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 고린도전서 6:12~2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7-25 16:51
조회
1231
2021년 7월 2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본문: 고린도전서 6:12~20



대체로 사도 바울의 서신은 어법이 단호하고 분명한 편이지만, 어떤 대목은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의 역사적 맥락을 헤아리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본문 그 자체로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그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전체적인 대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큰 뜻을 말하면서 세부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이 딱 떨어지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그 목적에 관한 중요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중심 메시지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로 집약됩니다. 율법을 따르는 데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데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본문말씀 또한 그 생각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은 자유가 남용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 자유를 제대로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설파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다 보니 의미 있고 또한 실행 가능한 윤리 규범의 성격을 함축하는 내용들을 그 전후문맥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줄여 말하면, 우리가 흔히 말하듯 자유란 방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셈인데, 바울은 단지 그 상식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해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먼저 구체적인 세 가지 명제를 제시하고 이에 대한 대구 형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들이 문제입니다. 제시된 그 세 가지 명제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바울의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기 간단하지 않습니다.

첫째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역설한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명제는 충분히 스스로 받아들일 만한 명제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을 때, 그 명제는 바울이 걱정하고 있는 어떤 경향을 이르는 것이 됩니다. 그 경향은 아마도 영지주의 윤리관과 관련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초기 교회에서 영지주의는 늘 문제꺼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영적인 지혜를 소유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고 육체적 삶을 경시하였던 영지주의는 두 가지 극단적인 윤리적 태도를 낳았습니다. 그것을 믿는 한편의 사람들은 육체의 쾌락을 억제하는 금욕주의를 따랐고 또 한편의 사람들은 육체적 삶이야 어찌되었든 상관없다고 보고 쾌락주의를 따랐습니다. 이 대목에서 바울이 특별히 유념한 것은 후자의 경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자유를 누리면 되었지 육체야 어떻든 상관없다고 믿는 사람들을 보고, 자유를 누리는 것은 좋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대원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라는 명제가 다시 반복되고 있지만 그 대구는 다릅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언뜻 볼 때 대구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논법입니다.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는 것, 곧 ‘자유롭다’는 것과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구를 이루고 있다면, 그 말의 실질적 의미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대구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고 여기는 태도가 실질적으로 어떤 제재를 받는 처지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삶의 태도가 결과적으로 어떤 것에 매이게 만드는 현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중독 현상을 들 수 있을까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어떤 행위가 결과적으로 나의 의지에 의해 선택된 행위가 아니라 거꾸로 그 행위가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현상입니다. 사람이 술을 먹지만 그것이 과하면 술이 술을 먹는 현상, 술이 사람을 먹는 현상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바울은, 목적 없는 자유의 남용은 그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 셈입니다.

