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총선을 앞두고 진보정당의 역할을 말한다?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4-01 22:49
조회
41
기독교시국행동 시국포럼: 4월총선, 진보정당에게 듣는다
2024년 4월 1일(월) 오후 7시 / 공간 이제홀



총선을 앞두고 진보정당의 역할을 말한다?

최형묵(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1. 총선 국면에서 진보정당의 역할을 말한다?

1-1. 총선 선거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국면에서 진보정당의 역할을 묻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이미 게임의 규칙이 확정되고 그 규칙대로 경기가 진행중인 상황에서 선전을 기대하며 응원하는 것 말고 뭘 더할 수 있을까?
1-2. 더욱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양상을 볼 것 같으면 그나마 그 기대와 응원도 민망한 상황이다. 이미 정해진 거대 양당의 대결구도에 ‘조국혁신당’의 돌풍까지 겹치면서 진보정당의 입지는 더욱 위태로워지고 있다. 결과는 지켜봐야겠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면 그야말로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그레고리 헨더슨) 양상이 곧바로 떠올려진다. 그 거대한 소용돌이 가운데 진보정당의 존재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정당의 역할을 묻는 것은 부질없는 것으로 보인다.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1-3. 그럼에도 진보정당의 역할을 묻는 의미는 무엇일까? 진지하게 마련된 이 자리에서 초 치는 소리를 할 수 없으니 그 의미를 다시 캐묻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언제나 힘쓰는 자세로 그 역할을 확인하고자 하는 데 오늘 논의의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현재 총선을 코앞에 둔 단기적 국면에서는 별 의미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중장기적 국면에서는 충분히 따져봐야 할 과제이기에 바로 그 점에서 오늘 논의가 의미 있다고 할 것이다.

2.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2-1. 2016년 촛불 항쟁에 이어 2017년 새로운 정부가 등장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는 낙관적이었다.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퇴행 현상이 현저해진 상황에서도 한국 민주주의는 예외적으로 진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2-2. 그러나 그 평가와 기대가 무너진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22년 제20대 대선에서 비로소 그 위기가 감지된 것은 아니었다. 2020년 제21대 총선 이후부터 그 기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기본권을 확대하여 탄탄한 민주주의 공화국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집권 거대 여당의 무능을 확인하는 데서부터 무너졌다. 제20대 대선 결과는 사실상 그 필연적 결과일 수도 있다.
2-3. 우리는 그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국 사회 기득권 세력의 강고한 지배구조를 확인하였고, 그것은 기존의 거대 정당에 의한 정권교체만으로 쉽사리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른바 재벌, 금융, 행정, 사법, 언론 등 여러 분야의 선출되지 않은 전문가들이 선출 권력을 제약할 뿐 아니라 통제하고 있는 실상을 확인하였다. 그에 대응하여 민주주의적 규율을 확대하여야 할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고스란히 보존하면서 정권 장악을 위한 당리당략에 몰입하는 현상을 지켜봐야 했다. 국민의 기본권과 대표권을 확장할 수 있는 정치는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한국 민주주의가 위태로운 기반 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2-4. 지금 우리가 진보정당의 역할을 묻는 것은 그와 같이 위기에 처해 있는 한국 민주주의 상황 가운데서 그 위기를 돌파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정치세력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에 다름 아닐 것이다. 과연 그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이는 긴 호흡으로 마주해야 하는 과제일 수밖에 없다.

3. 한국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진단과 대안

3-1. 오늘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는 입장에서 과연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고 어떻게 그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까? 이는 그저 객관적인 정세분석이 아니라 현재의 위기 상황을 돌파하고자 하는 뜻을 지닌 이들에게 주어진 주체 형성의 과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두 가지 입장을 주목하고 싶다.

