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마땅히 이뤄질 것을 - 마가복음 4:26~29[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2-04 13:05
조회
713
2024년 2월 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마땅히 이뤄질 것을
본문: 마가복음 4:26~29



아주 간결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번역본에 따라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새번역) 또는 “씨의 성장에 관하여”(개역)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는 본문의 비유는, 이야기 그 자체로 보자면 하나도 어려울 게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 간결하고 쉬운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과연 뭘 말씀하시고자 한 것일까 생각하면 그 답이 간단하게 찾아지지 않습니다. 성서의 많은 말씀, 그리고 복음서의 많은 비유들이 오용되고 있는 것처럼 오늘 본문 말씀의 비유 또한 해석이 분분할 뿐 아니라 자주 오용되어 왔습니다.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의 문제는 초기 교회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개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비유들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약간 변형된 형태로 등장하는데, 이 간결한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서 반복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이 이 비유를 너무 밋밋한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거나, 아니면 어디에 초점을 맞춰 해석해야 할지 곤란을 겪었기 때문에 제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농부였던 예수님은 하나의 알곡이 맺히기까지의 오묘한 이치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목수였다는 점 때문에 농삿일과는 상관없는 분으로 알기 쉽지만, 고대 사회에서 목수 신분은 기본적으로 농민계층의 일원이었습니다. 농민이지만 평균적인 농민보다 더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수공업에 종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농사의 이치를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농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서의 거의 모든 비유가 농사짓는 일과 관련된 것은, 청중의 대부분이 농사짓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께서 스스로 그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를 다시 확인해 볼까요?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을 낸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비유는 많은 초점을 지닌 이야기 방식이 아니라 단 하나의 초점을 간명하게 말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너무 자명한 농사의 이치를 말하고 있는 본문 말씀의 초점은 무엇일까요?

이 비유를 해석하는 견해가 다양하지만, 가장 널리 유포된 하나의 견해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간은 할 일이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하신다.’ 그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이 비유를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비유는,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고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마침내 열매를 맺어 추수하는 일련의 과정을 하나님 나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일상적이며 자연스러운 과정에 대한 묘사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해석의 열쇠가 되는 말은 씨를 뿌린 사람이 그 과정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열매를 맺기까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본문에서도 분명히 말하고 있듯이 사람은 씨를 뿌립니다. 그것으로 끝일까요? 이 이야기는 들에서 자라나는 식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농사를 짓는 이치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그다음에 또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거름을 주기도 하고 김을 매주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물을 줘야 하기도 합니다. 농사를 지어 열매를 거두게 되는 데 사람의 노력이 결코 배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고 말함으로써 사람의 노력으로만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것 또한 중요한 이치를 말합니다. 이것 또한 이 비유를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비유의 문을 여는 열쇠가 두 개 아니냐는 물음이 제기될 법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십시오. 이 이야기가 하나의 교훈을 말하는 비유라고 할 때 어떤 것이 핵심적인 열쇠일까요?
땅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결코 인간의 땀의 결과로써만 열매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에서도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는 합니다. 그 진실이 주는 교훈이 결코 사소하지는 않습니다. 하나의 씨앗이 많은 알곡을 내기까지는 인간의 손길, 인간의 땀만 배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일깨워 주며, 그것은 어떤 일이든 자신의 노력만으로 성취되지 않는 삶의 진실을 일깨워 줍니다. 성서는 곳곳에서 그 진실을 일깨워 주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 본문 말씀 비유가 그 초점을 강조하는 데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아무래도 그 초점은 사람이 그 과정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사람이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만의 힘으로 열매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땅이 열매를 맺히게 하기 때문에 사람은 그 과정을 하나하나 인지할 수 없다는 것으로 집약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씨앗이 변모하고 성장하여 어느 순간 많은 열매를 내는 과정을 일일이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알곡을 거두게 되는 기쁨을 누리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씨앗이 심겨져 싹을 틔우고 자라나 열매를 맺는 과정을 사람이 일일이 인지하지 못하지만 마침내 알곡을 거두게 된다는 이야기가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사람은 할 일이 없다는 것일까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분명히 씨를 뿌리고 가꾸는 사람의 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교훈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쯤에서 우리는 이 이야기의 청중이 누구일까를 헤아려야 합니다. 이 비유가 시작하는 대목에는 그 청중이 밝혀져 있지 않지만, 계속해서 씨앗에 관한 비유로 이어지는 4장을 보면 그 청중은 제자들이었습니다(4:10,34).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이 비유의 청중이 그 제자들이라면, 이 비유의 말씀은 바로 그 제자들에게 주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째서 이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을 격려하고자 하였을까요?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며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도 뭔가 손에 잡히는 열매가 아직 없어 실망하고 낙담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도 합니다. 바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씨를 뿌리고 가꿔라. 그것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일일이 알지 못하지만 마침내 열매를 거두게 되지 않느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하면 마땅히 그렇게 되는 이치를 잘 알지 않느냐 하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신 것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할까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하고 그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겸허한 삶을 말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야말로 떳떳하고 여일한 삶을 말합니다.

