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도마복음 다시읽기 13] 왜 찾지 않느냐?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3-13 15:52
조회
54
2024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도마복음 다시읽기
2024년 3월 6일~27일 4주간 매주 수요일 저녁 7:00~8:30
최형묵 목사

13강 (3/13) 왜 찾지 않느냐?

92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십시오. 그러면 찾을 것입니다.”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전에 나는 여러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내가 대답하려 하는데, 여러분은 물어보지 않습니다.”
93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마십시오. 개들이 이를 거름더미에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마십시오. 돼지들이 이를 {부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94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는[찾는] 사람은 찾을 것입니다.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열릴 것입니다.”
95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돈이 있으면 이자로 빌려 주지 마십시오. 오히려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주십시오.” * 이상 { }는 훼손된 부분을 복원한 것.
96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작은 양의 누룩을 가져다가 반죽에 넣어 큰 빵을 만드는 여인과 같습니다. 두 귀를 가진 이들은 들으십시오.”
97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곡식[밀가루]이 가득한 항아리를 이고 가는 여인과 같습니다. 먼 길을 가는 동안 항아리 손잡이가 깨져 곡식이 흘러내렸으나, 그 여인은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여인이 집에 이르러 항아리를 내려놓자 그 안이 비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98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힘센 자를 죽이기 원하는 어느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손수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시험 삼아 자기 집에서 그의 칼을 뽑아 벽을 찔러보고 나서야 그 힘센 자를 죽였습니다.”
99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형제들과 어머님이 밖에 서 계십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들이요 내 어머니입니다. 그들이 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 오강남, <또 다른 예수>; Thomas O. Lambdin 외 번역본; <도올도마복음한글역주> 참조

92. (* 유사병행구: 마태 7:7, 누가 11:9)
* 찾지 않는 어리석음, 의심을 폐기한 종교: 다른 복음서에 유사병행구가 등장하지만 아주 딴판이다. 다른 복음서가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말한다면 도마복음은 찾고자 하는 이들 내면의 노력을 말한다. 다른 복음서가 구하면 주시고 그다음에 구하는 이가 발견한다고 한 것과 달리 도마복음은 구하면 곧바로 발견한다고 말한다. 도마의 일관된 관점으로, 흔히 교회에서 통용되는 속물적 신앙을 정당화하는 구절로 오용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따르는 도반들의 성장 과정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물음이 많았으나 그 물음들이 하잘것없는 것들이어 대답할 필요가 없었지만, 이제는 성장하여 답을 하면 알아들을 만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의문을 저버리고 자명한 듯이 여기는 도반들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끊임없는 의심과 물음, 찾음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찾지 않는 자만과 어리석음을 말한다. “물음이 대답을 결정한다.”(안병무). 의심 없는 믿음, 물음 없는 종교의 폐단이다. 도마복음은 이 대목에서 잘못된 믿음의 현실을 질타하며 새로운 장을 열어가는 예수의 말씀을 부각한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 문제의식과 직결된다.

93. (* 유사병행구: 마태 7:6)
* 찾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성서에서 ‘개’ ‘돼지’는 매우 부정적인 대상에 대한 은유로 사용된다. 마태의 병행구에서 ‘개’ ‘돼지’는 흔히 이방인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말씀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이방인 선교에 대한 거부감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다. ‘찾음’과 ‘물음’을 강조한 앞 구절과 직결되는 것으로, 찾지 않고 묻지 않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을 일깨울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일종의 엘리트주의를 말한다기보다는 수용력과 이해력의 차원을 말한다. 묻지도 않는 자에게 답할 수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진실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오용되는 진실을 말한다. 거룩한 것을 거름더미에 버린다는 것이나 부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은 그 뜻을 함축한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태이다.

