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칼을 쳐서 보습으로 - 이사야 2:1~5[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8-11 12:21
조회
16231
2019년 8월 1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칼을 쳐서 보습으로
본문: 이사야 2:1~5



예언자 이사야의 선포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4절은 국제연합(UN) 본부 앞에도 새겨져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민족이 바라는 이상이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라는 이상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더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하면서 더더욱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말씀을 구성하는 앞 뒤 문맥이며, 그 문맥 안에서 이 말씀이 뜻하는 바입니다.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가에 우리는 먼저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말씀의 앞부분은, 우리가 바라는 바 그 희망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질지에 대해 시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그리고 만국의 백성이 이렇게 말하리라고 합니다.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은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백성의 사명을 말합니다. 약소민족으로 주변 강대국의 시달림을 늘 받아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소망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도 다른 민족들을 지배하며 그 위에 군림해 보고 싶은 욕망이었을 것입니다. ‘봐라! 우리의 하나님께서 너희의 신들을 물리쳤다. 이제 모두 우리 앞에 굴복하라!’ 이렇게 다른 민족들에게 힘을 자랑하며 떵떵거려 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예언이, 시련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는 소망의 말씀으로 바로 그와 같은 내용을 선포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예언의 말씀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희망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무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다시 말해, 경제력을 강화한다든지 군사력을 강화해서 국위를 떨치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내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움으로 세상의 만백성이 그 길을 따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다가올 소망의 미래가 분쟁으로 얼룩진 오늘 현실과 전혀 다르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동시에 그 미래를 이루어 가는 방식 또한 오늘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 질서의 진정한 역전, 곧 “칼이 보습으로 되는” 일은 그 방법에서부터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칼’은 경쟁과 갈등 그리고 죽음의 파멸을 의미하지만, ‘보습’은 화합과 평화 그리고 살림의 공존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현실을 지배하는 법칙이 완전히 뒤집어져 새로운 법칙이 탄생하는 것을 뜻합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4세기경 로마제국의 군사 저술가 베게티우스(Vegetius)의 격언입니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구가하던 로마제국은 그 격언에 충실했지만,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해야 했던 로마제국은 결국 전쟁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그 역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지배자들은 그 격언을 따라 군사적 우위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에 충실합니다. 역사가 입증하듯, 그 결과는 전쟁의 연속일 뿐입니다.
본문말씀은 그와는 전적으로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라.” 그 믿음을 따르는 길입니다. ‘로마의 평화’가 정점에 이른 바로 시기에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평화, ‘그리스도의 평화’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길은 세상이 따르는 길과는 전혀 상반되는 길입니다. 통상적인 가치의 전복해야 가능한 길입니다. 본문말씀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몇 세기(기원전 8~6세기) 앞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인식의 전환은 중대한 세계관의 변화를 뜻합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성서 말씀의 위대성, 성서적 통찰의 위대성은 바로 이와 같은 정신사의 변혁에 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전국시대를 경유하면서 위대한 사상이 분출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본문말씀은 혼란과 갈등의 시대를 경유하면서 이뤄진 사상적 전환, 그 전환을 뚜렷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강(强) 대 강(强)의 논리가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을 발견한 데 그 통찰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제2의 창조’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제2의 창조는 현실을 지배하는 법칙을 뒤집고 전적으로 새로운 법칙으로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본문말씀은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로 다시 만들어지는 세계에 대한 희망의 선포입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너라, 야곱의 족속아!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오늘 본문말씀의 예언을 선포한 이사야와 동시대 예언자 미가는 오늘 본문말씀과 동일한 내용을 선포하면서 거기에 더하여 또 하나 중요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4절과 동일한 그 말씀에 이어 미가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미가 4:4)
농사꾼 출신다운 예언자의 선포입니다. 자기가 흘린 땀의 결실을 맛보며 평화로운 일상의 삶을 누리는 세계에 대한 희망입니다. 평화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입니까? 단지 전쟁없는 상태가 아니라 일상적 삶의 평화를 이루는 것, 일체의 폭력과 강요, 그리고 그로 인한 상처와 불안이 사라진 삶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 평화를 이루는 길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동시대 두 예언자의 선포는, 지금 그 선포를 듣고 있는 백성이 여전히 기존의 논리에 매여 있는 현실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힘에는 힘으로, 군사력에는 군사력으로 대응하는 그 세계 안에서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자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베와 그를 뒷받침하는 일본의 극우세력, 그리고 그에 준동하는 한국의 극우세력들이 일으킨 사실상의 전쟁상태 아닙니까? ‘경제전쟁’이라 하기도 하고 ‘유사전쟁’이라고도 합니다만, 어쨌든 총성 없는 사실상 전쟁 상태인 것은 분명합니다.