사람은 늘 보이는 성과에 집착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순간순간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러한 인간의 특성이 위험을 회피하고 안정된 삶을 가능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간순간의 변화로 포착되지 않는 일련의 과정이 있습니다. 순간순간 변화 양상만으로는 미처 알 수 없으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는 이치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의 도리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합니다.
그 진실을 간과할 때 사람들은 조급증에 빠지고, 일희일비합니다. 그리고 뭔가 무리한 일을 감행합니다. 예수님 당시 젤롯당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 동기와 열성에서 누구보다 앞섰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운동과 자신들의 처지를 비교하며 실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제국의 지배에 직접 저항하는 젤롯당의 선명한 투쟁, 윤리적 각성과 생활 갱신 운동을 펼친 바리새파 사람들의 성과가 더욱 두드러지게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 운동은 도대체 뭘 변화시키고 있는지 알 수 없어 회의에 빠졌을 수 있습니다. 원대한 목적은 있지만 당장 무엇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막연하게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교회가 어째서 쉽사리 보수화되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낙담하고 꿈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은, 그렇게 회의에 빠져 있을 수도 있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근본적인 이치를 일깨워 주며 격려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할 것 없다, 마땅히 해야 할 몫을 다할 때 사필귀정 마땅한 결과를 거두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일깨운 것입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농사의 이치는 중요한 삶의 지혜를 일깨워 줍니다. 예컨대 민주주의를 정원에 비유하는 견해도 있습니다(예> 에릭 리우, <민주주의의 정원>). ‘기계형 지성(machinebrain)’과는 다른 ‘정원형 지성(gardenbrain)’을 추구하는 삶의 지혜를 일깨웁니다. 같은 취지로, 오늘날 민주적 시민의 덕성을 키우는 데 정원 가꾸기 등이 중요한 교육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네덜란드 교육학자 비에스타의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식물을 키우다 보면 식물을 내 욕망대로 빨리 자라게 할 수도 없습니다. 열심히 물을 주고 정성을 들여도 때로는 식물이 죽기도 하죠. 아이들은 엄청난 좌절을 경험하죠. 그런 만남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직면하고 그 욕망을 판단하는 실제적 연습을 하며 자기 제한을 배웁니다.” 민주시민 교육이 생태교육과 통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한겨레신문>, 2019.6.24.).
제가 심심치 않게 반복하지만,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씀과 함석헌 선생의 경험을 환기하는 것도 같은 뜻입니다. 다산은 “시골에 살면서 텃밭[園圃]을 가꾸지 않으면 천하에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지금 천안 봉명동에 씨알농장을 일구기도 했습니다. 이랑 하나 일구는 것도 반듯이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체험이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 우리 삶에 중요한 진실을 일깨워 주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사람들이 그렇게 땀 흘리며 깨닫기를 바랐는데, 사람들이 모두 당신 입만 바라보고 있어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더 평화롭고 평등하게 바뀌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순간에 이뤄지지 않는 상황을 보며 적지 않게 실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더욱이 부흥회적 열정을 바탕으로 하는 신앙생활을 추구하지 않는 우리에게 신앙의 의미 자체가 가물가물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결코 장황하지도 강력하지도 않지만, 되새겨보면 놀라운 삶의 진실을 환기함으로써 오히려 잔잔한 일상의 삶에서 맛볼 수 있는 놀라운 결과를 전망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면, 또박또박 뚜벅뚜벅 그 믿음의 길에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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