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의 - 로마서 10:9~17[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9-26 16:12
조회
550
2021년 9월 2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의
본문: 로마서 10:9~17



본문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한마디로 집약할 수 있을까요? 대번에 익숙한 말씀이 먼저 눈에 띄고 귀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10)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13)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17) 이런 구절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면 성서의 말씀에 상당히 익숙한 경우일 것입니다. 만일 특별히 들어오는 구절이 없더라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그만큼 편견이 없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독립된 구절로서 각각의 말씀이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본문말씀은 단절된 몇 마디 말로 그 뜻이 온전히 드러나기보다는 전반적인 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 전후 맥락에서 본문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본문말씀은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세상 만민의 구원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12) 바로 이 한마디로 집약되는 셈입니다. 이 논제는 9장에서부터 쭉 이어지는 문맥에서 결론에 해당합니다. 어떤 맥락에서 그 결론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그 맥락은 유대인의 구원에 관한 물음에서 시작됩니다. 선민으로 자처하는 유대인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자명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행함으로써 당연히 구원에 이른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더불어 그 유대인의 믿음은 오히려 장해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장해물이 된 것입니다. 그 믿음은 자기 의(義)를 정당화하는 방편이 되었을 뿐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길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자신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의에 이른다고 믿었지만, 그 밖의 사람들 곧 이방인들은 자기들과 같이 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고 여김으로써 이방인을 차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아니오!”를 외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의 의의 가장 강력한 증거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며, 그 안에서는 차별이 없다고 역설합니다.

오늘 우리는 10:9~17을 본문말씀으로 삼고 있지만, 그 뜻을 제대로 헤아리기 위해서는 10장 초반부터 그 논지를 살펴야 합니다. 10:1~4에 이르기까지 그 초반부는 앞선 9장의 결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도 바울이 유대인을 비판한 이유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을 비판한 것은 그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역설합니다.
유대인은 분명히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지만, 그 열성이 올바른 지식에 근거하고 있지 못합니다. 바울은 그 점을 안타깝게 여기며 유대인에게 호소합니다. 아무리 열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올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못하면 그 열성은 자기만족의 정당성만 확인해주는 것으로 귀결될 뿐입니다. 열성이 주관적 차원을 말한다면 올바른 지식은 객관적 차원에 해당합니다. 열성이 자기 정체성의 차원을 뜻한다면 올바른 지식은 진리의 차원을 뜻합니다.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역사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등등, 많은 사람들은 그런 자족감에 사로잡혀 삽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아니면 내가 선한 목적을 위해 사회적 활동을 펼치는 사람이라는 사실, 또는 사회사업가라는 사실 등을 자각하고 그 일에 열성을 다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 정체성에 부합하는 목적을 이루는 일에 정말 기여하고 있느냐 않느냐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올바른 지식을 갖출 때만이 그 열성은 뜻하는 바를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 비추어 끊임없이 검토되어야 합니다. 진실 앞에 자기를 열어놓고 돌이켜 볼 수 있을 때만이 열성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정체성은 그 이름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이름을 부여받게 된 근본적인 뜻에 좌우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이름은 계속해서 바뀌게 됩니다. 그것은 유대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주었던 율법을 마감하고 그 율법이 본래 의도했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계기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폐기이자 동시에 완성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모세의 율법을 급진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만민의 구원에 대해 역설합니다. 바울이 인용한 모세의 말, 곧 “율법을 행한 사람은 그것으로 살 것이다”(레위 18:5)는 말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이 추구하는 근본적 목적을 겨냥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조문을 지키는 현실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바울은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서도 역시 모세의 말을 인용합니다. “너는 마음 속으로 ‘누가 하늘에 올라갈 것이냐’ 하고 말하지 말아라. 또 ‘누가 지옥에 내려갈 것이냐’ 하고 말하지도 말아라.”(신명 30:12~13 참조) 이 대목에서 바울은 역시 율법의 근본 뜻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듯이 믿음 역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늘로 갈까 지옥으로 갈까 고민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임의대로 어떤 세계를 만들어 거기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진지한 노력이 오히려 그에 이르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가 되는 경우입니다. 스스로 만든 경계와 기준 때문에 거기에 매여 걱정하는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까닭을 바울은 다시 모세의 말을 들어 그대로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신명 30:14) 이 대목에서 바울은 모세의 신명기에서 율법에 상응하는 말씀을 그대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상응하는 말씀으로 바꿔 이야기합니다. 그 의도는, 본래 모세를 통한 율법도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부여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대로 살아가도록 안내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지 그 조문에 매이도록 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 뜻이 그리스도의 임재로 더욱 분명히 나타났다는 것을 바울은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으로 증언된 말씀만큼 분명한 것이 어디 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 분명한 진실 앞에 자기를 열어놓는 결단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다른 어떤 자격이나 그 자격을 결정짓는 어떤 경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경계는 오직 사람이 설정했을 뿐이고 그렇게 설정한 경계에 사람들 스스로 매여 있었을 뿐입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렇게 자기 안에 유폐되어 있습니다. 유폐되어 있기 때문에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 걱정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울타리 쳐진 밖의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신 앞에 있기에 시인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만 결정하면 됩니다. 결국 자기 유폐의 경계, 사실상 자기 의의 교만을 허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보입니다. 새로운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야말로 입에 있고 마음에 있는 것을 제대로 깨닫고 시인하기만 하면 된다고 바울은 역설합니다.
