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인공지능(AI)·디지털 시대 교회와 목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1-29 21:34
조회
105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동문회 백양세미나 / 연세신학인의 밤
2024년 1월 29일(월) 오후 3~6시 / 연세대학교 원두우신학관

인공지능(AI)·디지털 시대 교회와 목회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기독교윤리학·민중신학)

1. 시작하는 말

1-1. ‘디지털 시대’라는 화두가 회자된 것은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 이미 1990년대 어간부터 회자되기 시작하였으니 제법 오래된 화두이다. 오늘 그 화두가 새삼 문제시되는 것은 그 전개 양상이 급진전 되고 있기 때문이다. 3차 산업혁명을 넘어 4차 산업혁명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그 변화는 질적 변화의 양상을 띠고 있다. 디지털 매체의 변화는 ‘메타버스(Metaverse)’의 세계로 이어졌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여기에 ‘인공지능(AI)’이 결합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그 의미상 ‘디지털 시대’로 포괄해도 좋으나, 제목에 굳이 ‘인공지능(AI)’를 덧붙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1-2. 신학적 차원에서 디지털 시대가 함축하는 여러 양상은 매우 심각한 성찰의 과제를 제기한다. 곧 디지털 매체의 변화에 동반되는 소통방식의 변화, 메타버스로 상징되는 가상 현실 또는 증강 현실과 실제 세계와의 관계,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한 인간 정체성(‘포스트 휴먼’ 또는 ‘트랜스 휴먼’)의 문제 등은 윤리적이며 신학적인 성찰의 과제가 된다. 이미 그 신학적 성찰의 시도가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1-3. 주어진 발제가 의미 있으려면, 이미 이뤄진 신학적 성찰에 더해 새로운 문제 제기와 더불어 창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연구자에게 그와 같이 의미 있는 과제수행이 불가하다면 사양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더욱이 윤리학 전공자로서 마땅히 다뤄봄 직한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감당할 형편이 안 된다면 사양하는 것이 ‘체면’이라도 지킬 요량이 된다. 애초 발제의 과제가 떨어진 시점상 도저히 새롭게 연구할 시간 확보 자체가 불가한 상황이었다. 스스로 접근하기 쉬운 주제로 바꾸지 않는 한 사양하고 더 적합한 이에게 부탁하는 것이 마땅한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제를 맡게 된 사연은 우선 ‘목회적 접근’에 대한 요청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목회 경험을 기초로 한 성찰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과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한 이 자리를 준비해야 하는 처지이기도 하니, 단기간에 다른 누군가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이의 변명이다.
1-4. 돌이켜보건대, 공적 자리에서 ‘연구자’로서 여러 주제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는 많았지만 ‘목회자’로서 목회 경험을 이야기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목회자로서 기대할 것이 없고 연구자로서 몫에 충실하라는 의미였을까? 지난해 처음으로 한신대학교에서 ‘설교’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공적인 자리에서 목회의 한 단면을 들추어내어 성찰할 기회는 이번이 두 번째인 셈이다.
1-5. 사정이 그러하니, 이 발제의 접근 방식은 디지털 시대가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목회적 경험을 토대로 하여 성찰하면서 의미 있는 물음을 던지는 방식이 될 것이다. 현상을 전반적으로 조망하면서 그 현상을 포착할 수 있는 개념들을 연결하여 논리적 궤적을 구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목회 현장에서 경험하는 현상들을 되돌아보며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다. 그야말로 담담한 이야기 방식이 될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신학적·윤리적 과제를 제시할 수 있다면, 덤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더불어 스스로에게는 향후 본격적인 연구를 위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2. 과학기술의 향유 또는 규율

