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누가 이웃이 되어 주는가? - 누가복음 10:25~37[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9-11 14:55
조회
3417
2022년 9월 1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누가 이웃이 되어 주는가?
본문: 누가복음 10:25~37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도 명료하여 이미 기록된 내용 이상의 어떤 해석도 필요 없어 보일 정도입니다.

예수님과 율법학자의 대화로 이뤄진 본문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영생하는 길에 관한 물음을 중심으로 한 것이요(25~28), 두 번째는 그 영생하는 길로서 이웃 사랑과 관련하여 이웃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29~37).

율법학자와 예수님의 대화는 긴장감을 갖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의도로 이야기를 건네고 있습니다.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속내는 과연 예수께서 율법을 아는지 떠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간파한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반문합니다. 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율법학자와 대결하고자 하는 태세로 반문한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구약의 말씀(신명 6:5; 레위 19:18)을 들어 자신 있게 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그 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면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율법학자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던 율법학자는 이번에는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에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대목에서 예수님과 율법학자의 대화는 두 번째 국면으로 전환되며, 비로소 중대한 격돌이 일어납니다. 율법학자가 자기의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확고한 답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바로 그 이웃들을 사랑하고 있기에 율법의 가르침에서 한 치도 벗어나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율법학자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이웃은 누구였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한 이웃은, 동족 곧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같은 뜻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범위가 어떻게 될까요?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이른바 정통 유대인들로 국한됩니다. 여기에 사마리아 사람이나 이방인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지극히 내향적이고 폐쇄적인 이웃 개념입니다. 레위기(19:34)는 명백히 이방인도 이웃으로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정결 관념에 입각하여 이웃의 범위를 그렇게 한정하였습니다. 바로 그 이웃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율법학자는 흠 잡을 데 없었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바로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는 율법학자에게 예수님께서는 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마침 그 길을 지나던 제사장이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제사장이라면 당시 백성의 지도자로서 가장 지체 높은 신분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레위인 역시 지나치고 맙니다. 레위인은 당시 제사장보다 낮은 지위에서 그 일을 돕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둘 다 종교적으로 신실하고 또한 자신의 맡은 임무에 성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고통에 처한 사람을 두고 지나칩니다. 사랑의 실천에 무력한 종교적 열성을 비판하고 있는 셈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는 그 자리에 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갑니다. 그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정성으로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까지 데려다 주며 돌봐 줄 것을 부탁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되돌아올 때 갚아 줄 테니 보살펴 달라고까지 부탁합니다. 자기가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고통을 겪는 모습에 연민을 느끼고 지극정성으로 마치 자신의 가족이나 이웃을 돌보듯 합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훼손한 것으로 간주된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보다 더 질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이웃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길을 갈 때에도 사마리아지역을 피해 갈 만큼 그들을 경원시했습니다. 그런 사마리아인이 선행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 자체가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입니다.
