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들으시라, 비워진 자리 - 누가복음 11:5~8[이정희 목사 / 동영상]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20-05-31 18:12
조회
4020
2020년 5월 3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들으시라, 비워진 자리
본문: 누가복음 11:5~8

이정희 목사



나는 장로라는 교회의 직분의 본질이 무엇인지, 역할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오늘의 메시지 부탁을 받고, 비로소 모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알아볼까 하다가 그냥 덮었습니다. 교회의 제도와 치리라는 문법으로 규정되고 정리된 것의 덫에 걸리기 싫었습니다. ‘장로교’로 번역된 Presbyterianism이라는 말의 뿌리라도 더듬어보자 하고 라틴어 헬라어 사전을 넘기다 웃었습니다. 원뿌리는 헬라어 ‘프레스바스’인데, 한마디로 ‘늙은이’, ‘원로’, ‘안다니’, ‘힘 좀 쓰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관리인’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니 이 말뜻대로라면 오늘 장로 임직되시는 분들은 좀 기분이 그렇지 않을까요? ‘직분’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다 고린도후서 3-4장이 눈에 밟혔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절에서부터 치고 들어왔습니다. 짜집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습니다.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치고 들어오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은 뒷걸음질치고 줄행랑입니다. ‘못해요’, ‘그리 못 삽니다’. 나는 범생이라 감당 못합니다. 그러니 누구에게 이 말씀의 덫을 치고 그물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덮었습니다.
메시지 부탁을 받은 바로 그 시간에 서점에서 <<듣기의 윤리>>(김애령)라는 책을 샀습니다. 주문한 책입니다. 들음을 주제로 한 연구가 낯설었고 새로웠기 때문입니다. 들려서 듣는데, 무슨 윤리. 물론 엿들으면, 감청(監聽)하거나 도청(盜聽)하면 통신보호법에 걸리게 됩니다. 청문회(聽聞會), 공청회(公聽會)도 듣는 자리입니다. 허위, 거짓이 물론 윤리적 문제가 되겠지만,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감청이나 도청이 아니라면, 들리기에 들었는데, 무슨 윤리가 요구되는 것일까요? 들려서 들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 그것을 왜곡하거나 덧붙이거나 한다면 그것은 다시 말하기의 윤리가 될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책을 읽다가 <들어가는 말>에서 멈추었습니다. 이 책 <<듣기의 윤리>> 부제는 <주체, 타자, 그리고 정의의 환대>입니다. 전체적인 얼거리는 바로 이 부제(副題)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과제를 제시합니다.
“언어가 투명하고 중립적인 도구일 수 없다면, 권력의 작용으로부터 자유로운 말하기와 듣기가 있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저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들릴 수 있게 말하기 위해 승인된 담론 체계 중 하나를 선택하여 자기를 설명할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렇게 이미 담론 권력에 구속된 언어로 표현된 삶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 말할 수 없는 경험, 표현을 초과하는 삶, 언설로 담기지 않는 고통을, 부족하고 편향된 언어라는 도구에 담아 이미 틀어진 해석을 향해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문제는 결국 타자/소수자/서발턴의 ‘스스로 말하기’가 아니라 그 말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에 있는 게 아닐까? ... 잘 헤아려 듣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본의를 이해하는 것?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는 신뢰? 확고한 지지와 연대의식을 가지고 인내하며 그 말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한가, 듣기의 윤리라는 것은?”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롬 10:17)고 합니다. 그러니, 장로님 이제부터 목사님 말씀 더 잘 들으세요, 권면하려고 아리숭한 앞자리를 깔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귀찮게 굴지 말라”고 매정하게 밀치는 이 친구는 나쁜 친구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야이, 미친놈아, 지금이 몇 시인데 지랄이야” 소리치는 동무인 듯 동무 아닌 동무 같은 동무가 나에게도 있으니까요? 친구 두 사람이 어떻게 드잡이질을 했는지, 결국 빵을 꿔주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친구 사이임에도 빵을 꿔달라고 하니, 그 또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친구가 친구를 위해 빵을 빌러 왔는데, 그 집 역시 내일 아침 식구들이 먹을 빵밖에 가진 것이 없어 그리 매정했다면. 아무튼, 이 이야기는 참으로 씁쓸하고 애잔합니다. 그들의 가난이 쓰라립니다.