2-1. 디지털 시대란 과학기술 시대 가운데 최근의 한 국면에 해당한다. 이는 인류가 이미 오래 전에 진입한 과학기술 시대의 맥락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2-2. 오늘날 과학과 기술은 ‘과학기술학(STS: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이라고 통칭할 만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 긴밀한 관계는, 16-17세기 과학혁명으로 근대과학이 탄생하고, 이후 18-19세기 기술혁명이 초래한 산업혁명 이래 20세기에 이르러 과학과 기술이 융합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 일련의 과정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고, 인류 문명 자체의 성격을 결정지었다. 인간의 지적 능력과 욕망은 결코 그 이전의 세계로 돌이키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은 생물학적 진화의 궤도를 벗어났다고 할 만큼 그 눈부신 성과를 지금 향유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으로 이뤄진 세계를 이미 몇 세기에 걸쳐 경험하고 있는 만큼 그 명암 또한 비교적 분명하다.
2-3. 과학기술의 발전은 명백히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능력의 한계를 부단히 확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개별적 인간의 한계를 확장하는 효과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오는 밝은 측면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2-4. 그러나 동시에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양상이 펼쳐질 때마다 부작용 또한 동반되어 왔다.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전에 따른 새로운 기술의 실용화는 생활양식을 급격하게 변화시킴으로써 그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향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소외현상을 발생시킨다. 개인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소외 현상은 가벼운 것일 수도 있다. 그 향유를 거부하는 것은 때때로 적극적인 의미에서 개인적 선택일 수도 있다. 심각한 문제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거나 자연을 훼손함으로써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와 삶의 터전 자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지니는 어두운 측면에 해당한다.
2-5.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으로 인류 문명은 질적 비약을 가져왔고, 그 덕분에 인간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니는 어두운 측면 때문에 언제나 그에 대한 규율의 문제가 제기된다. 더욱이 오늘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자본의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거대과학(big science)’ 또는 ‘거대기술(big technology)’의 등장은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본과 권력의 집중 현상을 강화하여 사회적 관계, 나아가 인류 공동체를 심각하게 왜곡시킬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는 과학기술이 어떤 사회적 관계, 자연과의 관계 안에서 활용되어야 하는가 문제를 제기한다. 새로운 과학기술이 상용화되었을 때 기술 그 자체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것이 어떤 조건 안에서 활용되어야 하는지 헤아리는 과제가 중요한 까닭이다.
2-6. 과학기술 시대의 명암을 새삼 확인하는 것은, 그 한 국면인 디지털 시대 역시 큰 맥락에서 같은 형편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결국 어떤 사회적 관계 또는 생태적 관계를 지향하느냐, 그 지향 가운데 어떤 생활방식을 취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주어진 과제에 접근하는 기본적인 입장이다.

