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도마복음 다시읽기 15] 세상에 편재하는 하나님 나라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3-27 17:09
조회
48
2024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도마복음 다시읽기
2024년 3월 6일~27일 4주간 매주 수요일 저녁 7:00~8:30
최형묵 목사

15강 (3/27) 세상에 편재하는 하나님 나라

107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 목자와 같습니다. 무리 중 제일 큰 한 마리가 길을 잃었습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놓아 두고 그 한 마리를 찾으러 나갔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은 다음 그는 그 양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흔아홉 마리보다 너를 귀히 여긴다.’고”
108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입으로부터 마시는 사람은 나와 같이 될 것이고 나도 그와 같이 되어,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109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자기 밭에 보물이 묻힌 것을 모르고 그 밭을 가지고 있던 사람과 같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그 밭을 자기 아들에게 그 밭을 물려주었습니다. 그 아들은 보물이 묻힌 것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산으로 받은 그 밭을 팔았습니다. 그 밭을 산 사람은 그 보물을 찾았습니다. 그는 그 돈을 원하는 사람에게 이자를 받고 빌려 주기 시작했습니다.”
110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찾아 부자가 된 사람은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111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이 여러분 보는 데서 말려 올라갈 것입니다. 살아 계신 분으로 인해 사는 사람은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자기를 발견한 사람에게 세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112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에 의존하는 몸에 화가 있을 것입니다. 몸에 의존하는 영혼에 화가 있을 것입니다.”
113 그의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그 나라가 언제 올 것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온 세상에 두루 퍼져 있어 사람들이 볼 수 없습니다.”
114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우리를 떠나야 합니다. 여자들은 생명을 얻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그 여자를 인도하여 남자로 만들어 그 여자도 여러분 남자들처럼 살아 계신 영이 되게 하겠습니다. 스스로를 남자로 만드는 여자가 천국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 오강남, <또 다른 예수>; Thomas O. Lambdin 외 번역본; <도올도마복음한글역주> 참조

107. (* 유사병행구: 마태 18:12~14, 누가 15:4~7)
* 양 한 마리의 의의: ‘길 잃은 양’ 이야기로 매우 익숙하다. 마태는 바리새인들을 질책하는 맥락에서 죄인을 구하러 온 역할을 강조하고, 누가는 제자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한 영혼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마태와 누가는 공통적으로 양 100마리 모두에 대한 관심의 맥락에서 단 한 마리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보편주의적 가치를 보여 주고 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도마의 이 구절은 그와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다. 아흔아홉 마리보다 한 마리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다. 아흔아홉 마리와 비교가 안 되는 한 마리이다. 이 이야기는 8절의 물고기들 가운데 큰 물고기 하나 고르는 어부 이야기, 76절의 진주를 발견한 상인 이야기와 상통한다. 결국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일상적 자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군중 속에 파묻혀 사는 비본래적 자아를 말하는 반면 한 마리는 본래적 자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진정으로 아버지와 하나된 삶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그 의미를 연상시킨다. 도마복음과 다른 복음서의 전승의 관계를 감안하여 도마의 전승이 본래적이고 다른 복음서의 전승이 변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면, 다른 복음서의 변용은 탁월한 창조적 변용이라 할 것이다. 많은 경우 왜곡을 동반하였지만 이 경우에는 다른 차원으로 의미를 증폭시켰다.

108.
* 내 입으로부터 마시는 사람: 도마복음이 어록을 그저 임의로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전체 구조상 어떤 논리적 심화 과정을 유념하며 기록한 것인지는 더 탐구되어야 할 과제이지만, 이 구절은 도마복음의 주제 의식을 확연하게 드러내면서 어떤 결론을 암시하고 있다. ‘내 입으로부터 마시는 사람’은 13절에 나오는 도마처럼 예수님에게서 솟아나오는 샘물을 마시고 취한 사람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곧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을 뜻한다. 그 사람은 곧 예수와 같이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예수가 그와 같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구원 혹은 깨달음의 상호적 차원을 말한다. 대상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는 차원을 말한다. 역시 13절에서 깨달음에 이른 도마에게 예수께서 더 이상 ‘선생’이 아님을 선언한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사제관계를 넘어선 동격 및 일체의 관계이다. 그때에 비로소 모든 것의 이치가 제대로 보이리라는 것을 말한다.

