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므비보셋과 짝의 정신 - 사무엘하 19:24~30[박광순 교우 / 유튜브]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22-09-18 16:06
조회
1007
2022년 9월 1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므비보셋과 짝의 정신
본문: 사무엘하 19:24~30
박광순 교우



■ 노란 민들레를 어떻게 만나는지요?

주위에 흐드러진 노란 민들레꽃을 어떻게 보고 만나는지요? 우린 어떤 입장, 위치, 환경에서 이 꽃들을 만나고 있나요? 개미, 벌과 나비, 위압적인 우리가 바라보는 민들레는 어떨까요? 우리가 보는 것 중에는 그 이면까지 미처 알지 못하는 것 투성이 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고, 오랫동안 보아 왔다는 이유로 ‘당연함’으로 치부해버리는데, 이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세상을 보는 것으로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그런 이야기를 므비보셋의 프리즘을 통해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만나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성경에서 만날 때면 늘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불편함을 느낍니다.

 

■ 본문내용

므비보셋은 다윗의 절친한 친구인 요나단의 아들이며, 사울의 손자입니다. 사무엘하 4장 4절을 보면, 요나단의 하나뿐인 아들 므비보셋은 다섯 살 때 요나단과 사울의 전사 소식을 들은 유모가 그를 안고 급히 도망치다 떨어뜨려 장애인(다리를 저는)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안정을 찾아갈 때쯤, 사무엘상 20:15에-”내가 죽은 다음에도 나의 집안과의 의리를 지켜달라.“는 요나단과의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키기 위해 사무엘하9:3절,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을 수소문해서 찾습니다.

사무엘하 9장 7절,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내가 너의 아버지 요나단을 생각해서 네게 은총을 베풀어주고 싶다. 너의 할아버지 사울 임금께서 가지고 계시던 토지를 너에게 모두 돌려주겠다. 그리고 너는 언제나 나의 식탁에서 함께 먹도록 하여라”합니다.

그러자 사무엘하 9장 8~9절에, 므비보셋은 엎드려 ‘이 종이 무엇이기에 죽은 개나 다름없는 저를 임금님께서 이렇게 돌보아주십니까?’한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이 가졌던 모든 것을 므비보셋에게 줍니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고, 다윗은 쫓기며 피난 갈(삼하 15:30), 그때 므비보셋의 하인 ‘시바’가 가득 먹을 것을 싣고 나타난다(삼하 16:1). 그리고 므비보셋의 하인 시바는 주인인 므비보셋을 모함하여 속였고, 다윗은 시바의 말을 그대로 믿어 므비보셋에게 주었던 모든 재산을 다 시바에게 넘겨줍니다(삼하 16:4).

그럼에도 압살롬이 죽은 후에 예루살렘에 돌아와 다시 므비보셋을 만난 다윗왕은, 삼무엘하 19장 24절에, 므비보셋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난 날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발도 씻지 않고 수염도 깍지 않고 옷도 빨아 입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자 삼무엘하 19장 30절에, 다윗은 시바와 밭을 나누라고 합니다. 이때 므비보셋은 왕께서 잘 돌아 오신 것만으로도 되었으니, 이제 시바가 전부를 차지한들 어떠냐고 모든 것을 양보합니다.

 

■ 우리의 관점-므비보셋의 마음

〇 므비보셋이라는 말은 “수치를 면한 자” 혹은 “부끄러움을 벗은 자” 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그를 찾아 부르기 전에는 수치를 가진 자였고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가던 사람으로, 그가 다윗 왕을 만난 후 신분이 달라짐으로 더 이상 그는 수치를 가진 자가 아니라고 해석합니다. 또한 므비보셋은 ‘은혜 입은 자’의 전형적 모델로 봅니다. 하지만 이는 다윗을 주류로 보는 사관 때문입니다. 왜 그가 성경에 등장하는 걸까요?