3-2-1. 사회학자 백승욱은 그 위기를 돌파하려는 세력에게서 나타나는 ‘분석의 부재’와 ‘의지의 과잉’을 지적하고 있다(백승욱, 『1991년 잊힌 퇴조의 출발점 – 자유주의적 전환의 실패와 촛불의 오해』, 2022). 단순하게 요약하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위기의 상황을 낳은 구조적 요인에 대한 분석 없이 그저 민중의 결집된 의지로 그 상황을 돌파할 수 있다는 의지의 낙관주의만 넘쳐난다는 진단이다.
3-2-2. 백승욱은 1987년 이후 한국 역사를 단순히 ‘위대한 민중 승리의 역사’와 ‘계속 지속돼야 할 적폐 청산의 역사’로 보는 관점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며, 1987년의 위기를 ‘자유주의적으로 전환’하며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한 1991년을 주목한다. 정태춘이 ‘92년 종로, 장마에서’ 노래한 그 어간의 시점이다. 지배구조의 측면에서 보자면 준전시 체제하에서 위로부터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한 유신체제를 개방 지향적 자유주의적 경제구조로 전환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던 시점이었다. 3당 통합은 그런 시도의 일환으로 등장했고 재벌개혁의 시도가 부분적으로 시작되었다. 사회운동 세력은 그 상황에서 ‘PD 3파 통합’과 ‘전노협 해소’를 거치며 노동운동 현장에서 철수하고 합법적 혁신정당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이 시기는 제도적 측면에서 두 가지 변화를 특징으로 한다. 경제 관리 측면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종료되고 자유주의적 시장 관리 방식이 자리를 잡았고, 또한 공권력의 중심이 안기부에서 검찰로 이동하면서 ‘법치’의 제도화가 이뤄졌다. 요컨대 1991년은 한국 자본주의 축적구조를 유지하는 통치성의 수선기로서 경제적 자유주의와 법률 자유주의가 제도적 수선을 거쳐 새롭게 결합한 계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불안정한 체제였다.
3-2-3. 백승욱은 오늘의 정치적 위기가 그 유산의 기반 위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로부터 나타나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 돌파는 그 구조에 대한 분석에 기반하고 그것을 내파할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3-3-1. 다른 한편 진보정당에 몸담은 이력을 지닌 철학자 김상봉은 오늘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근원으로 ‘영성의 부재’를 꼽고 있다(김상봉, 『영성 없는 진보 –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 2024). 그 영성의 요체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사랑,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으로 집약된다. 그 믿음이 병들었기에, 현존하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부정에만 머물렀을 뿐 한국 민주주의가 공화국으로서 자기를 형성하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3-2. 김상봉은, 동학혁명 이래 우리의 역사가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져들지 않고 의미 있는 진보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에 응답하고, 모두의 선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이 이 땅에 많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그렇게 해서 이뤄진 한국 민주주의가 오늘 심각한 위기 증상을 드러내고 있다. 정치가 상대를 폭력적으로 제거하거나 제압하려는 대결로서 사실상 내전 상태로 퇴행하였다. 마치 한국전쟁 이전의 적대적 대립 상태를 방불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승패의 전략·전술만 남은 정치 현실을 꼬집는 지적이다.
3-3-3. 정치를 영성과 관련시키는 문제의식은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솔깃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신학자가 해야 할 말을 철학자가 대신해 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특정한 신앙을 가진 이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공동선을 위한 보편적인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는 정치적 주체들을 향한 주장이라는 점에서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3-4-1. 두 주장은 언뜻 보기에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상반된 의견을 제기한 것처럼 보인다. 한편은 ‘의지의 과잉’을, 한편은 ‘의지의 결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지’와 ‘영성’이 서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단순 대립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서로 완전히 다른 접근방법을 취하는 두 입장은 오히려 서로 접목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그 제안자들의 동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3-4-2. 두 입장에서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놀랍게 일치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 정치가, 적과 동지를 이분법으로 가르는 칼 슈미트적 정치구도에 가깝다는 진단이다(백승욱, 16; 김상봉, 30). 다만 한편에서는 ‘분석의 부재’를, 한편에서는 ‘영성의 부재’를 지적하고 있는 점에서 그 차이가 확연하게 다르다. 여기서 민주주의 위기 현상을 진단하는 원인으로서 분석의 부재와 영성의 부재가 동일한 수준에서 서로 맞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석’은 현상에 접근하는 방법을 의미하고, ‘영성’은 문제시되는 현상을 넘어 대안을 지향하는 정신적 지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를 종합하는 관점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냉철한 현실분석에 기초하여 그 지향하는 바를 뚜렷이 제시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3-4-3. 이는 매우 장기적인 과제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다급한 선거 국면에서 그 누구에게든 귀에 잘 들어올 리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 위기라고 불릴 만큼 심각한 문제를 노정하고 있는 현재의 정치구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의해야 할 과제이다.

4. 다시 총선 국면에서 진보정당의 역할을 말한다

4-1. 거듭 뼈아프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소수 진보정당들에게 제22대 총선을 앞둔 오늘의 상황은 참담하다. 이와 같은 상황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국민 대표성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선거제도 개혁이 이뤄졌어야 했다. 물론 이에 앞서 국민적 주권을 강화하는 헌법 개정과 더불어 국가보안법의 폐지 또한 이뤄졌어야 했다. 어느 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거대 양당 구도에서 소수 진보정당의 역부족을 자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불행하게도 제22대 총선이 끝난 이후에도 그 선거제도 개혁이 이뤄질지는 매우 불투명해 보인다. 앞서 문제시한 정치구도가 당분간 상당한 생명력을 지닐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혹 의미있는 변화와 더불어 다른 가능성이 있을까?
4-2. 그러나 거대 양당 구도하에서의 진보정당의 역부족을 탓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진보정당 스스로 존재의의를 드러낼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회 저변의 의지를 드러낼 뿐 아니라 그것이 보편적 공공선을 지향한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는 정책 제시의 과제를 포함한다. 더불어 여러 정파들로 갈라져 있는 진보정당의 현실 또한 돌아봐야 할 것이다. 유권자들이 혼란스러워하다 못해 외면해 버리는 현실적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평범한 유권자들은 정파의 차이를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가능한 한 대강의 정책에서 합의할 수 있는 진보정당들이 통합하는 것이 그나마 존재감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 될 것이다. 자유주의의 한계를 돌파해내고자 분투하는 중량감 있는 진보정당의 등장을 기대한다.
4-3. 현재 소용돌이의 국면에서조차도 거시적 전망을 견지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예컨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조국혁신당’ 돌풍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피차간의 내로남불이 빚어내는 ‘복수혈전’의 판타지로 볼 것인지(강희철, “총선을 전쟁터로 만드는 ‘복수혈전’의 판타지”, 「한겨레신문」, 2024.3.25.), 아니면 공정성 문제를 다루는 방식의 공정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계기로 볼 것인지(박용현, “‘조국당 돌풍’에 실린 ‘메타 공정’이란 질문”, 「한겨레신문」, 2024.3.22.)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유권자들을 훈계하기보다 유권자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지만 돌풍을 일으킬 만큼 환호하는 그 사태가 함축하는 뜻을 읽어내고 대안을 제시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미 판이 그렇게 표출할 수밖에 없도록 짜여진 현실에서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점을 헤아리고, 그 판을 넘어선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전망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의도하거나 의식하지 않은 가운데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현실의 역동성을 포착하고 실천적 전략을 모색하는 지혜 또한 절실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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