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차별 없는 세계를 향한 복음의 진실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2-27 12:07
조회
137
대전인권비상행동 [비상2023 집중인권강좌 두 번째]
2023년 2월 16일(목) 오후 7:00시 / 국가인권위원회 대전인권사무소 인권교육센터

차별 없는 세계를 향한 복음의 진실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NCCK인권센터 이사 / 전 NCCK정의평화위원장)


1. 신의 이름으로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나?

1-1. 차별금지법 제정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가 일부 개신교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2007년 처음 차별금지법안이 발의되었을 때 그 반대세력은 일부 개신교에 한정되지 않았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 역시 주요 반대세력이었다. 그러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차별금지법 제정에 관한 논의 국면에서 그 입장은 거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다. 입장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을 대신해서 싸워주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부 개신교가 성소수자 조항을 빌미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 사실상 어떤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 새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특정한 차별의 용인은 사회 구성원 대다수에게 폭넓게 영향을 미치는 차별의 효과를 확대 온존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1-2. 보편적 사랑의 구현을 목적으로 하는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과연 신의 이름으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이 가능할까? 신에 대한 믿음이 인간사회 의 정의와 권리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와 같은 의문부터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음은 심각한 해석학적ㆍ신학적 논란을 함축하고 있어 진지한 검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1-3. 언뜻 겉으로 보기에 혐오와 차별의 논리를 펼치는 기독교인들이 다수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와는 명백히 다르게 포용과 환대의 복음을 강조하고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련의 인식조사를 따르면, 오히려 후자의 입장을 견지하는 기독교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 사실은 신앙을 명분으로 혐오와 차별의 논리를 펼치는 입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과잉 대표된 그 입장이 어떻게 가능한지 새삼스러운 물음을 제기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것은 또 하나의 중대한 과제이기에 오늘 강의에서는 긴 설명은 생략한다. 오늘 강의는 보편적 인권의 의의와 더불어 그 누구든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기독교 복음의 진실을 분명히 하는 데 그 초점을 두고자 한다.


2. 보편적 인권에 대한 이해

2-1. 근대의 정치적 혁명과 함께 등장한 인권의 개념은 고대 민주주의의 이념을 근대 민주주의 이념으로 발전시키는 데서 핵심적인 다리 역할을 했다. 모든 인간이 존엄한 존재로서 평등하게 존중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인간적 이상으로서 인권은 인간들 상호간에 그 원칙을 지킬 수 있을 때 보장된다. 여기서 인권의 상호인정은 정치적 구성 행위가 되고, 그 행위는 본성상 민주적인 정치적 구성 행위가 된다. 사람들은 상호간에 권리를 인정하면서 집합적 정치적 주체로서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은 내적으로 필연적인 관계를 이룰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가치규범으로서 역할을 한다.
2-1. 현실의 제도로서 민주주의는 언제나 완벽할 수 없는 결함을 지니고 있다. 집합적인 정치적 주체를 적법하게 인정하는 제도 안에서 일부 구성원이 배제되거나 무시되는 결함이다. 여기에서 특정한 정치 공동체의 성원 내지는 시민의 권리와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보편적 권리로서 인권의 대립이 발생한다. 인권은 항상 이 지점에서 제기된다. 배제당하고 무시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에 대한 요구로서 인권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권은 현실에 존재하는 부당함을 드러내주며, 이 때 인권은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없는 사람들의 권리가 된다. 특정한 정치적 주체의 권리에 대항하여 모든 인간의 권리로서 제기되는 인권은 그 자체로서 보편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여기서 그 인권이 스스로 보편성을 자임한다고 해서 그것이 허구인 것은 아니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요구로 제기되는 인권은 기존의 특수한 집단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회적 관계의 재편을 요구하고 따라서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바로 이 점에서 보편적 인권에의 요구는 현실의 변화를 추동하는 규범적 효능을 갖고 있다.
2-3.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권 개념은 대략 세 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구체성을 확보해 왔다.
2-3-1. 제1세대 인권에 해당하는 시민적ㆍ정치적 권리로서 인권(자유권적 기본권)은 서구 계몽주의의 유산으로서, 봉건적 체제에 대항하는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기본 내용으로 하여 개인의 생명권, 종교와 의사표현의 자유, 그리고 재산권 등을 그 구체적 내용으로 하고 있다.
2-3-2. 제2세대 인권에 해당하는 경제적ㆍ사회적 권리로서의 인권(사회권적 기본권)의 확장은 19세기 산업혁명과 노동운동의 성장으로 이뤄졌다. 계몽주의 이래 자유주의적 인권의 범주에서 배제되었던 무산계급, 곧 노동계급은 자신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없이는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의 격차를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며 운동을 펼쳤다. 이로부터 자유를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사회적ㆍ물질적 조건의 보장을 요구하는 경제적ㆍ사회적 권리 의식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존엄한 사회적 삶을 평균적으로 영위하기 위한 생존과 생활 수단을 확보하는 데 그 핵심이 있으며, 이는 경제적 평등, 제반 노동의 권리, 교육의 권리, 어린이 및 청소년 복지, 기타 사회복지 권리 등을 구체적 내용으로 하고 있다.
2-3-3. 제3세대 인권은 문화적 및 연대의 권리로서, 그것은 애초 소수 민족의 자결권에 대한 요구에서 비롯되어 오늘날 보다 광범위한 소수집단들, 예컨대 소수 인종, 원주민의 권리에 대한 요구들을 함축하게 되었다.
2-3-4. 그러나 인권의 목록이 이상 예시한 것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지속되는 역사적 과정 가운데서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채 배제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고, 이에 따라 정당한 권리에 대한 요구의 목록 또한 계속 추가되고 있다.