아베 정부가 뭐라 변명하든, 그 저의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가고자 하는 욕망, 그래서 누군가를 적으로 간주하여 위기감을 조성하려는 의도, 결국 사실상 전후에도 여전히 극복되지 않은 제국주의의 야욕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아베는, 일본 근대화의 선구로 추앙받고 있지만 천황지상주의를 내세우고 정한론을 주도하여 사실상 일본 군국주의의 정신적 뿌리를 형성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존경하고, 만주국의 사실상 기획자였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존경하며, 그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베는 1945년 전후(戰後)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일본 지배세력의 속마음(‘立前[다테마에]’가 아니라 ‘本音[혼네]’ / ‘鍍金’이 아니라 ‘地金’)을 대변하고 있는 정치인입니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중국이나 북한을 비판할 때는 ‘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강조하지만,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맥락에서는 전혀 다른 주장으로 자신들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국민주권, 기본적인 인권, 평화주의 ... 이 세 가지는 맥아더가 일본에 강요한 전후 레짐 그 자체 아닙니까? 이 세 가지를 없애지 않으면, 진정한 자주 헌법이 될 수 없어요.”(아베 1차 내각 법무대신 나가세 진엔, 2012.5.10. 발언 / <한겨레신문> 2019.8.19)

우리는 그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며 전혀 다른 정신적ㆍ사상적 전통을 형성하고 계속 이어오고 있습니다.

3.1 독립선언의 위대한 자주와 평화 정신이 있습니다. 그 몇 대목입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도 바쁜 우리에게는 남을 원망할 여유가 없다. ...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이 시키는 대로 우리의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결코 오랜 원한과 한순간의 감정으로 샘이 나서 남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낡은 생각과 낡은 세력에 사로잡힌 일본 정치인들이 공명심으로 희생시킨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올바른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 지난 수천 년 갈고 닦으며 길러온 인도적 정신이 이제 새로운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는구나. ...
온 세상의 도리가 다시 살아나는 지금, 세계 변화의 흐름에 올라탄 우리는 주저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다. 우리는 원래부터 지닌 자유권을 지켜서 풍요로운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다. 원래부터 풍부한 독창성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세계에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꽃피울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의 한 대목은 언제 다시 봐도 되새겨야 할 명문이오, 위대한 정신의 유산입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 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우리에게 그 위대한 정신적 유산이 있기에 우리는 일제의 압제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었고, 독재를 넘어 민주주의를 일궈냈고, 지금 분단의 질곡을 넘어 평화를 이루기 위한 여정에서 분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마주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도발에 대응해 우리를 지킬 수 있는 자구책을 강구하여야겠지만, 그 모든 대비책의 밑바탕에는 세계 만민이 따를 수 있는 도의를 기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일본을 배척하고 일본 사람을 배척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제국주의의 헛된 망령, 그 망령을 따르는 아베와 그 지지세력의 망상을 몰아내야 합니다. 경제력보다, 군사력보다 우선하여 민주주의를 더욱 굳건하게 하고 평화를 이루는 길로 그것은 가능합니다. 그 길에 모든 사람이 동참할 수 있도록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진실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너라!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그 말씀을 신실하게 따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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