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한국교회 신앙의 역사와 유산 04] 돌진적 근대화와 기독교 민주화ㆍ인권운동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5-24 21:22
조회
146
천안살림교회 2023년 상반기 수요 강좌 제4강 / 2023년 5월 24일(수) 오후 7시
주제: 한국교회 신앙의 역사와 유산 / 강사: 최형묵 목사

제4강(5/24) 돌진적 근대화와 기독교 민주화ㆍ인권운동

1-1. 1960년대를 지나 7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급속한 성장을 한다. 양적 성장 면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매 10년마다 거의 2배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이러한 성장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① 한국 기독교의 ‘사회적 공신력’, ②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인한 사회불안의 팽배, ③ 교회 자체의 적극적인 성장 전략.
1-2. 1970년대 한국 사회는 경제개발계획으로 인한 급격한 근대화로 특징지어진다. 돌진적 근대화라고 일컬어질 만큼 급격한 산업화는 절대적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지만, 민중의 기본권 박탈 등 심각한 민주주의의 왜곡 현상과, 전통적 가치관의 급격한 붕괴로 인한 사회적 아노미 현상을 심화시켰다. 70년대 교회의 역할은 어떠한 측면에서든 바로 이와 같은 사회현상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2-1. 4.19의 충격으로 반성하기 시작한 교회는 1960년대 꾸준히 사회참여 활동을 강화하였고, 경제개발과 함께 분출한 민중문제에 적극 대처한다. 1968년 ‘산업전도’에서 ‘산업선교’로의 전환,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 창립, 기독학생운동의 ‘학생사회개발단운동’ 등은 그 실례이다. 이는 ‘하나님의 선교’론에 입각한 현장 중심의 선교활동으로 이후 노동운동과 도시빈민운동, 농민운동의 기틀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2-2. 1970년대 초반에 이르면 그야말로 민중 문제가 폭발하는 양상을 띤다. 70년 11월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 분신사건, 71년 9월 파월 노동자 임금체불에 대한 쟁의, 70년 4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71년 8월 광주대단지 사건 등이 발생한다. 이에 따라 언론자유 운동과 교수 시국선언 및 재야의 민주화운동 등 각계각층의 저항운동이 펼쳐지고 대통령 선거에서마저 아슬아슬하게 이긴 당시 박정희 정권은 위기감을 느낀다. 이즈음 교회는 전반적으로 대열을 정비하고 대사회적 활동을 강화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경우 70년 제55회 총회에서 ‘교회와 사회위원회’를 설치하고, 71년 제56회 총회에서 <사회선언지침>, 72년 제57회 총회에서 <신앙고백선언서>를 채택하여 ‘하나님의 선교’ 신학을 대사회 발언과 참여를 위한 공식적 근거로 제시한다.
2-3.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결국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소위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삼권분립 등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완전히 무시한 유신헌법을 공포한다. 이것만으로도 부족하여 긴급조치를 남발한다. 극악한 공포정치의 상황에서도 학생들을 비롯한 민주화세력은 끊임없이 저항운동을 펼쳤다. 교회는 그 선두에 섰을 뿐 아니라 그 운동들과 연대하며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1973년 4월 남산부활절 사건,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 NCC의 <인권선언>, 장준하 선생을 중심으로 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펼쳐졌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75년 인혁당사건 관련자 사형집행 등 권력의 폭압이 심해지는 가운데 76년 <3.1 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었으며, 이후 1979년 유신체제가 붕괴하기까지 그야말로 숨 가쁜 상황이 펼쳐졌다.
2-4. 이러한 상황에서 반공과 정교분리를 내세운 기독교 세력은 대규모 집회를 계속하였다. 71년 김준곤 목사 주도의 대학생선교회(CCC)의 ‘민족복음화운동’, 73년 5월 한경직 목사 주도의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 9월 세계오순절 대회, 74년 8월 CCC주도 ‘엑스플로74’ 등등이 그 예이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조찬기도회를 통해 정교유착을 공고히 하였다.
2-5. 많은 기독교인들의 뇌리 가운데는 이상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보다는 이른바 ‘심령대부흥회’로 대표되는 교회의 부흥운동과 그로 인한 성장의 경험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요동치는 사회적 환경 가운데서 민중들에게 위로를 주는 측면을 지녔고, 따라서 교회성장의 밑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고착화된 한국교회의 신앙 풍토가 바람직한 것인지는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한다.

3-1. 유신체제의 종말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높아졌으나, 권력의 공백기를 틈탄 신군부의 쿠데타와 광중항쟁의 진압과 더불어 1980년대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명백히 비극이요 역사적 좌절이었다. 그러나 광주항쟁 이후 한국사회는 그 방향을 새롭게 가다듬게 되었다.
3-2. 광주민중항쟁은 특별히 세 가지 점에서 독재권력에 저항했던 세력들을 일깨웠다. ①기존 정치권세력에 대한 회의, ② 외세(미국)의 실체에 대한 인식, ③ 조직화되지 않은 민중운동 세력의 무력감 등이 그것이었다. 그 반성을 통해 한국 민중은 근본적 사회변혁의 전망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스스로를 조직화해나기 시작한다. 이로써 민중운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이제 한국은 또 다른 측면에서 세계인들의 주목을 끈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는 이와 같은 민주화운동의 경험이 대중화되면서 ‘민주주의적 의식’이 점점 생활화 되어 간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3-3.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급속히 성장한 민중운동 세력은 급격히 성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체제를 구축한 권력 역시 그 나름의 고도의 통치술을 통해 권력재생산에 성공한다. 한편 이 시기에는 80년대 초반 호황에 힘입어 한국 자본주의의 외형적 성장이 급속히 이루어지고, 이와 더불어 고도 소비사회를 경험한다. 한국 역사에서 사실상 소비자본주의의 ‘향유’는 이때부터이다(소비사회의 대중문화와 ‘신세대’ 탄생의 배경). 그러나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소비문화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보다 더 근본적인 대안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을 일깨웠고, 그것은 다양한 형태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을 통해 나타나게 되었다.

4-1. 1970년대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루로서 독재권력에 맞서 최전방에 나섰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 교회 자체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들이 있었던 것과 같은 현상은 8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이 양극화의 경향은 80년대에 비로소 최고조에 달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혹독한 군사독재에 맞서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혼신을 다하고 있을 때, ‘발전하는’ 한국 자본주의와 더불어 거대 조직화한 교회들이 곳곳에 자리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개혁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또 한편에서는 급진화한 학생운동세력이 거대 교회를 ‘불사르겠다’고 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4-2. 꾸준히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해 달려왔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80년대 변화된 상황에서도 그 몫을 다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70년대 교회가 민주화운동의 최일선에 섰다면, 80년대에는 여타의 민중운동 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그 선봉에 서기보다 지원자로서 몫이 두드러진 상황이 되었다. 교회의 민주화운동 역량이 사실상 더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몫에서 상대적으로 그 비중이 줄어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자신의 몫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은 그간 누적된 역량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전세계적 네트워크, 그리고 기독교의 뿌리 깊은 정의와 평화에 대한 희망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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