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생명을 주는 죽음, 그 역설 - 고린도후서 4:6~1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1-28 15:39
조회
767
2024년 1월 2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생명을 주는 죽음, 그 역설
본문: 고린도후서 4:6~10



사도 바울의 서신은 어느 대목이든 심상치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 심각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청중들이 이해했으며, 어떻게 복음의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이른바 커뮤니케이션 이론이 발달한 오늘날 전문가들은 말하기를, 긍정적인 내용과 비판적인 내용의 비율이 70:30 정도면 사람들을 설득하기에 가장 좋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은 그런 비율에 맞을까요?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은 전반적으로 심각합니다. 물론 심각함과 경쾌함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차원과 동일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심각하기 그지 없는 말씀들입니다. 그것을 도대체 청중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사도 바울의 말씀들이 복음의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나아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기초를 형성한 중요한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그 말씀의 기교에 있지 않고 그 말씀의 진정성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그 진정성을 잘 보여 주는 말씀의 한 대목입니다. 본문 말씀은 사람을 구원하는 도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저 보편타당한 진실을 건조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실존적 정황 가운데서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도 바울은 교회 안팎으로 제기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분투하며 복음의 진실을 전하는 이로서 몫을 다하기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직면해야 했던 여러 문제들 가운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어려움 외에도 사도와 그 일행을 향한 비난도 적지 않은 괴로움 거리였습니다. 사도와 그 일행은 그에 대해 끊임없이 스스로 변호해야 했습니다.
본문 말씀 가운데 첫머리(6절)는 고린도후서 4장에서 계속된 그 변론의 결론 격에 해당합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4:6). 하나님께서 빛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 만물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신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빛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다른 사람들의 비방 앞에서 그 진실을 말하는 까닭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진실을 전하고자 할 따름이니 제발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그것은 초기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잘 집약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고 따르는 믿음입니다. 그의 인격과 생애를 통해 하나님을 안다는 믿음입니다. 이 진실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감동을 주는지 참 의심스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이들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어 그저 믿어야만 하는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그 믿음이 확고해지기 이전 상황에서 이해할 때 훨씬 실감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신적인 존재와 동일시되는 면모를 전혀 지니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경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도대체 어떤 분일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7절 이하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놀라운 진실을 스스로 체현하고 있다는 대담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4:7). 질그릇의 비유는 성서에서 종종 등장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깨어지기 쉽고 또한 결코 값진 것이라 할 수 없지만 그 안에 보물을 간직한 그릇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바울과 그 일행을 비유합니다. 애초에 그리스도 자체를 비유하는 것일 수 있으며, 나아가 그리스도인 자체에 대한 비유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자신의 체험이 배인 고백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4:8~9). 질그릇에 담긴 보물의 진실을 네 가지 대립되는 상황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깨지기 쉬운 그릇에 담겨 있지만 손상되지 않는 보물, 어려움을 겪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삶의 진실을 말합니다.

그 진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4:10). 생명을 주는 죽음의 역설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역설을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진실을 체현하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역설을 말합니다. 내 안에 체현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역설의 진실입니다. 깨지기 쉬운 질그릇에 담겨 있지만 손상되지 않는 보물의 진실, 늘 박해와 비방으로 시달리고 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는 삶의 진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모습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진실을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대목에서 그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범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난 다음 그 삶을 따르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훨씬 쉬웠을 것 같은데, 어째서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이렇게 어렵게 말했을까요? 신약성서 첫 기록을 남긴 사도 바울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는 진실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초기 교회에서도 그 진실이 오인될 가능성을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복음서가 기록된 거시적 배경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는 진실을 역설한 것은,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대속론과 같은 어떤 교리를 형성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교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분투하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예수의 삶을 보라. 그리고 따르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과 삶을 공유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삶에 대해 들은 바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그 진실만 말한다면 훌륭하기는 하지만 모범이 되는 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선명하게 드러나는 독특한 진실의 의미를 캐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삶의 진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하지만,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그분의 삶에 어떤 놀라운 비밀이 담겨 있다는 통찰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극한적인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예수의 삶의 진실, 바울이 포착한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강조한 십자가 사건은 죽음의 주술적 신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진실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완전하게 자기를 비워버린 예수의 삶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살리는 진실을 뜻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통찰입니다.

어쩌면 사람들 다 도망가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안락함과 행복을 추구하고 그것이 구원이라 믿는 사람들에게 놀라자빠질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놀라며 바울을 비웃었습니다(사도 17:16 이하). 우리 근대사에서 홍대용이 북경 천주교당에 가서 고난받는 예수상을 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사정(홍대용, <을병연행록>)도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이 생명을 가져다 주는 죽음의 역설을 말한 것은 당대의 세계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당대의 세계와 인간, 그 모습과는 전적으로 대비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진정한 삶의 길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저마다 살겠다고 타인을 죽이는 현실, 저마다 인정받고자 타인을 배제하는 삶의 현실, 그 최종 승자가 지배자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 신민이자 예속민이 되는 세계에 그 어떤 구원의 가능성은 없다고 본 것입니다. 온갖 어려움과 비방을 겪으면서도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삶, 끝내는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자기를 부정해버린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구원의 표상이라고 바울은 역설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지금 경험하는 세계와 인간상을 부정해버리고 철저하게 지향해야 할 세계와 인간상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고 그 진실을 역설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체험 가운데서 그 진실을 일관되게 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 말씀의 진실은 너무나 먼 이야기일까요? 여기서 깨지고 저기서 깨지고, 여기서 상처받고 저기서 상처받는 삶이 계속되는 현실에서 그 진실을 따르라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렇게 당하고 사는 삶을 정당화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그러니 분투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웁니다. 거꾸로 훨씬 더 능동적인 삶을 일깨웁니다. 참을 때 참아야 하고, 싸울 때 싸워야 하는 삶, 거부해야 할 것을 거부하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는 삶,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때를 분별하는 삶은 훨씬 단단한 내면의 세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빈말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피조물이 더불어 생명에 이르는 길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맞닥뜨리는 난관 가운데서도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삶의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 삶의 진가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에게 가능한 견결한 삶의 의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삶 가운데 구현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삶을 지향하며, 이 교회가 그 삶을 돕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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