여기서 ‘입’과 ‘마음’의 기능을 구분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병행적 수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믿음’과 ‘고백’을 구분하는 것 역시 부질없습니다. 이와 같은 수사는 예수를 그리스도 곧 주로 시인하면 된다는 뜻일 뿐입니다. 예수를 주로 섬긴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입니다. 예수를 주로 섬긴다는 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살겠다는 의지입니다. 그 예수가 부활한 예수라는 사실은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써 누리는 세계가 전적으로 새로운 현실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부활한 예수에 대한 믿음은 그렇게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기 의의 정당화 수단으로서 이전의 모든 경계를 무용지물로 만듭니다. 따라서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에 상관없이 사람은 누구나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완고한 세계는 더 이상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 의에 기반한 모든 세계의 정당성은 더 이상 인정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말씀(14~17)은 완고한 자기 전통에 매여 있는 유대인들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일깨웁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는데 어찌 그 이름을 부를 수 있겠느냐고 유대인들이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계속해서 구약성서를 인용해 말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15) 이미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의 뜻을 제대로 알았던들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변명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심판의 선언을 하기 위해 그렇게 장황하게 구약성서를 종횡무진해가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21)는 사실을 역설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은 없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집약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그 요체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차별도 용인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진실이 차별받던 이방인에게 복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민이라 자처한 유대인에게는 오히려 장해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렇게 차별을 용인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를 곡해하여 그 자리에 자기 의를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열정만 믿고 참된 지식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 임의로 기준을 설정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의로 둔갑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영영 구원에 이르지 못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종일 손을 내미시며 그들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손을 내미시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떤 경계도 설정하지 않고 어떤 자격도 요구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차별도 용인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예수 그리스도만큼 분명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 진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말씀의 요체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저마다 강고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소통의 능력을 상실하고 사회적 신뢰를 잃어버린 오늘의 교회에 더더욱 강력하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견해와 다르면 우선 이단으로 정죄하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의의 수호자일까요? 모든 사람의 평등권을 보장하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자기 의를 하나님의 의로 대체하는 교만함의 극치를 나타낼 뿐입니다. 건강한 시민사회와 소통하지 못하는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도 불경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교만이 하늘까지 치솟아 올라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한 듯한 교회의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이번 주간 한국 장로교의 주요 교단들이 총회를 엽니다. 이미 들려오는 슬픈 소식들이 있지만, 또 얼마나 많은 슬픈 소식들이 전해질지 두렵습니다.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시 28일(화)~29일(수) 이틀간 총회를 엽니다. 코로나 상황으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한 자리에 모이지 못하고 4개 교회에 분산하여 총회를 엽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와사회위원장 4년의 임기를 마무리하는 총회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공격을 받게 될지 각오하는 가운데 나섭니다. 공격당하는 일이 두렵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빌미로 독설을 내뿜는 일들이 벌어지는 사태가 안타깝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12) 바로 이 말씀의 진실 앞에 겸허하게 스스로를 돌아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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