3. 인권의 신학적 수용

3-1. 기독교 신학이 근대 역사에서 등장한 인권의 가치를 처음부터 곧바로 수용하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프랑스혁명 등 반종교적 성격을 띤 근대의 정치적 혁명과 그로부터 제기된 근대적 가치들을 선뜻 인정하기 어려웠다. 종교개혁이 결과적으로 근대적 인권의 지평을 여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개신교 역시 근대적 정치혁명을 통해 등장한 세속적 인권 개념을 곧바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프랑스혁명에 이어진 공포정치와 나폴레옹의 지배 현상은 혁명과 그 가치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그 현상은 하느님에 대항하는 자율정신의 오만한 반역의 결과로 인식되었다.
3-2. 그러나 그 어두운 일면 때문에 그로부터 제기된 인권과 여러 근대적 가치들이 전적으로 부정당할 수는 없었다. 기독교적 배경을 가진 많은 계몽사상가들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학은 점차 인권 등 근대적 가치들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인권에 대한 태도가 결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독일의 나치 국가 및 소련의 스탈린 국가의 반교회적ㆍ반인권적 경험 때문이었다. 기독교가 인권의 문제를 중요한 신학적 문제로 인식한 것은 세계적 차원에서 인권 규범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결국 국제연합주도의 「세계인권선언」이 이뤄지게 된 것과 같은 배경에서였다. 에큐메니칼운동 진영을 중심으로 인권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이뤄지기 시작한 이래 오늘날 기독교 신학에서 인권의 문제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과제로 인정되고 있다.
3-3. 신학적 차원에서 인권은 기본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안에서 이해된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지평 안에서 이해되는 신학적 인권의 개념은 성서의 여러 전거들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성서가 현대적 의미에서 인권을 제창한 것은 아니지만, 성서의 핵심 메시지는 오늘날 인권 개념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원천 가운데 하나이다.


