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신앙의 역사와 유산 03] 분단과 전쟁 시기 교회의 진통과 이념분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5-17 21:53
조회
244
천안살림교회 2023년 상반기 수요 강좌 제3강 / 2023년 5월 17일(수) 오후 7시
주제: 한국교회 신앙의 역사와 유산 / 강사: 최형묵 목사
제3강(5/17) 분단과 전쟁 시기 교회의 진통과 이념분쟁
1.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의 해방,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민족의 해방이 아니었으며 남북의 분단으로 새로운 비극의 시작을 의미했다. 당시 기독교는 민족사적으로 중요한 과제를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제잔재의 청산과 신사참배 회개운동, 분단의 극복,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의 건설 등의 과제였다. 기독교가 과연 그 과제들을 잘 감당하였을까?
1-1. 해방후 개신교에서는 최소한의 신사참배 회개 요구가 제기되었으나 기성교회 지도자들의 반대로 회개운동은 좌절되었고, 이로 인해 교단이 분열되었다.
* <참고> 1945년 10월 독일의 <쉬투트가르트선언>; 1967년 3월 <제2차세계대전하에 있어서의 일본 기독교단의 책임에 대한 고백>; 1988년 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2007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신사참배와 부일협력에 대한 죄책고백 선언문>.
1-2. 기독교는 사회보다 더 극우적인 입장에서 분단을 이념적으로 고착화시켰다. 이북에서 월남한 기독교인들의 반공활동으로 반공의식이 강화되었고, 특별히 서북청년단의 역할은 치명적이었다.
1-3.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을 거치면서 정교유착으로 기독교는 특혜를 누리는 가운데 권력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상실하고 정권의 과오를 공유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이루는 데 적극적 기여를 하지 못하였다.
1-4. 1946년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남한지역 주민 가운데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7%, 자본주의 14%로 각각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이념지형을 감안하면 극단의 이념적 선택보다는 통합적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통합을 지향하는 세력은 설 자리를 잃고 이념지형이 극단화되었다. 전쟁은 그 완전한 양극화를 초래했다.
2-1. 신사참배 문제로 일차 분열한 교회는 전쟁의 와중에 신학적 문제로 다시 분열을 겪게 된다. 해방직후 남한에서 유일한 장로교 총회 직영 신학교인 조선신학교의 교수 김재준 목사와 캐나다 선교사 스코트 목사의 신학사상이 보수주의에 도전이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결국 장로교 총회는 전쟁의 와중에서 논란을 벌이게 되고 끝내 김재준 목사를 출교하고 조선신학교를 부정함으로써, 1953년 불가불 새로운 교단 기독교장로회가 출범하게 된다.
* <참고> 1953년 호헌총회 선언: “① 우리는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음의 자유를 확보한다. ② 우리는 전세계 장로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건전한 교리를 수립함과 동시에 신앙양심의 자유를 확보한다. ③ 우리는 노예적인 의존사상을 배격하고 자립자조의 정신을 함양한다. ④ 그러나 우리는 편협한 고립주의를 경계하고 전세계 성도들과 협력 병진하려는 세계교회 정신에 철저하려 한다.”
2-2. 6.25 전쟁으로 외부적으로 겪은 수난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내부적 분열의 외길을 걷는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경건’과 ‘신학’을 명분으로 하는 분열뿐만 아니라 교회는 ‘교권’ 문제(인사와 정치 문제)로 ‘명분없는’ 분열양상을 겪기도 하였다(1955년 3월 감리교의 분열).
2-3. 6.25와 그 후유증에 시달린 교회에 열광적 종말론적인 내면화의 경건이 여기저기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운동들은 대개 탈사회적, 일탈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2-4. 그러나 교회의 주도 세력은 전쟁중 교회가 미국의 구호물자를 배분하는 역할을 맡는 것 등을 통하여 교세를 더욱 확장하고 반공주의를 더욱 강화한다. 물질적 축복을 구하는 기복적 신앙이 확고하게 정착된 것도 한국전쟁을 통해서였다.
3. 1960년대 한국교회는, 지난 50년대 6.25의 뼈아픈 상처와 부끄러운 내홍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짓누르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뒤척거리고 있었지만(계속되는 교회의 분열, 신흥종교와 분파적 부흥운동),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 무게를 떨쳐 버리고 새로운 교회로 거듭나려는 몸부림을 치며(에큐메니칼운동, 한국적 신학의 형성, 역사참여) 새 시대를 예비하고 있었다.
3-1. 50년대 전란의 와중에서도 분열의 외길을 걸었던 한국교회는 60년대 벽두에 또 한 차례의 분란에 휩싸인다. 예장 통합과 합동의 분열이 그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용공적이라고 계속 공격해오던 목사들이 1959년 예장 44회 대전 총회에서 논란을 일으키다 11월 24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합동 총회를 열었다(사실상 문제의 촉발 계기는 당시 총회신학교 교장이던 박형룡 목사의 신학기금 3천만 환 유용사건). 이에 세계교회협의회 노선을 지지하는 총대들은 교단의 통합을 위해 세계교회협의의 잠정적 탈퇴를 결의하면서까지 1960년 2월 27일 서울 연동교회에서 통합총회를 열었다. 그러나 또다시 갈린 장로교는 서로가 정통임을 자처하며 오늘에 이르고 그 이후에도 끊임없는 분열을 연속해왔다.