〇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당시의 장애인은-삼무엘하 5장 8절처럼 장애인은 은혜 베풀 수 없는 존재로, 왕궁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로 치부하였다. 당사자도 죽은 개나 다름없는 처지라고 자신을 고백합니다. 죽은 개는 무가치하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당당함으로 역모자로 몰릴 수 있는 여건 속에서도, 다윗을 지지하는 한결 같은 마음을 보이고, 조금도 욕심 없는 사람으로, 시대의 무가치한 존재 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 – 이는 한 존재로서의 ‘가치’에 대한 소중함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에 등장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〇 삼무엘상 20장 15절에 ‘내가 죽은 다음에도 나의 집안과의 의리 지켜달라는 그 의리를 다윗은 지킴으로 다윗의 의리는 왕급(?)의 의리임을. 그러나 똑같은 의리를, 아니 저의 눈으론 더한 환경에서 의리를 지킨 므비보셋의 의리는 시바급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〇 흔하지 않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의리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왜 그런 말이 나올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장애에 대한 이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햄릿>, <리어왕>, <맥베스> 등을 쓴 세계적 대문호, 셰익스피어(T. Shakespeare)는 손상을 가진 사람들이 차별과 편견 탓에 장애를 경험하는데, 이런 편견은 단지 개인 상호 간이 아니라 이 사회의 문화적 표현, 언어, 사회적 상징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장애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구성되는 상대적 개념입니다. 우리사회는 비장애인은 정의하지 않으면서 장애인을 정의하고, 이들에게 특별한 사회적 역할을 강제하기 때문에 장애인은 차별의 대상이 됩니다.

〇 우리나라 장애인복지법 제2조 장애인을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장애당사자로서 한 줄로 ‘차별 받기 때문에 장애인’이라 정의합니다. 휠체어를 타고, 목발을 짚고, 여러 유형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이 사회에 살 때 편의시설, 결혼, 직장 등 그 모든 것에서 기회와 결과의 균등과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즉 차별이 없다면 장애인이라 할 수 없겠지요.

〇 장애를 가진 사람을 의리가 없다는 말은 이렇듯 차별과 관련이 있습니다. 약자 특히 최약자인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위험한 단어가 ‘시혜적’이라는 어휘입니다. 시혜적이라는 말이 특히 약자들에게 통용되는데 그건 약자이기에 무엇이 필요할 것이라는, 그래서 그것을 주어야 한다는 일방성의 일방통행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무엇을 주어야 한다는, 당사자들이 느끼기에는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던져주는 일방통행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〇 므비보셋 그는 자신의 길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이 왜 다윗 왕을 따라가지 못했는지를 다윗에게 밝힙니다. 사무엘하 19장 26절,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났을 때 왕과 함께 떠나려고 나귀를 준비해 두었는데, 그의 종 시바가 그를 속이고 혼자 나귀를 타고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을 배반하지 않고 왕궁에 남아 다윗 왕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습니다. 그는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직분을 잘 알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렇듯 그는 장애라는 환경에서도 당당함을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〇 그는 주인의 고통에 온전히 동참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난 날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발도 씻지 않고 수염도 깍지 않고 옷도 빨아 입지 않고 그를 기다렸습니다. 이러한 므비보셋의 행동은 다윗이 행사했던 그 의리, 즉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변함없는 한결같은 마음, 조류에 편승하는 기회주의자가 아닌,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고 다윗을 사랑하는 자였다고 저는 애써 이 본문을 대할 때마다 그렇게 읽습니다.

〇좀 되었지만 제가 쓴 글 중에 ”짝을 만들어가는 짚신처럼“이라는 제목이 있는데 그것을 한 번 읽어드리는 것으로 강단에 선 의미로 가름하도록 하겠습니다.

 

짝을 만들어가는 짚신처럼

화장실 앞에서 아내와 마주쳤다. 그러자 대뜸 ‘꼭 그렇게 두 짝을 신고 다녀야 해?’한다. 화장실에 들어가며 실내화를 신으려 애쓰는, 아니 있는 힘을 다해 엄지발가락에 걸치려는 모습을 보았는가 보다. 이어 ‘뭘 꼭 그렇게 왼쪽을 신으려 애써. 그쪽은 땅에 닿지도 않잖아’한다. 너그러운 표정으로 받아야 하는지, 차별한다고 윽박질러야 하는지 참 딱한 상황이다.

