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도마복음 다시읽기 14] 하나님 어머니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3-20 16:25
조회
192
2024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도마복음 다시읽기
2024년 3월 6일~27일 4주간 매주 수요일 저녁 7:00~8:30
최형묵 목사

14강 (3/20) 하나님 어머니

100 그들이 예수께 금전 한 닢을 보이고 말했습니다. “황제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세금을 요구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드리고, 나의 것은 나에게 주십시오.”
101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가 하는 것처럼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내가 하는 것처럼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는 나에게 [죽음을 주었고]{거짓을 주었지만}, 나의 참 어머니는 나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102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재앙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소 여물통에 누워 있는 개와 같습니다. 자기도 먹지 않고 소도 먹지 못하게 합니다.”
103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이 어디로{어느 시점에 어디로} 들어올지 아는 사람은 다행입니다. 그리하면 그가 일어나 힘을 모아서 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4 그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오십시오. 오늘 저희와 함께 기도하고 금식합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범했습니까? 내게 무슨 잘못이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신랑이 신방을 떠날 때 저들이 금식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105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는 사람, 그가 창녀의 아들이라 불릴 것입니다.”
106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둘을 하나로 만들면 여러분은 사람의 아들이 됩니다. 여러분이 ‘산아, 움직여라.’고 하면 산이 움직일 것입니다.
- 오강남, <또 다른 예수>; Thomas O. Lambdin 외 번역본; <도올도마복음한글역주> 참조

100. (* 유사병행구: 마가 12:13~17, 마태 22:15~22, 누가 20:19~26)
* 황제의 것, 하나님의 것, 그리고 나의 것: 공관복음서의 유사병행구들은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맥락이 유사하고, 따라서 그 의미도 비교적 분명하다. 물론 그에 대한 해석이분분하고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적 상황에 휘말리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의중을 포기하지도 않은 현명한 답변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곧 로마당국에 빌미를 주지도 않고, 유대주의자들을 거스르지도 않은 현답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것을 분명히 말함으로써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근본적 인식의 태도 또한 피력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다른 공관복음서에 등장하지 않는 ‘나의 것’에 대한 언급으로, 이 구절은 매우 해석하기 어려운 난문이 되어버렸다. 공관복음서의 대립구도를 그대로 전제하는 가운데 ‘나의 것’이 뜻하는 바를 해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 나타내는 차원을 한층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곧 ‘내가 하나님의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나의 길을 따르라’는 정도의 의미로 새겨볼 수도 있다.
그러나 ‘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각각 로마주의와 유대주의를 나타내고, 따라서 부정해야 할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라 본다면, 이 구절은 초점은 전적으로 ‘나의 것’에 있다. ‘하나님의 것’이 부정적인 의미로 유대주의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도마복음에서 ‘하나님’이 줄곧 ‘아버지’로 표현되고 있는데 반해 이 대목에서 낯설게 등장하는 데 있다. 여기서 로마주의는 당시 금전이 나타내는 바, 곧 황제의 초상과 함께 ‘티베리우스 가이사, 하나님이 되신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신성한 황제’(앞면), ‘최고의 제사장’(뒷면)이라는 문구가 나타내듯 신성화된 로마제국 황제의 권력, 로마제국의 질서를 말한다. 유대주의는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제의적 질서를 나타낸다. 이렇게 보면 둘을 모두 원주인에게 돌려주라는 것은 그로부터 해방되라는 것을 말한다. 결국 ‘나의 것’은 그것들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본문은 딜레마적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믿고 따르는 길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매우 급진적이고 전혀 새로운 차원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01.
* 하나님 어머니: 다른 공관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도마복음 고유한 말씀이다. 다만 도마복음 55절과 유사하고, 바로 앞의 99절과 그 의미가 통한다. 이기적 자아의 온상으로서 혈연적 가족관계를 부정했듯이, 바로 그런 의미에서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정하고 있다. 곧바로 이어지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듭난 자아, 새로운 가족관계를 이루는 근거로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말한다. 절대적 신성을 말한다고 할까? 다음 구절이 흥미롭다. 죽음을 준 어머니와 생명을 준 어머니를 대비한다. 혈육상의 어머니와 영적인 어머니를 말하는 것으로, 절대적 신성을 ‘아버지’로만 말하지 않고 ‘어머니’로 말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신성에 대해서도 양성을 인정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도 성령은 여성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서방교회에서 라틴어가 공식언어로 사용되면서 남성(Spiritus Sanctus)으로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102. (* 유사병행구: 마태 23:13, 누가 11:52)
* 소 여물통에 누워 있는 개: 이 이야기는 당시 헬레니즘 세계에서 널리 알려진 속담으로, 이솝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예수의 언행은 유대교의 정신사적 맥락에 있기도 했지만 동시에 헬레니즘의 정신사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었다. 예수에게 공유되고 있는 헬레니즘의 정신사적 전통을 주목할 것 같으면 예수의 언행은 견유학파 철학자들과 매우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구절은 그 측면을 아주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구절은 다른 복음서에도 유사병행구를 갖고 있지만, 도마의 이 구절이 속담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반면 유사병행구들은 보다 해설적이다. 또한 이 구절은 도마복음으로서는 드물게 바리새인들을 직접 언급하고 있는 경우로 39절과 유사하다. 도마복음서는 특정한 부류의 오류만을 문제시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범할 수 있는 오류와 동시에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을 강조한 까닭에 특정 집단을 비방한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으나, 이 구절은 바리새인들을 꼬집어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을 통해 보더라도 바리새인들이 진리의 걸림돌이 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비유적인 이 이야기는 자신도 진리의 깨우침에 이르지 못할 뿐 아니라 남들도 진리의 깨우침에 이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꼬집고 있다.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진리와 거리가 먼 사람들의 행태이다. 오늘 그런 부류는 너무 흔하게 볼 수 있다. 진리는 독점의 대상이 아니라 개방의 대상이다. 교회의 강단은 목사의 독점물이 아니라 모든 회중에게 개방되어야 할 것이다. “설교강단은 어디까지나 대중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목사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대형교회일수록 그런 착각이 심한데, 그런 목사님들은 모두 여기서 말하는 ‘여물통에서 잠자고 있는 개들’이다”(도올).