3. 새로운 기술 환경과 교회 목회의 실제 – 천안살림교회의 경우

3-1. 교회 현장에서의 목회적 경험을 기초로 접근하겠다고 하였으니, 먼저 간략히 주제와 관련된 경험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3-2-1. 새천년 첫 주일(2000.1.2.)에 시작한 천안살림교회는 먼저 지역사회에 자리 잡으려는 지향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또한 이미 널리 활용되고 있는 디지털 매체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디지털 시대 이전의 유산이라고 할 것이 없는 조건이었으니 디지털 매체의 환경에 친화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실제 공동체를 기반으로 디지털 매체 환경을 활용하고자 한 것이지 가상 현실에 공동체를 세우려는 것은 아니었다.
3-2-2. 첫 시도는 홈페이지를 개설하는 것이었다. 교회를 시작한 지 1년만에 홈페이지를 개설하였다(2001.2.18.). 첫 홈페이지는 독자적인 것은 아니었고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홈페이지에 별도의 게시판을 운영하는 형태였다. 디지털 셋방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소통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독자적으로 본격적 홈페이지를 연 것은 2005년 7월 24일이었다. 이때 홈페이지 개념은 ‘교회 같지 않은 교회의 홈페이지’였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2015년 9월에 전면적인 재편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독자적인 홈페이지를 개설하고서는 교회당을 지은 것(교회건축은 2016년 5월)만큼 기뻐했던 기억이 새롭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초기에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여러 SNS 소통방식이 활발해진 최근에는 커뮤니케이션 수단보다는 정보저장 공간이자 교회를 안내하는 길잡이로서 역할이 두드러진다. 인공지능(AI) 시대 무방비 상태로 열려 있는 정보들에 대해 염려할 정도(?)로 상당한 자료가 축적되었다. 교회의 초신자 거의 대부분이 홈페이지를 통해 교회를 찾고 있다. 덕분에 교인들의 지역 범위가 상당히 넓은 편이다.
3-2-3. 처음부터 교회 헌금도 온라인 입금을 장려하였다. 이 때문에 ‘이상한 교회’라는 말도 들었지만, 뜻밖에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맞이하면서 온라인 헌금의 위력을 확인하게 되었다. 대면 예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헌금에 대한 별도의 안내나 대비가 필요 없었다. 물론 대면 예배가 불가했던 상황이 헌금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상대적으로 영향이 크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3-3-1. 모두가 경험한 바와 같이,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맞이하며 디지털 매체를 활용한 소통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전적인 비대면 상황에서는 예배의 내용을 미리 준비하여 홈페이지를 통해 공유하였다. 제한된 인원으로 간헐적 대면 예배가 가능해진 팬데믹 1년차인 2020년 연말부터는 유튜브 실시간 중계를 개시하였고, 이후 지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3-3-2. 팬데믹 상황에서는 줌 회의를 시도하기도 하였고, SNS(주로 카톡)를 통한 회의와 일상적 소통이 활발해졌다. 현재는 줌 회의는 거의 없고, 카톡을 통한 회의는 종종 있으며, 일상적 공지와 소통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3-3-3. 팬데믹 상황이 전개되면서 ‘흩어지는 교회’의 가능성을 예견하였다(CBS 뉴스 파워인터뷰, 2020.5.6.). 현실적으로 원거리 소통은 물론 빈번하고 자유로운 소통 등의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 덕분에 지역의 경계를 넘는 새로운 연대를 체험하기도 하였다. 구민교회(김거성 목사)와 천안살림교회의 유대와 연합예배(2023.3.19.)는 그 한 예이다. 그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팬데믹 상황은 두말할 것 없이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내 주었다. 진정한 커뮤니케이션 또는 공동체의 의미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직접적인 대면이 아닌 온라인 소통방식으로는 공동체 구성원 전반을 아우르지 못하는 한계가 있고, 온라인 소통방식 자체에도 한계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커뮤니케이션에서 실제로 언어 자체의 비중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예견된 상황이었다. 또한 예배실황 중계는 일방적 소통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로 인해 교인들이 공동체의 주체로서보다는 마치 ‘관객’과 같이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공동체의 구심성보다는 원심성이 강화되는 양상도 나타난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기대되었던 ‘흩어지는 교회’의 이상과는 괴리된 현실이다.
3-3-4. 코로나 팬데믹 상황 가운데서 교회학교와 소그룹 모임은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었다. 그 가운데 청년들만 예외적으로 활발히 움직인 것은 다행이었으며, 온라인 예배를 가능하게 한 것도 청년들의 헌신 몫이 크다. 그 동인이 무엇인지는 좀 따져봐야 할 것 같다.
3-3-5. 코로나 팬데믹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이전 예배 인원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3-4.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메타버스’ 또는 ‘인공지능(AI)’ 활용 문제는 아직 교회 생활에 현실적으로 체감되는 바 없다. 그러나 목회적 차원에서 그 활용과 효과에 대해서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양 측면에서 숙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4. 메타버스, 인공지능, 그리고 사회와 교회