셋째 “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입니다.”라는 명제를 내세웁니다. 그 뜻이 아리송한데, 적어도 이 말이 먹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에서 먹는 것의 문제는 끊임없는 논란꺼리였습니다. 이 명제는, ‘음식은 음식일 뿐으로 그것이 저마다의 배에서 받아들여진다면 못 먹을 것이 어디 있느냐’는 뜻입니다. 음식에 대한 금기의 부정입니다. 이에 대한 대구로서 바울의 이야기도 그 명제의 의미를 긍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없애버리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이 규정한 금기가 의미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가 내용상 진정한 대구에 해당합니다.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주님은 몸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역시 아리송해 보이는 말씀이지만, 바로 여기에서 바울의 의중이 드러납니다. 초기 교회에서 음식물에 관한 사항이 논란거리였고, 바울 역시 이에 관해 누차 의견을 밝혔지만, 이 대목에서 음식물에 관한 태도는 일종의 비유적인 차원에서 언급된 것일 뿐, 바울이 정작 말하고자 한 것은 ‘음행’이라고 한 데 있습니다. 바울이 진정한 자유가 아닌 방종의 가장 심각한 현상으로 꼽은 것이 바로 ‘음행’이었다는 것을 이 대목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더욱 구체적입니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창녀의 지체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지체와 대비되는 창녀의 지체는, 본문말씀의 전후맥락에서 볼 때 단순히 비유로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말씀 전후로 5~7장에 이르는 내용 가운데 성 문제와 남녀관계의 문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교회가 처한 환경, 곧 당대 고린도라는 도시의 환경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신흥 무역 항구도시로서 고린도에는 매우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각종 신전들이 화려하게 자리 잡고 있는 사실이 보여주듯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가 발달하였습니다. 온갖 욕망이 들끓는 오늘의 대도시 분위기와 유사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성적 쾌락으로 위안을 삼는 일 또한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남신과 여신의 결합을 흉내 내는 히에로스 가모스(ἱερὸς γάμος)라는 종교의식까지 공인되고 있었으니 보통 사람들에게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도시의 분위기는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도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환경 가운데 있는 교우들에게 분명하게 그러한 세태를 경계하는 말씀을 전할 필요를 절감하였습니다.
바로 그 맥락에서 본문말씀 바로 앞에, 오늘날 동성애를 금지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오인되고 있는 본문이 등장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사람의 예시 목록에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고전 6:9. 새번역)이 나옵니다. 그리스어로 ‘말라코이’’(μαλακοι)와 ‘아르세노코이타이’(αρσενοκοιται)를 그렇게 번역한 것인데, 성서의 일부 번역본들이 그와 같이 번역하고 있을 따름이지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당대에 오늘날 통용되는 의미에서 성적 지향의 하나로서 동성애 개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여기에 등장한 단어의 용례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번역본마다 짐작하여 번역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에 관한 한 정설은 없습니다.
여기서 말라코이는 참조할 만한 용례로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세례 요한을 두고 말할 때 사용한 경우가 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마태 11:8; 누가 7:25). 말라코이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마태) 또는 비단옷을 입은 사람(누가)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아르세노코타이는 성서 안팎에서 그 용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개념이 사람이라는 뜻의 ‘아르센’(αρσην)과 ‘침대’라는 뜻의 ‘코이토스’(κοιτος)가 합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직역하자면 ‘침대의 남자’라는 정도의 의미를 지닙니다(김진호). 또는 ‘케이마이’(κειμαι), 곧 ‘옆으로 눕다’라는 뜻을 지닌 개념에서 유래하는 ‘코이테’(κοιτη)가 결합한 것으로 보면, ‘옆으로 누운 남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박경미). 개념상으로 알려진 것은 이런 정도입니다. 이것이 동성애와 관련되어 있다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맥락상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일이 흔했고, 문맥상 성적 방종 행위와 관련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는 점을 감안해 그 뜻을 헤아릴 수밖에 없습니다. 말라코이가 궁중에서 화려한 옷을 사람을 뜻하는 의미로도 사용된다면 아마도 히에로스 가무스 의식을 수행하는 신전 사제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와 구별되는 존재로서 아르세노코타이가 ‘침대의 남자’를 뜻한다면 신전과 상관없이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남자를 일컬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만연해 있는 성적 방종, 성적 관계의 유해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만족적인 쾌락의 도구일 뿐인 성적 관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상대를 도구화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몸을 망치는 일을 문제시한 것입니다.

불가불 이 시대에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기에 꼭 필요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만, 다시 본문에 집중하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본문말씀은,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그 자유가 남용되어 방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 자유가 방종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될까요? 첫 번째로 한 개인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개인의 자유는 스스로의 몸을 해치는 것이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자기 몸 밖에 있지만, 음행하는 사람은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몸은 단지 육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몸이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영혼과 육체를 지닌 전인적 주체로서 인간을 뜻합니다. 바울은 그 몸이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를 이루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곧 성령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온전한 인격적 주체로서 자신의 몸은 자신의 것만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몸에 죄를 짓는다는 것 역시 자기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 역시 관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줄여 말하면 자신의 자유를 위하여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고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곧 자신의 인격을 해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본문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리는 자유가 자기만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된 온 몸의 유익함과 건강함을 위해 선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진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되는 교회 공동체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의 전반에 해당합니다. 예컨대 지금 우리가 코로나19 위기가 덮친 엄중한 이 시기에 각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들을 용인하는 사연이 무엇일까요? 공동체적 삶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어째서 자유로운 시장의 원리, 자유로운 경쟁의 원리를 그대로 방치하면 위험하다고 생각할까요? 그것은 사람이 물질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더 긴 이야기는 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오늘 말씀의 깊은 뜻을 새기고 따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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