3-2. 그러나 한편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교회의 분열 자체에 대해 반성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6.25라는 동족상잔을 경험하면서 참된 의미의 ‘교회’, 성도의 사귐에 대해 새삼 깨우치고 한국 교회는 교회의 일치와 세상의 일치를 향한 발걸음을 꾸준히 내딛기 시작한다. 1959년 감리교의 무조건 합동, 1961년 분열했던 예성과 기성의 1965년 결합, 신학교육에서의 연합(1964년 4월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설치), 1965년 전국복음화운동(“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 1966년 3월 8일 신ㆍ구교연합예배, 1971년 부활절 신ㆍ구교 공동번역 신약성서 발간 등이 그 사례이다.
3-3. 50년대 내부 문제로 골몰하던 교회는 4.19라는 역사의 대전환기에마저 무력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에 대한 반성에서 교회는 마땅히 세계와 현실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을 새삼 자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말 봉건사회에서의 교회의 역할과 3.1운동을 비롯한 일제 치하에서의 민족운동의 전통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첫 실험이 5.16군사정권에 대한 대결이었고, 이후 1962년 민정이양 촉구, 1965년 한일협약반대성명, 1969년 삼선개헌반대운동에 참여하면서 한국 기독교는 한국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의 선구로서 몫을 다해나가기 시작한다. 찬송가 “어둔 밤 마음에 잠겨”(1967년)는 바로 이러한 역사의 여명기에 태어난다.
3-4. 교회의 새로운 각성은 곧바로 신학적 각성으로 이어졌다. 1963년 토착화 논쟁을 시발로, 1965년대 이후 세속화론, 비종교화론, 희망의 신학과 미래 문제, 도시화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 혁명의 신학, 정치신학, 생태학적 신학 등이 소개되고 수용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어떠한 경우에나 ‘한국적 신학의 형성’이라는 과제는 당시 모든 신학적 논의의 결론이 되었다: 이장식, 서남동, 안병무, 윤성범, 김정준, 유동식 등등의 여러 신학자들과 크리스챤아카데미의 강원룡 목사의 대화 모임 등이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노력들이 7ㆍ80년대를 경과하면서, 세계신학계가 주목한 민중신학의 밑거름이 된다.*
주제: 한국교회 신앙의 역사와 유산 / 강사: 최형묵 목사
제3강(5/17) 분단과 전쟁 시기 교회의 진통과 이념분쟁
1.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의 해방,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민족의 해방이 아니었으며 남북의 분단으로 새로운 비극의 시작을 의미했다. 당시 기독교는 민족사적으로 중요한 과제를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제잔재의 청산과 신사참배 회개운동, 분단의 극복,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의 건설 등의 과제였다. 기독교가 과연 그 과제들을 잘 감당하였을까?
1-1. 해방후 개신교에서는 최소한의 신사참배 회개 요구가 제기되었으나 기성교회 지도자들의 반대로 회개운동은 좌절되었고, 이로 인해 교단이 분열되었다.
* <참고> 1945년 10월 독일의 <쉬투트가르트선언>; 1967년 3월 <제2차세계대전하에 있어서의 일본 기독교단의 책임에 대한 고백>; 1988년 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2007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신사참배와 부일협력에 대한 죄책고백 선언문>.
1-2. 기독교는 사회보다 더 극우적인 입장에서 분단을 이념적으로 고착화시켰다. 이북에서 월남한 기독교인들의 반공활동으로 반공의식이 강화되었고, 특별히 서북청년단의 역할은 치명적이었다.
1-3.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을 거치면서 정교유착으로 기독교는 특혜를 누리는 가운데 권력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상실하고 정권의 과오를 공유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이루는 데 적극적 기여를 하지 못하였다.
1-4. 1946년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남한지역 주민 가운데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7%, 자본주의 14%로 각각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이념지형을 감안하면 극단의 이념적 선택보다는 통합적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통합을 지향하는 세력은 설 자리를 잃고 이념지형이 극단화되었다. 전쟁은 그 완전한 양극화를 초래했다.
2-1. 신사참배 문제로 일차 분열한 교회는 전쟁의 와중에 신학적 문제로 다시 분열을 겪게 된다. 해방직후 남한에서 유일한 장로교 총회 직영 신학교인 조선신학교의 교수 김재준 목사와 캐나다 선교사 스코트 목사의 신학사상이 보수주의에 도전이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결국 장로교 총회는 전쟁의 와중에서 논란을 벌이게 되고 끝내 김재준 목사를 출교하고 조선신학교를 부정함으로써, 1953년 불가불 새로운 교단 기독교장로회가 출범하게 된다.