4-1. 메타버스와 인공지능의 등장은 기존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놀라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 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른바 디지털 시대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기술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그 놀라운 가능성의 측면이 도드라지게 보인다. 그 놀라운 과학기술의 성과가 펼쳐지는 환경 가운데서 이를 어떻게 향유할 것인지 헤아리는 것은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교회의 입장에서 신앙은 어떻게 재구성하며 목회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모색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인공지능이 교회 현장에서 어떤 파급 효과를 띠는지는 아직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메타버스는 부분적으로 이미 교회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고, 전적으로 메타버스형 교회(예> Life.Church)도 등장하였다.
4-2-1. 그러나 메타버스와 인공지능의 상용화는 동시에 여러 문제를 동반하고 있는 점을 쉽사리 간과할 수 없다. 그 기술의 활용 그 자체의 맥락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물론 거시적 맥락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4-2-2. 기술의 활용 그 자체의 맥락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무엇일까?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서 과연 가상 현실 또는 증강 현실이 실제 현실을 보완하는 긍정적인 역할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 현실의 관계를 약화시키거나 왜곡시키는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가상 현실 또는 증강 현실에 참여하는 주체의 왜곡을 동반하기도 한다. 가상 현실에 몰입한 이들의 중독 현상도 간과할 수 없다. 만일 실제 현실과 상관없는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만족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환상에 의존하여 저 천당을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4-2-3. 사회 전반의 거시적 맥락에서 보자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그 기술이 상용화되는 상황을 전제로 여러 측면에서 윤리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급속도로 진전되는 기술의 응용은 그 윤리적 대안의 수립보다 앞서 사회 전반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안고 있다. 특별히 인공지능의 상용화는 산업구조의 재편과 더불어 직업구조의 재편을 가속화할 수 있다. 선진국 60%의 일자리가 인공지능에 노출되어 있고 그 절반은 부정적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이하 관련 내용 <한겨레신문>, 2024.1.22. 19면 기사 참조). 그 노출의 정도는 전문적 지식을 위주로 하는 고숙련 직업군이 높은 반면 공감과 감성을 바탕으로 하는 관계지향형 직업군이 낮은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이른바 ‘스템(STEM: 과학·기술·공학·수학)’ 전공 선호를 경고하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Christopher Pissarides). 인공지능의 상용화로 일부 일자리는 소멸하는 반면 더 많은 또 다른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 예견되기는 하지만, 기왕의 사회적 불평등 구조가 개선되지 않은 채 그 변화가 가속화될 경우 전반적인 사회적 충격과 더불어 불평등의 심화가 가속화될 수도 있다.
4-3-1. 결국 새로운 기술이 상용화될 때, 그로 인한 사회적 충격을 줄이고 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대안의 모색이 절실히 요청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새로운 과학기술의 속성 그 자체로 인한 파급 효과를 예견하는 것과 더불어 그것이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활용되어야 하는지 헤아리고 전 사회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과제가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곧 오늘의 사회, 오늘의 인류문명이 지니는 문제점을 강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거꾸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과제이다.
4-3-2. 그것은 과학기술을 적절하게 규율하는 과제를 포함하는 한편 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관계를 재편하는 과제를 포함한다. 흔히 4차 산업혁명이 진전됨으로써 예견되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해결책으로 기본소득제를 그 대안 가운데 하나로 제안하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그것은 자연적 공유부와 역사적 공유부는 물론 4차 산업혁명과 함께 더욱 중요하게 부상한 인위적 공유부로서 정보자산으로 인한 수익의 결과를 함께 나누는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그 윤리적 정당성은 물론 예견되는 실질적 파급 효과라는 측면에서도 현실적 타당성을 갖는다. 물론 기본소득제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급속도로 진전되는 만큼 훨씬 철저한 사회적 구조의 재편을 동시에 예비해야 할 것이다.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FALC: Fully Automated Luxury Communism)’를 꿈꾸는 것은 지나친 기술낙관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일 수 있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한편 재구성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적 구조와 삶의 방식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과제를 환기해 준다.
4-4-1. 새로운 과학기술의 상용화가 교회에 주는 충격은 어떤 것일까? 근본적인 신앙의 재구성, 교회구조의 재편, 목회방식의 변화 등 어려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4-4-2. 근본적인 신앙의 재구성은 매우 심각한 과제를 함축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 양상으로 메타버스와 인공지능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전통적인 신앙을 구성하는 핵심 내용이 얼마나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지, 그것을 표현하는 상징은 적절한지, 무엇보다 그 바탕을 이루는 존재론 및 인식론에 대한 재검토의 과제를 포함한다. 어찌 보면 새삼스러운 과제가 아닐 수도 있다. 이미 16-17세기 과학혁명이 일어난 시점부터 제기된 과제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등장은 확실히 새로운 물음의 국면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정체성 또는 주체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지전능한 신의 개념은 여전히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인공지능은 과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과 동등한가 등등의 물음을 촉발시킨다.
4-4-3. 가장 뚜렷하게 가시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교회구조의 재편 과제는, 일정 부분 이미 경험하고 있는 측면과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차원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 멀티미디어의 환경은 이미 일반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그 기술적 활용은 일반화되었지만, 멀티미디어 환경이 가능하게 해주는 수평적 차원의 의사소통 방식이 얼마나 정착되었는지는 의문이다. 메타버스의 응용은 앞에서 살짝 언급했지만,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화하게 될지 아니면 환상에 의존하는 가상의 공동체로 남을지 헤아려 보아야 한다.
4-4-4. 목회방식과 관련해서는 인공지능의 활용이 가장 커다란 변화의 동인이 될 수도 있다. 이미 설교를 작성하는 데 ‘챗지피티(ChatGPT)’가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진정성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기서 나아가 교리교육과 성례전의 집행까지도 인공지능에 맡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검토되어야 한다. 만약 메타버스를 활용하고 있다면 이미 부분적으로 그에 의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인격과 인격의 대면관계를 통한 목회와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교회 공동체성의 개념을 뒤흔드는 사태일까, 아니면 새로운 기술환경에서 적합하게 공동체성을 강화하는 사태일까? 인공지능의 활용으로 목회자는 지적 탐구의 노고로부터 자유로워져 직접적인 대면관계에 보다 집중할 수 있는 여력을 얻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역할을 인공지능에 내맡김으로 스스로 필요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는 사태를 맞이할까?
4-4-5. 이상의 과제는 어쨌든 교회 공동체가 존속한다는 전제하에서 제기되는 과제들이다. 그러나 만일 후속세대가 단절되는 심각한 사태가 전면화된다면, 그 조건하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갖는 의미와 교회의 존재 의미를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이미 많은 교회에서 젊은이와 어린이들이 줄어드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그것은 세대간 인구비례에 따른 것만은 아니며, 그 이상으로 후속세대의 단절 현상은 현저하다. 이는 다각적으로 그 원인과 대책을 모색해야 할 과제이지만, 주제와 관련하여 생각한다면 이른바 ‘디지털 원주민’이라 불리는 세대의 삶의 의미에 대한 인식과 감성의 문제를 탐구해야 할 과제를 제기한다. 만일 디지털 환경에 철저하게 적응한 결과로 교회에 나올 동기 자체가 사라지게 된 것이라면, 그것이 일면이라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그에 대한 교회의 대책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는 ‘접속’되어 있지만 바로 곁에 있는 사람에는 무관심한 현상을 어떻게 해야 할까?