103. (* 유사병행구: 마태 24:43~44, 누가 12:39~40)
* 도둑이 어디로 들어올지 아는 사람: 다른 복음서들의 병행구들은 종말론적 색채를 분명하게 띠고 있는 반면 도마복음의 이 구절은 그 색채가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 ‘어디로’(오강남)로 번역된 콥트어 단어가 시·공간을 동시에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음(도올)에도 불구하고 도마복음의 이 구절이 종말론을 전제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도마복음의 전반적인 맥락에서 볼 때 도둑은 외재적 대상이 아니라 ‘참 나’에 대한 깨달음을 가로막는 내적 욕망이라 할 수 있다. 곧 집에 도둑이 든다는 것은 영혼이 거하는 집인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 영혼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 도둑은 우리 몸의 가장 취약한 구석을 통해 침입한다. 그러므로 늘 그에 대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104. (* 유사병행구: 마가 2:18~20, 마태 9:14~15, 누가 5:33~35)
* 금식과 기도가 필요할 때: 다른 병행구들이 특정한 맥락에 배치되어 있는 반면 이 구절은 제자들의 요청에 즉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당시 형식화된 의례로서 금식과 기도를 하고 있는 집단은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 집단이었다. 예수의 도반들 또한 그 관습에 일정한 영향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6절과 14절에서 기도와 금식을 금했던 이유가 여기에서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여기서 청유와 응답이 이뤄지는 상황을 상상해보면 청유하는 제자들이 무척 무안해질 수밖에 없다. 예수는 종교적 의례가 행해지는 맥락의 바탕에 깔린 ‘죄의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예수는 바로 지금 당신의 상태, 또한 바로 당신과 함께하고 있는 제자들의 상황을 신랑이 신방에 있는 상황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합일을 결혼 또는 신방에 드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익숙한 은유이다. 하나님과 진정한 합일의 경지에 있는 사람에게 종교적 의례로서 기도와 금식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도와 금식은 신랑이 신방을 떠날 때나 필요하다는 언급은 장차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보다는, 지금 그러한 때가 아닌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일갈하는 데 그 근본 뜻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의식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됨을 강조한다. 곧 인간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 타력 구원을 믿는 ‘오만’과 자력 구원을 믿는 ‘겸손’: 도마복음을 공부하면서 떠오르는 현실의 아이러니이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가 인간의 한계를 강조한 반면 도마복음이 말하는 예수의 가르침은 인간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이른바 타력 구원과 자력 구원의 대비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타력 구원을 믿는 이들에게 ‘오만’이 두드러지고(소 여물통에 드러누은 개 모양), 정반대로 자력 구원을 믿는 이들에게 ‘겸손’이 두드러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마주한다. 왜 그럴까?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 또는 ‘이미 도달한 길’과 ‘멀지만 가야 할 길’의 차이 아닐까? ‘이미 구원이 성취되었으니 우리는 못할 것이 없다’는 인식과 ‘아직 구원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언제나 자기성찰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의 차이일까?