4. 성서의 진실, 복음의 진실

4-1. 구약성서의 창조론은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중요한 초점으로 하고 있다. 하느님에 의해 피조된 존재로서 하느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은 창조신학의 맥락에서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먼저 ‘존재론적 차이’를 지니고 있고, 다음으로 ‘인격적 상응’의 관계에 있다. 존재론적 차이의 측면은 인간과 나머지 피조물들이 존재상 동일한 지위를 갖고 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피조된 세계 안에서 인간 홀로 자족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인격적 상응의 측면은 피조된 실존성을 지닌 인간이 책임을 지고 성숙해지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책임적인 존재로서 창조주의 위임을 받아 활동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형상을 구현하며 창조주의 요구에 응답한다. 창조신학이 말하는 이 두 가지 측면은 이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적절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피조물들과 연대 가운데서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 가운데서 책임적인 존재로서 하느님의 형상을 구현한다. 신학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부여받은 하느님의 형상은 인권의 가장 근본이 되는 근거이다.
4-2. 그러나 역사적 현실에서 창조신학이 말하는 하느님의 형상은 온전히 구현되지 않았다. 창조신학에 의하면 하느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임무는 피조물들과의 공생관계를 형성하고 피조세계를 보존하는 데 있다. 창조의 질서 안에서 각각의 생명체에게 각각의 생활공간이 할당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뭍에 사는 다른 동물들과 인간의 생활공간이 겹치는 데서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그 갈등은 규율되지 못했고 인간은 공생관계를 넘어 다른 피조세계를 지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지배의 욕망은 다른 인간에 대한 지배의 욕망으로 확대되었다. 창세기가 전하는 형제살해 사건(창세 4:1~16)은 그 지배의 욕망으로 인간들 사이의 관계마저 파괴되었다는 통찰을 담고 있고, 바벨탑 이야기(창세 11:1~9)는 그 지배의 욕망이 마침내 인간 자신을 신격화하고자 하는 데 이르렀다는 것을 통찰하고 있다. 결국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의 연대 속에서 삶을 온전히 일구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모두가 동등하게 책임적 존재로 삶을 영위하지도 못했다. 인간사회 안에 억압과 불평등이 생겨났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4-3. 성서는, 이런 역사적 현실 한 가운데서 하느님이 억압받는 백성을 선택하여 계약을 맺고 그들을 해방하였다고 선포한다.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억압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켰고, 그 백성과 계약을 맺었다. 이것은 가장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생존과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인간사회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룬다는 성서의 근본정신을 함축하고 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계약은 구체적으로 가난한 자(출애 23:6, 신명 15: 7~11), 외국인(출애 21:21~24), 나그네(신명 10:19), 과부와 고아(신명 24:19~22), 무산자(신명 14:27), 긴급보호대상자(레위 25:25, 신명 15:1~18) 등을 보살피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4-4. 하느님이 인간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느님 앞에 선 주체로서 인간과 그 인간의 삶을 긍정하는 성서의 정신은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성육신 사건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성육신 사건은 하느님이 몸소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으로 구체화되었다. 하느님이 인간과 동일시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의 삶을 긍정하고 그 삶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온전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훼손된 하느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한 인간으로서(로마 5:14 이하), 죄 가운데 있는 인간들, 곧 하느님의 형상을 훼손당한 사람들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함으로써(마태 7:12, 19:19) 인간들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존엄한 존재가 되는 관계를 형성할 것을 가르쳤다. 나아가 예수는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부정당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고자 하였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쳤는가 하면(마태 25:40), 스스로 죄인과 가난한 자, 과부와 고아, 억압당하는 이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4-5.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른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은 보편적 인권의 논리적 근거를 더욱 분명하게 확립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을 역설하였다(갈라 3:28~29). 그 가르침이 보편적 인권의 근거를 확고히 한 것은, 그것이 인의론(認義論)에 근거한 까닭이다.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인정된다는 인의론의 핵심 요체는 일체의 업적주의를 배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 또는 업적에 의해 어떤 성원의 자격이 부여되는 사회적 질서 안에서는 항상 배제된 자들이 발생한다. 인의론은 그 현실적인 원리를 부정하고 있다. 이것은 가난한 자와 배제된 자의 권리를 옹호해온 성서적 관점이 단순히 시혜적 관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 인권의 확고한 신학적 근거가 된다.
4-6. 이상의 논거에 비추어볼 때 신학적 인권 개념은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현대적 인권 개념과 곧바로 상통한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엄성을 인정받고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현대적 인권 개념은 성서의 신학적 인권 개념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된다. 물론 인간 자체를 최종적 목적으로 삼는 현대적 인권 개념에 비해 신학적 인권 개념은 그것을 뛰어넘는 신적 근거를 전제한다. 신적 근거를 전제하는 신학적 인권 개념은, 인간 자체를 최종적인 목적으로 하는 현대적 인권 개념이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다차원적 측면을 충분히 고려할 수 없는 한계와 함께 목적으로서 인간의 삶을 지탱시켜 주는 당대의 여러 가치들을 절대화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한계를 지니는 데 반해, 그 한계를 넘어 보다 고양된 인권의 지평을 열어 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 성서를 근거로 하는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과연 정당한가?