그 충격으로 멍 때리고 있을 율법학자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과연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묻습니다. 율법학자는 피할 길 없이 정답을 내놓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면 그렇게 자비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곧 영생을 누리를 길이라는 것입니다. 긴장감 넘친 대화는 이렇게 종결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확고한 자기 신념을 바탕으로 자기 나름의 의에 사로잡힌 율법학자의 세계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로 그를 인도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수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이 본문말씀은 빈번하게 인용되는 가운데 그 의미가 음미되어 왔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이야기를 하나의 우화(알레고리)로 삼아, 이야기를 구성하는 모든 소재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예컨대 강도만난 사람을 인간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로, 여관을 교회로 해석하는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여기서 이웃사랑을 온전히 실천한 사마리아 사람이 구원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고난 받는 민중의 신음과 한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결단을 이끌어낸다는 것에 착안한 것입니다. 이른바 민중의 메시아적 역할을 주목한 것입니다. 이로써 본문말씀의 깊은 뜻을 다시 새겨볼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줍니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이웃이 되느냐 하는 물음으로 그 시점을 고통 받는 사람에게 설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이웃의 범위는 매우 역동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그저 같은 집단으로서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서 선행을 행하는 사람으로 이웃의 범위를 확대한 것보다 더 근본적인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이웃은 정해져 있는 어떤 범주적 집단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고통의 호소에 응답하고 연대하는 역동적 관계를 일컫는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는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이웃이요, 그 손길을 내미는 사람에게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이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함으로써 이웃이 되는 관계입니다. 가깝다고 해서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라 관심을 기울이고 사랑하는 마음과 행동이 가까운 사람을 만드는 관계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본래 그 비유의 본래 자리에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대화상대 곧 청중을 율법학자들로 설정하고 있지만, 농경사회 안에서 농민의 생활세계와 의식을 공유하였던 예수님께서 일차적 청중으로 농민들을 대상으로 했다면 또 어떨까요? 실제로 예수님의 비유는 거의가 농사짓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많은 비유가 그 생활세계 안에 있는 사람을 일차적 청중으로 하였습니다. 유대의 농민 생활세계 안에서도 이 이야기는 상당히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농민사회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흘린 땀의 결과를 자기가 온전히 누리는 자족적인 생활세계를 추구했습니다. 이윤을 얻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생산해야 한다는 관념은 없었고 그저 자신들의 마을 공동체가 풍요를 누리면 족하다는 생각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것을 위협하는 외부 요인에 대해서는 극도의 경계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세계 안에서 내적 친밀감은 매우 높지만 외부에 대해서는 상당한 배타성을 띠기도 합니다. 그 생활세계 안에서 이웃의 범위는 매우 명확합니다. 친족공동체 또는 마을공동체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그 맥락에서 볼 때도 상당히 충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농민의 생활세계를 공유하고 그에 따른 의식을 지니고 있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그 의식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유대 농민이 들었을 때 갸우뚱거릴 만한 여러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유력자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로 예루살렘에 거주한 부재지주를 연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강도라면 당대에는 농촌사회에서 견디지 못하고 이탈한 무리들입니다. 농민들은 대체로 이들에게 동정적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틀림없이 상인이었습니다. 짐승에 실은 기름과 포도주는 당시 주요 상거래 품목이었습니다. 당대에 여관은 소란스럽고 난잡한 곳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여관에서 밤을 보내려면 유언서를 작성하라’는 이야기가 떠돌 정도였습니다. 이쯤 되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어리석은’ 사마리아 사람으로 간주될 만합니다.
이렇게 의혹을 받을 만한 요소들을 잔뜩 지니고 있는 이야기를 통해 이웃이 누구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면, 그리고 모든 비유가 그렇듯 이를 통해 하나님나라에 관해 말씀하고 계시다면, 이 이야기는 하나님나라의 전복적인 성격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모든 부정적인 편견을 뒤집어 없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세계에 대한 전망입니다. 율법의 요체로 여겨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현하는 길로서, 고통 받는 사람을 주목하고 그에 손길을 내미는 구체적 사랑의 행위가 펼쳐지는 세계에 대한 전망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이 이야기는 당시 종교적 전통, 소위 종교적 정통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사회의 기득권 집단을 향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웃을 자기와 가까운 사람으로만 한정하는 모든 이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이야기가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믿음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기만의 확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부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체감 여부에 달려 있으며, 우리의 믿음의 정도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체감 정도에 달려 있습니다. 나 아닌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수록 우리는 구원의 현실에 더 가까이 다가서 있고, 그만큼 희망 또한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신앙공동체란 결국 그 믿음을 공유하고 익히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가위 명절 휴가를 보내는 중 주일을 맞아 이 말씀을 음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족끼리 기쁨을 누리는 가운데 늘 그 기쁨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기도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자기만족적인 세계에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 이웃이 되어 주는 손길이 없어 곤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본문말씀이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의 길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이어지고 있는 점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고통 받는 이의 호소에 응하고 연대하는 것이야말로 그 길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 마땅한 도리를 따르는 사회가 되도록 기도하며 헌신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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