5. 마치는 말

5-1. 아마도 기술의 발전은, 그로 인해 야기되는 부정적인 파급 결과를 전 사회적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것보다 앞질러 갈 것이다. 그 문제에 대처하는 윤리적 합의와 그것을 규율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의 재편은 항상 사후적으로 이뤄져 온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새로운 과학기술의 성과가 전면에 등장하였을 때 늘 그에 대한 적응과 활용의 문제가 먼저 대두한다. 그 성과를 공유하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만큼 교회도 그럴 수밖에 없는 점을 우리는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5-2. 그러나 다른 한편 과학기술의 발전이 원치 않는 파국적 결과를 가져오는 현상을 인류는 지켜보았다. 이른바 ‘거대과학’의 탄생 기점이 되는 ‘맨해튼 계획’은 그 단적인 사례이다. 그것이 하나의 극적인 사례라면 오늘날 심각한 기후위기 현상은 과학기술의 남용이 빚어낸 일상적 위기의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확실히 오늘 세계는 과학기술이 발전한 만큼 위기 또한 일상화되어 있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폭넓은 공감대를 얻고 있다.
5-3. 우리는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여 주는 너무나 놀랍고 편리한 세계에 빠져 그 기술이 심화되고 질적으로 비약하는 현상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빚어내는 어두운 측면을 생각하면 부단히 그것이 인간과 자연을 위하여 선용되도록 하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발제는 그 문제의식의 기조에서 인공지능·디지털 시대의 교회와 목회의 과제를 생각해 본 것이다. 세계는 참으로 심오하고 할 일도 참으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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