* <참고> 1953년 호헌총회 선언: “① 우리는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음의 자유를 확보한다. ② 우리는 전세계 장로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건전한 교리를 수립함과 동시에 신앙양심의 자유를 확보한다. ③ 우리는 노예적인 의존사상을 배격하고 자립자조의 정신을 함양한다. ④ 그러나 우리는 편협한 고립주의를 경계하고 전세계 성도들과 협력 병진하려는 세계교회 정신에 철저하려 한다.”
2-2. 6.25 전쟁으로 외부적으로 겪은 수난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내부적 분열의 외길을 걷는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경건’과 ‘신학’을 명분으로 하는 분열뿐만 아니라 교회는 ‘교권’ 문제(인사와 정치 문제)로 ‘명분없는’ 분열양상을 겪기도 하였다(1955년 3월 감리교의 분열).
2-3. 6.25와 그 후유증에 시달린 교회에 열광적 종말론적인 내면화의 경건이 여기저기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운동들은 대개 탈사회적, 일탈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2-4. 그러나 교회의 주도 세력은 전쟁중 교회가 미국의 구호물자를 배분하는 역할을 맡는 것 등을 통하여 교세를 더욱 확장하고 반공주의를 더욱 강화한다. 물질적 축복을 구하는 기복적 신앙이 확고하게 정착된 것도 한국전쟁을 통해서였다.
3. 1960년대 한국교회는, 지난 50년대 6.25의 뼈아픈 상처와 부끄러운 내홍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짓누르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뒤척거리고 있었지만(계속되는 교회의 분열, 신흥종교와 분파적 부흥운동),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 무게를 떨쳐 버리고 새로운 교회로 거듭나려는 몸부림을 치며(에큐메니칼운동, 한국적 신학의 형성, 역사참여) 새 시대를 예비하고 있었다.
3-1. 50년대 전란의 와중에서도 분열의 외길을 걸었던 한국교회는 60년대 벽두에 또 한 차례의 분란에 휩싸인다. 예장 통합과 합동의 분열이 그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용공적이라고 계속 공격해오던 목사들이 1959년 예장 44회 대전 총회에서 논란을 일으키다 11월 24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합동 총회를 열었다(사실상 문제의 촉발 계기는 당시 총회신학교 교장이던 박형룡 목사의 신학기금 3천만 환 유용사건). 이에 세계교회협의회 노선을 지지하는 총대들은 교단의 통합을 위해 세계교회협의의 잠정적 탈퇴를 결의하면서까지 1960년 2월 27일 서울 연동교회에서 통합총회를 열었다. 그러나 또다시 갈린 장로교는 서로가 정통임을 자처하며 오늘에 이르고 그 이후에도 끊임없는 분열을 연속해왔다.
3-2. 그러나 한편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교회의 분열 자체에 대해 반성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6.25라는 동족상잔을 경험하면서 참된 의미의 ‘교회’, 성도의 사귐에 대해 새삼 깨우치고 한국 교회는 교회의 일치와 세상의 일치를 향한 발걸음을 꾸준히 내딛기 시작한다. 1959년 감리교의 무조건 합동, 1961년 분열했던 예성과 기성의 1965년 결합, 신학교육에서의 연합(1964년 4월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설치), 1965년 전국복음화운동(“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 1966년 3월 8일 신ㆍ구교연합예배, 1971년 부활절 신ㆍ구교 공동번역 신약성서 발간 등이 그 사례이다.
3-3. 50년대 내부 문제로 골몰하던 교회는 4.19라는 역사의 대전환기에마저 무력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에 대한 반성에서 교회는 마땅히 세계와 현실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을 새삼 자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말 봉건사회에서의 교회의 역할과 3.1운동을 비롯한 일제 치하에서의 민족운동의 전통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첫 실험이 5.16군사정권에 대한 대결이었고, 이후 1962년 민정이양 촉구, 1965년 한일협약반대성명, 1969년 삼선개헌반대운동에 참여하면서 한국 기독교는 한국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의 선구로서 몫을 다해나가기 시작한다. 찬송가 “어둔 밤 마음에 잠겨”(1967년)는 바로 이러한 역사의 여명기에 태어난다.
3-4. 교회의 새로운 각성은 곧바로 신학적 각성으로 이어졌다. 1963년 토착화 논쟁을 시발로, 1965년대 이후 세속화론, 비종교화론, 희망의 신학과 미래 문제, 도시화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 혁명의 신학, 정치신학, 생태학적 신학 등이 소개되고 수용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어떠한 경우에나 ‘한국적 신학의 형성’이라는 과제는 당시 모든 신학적 논의의 결론이 되었다: 이장식, 서남동, 안병무, 윤성범, 김정준, 유동식 등등의 여러 신학자들과 크리스챤아카데미의 강원룡 목사의 대화 모임 등이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노력들이 7ㆍ80년대를 경과하면서, 세계신학계가 주목한 민중신학의 밑거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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