105.
* 창녀의 아들: 상당히 거북스러운 비유이다. 이 이야기에는 당대의 신화적 관념과 풍속에 따른 통념이 착잡하게 얽혀 있다. 마술사 시몬이 데리고 다니는 창녀 헬레나 이야기(천상의 존재에서 지상의 존재로 갇혀 세상의 모든 자식을 낳은 여자)에서 볼 수 있는 신화적 관념, 또한 사랑 없는 성관계에 관한 통념, 아비를 모르는 자식을 낳은 창녀에 관한 통념 등이 반영되어 있다. 예수 자신도 로마병정 판테라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전설도 있다. 그 배경에 복잡한 신화적 관념 내지는 풍속에 따른 통념이 깔려 있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의 의미는 다른 본문에 비추어 헤아려 볼 수 있다.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만을 아는 데 그친다면 창녀의 아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 아닐까? 101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해야 한다는 것과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대비되는 의미, 그리고 낳아준 어머니와 참 생명을 준 어머니가 대비되는 의미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또한 곧바로 이어지는 106절의 ‘사람의 아들’과 대비되는 의미의 ‘창녀의 아들’의 의미를 생각하면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다. 육체의 한계 안에 갇힌 인간의 삶을 말한다.
그러나 정반대로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절대적 신성을 말한다면, 그것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서 예기치 못한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거꾸로 ‘애비 어미도 모르는 호로자식’이라 비방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106.
* 사람의 아들: 둘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은 도마복음서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초점이다. 영적 자아와 일치되는 삶이다. 아버지와 하나 되는 나, 곧 ‘제 나’를 극복한 ‘얼 나’(다석)를 말한다. 그때 비로소 진정한 ‘사람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86절에서 말하는 ‘사람의 아들’과 일치한다. 그것은 예수 자신을 일컫는 말이며 동시에 진정으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모든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육적 주체와 영적 주체, 육체적 존재와 영적 주체의 합일, 또는 물리적 세계와 영적 세계의 합일을 말한다고 할까? 그때 세상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신학자 폴 니터는 1980년대 엘살바도르에서 독재권력에 의한 학살이 자행되고 있을 때 ‘살바도르의 평화를 위한 크리스천’ 활동을 하던 중 명상을 하고픈 마음과 현지에 가서 살인을 멈추게 하고픈 마음의 충돌을 느꼈지만, ‘그 둘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는 말하기를, “예수 종교의 위대함은 그의 가르침이 우수한 데 있지 않고, 그의 인식이 하나님의 그것과 하나라는 것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끝마친 짧은 삶에서 사람이 실현할 수 있는 모든 정신적 발달을 체현하는 데 있었다.”고 했다. 최근 철학자 김상봉은 『영성 없는 진보』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와 관련하여,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사랑,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 즉 ‘영성’의 회복을 역설한다.


* 15강(3/27) 세상에 편재하는 하나님 나라 - 107~114, 다음 주에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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