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인권은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3-07 17:18
조회
253
인권조례 등 지역인권보장체계 위기대응 긴급토론회: 국가인권위원회 대전사무소 주관
2023년 3월 7일(화) 13:30~15:30 / 충남내포혁신플랫폼 1층 다목적회의실
보편적 인권은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가?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 이사)
1. 충남학생인권조례와 더불어 충남인권조례가 또다시 위기에 놓였다. 폐지 조례안이 주민발의로 청구되어 있기 때문이다. 2007년 처음 발의된 차별금지법/평등법이 아직까지 제정되지 못한 까닭이 사실상 일부 기독교의 격렬한 반대 때문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보편적 인권을 더욱 확실하게 보장하고자 하는 인권체제의 형성이 기독교의 신앙을 명분으로 하는 반대의견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와 동일한 맥락에서 지역 인권보장체제 역시 위기를 겪고 있다.
2. 차별금지법안이 2007년 처음 발의되었을 때 그 반대세력은 일부 개신교에 한정되지 않았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 역시 주요 반대세력이었다. 그러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차별금지법 제정에 관한 논의 국면에서 그 입장은 거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다. 입장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을 대신해서 싸워주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일부 개신교가 성소수자 조항을 빌미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 사실상 어떤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 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특정한 차별의 용인은 사회 구성원 대다수에게 폭넓게 영향을 미치는 차별의 효과를 확대 온존시키고 있다.
3-1. 개신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늘 난처한 입장이기에 먼저 한 가지 분명한 사실부터 해명하고자 한다. 언뜻 보기에 차별금지법 및 지역의 인권조례 등을 반대하는 입장이 개신교 전체의 의견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와 다르다. 그것은 과잉 대표된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 개신교 전체의 의견이 아니라 일부 의견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그 입장이 과잉 대표된 것은 개신교 내의 의사결정구조와 관련되어 있다. 특정한 직분(목사, 장로)의 고연령층 남성이 공적 의사결정구조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무장한 열성적 신자들이 가세하여 그 목소리가 크게 들릴 뿐이다.
3-2. 국가인권위원회 등의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나 있거니와, 개신교계에서 진행된 일련의 여론조사 결과(특히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조사결과 등)를 보더라도 차별금지법과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이해에서 포용적 입장이 일관되게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일반적 여론조사 결과에 비해 유보적 입장 비율이 다소 높기는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반대보다는 찬성이 늘 높은 비율로 드러나고 있다. 과잉 대표된 목소리 때문에 묻혀 있을 뿐 조용한 다수의 입장은 우리 사회의 보편적 인권에 대한 인식과 크게 괴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이 점은 정치권과 교계 모두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4-1.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제기하고 싶은 물음은 이것이다. 보편적 인권의 요구가 과연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가? 신의 이름으로, 복음에 대한 믿음을 이유로 차별을 용인하는 것이 정당한가? 이에 대해 우리는 성서의 대의와 복음의 진실에 비추어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4-2.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보편적 인권의 요구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신학적 쟁점이 되어 왔다. 근대 계몽주의의 대두 및 정치적 혁명과 더불어 제기된 보편적 인권에 대해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처음부터 선뜻 수용하기 어려워했던 국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계몽주의 자체가 성서 및 신학의 유산을 재해석하는 측면을 지니고 있었고, 또한 종교개혁이 진정한 근대적 주체로서 개인의 발견을 초래한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인식이 분명해지는 가운데 보편적 인권의 요구는 복음의 진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점차 여겨지게 되었다. 여기에 <세계인권선언>의 탄생배경이 되었던 세계전쟁과 전체주의의 끔찍한 경험은 기독교 신학에도 결정적인 자극이 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 기독교 신학은 보편적 인권의 요구를 복음의 구체화로 확고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5-1. 성서의 창조론은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중요한 초점으로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연대 가운데서 책임적인 존재로서 하느님의 형상을 구현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신학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부여받은 하느님의 형상은 인권의 가장 근본이 되는 근거이다.
5-2. 그 하느님의 형상이 온전히 구현되지 않고 지배와 억압으로 갈등을 겪는 인간의 역사적 현실 가운데서, 성서는 하느님이 억압받는 백성을 선택하여 계약을 맺고 그들을 해방하였다고 증언한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생존과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인간사회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룬다는 성서의 근본정신은 율법과 예언의 핵심이 되었다.
5-3. 예수 그리스도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함으로써(마태 7:12, 19:19) 인간들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존엄한 존재가 되는 관계를 형성할 것을 가르쳤다. 나아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부정당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고자 하였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쳤는가 하면(마태 25:40), 스스로 죄인과 가난한 자, 과부와 고아, 억압당하는 이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그것이 복음의 진실이다.
