31:9~13)
마치 욥의 탄식을 듣는 것 같습니다. 병고(9~10)에 더해 적대자들로부터 비방을 겪고, 친구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처지에 빠져(11), 결국은 죽음의 위협까지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한 탄식입니다(12~13).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 아니 그저 죽고 싶은 마음뿐인 처지에 대한 탄식입니다.

그러나 시편은 반전합니다. 그 절박한 상황이 절망으로 이어지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전환됩니다. 14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그 대미에 해당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주시려고 주님께서 마련해 두신 복이 어찌 그리도 큰지요? 주님께서는 주님께로 피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베푸십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복을 베푸십니다. 주님은 그들을 주님의 날개 그늘에 숨기시어 거짓말을 지어 헐뜯는 무리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고, 그들을 안전한 곳에 감추시어 말다툼하는 자들에게서 건져 주셨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포위당했을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놀라운 은총을 베푸셨기에,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포위되었을 그 때, 나는 놀란 나머지 ‘내가 이제 주님의 눈 밖에 났구나’ 생각하며 좌절도 했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는, 내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너희 모두 주님을 사랑하여라. 주님께서 신실한 사람은 지켜 주시나, 거만한 사람은 가차없이 벌하신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아, 힘을 내어라. 용기를 내어라.”(12:19~24)
시편 31편은 마치 욥기 전체를 한 편의 시로 집약해 놓은 것과도 같습니다. 어떤 시를 대하든지 마찬가지이지만, 그 놀라운 반전을 그저 논리로 분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 절망스러운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와 더불어 용기를 얻게 되는지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구절에 일일이 해설을 덧붙이기보다 그대로 반복해서 다시 음미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 시편 주인공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 위하여 또 하나의 시적 고백을 그대로 겹쳐 보고자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의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 주님은 저처럼 가난하고 비천했으며, 옥에 갇히고 동무들에게까지도 버림받았습니다. 주님은 인간들의 모든 비통함을 아십니다. 제 안에, 제 고독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 누구도 제 편이 되지 않을 때, 저와 함께해 주시고 저를 잊지 말고 찾아주십시오. 주님은 제가 주님을 알고 주님께로 향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오니, 도와주십시오.”(디트리히 본회퍼, 『저항과 복종』, 270, * 기도말 수정: 최형묵)
시편 31편과 그대로 겹치며 공명하고 있습니다.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있던 1944년에 작성한 고백입니다. 감옥에 갇힌 이의 심정이 절절히 드러나 있습니다.

본회퍼의 글에 지그프리트 피에츠(Siegfried Fietz)가 곡을 붙인 노래로 잘 알려져 있는 “선한 능력으로”(Von guten Mächten)의 가사를 또한 음미해 봅니다.
“1. 선한 능력에 고요히 둘러싸여 보호받고 위로받는 이 놀라움 속에 그대들과 함께 오늘을 살기 원하고 또한 그대들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2. 지나간 것들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어두운 날들의 무거운 짐은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지만 아, 주님 두려움에 떠는 우리의 영혼에 주님께서 마련해 두신 구원을 보내주십시오.
3. 고난의 잔이 쓰디쓴 고통으로 넘치도록 채워진다 할지라도 주님의 선하신 사랑의 손에서 두려움 없이 감사히 그 잔을 건네받겠습니다.
4. 그럼에도 한 번 더 이 세상 살아가는 기쁨과 눈부신 햇살을 허락하신다면 지난 날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온전히 주님의 것입니다.
5. 우리의 어두움 속으로 가져 오신 그 촛불이 평온하고 따듯하게 타오르게 하시고, 우리를 다시 하나되게 하십시오. 주님의 빛이 밤에도 빛나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6. 무거운 침묵이 깊어질 때면, 우리 곁에 보이지 않는 그 세상에 가득한 주님의 자녀의 찬양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십시오.
7. 선한 능력으로 놀랍도록 보호받고 있기에 의연하게 다가올 일들을 기대합니다. 주님께서는 밤에도 낮에도 우리 곁에 계시며 다가올 모든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노래로 다시 음미해 보면 어떨까요? 축약된 형태로 운율을 따른 노랫말로 변경되어 있지만, 노래로 음미하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질 것입니다.

“선한 능력에 언제나 고요하게 둘러싸여서 보호받고 위로받는 이 놀라움 속에, 여러분과 함께 오늘을 살기 원하고,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옛것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어두운 날들의 무거운 짐은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지만, 오 주님, 내몰려 버린 우리의 영혼에게 주님께서 준비해놓으신 구원을 주십시오.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어둠 속으로 가져오신 그 촛불들이 오늘 밝고 따뜻하게 타오르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다시 하나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는 압니다, 주님의 빛이 밤을 밝히고 있음을.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언제 쓴 시일까요? 본회퍼 목사가 1944년 12월 19일 베를린의 차가운 지하감옥 안에서 약혼녀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Maria von Wedemeyer)에게 쓴 편지 말미에 붙은 시입니다. 본회퍼 목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얼마 남지 않은 1945년 4월 9일 새벽 독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교수형으로 서른아홉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형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이처럼 놀라운 긍정의 언어로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행동하는 신앙인의 사표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또한 신학적으로도 한 시대의 분기점을 형성할 만큼 현대 신학에 깊은 영향을 남긴 탁월한 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비종교적 해석은 오늘의 신학에 끼친 영향이 지대합니다. ‘타자를 위한 그리스도’는 그 신학의 요체입니다.
목사로서 어떻게 히틀러 암살계획에 동참할 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대한 그의 답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만일 어떤 미친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사람이 걸어 다니는 보도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면, 나는 목사로서 그 자동차에 희생된 사람의 장례를 치르고 그 친족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내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 장소에 있었다면, 나는 그 자동차를 빼앗아 타고 그 미친 사람에게서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현대신학자 20인』, 107)
본회퍼 목사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몇 가지 일화로 집약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운 삶을 살았고 놀라운 족적을 남겼습니다. 뛰어난 신학자로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로 자족할 수 있었고, 그것도 광란의 독일 정치 현장에서 벗어나 안전한 영국이나 미국에서 목회자이자 신학자로서 삶을 이어갈 수도 있었지만, 자기가 마땅히 나서야 할 자리에 나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정치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고백교회 운동을 주도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분투했던 현장에서 내놓은 그의 모든 저작은 현대 신학의 고전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끊임없는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을 마주하면서 그의 삶을 환기하는 뜻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삶의 현실에서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삶의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헤아려 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역시 비범한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것이라 여긴다면, 우리는 오늘의 시편으로부터, 나아가 성서로부터 아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시편은 ‘다윗의 노래’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 표제가 붙기 이전에 이 노래는 평범한 민중의 노래였습니다. 또한 더불어 이 노래가 끊임없이 애송되었던 까닭도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삶의 정황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거듭하지만, 그 노래의 의미는 어떤 논리적 사변으로 분석하기 어렵습니다. 저마다 겪을 수 있는 삶의 체험과 확신을 빼놓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노래입니다.

시편 기자가 채록해 놓은 이 노래를 마주하며, 저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는 의미를 깊이 새기기를 바랍니다. 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자기만의 유폐된 절망의 감옥에 결코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그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뜻하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 연대의 손길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 목소리를 외치는 것을 주저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목소리가 우리 곁에 들려올 때 거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선한 능력을 믿으며,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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