109. (* 유사병행구: 마태 13:44)
*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도 모르고 밭을 가는 사람: 난해한 구절이다. 많은 경우 마태복음의 병행구에 의존하여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곧 보물을 발견한 것에 초점을 맞추는 해석이다. 이 해석은 도마복음 76절의 진주를 구한 상인 이야기에 의해서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도마복음의 이 구절은 그와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정적인 단서로 ① 도마복음이 일관되게 비유의 대상을 인격적 주체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 ② 이자놀이에 대한 예수의 부정적 인식과 언급(95절)을 들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유의 대상을 인격적 주체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나라’는 우연히 보물을 발견한 사태가 아니라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도 모르고 밭을 경작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물론 비유란 그 비유가 묘사하는 내용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 가운데 하나의 초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지만, 이 단서들을 고려할 때 이 비유는 마태의 병행구절이나 76절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비유는 97절의 빈 항아리를 이고 가는 여인의 비유와 상통한다. 또한 이솝우화 가운데 훌륭한 농부 이야기와 상통한다. 한 농부가 자식들이 농사를 익히도록 밭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 말하자 자식들은 열심히 밭을 가는데 보물은 나오지 않고 그 밭이 몇 배의 수확을 안겨 주었다는 이야기로, 수고로부터 얻은 것이야말로 진정한 보배라는 것을 일깨우는 이야기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우연히 보물을 횡재한 사람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물에 아랑곳하지 않고 농사를 짓고 그 농사의 터전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여일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이야기로 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 여일한 삶의 과정에 있지 횡재한 보물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110.
* 세상을 발견한 부자: 도마복음에서 ‘세상’은 대개 부정적으로 언급된 경우가 많다. 27절에서 세상에 대한 금식, 56절에서 시체와 같은 세상, 80절에서 몸으로서 세상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염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를 부정한다는 것은 새삼 말할 것 없다. 그런데 여기서 ‘세상’이 그 부정적 의미의 연장선상에 있는지 아닌지는 더 깊이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은 세상에 대한 부정을 말하고 있기에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단순 부정이 아니라 모종의 점층법을 사용하고 있을 수 있는 점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특히 ‘부자’와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81절에서도 부자가 언급되고 있고, 역시 결론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그 구절에서는 분명히 점층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상’과 ‘부자’가 결합된 이 구절은 각기 두 개념이 함축하는 바에 따라 네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지닌다: ① 세상의 부정 + 물질적 부자 + 세상의 부정 → 단순논리, 세상의 부정은 당연, ② 세상의 부정 + 영적 부자 + 세상의 부정 → 이미 부정된 세상을 또다시 부정하는 부자연스러운 논리, ③ 세상의 긍정 + 물질적 부자 + 세상의 부정 → 질적 전환을 동반한 고차원의 논리, 유익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부정해야 할 것, ④ 세상의 긍정 + 영적 부자 + 세상의 부정 → 부자연스러운 논리. 언뜻 보기에 이 구절은 ‘세상의 실상을 알고 깨달음에 이르렀으니, 세상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②)처럼 보일 수 있으나, ‘세상의 유익한 가치를 통해 부유하게 되었더라도 그것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③)으로 보는 것이 극대화된 의미로서 적절해 보인다. 어쨌든 결론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으나,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깨달음의 과정은 차이가 있다.

