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제7문서 의제 6. “불평등의 극복과 경제정의 실현” 해설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3-31 23:02
조회
32
*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회보 649(2024년 4월호) 게재

제7문서 의제 6. “불평등의 극복과 경제정의 실현” 해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인간에게 먹고사는 문제는 가장 기본적인 요구에 해당한다. 그 먹고사는 문제를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하는 방식이 이른바 경제생활이다. 인간사회는 오랫동안 필요의 충족을 위한 경제생활을 영위해 왔다. 그러나 자원이 희소한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항상 문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각자에게 적절한 몫을 나누는 정의의 인식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여기에서 필요 이상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이나 그 부가 특정한 세력에게 집중되어 불평등을 초래하는 상황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가장 일반적인 정의의 요체는 기여에 따른 분배의 원칙이다. 업적에 따른 분배의 원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른바 비례적 정의론이다. 그러나 성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기이한 정의론을 제시해 주고 있다.

성서적 정의론의 요체

제7문서는 불평등의 극복과 경제정의 실현을 모색하는 데서 먼저 성서적 정의론의 요체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정의’라 할 수 있는 성서적 정의론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안에서 인간사회 안에 이뤄져야 할 온전한 관계를 지향하는 매우 포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비단 경제적 생활에 한정되지 않고 인간 삶의 전반적인 관계에 해당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현대적 정의론은 단지 물질의 ‘분배’에 그치지 않고 존재의 ‘인정’을 함축하는 차원까지 그 인식이 발전하고 있다. 성서적 정의론은 그에 관하여 매우 포괄적이며 풍요로운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성서적 정의론은 억압받는 백성을 해방한 하나님의 신실한 행위를 기억하는 데서부터 형성되었고 시대를 거듭하는 가운데 더욱 풍요로워졌다.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함으로써 정의를 이뤄야 한다는 정신은 율법과 예언의 요체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눅 6:20). 예수의 이 선언 또한 그 정신을 집약하고 있다.
이와 같은 포괄적인 정의의 전망 안에서 성서는 경제생활에서 이뤄져야 할 정의의 요체를 끊임없이 환기해 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정당한 몫은 기본적인 생존에 필요한 것으로, 어떤 경우이든 필수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체이다. 만나 이야기(출 16:1-36), 주의 기도(마 6:9-13, 눅 11:2-4),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 20:1-16), 최후심판의 비유(마 25:31-46) 등은 그 정신을 분명하게 일깨워 준다. 하나님의 정의는 노동의 업적과 무관하게 삶의 필요를 따라 재화를 나누는 것과 부합한다. 그것은 배타적인 부의 축적을 거부하고 누구나 필요에 따라 ‘일용할 양식’을 누리는 것을 뜻한다.

불평등의 심화와 노동의 위기

제7문서는 성서적 정의론을 전제한 후 그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오늘의 역사적 상황을 다루고 있다.
오늘 경제적 불평등의 상황과 노동의 위기는 비단 한국적 상황만은 아니다. 전 세계 공통의 상황이다. 제7문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 4차 산업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산업구조의 개편, 그리고 코로나19 위기와 함께 더욱 가속화된 세계 공통의 경제적 불평등 현상을 주목하지만, 특별히 한국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의제간 분량상의 균형을 감안하여 절제할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한국 사회는 자타가 공인하듯 놀라운 경제적 성장을 이뤄 선진국 반열에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불평등은 매우 극단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부동산 등 자산의 불평등에 더해 소득의 불평등마저 심화하고 있다. 여기에 핵심적 요인이 자본과 노동의 심각한 불균형이다. 제7문서는 이 점을 주목하며 경제민주화의 근본 취지를 환기한다. 대한민국헌법(제119조 2항)이 보장하는 바와 같이 경제민주화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의도한다. 이는 시장의 지배력 남용을 방지하여 경제주체간 조화와 균형을 이룸으로써 국민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이뤄내면서도 적정한 소득분배를 실현하려는 취지를 지니고 있다. 경제주체간의 조화와 균형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공존조건을 형성하는 것을 넘어 명확하게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자본과 노동의 균형을 그 요체로 한다.
불행하게도 한국 사회에서 자본과 노동의 균형은 실로 요원한 실정이다. 그 단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가 아직도 노동 기본권이 완전하게 보장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층적으로 분절된 노동시장에서 차별 현상이 심각한 데 더해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으로 집약되는 노동 기본권마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조건에서 노동의 위기는 심각하고 그에 따른 불평등은 심화할 수밖에 없다. 최근 국민적 합의에 이른 ‘노란봉투법’마저도 대통령의 거부권으로 무산된 지경이니 한국 사회에서 노동 기본권의 확립은 여전히 지난한 과제가 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제7문서의 문장은 다소 꼬여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게 된 점이 아쉽다. “...자본과 노동의 균형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여기에서 절실한 과제가 노동권의 완전하고도 실질적인 보장이다. 한국 사회는 심각한 노동의 위기를 겪고 있다. 세계 최고수준의 장시간 노동과...” 이렇게 서술되어야 할 대목이 “여기에서 절실한 과제가 노동권의 완전하고도 실질적인 보장인데 현재로서는 노동의 위기이다.”로 맥없이 그 문장이 꼬여버렸다. 공동작업의 미덕을 최대한 살리고자 애썼지만, 양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문장을 줄이면서 나타난 일이다. 막바지 검토에서 미처 가다듬지 못한 점이 아쉽다.