5-4.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을 대표하는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을 역설하였다(갈라디아서 3:28~29). 사도 바울이 말한 인의론(認義論)은 일체의 자격이나 업적과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강조한 점에서 보편적 인권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6-1. 성서의 대의와 복음의 진실이 보편적 인권의 요구를 확실히 뒷받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기독교인들은 특정한 성서 구절을 인용하여 차별의 논리를 펼치고 있다. 특정한 행위를 문제시할 뿐 사람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고유한 인격의 표현으로서 행위를 문제시한다면 그것은 곧 사람 자체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6-2. 이 때 자주 인용되는 성서구절들이 특정한 성적 지향을 금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이것은 중요한 해석학적ㆍ신학적 물음을 뜻하는 것으로, 신중하게 접근하여야 한다. 무엇보다 성서의 대의에 비추어 보는 것이 당연한 전제이고, 특정한 본문의 역사적 맥락을 살피고, 더불어 오늘날 성숙한 윤리적 가치판단을 함께 고려하여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
6-3. 흔히 인용되는 많은 성구가 사실은 특정한 성적 지향과는 상관이 없다. 특정한 성행위를 문제시하는 구절이 없지는 않다(레위기 18:22, 로마서 1:18~32; 고린도전서 6:9~11). 그러나 그것은 전반적인 문맥과 당대의 상황을 고려해 해석해야 하고, 또한 오늘의 보편적인 윤리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성적 지향 개념이 존재하지도 않고, 현대의 과학적ㆍ의학적 지식이 확립되기 이전에 문제시된 특정한 성행위에 대한 언급은 고대의 종교적ㆍ윤리적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 전반적인 문맥을 고려하면 특정한 성적 지향을 문제시한다기보다는 성적 착취 또는 성적 폭력을 문제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다.
6-4.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었다고 해서 성서의 진실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듯 인간에 대한 이해와 성적 지향에 대한 이해의 변화가 곧 성서의 진실을 무효화하는 것도 아니다. 그 변화는 오히려 훨씬 풍요로운 성서의 세계를 향한 길이 될 수 있다.
7-1. 종교적 믿음의 체계는 그 자체로 자기완결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다른 가치체계와 접촉할 때 독단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가치체계와 접촉을 통해 오히려 스스로의 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7-2. 신앙을 사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고유한 책무이지만, 다른 구성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공동체 안에서 그 표현은 보편적 가치관과 소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독단은 사회에도 해악을 끼칠 뿐 아니라 종교 그 자체에도 자멸의 길이다.
2023년 3월 7일(화) 13:30~15:30 / 충남내포혁신플랫폼 1층 다목적회의실
보편적 인권은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가?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 이사)
1. 충남학생인권조례와 더불어 충남인권조례가 또다시 위기에 놓였다. 폐지 조례안이 주민발의로 청구되어 있기 때문이다. 2007년 처음 발의된 차별금지법/평등법이 아직까지 제정되지 못한 까닭이 사실상 일부 기독교의 격렬한 반대 때문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보편적 인권을 더욱 확실하게 보장하고자 하는 인권체제의 형성이 기독교의 신앙을 명분으로 하는 반대의견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와 동일한 맥락에서 지역 인권보장체제 역시 위기를 겪고 있다.
2. 차별금지법안이 2007년 처음 발의되었을 때 그 반대세력은 일부 개신교에 한정되지 않았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 역시 주요 반대세력이었다. 그러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차별금지법 제정에 관한 논의 국면에서 그 입장은 거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다. 입장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을 대신해서 싸워주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일부 개신교가 성소수자 조항을 빌미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 사실상 어떤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 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특정한 차별의 용인은 사회 구성원 대다수에게 폭넓게 영향을 미치는 차별의 효과를 확대 온존시키고 있다.
3-1. 개신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늘 난처한 입장이기에 먼저 한 가지 분명한 사실부터 해명하고자 한다. 언뜻 보기에 차별금지법 및 지역의 인권조례 등을 반대하는 입장이 개신교 전체의 의견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와 다르다. 그것은 과잉 대표된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 개신교 전체의 의견이 아니라 일부 의견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그 입장이 과잉 대표된 것은 개신교 내의 의사결정구조와 관련되어 있다. 특정한 직분(목사, 장로)의 고연령층 남성이 공적 의사결정구조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무장한 열성적 신자들이 가세하여 그 목소리가 크게 들릴 뿐이다.