5-1. 일부 기독교계에서는 성서를 근거로 하여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특정한 성적 지향을 정죄하며 반대하고 있다. 과연 성서를 근거로 하여 성적 차별을 주장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이는 비단 동성애 등 특정한 성적 지향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성서의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함축한다. 다음에서 살펴보게 될 성서 본문은 흔히 동성애를 부정하는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본문들이지만, 과연 그렇게 오용되는 것이 정당할까?
5-2. 창세기 1:27~28; 2:18~25의 본문은 인류 첫 남녀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로, 남녀를 축복한 것이 특정한 성적 지향을 정죄하는 것과는 상관없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서로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이뤄지는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다.
5-3.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 그리고 그와 유사한 사사기 19장의 이야기는, 그 도시들에 동성애가 횡행했고 그것이 타락한 도시의 핵심적 범죄였다는 것을 증언하는 본문으로 간주되지만, 사실은 그 도시들의 핵심적 범죄는 손님을 ‘환대’하지 않은 것이었다는 것을 증언해 줄 뿐이다. 소돔의 죄가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은 예수의 말씀(마태 10:14~15)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5-4. 레위기 18장 이하 성결법의 성관계에 관한 규정 가운데 특히 18:22은 동성간의 성행위를 금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단 한 구절이라도 성서가 금지하고 있으니 그것은 곧 성서가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할까? 만일 그렇게 봐야 한다면 예컨대 각종 음식물에 관한 규정과 사제의 자격에 관한 각종 규정들이 오늘날 그대로 준수되지 않은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성적 지향에 관한 현대의 과학적ㆍ의학적 인식이 없는 가운데 형성된 고대적 견해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굳이 문자적으로 엄밀하게 새겨보더라도 망측한 성행위의 한 형태를 문제시하는 것일 뿐 성적 지향을 문제시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5-5. 신명기 23:17~18; 열왕기상 14:24; 15:12; 22:46; 열왕기하 23:7의 성매매 금지 내지는 폐지에 관한 증언은, 당시 가나안 풍요종교/다산종교에서 행해지던 성창(聖娼)제도의 금지를 말하는 것일 뿐 동성애와는 상관없다.
5-6. 로마서 1:18~32에서 ‘사악함과 부당함’을 말하고 있는 대목에서 사도 바울이 오늘날 ‘동성애’라 불리는 현상을 왜곡된 인간관계의 한 예로 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문맥에서 볼 때 이 구절은 이성 관계까지 포함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부적절한 인간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동성애만을 정죄하려는 초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 역시 현대의 과학적ㆍ의학적 인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어쨌든 바울 서신의 전반적 맥락에 비춰볼 때 바울은 ‘성적 착취’를 더 문제시하고 있다.
6-7. 고린도전서 6:9~11의 ‘부정한 자’로 언급된 ‘탐색하는 자’(남창노릇을 하는 자?, Malakoi), ‘남색하는 자’(동성연애를 하는 자?, Arsenokoitai)는 정확히 어떤 사람을 말하는지 논란거리이다. 당대에 오늘날 통용되는 의미에서 성적 지향의 하나로서 ‘동성애’ 개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여기에 등장한 단어의 용례도 확인하기 어렵다. 말라코이는 참조할 만한 용례로서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세례 요한을 두고 말할 때 사용한 경우가 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마태 11:8; 누가 7:25). 말라코이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마태) 또는 ‘비단옷을 입은 사람’(누가)로 번역되고 있다. 아르세노코타이는 성서 안팎에서 그 용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그 개념이 사람이라는 뜻의 ‘아르센’(αρσην)과 ‘침대’라는 뜻의 ‘코이토스’(κοιτος)가 합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직역하자면 ‘침대의 남자’라는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또는 ‘케이마이’(κειμαι), 곧 ‘옆으로 눕다’라는 뜻을 지닌 개념에서 유래하는 ‘코이테’(κοιτη)가 결합한 것으로 보면, ‘옆으로 누운 남자’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이 동성애와 관련되어 있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사회적 맥락상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일이 흔했고, 문맥상 성적 방종 행위와 관련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는 점을 감안해 그 뜻을 헤아릴 수밖에 없다. 바울은 만연해 있는 성적 방종, 성적 관계의 유해성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만족적인 쾌락의 도구일 뿐인 성적 관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상대를 도구화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몸을 망치는 일을 문제시한 것이다.
6-8. 에베소서 5:33의 이상적 결혼관계에 관한 언급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부부관계를 말하고 있을 뿐 동성애와는 상관없다.
6-9. 유다서 1:7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언급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를 ‘동성애’로 한정해서 이해해야 이 구절도 그렇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를 정죄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구절 역시 그에 대해 정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6-10. 결국 성서가 확고하게 동성애를 정죄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특별히 예언자나 예수에게서는 동성애를 정죄하는 말이 단 한마디도 없다. 동성애를 문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반적인 문맥과 당대의 상황을 고려해 해석해야 하고, 또한 오늘의 보편적인 윤리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