한국형 복지체제의 형성과 기본소득

제7문서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주요 요인으로서 노동의 위기를 주목하면서 경제민주화의 의미를 강조한 데 이어, 보다 포괄적인 한국형 복지체제의 모색을 전망하고 있다.
굳이 한국형 복지체제를 내세운 것은 한국적 특수성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경제성장이 이뤄지는 동안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분배정책 및 복지제도 대신에 성장으로 인한 고용효과에 의존해 왔다. 그 까닭에 신자유주의적 물결이라는 경제 여건 가운데서 심각해진 불평등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총량적 기준에서 볼 때 한국 경제는 놀랍게 그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는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자원이 풍부해졌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 공유될 수 있는 부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 사회적 합의에 이를 수 있다면 기왕의 서구 국가들이 구축해 온 복지체제와는 다른 한국형 복지체제의 형성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서구 국가들이 구축한 복지체제는 기본적으로 업적주의에 따른 보상의 원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국가가 시혜를 베푸는 정책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기여에 따른 보상의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 기여한 만큼 혜택을 누리는 사회보험의 성격을 보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제7문서는 그나마 제대로 구축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다른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간의 취약한 보편적 복지를 확대하는 한편 여기에 기본소득제를 결합함으로써 한국형 복지체제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제는 간단히 말해 정기적으로 모두에게 적절한 현금을 지급함으로써 기본적인 소득을 보장해 주는 제도이다. 그것은 없는 자원을 동원해서 선심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원천적으로 배타적인 사적 소유가 될 수 없는 공유자산의 몫을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공정하게 나눠주는 취지를 지니고 있다. 그 공유자산은 토지와 천연자원을 및 생태환경을 포함한 자연적인 자산, 역사를 통해 축적된 지식과 문화 등 역사적인 자산, 특히 오늘날 플랫폼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빅데이터로 대표되는 정보자산 등을 포함한다. 이윤추구가 극대화된 오늘 사회 현실에서는 그 모든 것이 배타적인 사적 소유가 되어버렸다. 기본소득제는 이를 마땅히 모든 사람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는 취지를 지닌 것이다. 물론 이를 모든 구성원에게 돌리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세제가 확립되어야 하고 이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는 그 방안을 마련함으로써 새로운 복지체제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제7문서가 이 문제를 다루는 대목에서 한국형 복지체제를 형성하기 위한 정치체제 형성의 과제를 별도로 다루지 못한 것은 아쉽다. 물론 정치체제의 문제는 정의로운 경제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 구성원의 온전한 주권을 보장하는 민주주의 그 자체를 형성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오랫동안 그 정치적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헌신해 왔다. 그래서 거꾸로 간과될 것일까, 아니면 너무나 당연해서 지나쳤을까? 최근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가 형편없이 하락하여 심지어 ‘독재화하는 국가’로 분류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언론보도를 보면서 착잡하기 그지 없다. 인권의 보장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노력은 한시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과제임을 다시 환기해야 할 것이다.

불평등 극복을 위한 교회의 과제

제7문서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고 요구할 뿐 아니라 스스로 정의를 구현해야 하는 과제를 환기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교회가 세상에 요구하는 것이나, 아니 어떤 경우는 이미 세상이 구현하고 있는 정의에도 미치지 못하는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경제민주화나 공정거래와 같은 규범이 교회 안에 있는가? 그저 각 개별교회의 성장전략에 맡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그야말로 각자도생의 원리에 맡겨져 있는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최저생활보장제’와 같은 선구적 제도를 갖추고 있고 이를 통해 교회 간 불균형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훌륭한 제도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한국기독교장로회 구성원 모두 깊이 공감하고 있다. 따라서 그 제도의 정신을 더욱 확산하고 심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교회 규모에 상관없이 목회자의 기본생활을 보장하는 방안, 도시교회와 농촌교회의 유대를 강화하는 방안 등이 모색되어야 한다.
제7문서는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교회의 정신(고전 12:12-31)을 환기하며, 그에 따르는 기본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다. 선언적 문서의 한계 탓에 구체적인 정책의 제안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은 아쉽다. 교회 안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적 대안은 끊임없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제7문서는 전반적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을 뿐 구체적 과제를 일일이 적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또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급진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 안에서 상식이 되어야 할 가치를 확인하고 그 방향을 제시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에 대해 공감한다면, 이를 기초로 하여 더욱 철저한 실천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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