3-2. 국가인권위원회 등의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나 있거니와, 개신교계에서 진행된 일련의 여론조사 결과(특히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조사결과 등)를 보더라도 차별금지법과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이해에서 포용적 입장이 일관되게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일반적 여론조사 결과에 비해 유보적 입장 비율이 다소 높기는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반대보다는 찬성이 늘 높은 비율로 드러나고 있다. 과잉 대표된 목소리 때문에 묻혀 있을 뿐 조용한 다수의 입장은 우리 사회의 보편적 인권에 대한 인식과 크게 괴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이 점은 정치권과 교계 모두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4-1.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제기하고 싶은 물음은 이것이다. 보편적 인권의 요구가 과연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가? 신의 이름으로, 복음에 대한 믿음을 이유로 차별을 용인하는 것이 정당한가? 이에 대해 우리는 성서의 대의와 복음의 진실에 비추어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4-2.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보편적 인권의 요구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신학적 쟁점이 되어 왔다. 근대 계몽주의의 대두 및 정치적 혁명과 더불어 제기된 보편적 인권에 대해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처음부터 선뜻 수용하기 어려워했던 국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계몽주의 자체가 성서 및 신학의 유산을 재해석하는 측면을 지니고 있었고, 또한 종교개혁이 진정한 근대적 주체로서 개인의 발견을 초래한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인식이 분명해지는 가운데 보편적 인권의 요구는 복음의 진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점차 여겨지게 되었다. 여기에 <세계인권선언>의 탄생배경이 되었던 세계전쟁과 전체주의의 끔찍한 경험은 기독교 신학에도 결정적인 자극이 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 기독교 신학은 보편적 인권의 요구를 복음의 구체화로 확고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5-1. 성서의 창조론은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중요한 초점으로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연대 가운데서 책임적인 존재로서 하느님의 형상을 구현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신학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부여받은 하느님의 형상은 인권의 가장 근본이 되는 근거이다.
5-2. 그 하느님의 형상이 온전히 구현되지 않고 지배와 억압으로 갈등을 겪는 인간의 역사적 현실 가운데서, 성서는 하느님이 억압받는 백성을 선택하여 계약을 맺고 그들을 해방하였다고 증언한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생존과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인간사회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룬다는 성서의 근본정신은 율법과 예언의 핵심이 되었다.
5-3. 예수 그리스도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함으로써(마태 7:12, 19:19) 인간들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존엄한 존재가 되는 관계를 형성할 것을 가르쳤다. 나아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부정당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고자 하였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쳤는가 하면(마태 25:40), 스스로 죄인과 가난한 자, 과부와 고아, 억압당하는 이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그것이 복음의 진실이다.
5-4.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을 대표하는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을 역설하였다(갈라디아서 3:28~29). 사도 바울이 말한 인의론(認義論)은 일체의 자격이나 업적과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강조한 점에서 보편적 인권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6-1. 성서의 대의와 복음의 진실이 보편적 인권의 요구를 확실히 뒷받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기독교인들은 특정한 성서 구절을 인용하여 차별의 논리를 펼치고 있다. 특정한 행위를 문제시할 뿐 사람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고유한 인격의 표현으로서 행위를 문제시한다면 그것은 곧 사람 자체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6-2. 이 때 자주 인용되는 성서구절들이 특정한 성적 지향을 금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이것은 중요한 해석학적ㆍ신학적 물음을 뜻하는 것으로, 신중하게 접근하여야 한다. 무엇보다 성서의 대의에 비추어 보는 것이 당연한 전제이고, 특정한 본문의 역사적 맥락을 살피고, 더불어 오늘날 성숙한 윤리적 가치판단을 함께 고려하여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
6-3. 흔히 인용되는 많은 성구가 사실은 특정한 성적 지향과는 상관이 없다. 특정한 성행위를 문제시하는 구절이 없지는 않다(레위기 18:22, 로마서 1:18~32; 고린도전서 6:9~11). 그러나 그것은 전반적인 문맥과 당대의 상황을 고려해 해석해야 하고, 또한 오늘의 보편적인 윤리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성적 지향 개념이 존재하지도 않고, 현대의 과학적ㆍ의학적 지식이 확립되기 이전에 문제시된 특정한 성행위에 대한 언급은 고대의 종교적ㆍ윤리적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 전반적인 문맥을 고려하면 특정한 성적 지향을 문제시한다기보다는 성적 착취 또는 성적 폭력을 문제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다.
6-4.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었다고 해서 성서의 진실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듯 인간에 대한 이해와 성적 지향에 대한 이해의 변화가 곧 성서의 진실을 무효화하는 것도 아니다. 그 변화는 오히려 훨씬 풍요로운 성서의 세계를 향한 길이 될 수 있다.
7-1. 종교적 믿음의 체계는 그 자체로 자기완결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다른 가치체계와 접촉할 때 독단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가치체계와 접촉을 통해 오히려 스스로의 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7-2. 신앙을 사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고유한 책무이지만, 다른 구성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공동체 안에서 그 표현은 보편적 가치관과 소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독단은 사회에도 해악을 끼칠 뿐 아니라 종교 그 자체에도 자멸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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