6. 기독교 신앙과 사회적 책임

6-1. 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신앙의 내적 요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에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한 그 책임을 성실히 감당하여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이 세상 만물 가운데 함께 하시며 사랑하시는 백성들 가운데서 그 뜻을 펼치신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특히 지상에서 삶을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믿음은 세상 한 복판에서 그 책임적 행위를 더욱 분명하게 요청하는 근거이다.
6-2.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의 그 책임적 행위는 근대 이후 확립된 정교분리의 원칙을 따라야 하는 요구를 받고 있다. 이 원칙은 종교인의 정치적 참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종교화 또는 종교의 정치화를 배제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곧 정치적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하거나 간섭하는 행위를 배제하는 한편 종교가 정치권력에 기대어 특권적 지위를 향유하는 것을 배제해야 한다는 뜻을 지닌다. 그것은 정치와 종교의 자율성을 인정함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한편 배타적 세계관에 좌우되지 않는 투명한 민주적 헌정질서를 지향하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 종교인의 신앙의 따른 정치적 참여와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6-3.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은 근원적으로 신앙의 요청에서 비롯되고 있지만, 동시에 오늘날 민주적 헌정질서가 추구하는 정교분리의 취지에 따라 규율 받는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과 그 표현방식은 신앙의 요청에 부합하는 동시에 오늘날 국가사회를 구성하는 보편적 인권의 요구, 그리고 민주주의적 가치와 그 소통방식에 부합하여야 한다. 이는 기독교인만의 세계관적 독단에 따라 그 입장을 개진하는 것을 지양하고 각기 다른 세계관을 지닌 사회 구성원을 존중하고 그 가운데서 소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입장을 개진하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의 입장은 신앙이 그 근거가 되지만 그것이 사회구성원들에 소통 가능한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의 요청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의 요청을 당대의 역사·문화적 환경 가운데서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6-4. 이를 위해서는 복음이 펼쳐져야 할 장으로서 세계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당대 사람들이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공감의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이 언제나 당대의 현실 가운데서 구체화되고 육화되어온 역사를 환기하여야 한다. 복음의 그 육화과정을 외면할 때 교회는 독단에 빠질 수밖에 없다. 교회가 국가권력과 결탁되어 있는 조건에서라면 그 독단의 파괴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국가권력과 교회가 분리된 조건에서는 교회의 신뢰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고 결국은 사회적 영향력 자체를 소멸시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는 더욱 절박하게 당대의 사람들이 어떤 삶의 조건에 처해 있는지, 그 조건 안에서 어떤 삶을 지향하는지 헤아리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소통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것이 교회의 급선무이다.
6-5. 또 다른 한편 교회는 다종교 사회 상황을 유의해야 한다. 어떤 특정 종교가 국교의 지위를 가짐으로써 외부적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있고 시민사회 안에서 각기 스스로의 신뢰도를 높여야 하는 조건에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 믿음의 체계는 그 자체로 자기완결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다른 가치제계와 접촉할 때 독단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가치체계와 접촉을 통해 오히려 스스로의 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종교간의 상호존중과 협력의 태도는 스스로의 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사회적 신뢰를 높이는 길이 된다. 배타적 진리 주장을 외치는 종교보다는 포용력을 지닌 종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높은 현실을 유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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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