가난은 어떻게든 버틸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당장의 굶주림은 사람의 자존감을 흩트립니다. 수치와 모멸감, 무력감이 치솟거나 몰려듭니다. 기근으로 이집트로 가던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로 위장시키는 비루함을 통해 우리를 배고픔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빌리든 동냥이든, 친구를 위한 일어섬/나섬은 굶주림의 힘이 구성해내는 한계/경계를 부수기, 돌파하기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응답이고 환대이며, 곧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위해 애걸하는 것이 아니라 빵을 줄 때까지 들이받으라고 합니다. 그것은 또한 빵을 가진 친구의 윤리적 삶을 세우는 길이고,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구원의 길이 될 것입니다. 한밤중에 찾아온 굶주린 친구, 그는 친구이기도 하겠지만 <침입자>입니다. 친구를 위해 빵을 빌러 간/온 친구 또한 침입자입니다. 마주침/만남은 이렇게 침입으로 시작됩니다. “마주침은 한 사람이 스스로를 타자의 요구들과 주장에 노출되면서 시작된다.”(알폰소 링기스,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 34) 친구/그러나 낯선/이방인/타자에게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굶주린 친구의 얼굴에서 윤리적 명령을 알아차릴 때, 그 명령에 따라 잘 짜여 있을 것으로 보이는 친구의 경계를 파고들 때, 도래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에 얽혀드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공동체[교회]가 사건화됩니다.
며칠 동안 ‘기레기’에서 이제는 쓰레기 대신 ‘구더기’로 변신한 ‘기더기’ 미디어 추잡한 ‘소음’이 우리의 소통공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그 소음의 정체는 ‘토착왜구’로 멸칭되는, 그 뿌리에서 번식한 집단, 정의연의 운동을 무시, 멸시, 무관심, 왜곡해왔던 무리들의 도덕 감정을 옳다구나 덮어씌우고 히히 크크 거리는 무리들이 토해내는 귀곡성(鬼哭聲)입니다. 징글징글합니다. 그 소음을 ‘알아’-듣기도, 선택적 듣기도 듣기의 윤리가 요청되지만, 아예 듣지 않기의 윤리가 더 큰 윤리적 역량을 발휘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문제는 그 소음이 집짓기 위해 날아드는 벌처럼 며칠 신경 끄고 있으면 어느새 육각 방 몇 개 재어놓고 있듯이, 슬그머니 귓속에 집을 짓고 그 속에서 윙윙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삶을 통해서라도 되돌아보면 해야 할 말과 하면 안 되는 말만이 아니라, 들어야 할 말과 듣지 말아야 할 말이 정치권력에 의해 규정되어 강압된 삶이었습니다. 이 강압의 권력 한 중심축이 기독교였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만, 요청되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분노’임을 우리는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화, 기쁨, 사랑이 로마 제국의 군사력과 그 힘에 부역하면서 기득권을 누리던 유대 지배집단을 향한 예수님의 분노를 알고 익히고 따르지 못하게 또 하나의 통치 권력 체제로서의 교회는 우리를 훈육해왔습니다. 예언자들의 분노, 아니 하나님의 분노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우리 귓속에 벌집을 짓고 윙윙댔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 믿음은 귓속에 집을 짓고 윙윙거리는 소음, 귀곡성을 비워내는 것, 한밤중 불쑥 찾아드는 친구, 이웃의 굶주린 뱃소리, 그리고 그 굶주린 뱃소리를 내게 하는 우리 삶의 불의를 향한 예수님, 하나님의 분노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들음의 윤리입니다.
그런데, 그러나, 그럼에도 어떻게든 들리지 않게 철갑 귀마개를 쓰고 싶고, 그래도 들리면 안 들리는 척, 못 들은 척, 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 의식/무의식, 영혼에 슬그머니, 옅게는 ‘부끄러움’ 같은, 짙게는 ‘죄책/죄의식’ 같은 것이 둥지를 트는 그런 소리, ‘부름’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행복하다. 행복해질 것이다. 다만, “사람의 아들 때문에”, “나 때문에”, 그러나 이 세상에서가 아니고.
이 말씀을 ‘행복선언’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이 소리-부름이 거북살스럽고 껄끄러웠는지, 막스 베버는 ‘헛소리’ ‘꿈 깨’라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성서학자들은, 교회사와 신학사에서, 그것은 특정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엘리트)에게, 곧 들이닥칠 하나님나라의 급진적 시간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혹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나’ 그럼직한 것이라고, 아무튼 그렇게 염색하고 꿀을 발랐습니다. 그러니 그 부름 앞에서 소소한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서늘한 부름의 소리입니다. 나는 이렇게 듣고 싶습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 우리에게, 이 부름은 그리고 들음은 “무엇이 걸려 있는 부름인가?” 도래하고 있는, 와야 할, 이루어져야 할 새로운, 정의와 평화, 기쁨이 새벽안개처럼 깔리는 삶의 질서 구성을 위해 누군가 감당해야 할 ‘사랑의 길’의 ‘고난선언’입니다. 신내림굿을 마친 신어미는 내림받은 무당을 붙들고 처연하게 웁니다. “이 험한 길, 어찌 가려느냐?” 그럼에도 받은 <부름>이요, 그 길로 내딛겠다는 <약속>이니, 갈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장로(長老)에서 장로(張路)로 바꾸어 오늘 장로임직한 분들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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