111. (* 유사병행구: 마태 24:35, 누가 21:33)
* 자신을 발견한 자: 이 구절은 세상보다 더 중요한 자기 자신에 대한 발견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앞 구절과 대비되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앞 구절이 세상이 어떤 유익함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부정해야 할 것이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발견은 세상에 대한 발견과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말려 올라가는 상황은 종말을 암시한다기보다는 뒤에 이어지는 말과 연결된 수사로서, 마태 및 누가의 유사병행구와 같은 의미이다. 곧 천지가 사라진다 해도 살아 계신 예수와 일체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진실은 변함없다는 것이다. 1절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환기한다. 이 점에서 도마복음 결론부의 이 구절은 처음 던졌던 이야기를 다시 확인하고 강조하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록의 무작위적인 배열이 아니라 의미의 심화를 유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육체의 죽음을 부정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진정으로 삶답게 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세상을 지배하는 질서, 곧 부정되어야 할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112.
* 영혼에 의존하는 몸, 몸에 의존하는 영혼: 인간이 몸과 영혼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이해되고 있고, 그 몸과 영혼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상식에 비추어 볼 때 난해한 구절이다. 87절에서는 몸에 의존하는 몸의 비참함, 그리고 그 둘에 의존하는 영혼의 비참함을 말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대개 이해할 수 있다. 몸에만 의존하는 육체적·물질적 삶과 그것에만 의존하는 영혼의 비참함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와 대극을 이루는 한 가지 차원, 곧 영혼에 의존하는 몸의 부끄러움을 말하고 있다. 결국 그 의미는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삶의 차원은 모두 부끄러운 것이라는 뜻이다. 정확히 말해 ‘몸에만 의존하는 영혼’이나 ‘영혼에만 의존하는 몸’ 모두 불행하다는 것이다. 상호의존과 합일이 아니라 일방적 의존관계의 불행함을 말한다. 결국 영육 이원론의 극복을 말한다. 진정으로 하나된 자를 환기해 주는 구절이다.

113. (* 유사병행구: 누가 17:20~21)
* 세상에 편재하는 아버지의 나라: 도마복음이 임의적인 기록이 아니라 모종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편집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이 대목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도마복음의 서두(3절)에서 언급된 아버지의 나라가 마지막 이 대목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를 다시 일깨워 주고 있다. 다만 3절에서는 공간의 맥락에서 다뤄지고 있다면 여기서는 시간의 맥락에서 다뤄지고 있다. 아버지의 나라, 하나님 나라, 하늘 나라를 별도의 공간이나 별도의 시간으로 한정하는 인식을 거부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실체화된 인식의 거부이다. 공간상으로든 시간상으로든 실체화하는 인식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저세상도 아니요, 이 세상의 종말도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는 온 세상에 두루 퍼져 있을 뿐이다. 112장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몸과 영혼이 분리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나라는 이 세상과 분리될 수 없다. 천국과 세상은 하나이다. 명확하게 이원론적 사유를 거부하고 있다. 세상에 편재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식은 실천이성적 차원에서 삶의 결단을 촉구한다. 어디로 가야 하거나 언젠가 맞이하게 될 실체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삶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삶으로 살아야 하는 과제를 망각하고 엉뚱한 데서 하나님 나라를 찾으려 하니 보이지 않는다는 일갈! 예수의 이 말씀은 죽비가 아니라 가히 몽둥이질!

114.
* 여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통념의 전복: 113절의 장엄한 결론 뒤에 붙은 이상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후대의 첨가구로 도마복음을 훼손한다는 견해도 있으나, 깊은 뜻을 새기자면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여기서 베드로는 당대의 통념을 대변하고 있다. 여자는 제자들의 무리에서 떠나야 한다는 견해는 여자는 생명을 얻을 자격이 없다는 당대의 통념을 반영한다.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유대인들의 기도, 남자와 짐승 중간쯤으로 보는 플라톤의 여성관 등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예수는 당시의 그런 통념을 전복하고 있다. 예수는 여자도 살아 있는 영으로서 생명을 누릴 수 있고,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래도 걸리는 문제는 굳이 여자가 남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 점이다. 이 역시 당시 통념에 비추어 이해하면 그 진의를 알 수 있다. 당시 통념상 ‘남자’는 ‘완전한 인간’을 뜻하고 ‘여자’는 ‘불완전한 인간’을 뜻했다. 따라서 여자가 남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이야기는 22절에서 수컷은 수컷 같지 않게 하고 암컷은 암컷 같지 않게 해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 말씀의 뜻에 비추어 해석할 때 그 진의를 헤아릴 수 있다. 당시 통념을 반영한 일상 언어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분별, 나아가 그에 대한 위계적 차별관계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당시 통념상 가장 실제적이고 완고한 편견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세차게 몽둥이질하는 셈이다. 도마복음은 그런 통념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일관되게 강조한다. 그로써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 이상 도마복음 다시읽기를 마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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