거기다 한 마디 더 쏘아 붙인다. ‘발가락에 겨우 걸치는데 엄지가 마비되지 않아?’. 뭐 그러든 말든 꾹 참고 한참을 더듬거리다 왼발에 실내화를 꿰찬다. 오른발에 비해 크기며 길이, 두께까지 왼발은 한참 어린애다. 양쪽다리 길이가 같기라도 하면 그런대로 볼품사납지 않을 텐데, 왼쪽은 언제나 비교 바깥에 있다. 그 발에 신발을 신으려면 늘 손이가야 한다. 힘이 없고 짧아 손으로 발을 붙잡아 신기고 벗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목발 짚고 발을 집어 올려 신발을 신기는 것은 늘 줄타기다.

화장실은 실내화를 신지 않고 얼마든지 들어 갈 수 있도록 청소가 되어 있다. 그런데도 언제고 이렇게 실내화를 신으려 실랑이 하는 것은 길러진 습관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신지 않고 들어가는 것이 훨씬 편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고집하는 것은 오랜 시간 그렇게 형식을 갖추는 것이 생각과 마음의 틀로 굳어져 있어서일 게다. 다른 사람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똑같은 겉모양을 갖추는 것 말이다.

한쪽 다리가 짧고, 조그맣고, 힘이 없어 손으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다 보면 누구든 뭐 하러 신을 신느냐고 말할 수 있다. 당사자끼리도 휠체어를 타는 이들에게 땅에 한 번도 안 닿을 텐데 무슨 신발을, 그것도 힐까지 신느냐 농담할 때가 있다. 그런데 신겨봐야 신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을 왜 신느냐고 한다면. 또한 장애 때문에 땅에 닿을 일 별로 없다고 신발을 신지 않고 다닌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특징으로 자리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한 짝을 잃는 것이 아닐까?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이 있다. 짚신을 만들어 본 경험은 없지만 짚신을 만들 때 발 모양에 따라 양말처럼 오른쪽 왼쪽을 따로 만들지 않는다 한다. 그래서 짚신은 원래 왼발 오른발이 없단다. 그리고 손으로 만들기에 크기가 제각각이다. 대충 크기가 비슷하면 왼발 오른발 구분 없이 그냥 신는다. 그렇게 신다보면 짚신의 모양이 이리저리 움직여 발에 맞게 늘어날 곳은 늘어나고, 왼발 오른발 다르니까 거기에 맞춰 변한다. 그러다보면 짚신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짚신이 만나 짝을 이루고, 그 발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확연하게 구별되어 서로가 조화로운 짝을 이루는 것이다.

왼발처럼, 처음부터 장애가 심해 신발을 신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고 해 신발을 신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장애를 가졌든 아니든 우리 함께 살아야 한다는 짝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언제고 신지 않아도 되고, 약하니 너는 필요 없다는 강자의 논리에 복종하는 삶은 짝의 정신을 잃은 것이라면 틀린 말일까.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처럼 그렇게 작은 발, 힘없는 발에도 끈질기게 신기다보면. 그 발에 맞는 짚신이 나타나고, 서로가 구별되는 조화로운 짝이라고 맞장구쳐 줄 것이다.

뭘 꼭 두 짝을 신느냐 지청구하는 아내. 곁에서 늘 보고 느끼는 가장 가까운 친구요, 평생 짝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임에도 잠시 짝의 정신을 잃었나 보다. 남과 똑같기 위해 겉모양에 목숨 걸고 살아왔다면, 이젠 진정 짝의 정신을 위해 신발을 챙기는 것. ‘너 뭐 그러니’가 아니라, ‘그런 것, 참 좋아’하는 이야기들이 우리가 사는 곳곳에서 푸근푸근 들려온다면 더 즐거운 삶의 마당이 될 것만 같다.

오늘도 우리는 휠체어에 실려 가는 구두를, 한쪽 발에 매달려가는 신발을 용감하게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다. 왼발 오른발 구분 없이 신다보면 발에 맞게 늘어날 곳은 늘어나고, 발에 맞춰 변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게 드러냄으로, 또한 그 발에 들이는 짝 찾는 시간을 늘릴수록, 짝짝이에서 점점 더 잘 맞는 짝을 찾아가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