94. (* 유사병행구: 마태 7:8, 누가 11:10)
* 끊임없이 찾음: 앞 구절들과 직결된다. 끊임없이 찾고 두드리라는 것이다. ‘구하면 받는다’, ‘찾으면 발견한다’, ‘두드리면 열린다’ 가운데 도마에는 ‘구하면 받는다’는 것이 없다. 능동적인 내면적 성찰과 노력을 강조하는 도마의 일관된 관점이다. 없는 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지만 미처 찾지 못했던 것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찾고 두드리는 노력이 없는 자는 마치 개나 돼지와 같다. 발견할 때까지 열릴 때까지 찾고 두드리라는 것이다.

95. (* 유사병행구: 마태 5:42, 누가 6:30 // 출애굽기 22:25)
* 돈을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돈을 주라: 이 말씀은 당대의 관습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예수의 견해를 보여준다. 돈을 빌려 줄 때는 이자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현실에서 그것을 거스르는 말씀이다. 축적금지와 이자금지는 구약성서부터 끊임없이 강조하는 계율이었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않았다. 예수는 다시 그 옛 가르침을 환기한다. 자기에게 쌓인 것을 움켜쥐지 않고 나눠줄 때 생명의 질서가 회복된다는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은혜의 참뜻이기도 하다. 이 가르침이 현실화하면 오늘의 자본주의, 특히 금융자본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 금융자본이 소멸된 자리에 생명이 싹틀 것이다. 성서의 이러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금융질서를 확립한 주역이 유대인들이고, 근대 자본주의가 서구 기독교사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이 말씀이 현실 비판임과 동시에 깨달음에 대한 은유라면, 그 깨달음을 전파하고 나누라는 것이다.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삶이다. “공부해서 남 주자!”

96. (* 유사병행구: 마태 13:33, 누가 13:20~21)
* 여인이라는 인격체에 비유되는 하나님 나라: 다른 유사병행구와 달리 아버지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가 어떤 사물이나 사태에 비유되지 않고 여인이라는 인격체에 비유되고 있다. 다른 복음서의 내용이 너무 익숙한 까닭에 그다지 놀랄 것 없는 비유로 여겨지기 쉬우나, 도마복음의 이 비유는 파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행동하는 인격체에 비유되고 있는 점은 하나님 나라가 곧 인격적 주체의 차원을 함축하는 것으로, 그 주체의 실천적 행동 가운데 있다는 것을 뜻한다. 더욱이 여기서 비유의 주체가 여인이라는 점도 주목거리이다. 스스럼없이 여인을 비유의 주체로 말했다는 것은, 예수를 따르던 도반들 가운데서 여인들의 적극적인 역할과 무관하지 않다. 이어지는 97절 비유의 주체, 그리고 101절에 등장하는 어머니로서 하나님을 암시하는 표현은 우발적이라 볼 수 없다. 교회의 시대 남성중심의 질서와는 다른 예수운동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가늠하게 해 주는 말씀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는 데 누룩을 언급하고 있는 것 또한 당시 통념에서 벗어나는 요소이다. 대개 부정적 의미를 상징하는 누룩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통념에 도전하고 있다.

97.
* 비워진 항아리: 도마복음에만 등장하는 비유로서, 역시 하나님 나라를 여인이라는 인격체에 비유하고 있다. 언뜻 보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도마복음의 전반적인 맥락에서 하나하나 어록이 선불교의 공안(公案)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헤아릴 때(하비 콕스), 이 말씀은 그 성격이 두드러진다. 그 점을 헤아리면 오히려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 이 비유에서 항아리가 비워진 상태는 결코 부정적인 어떤 사태로 이해할 수 없고 매우 적극적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빔’을 말하고 있다. 이 비유 역시 그 사태를 초점으로 하지 않고 그 사태를 발견한 여인에게 초점이 있다는 점에서, 가득 채워졌던 항아리가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여인의 발견(깨달음)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밀가루를 항아리에 가득 담고 집에 가서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한 여인의 정황을 상상할 때 그 의미를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밀가루로 온갖 음식을 만들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누구를 탓할 수도 없게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다 사라져 버린 상태이다. 그때 누구나 허탈해하겠지만, 예수는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고 있다. 온갖 상념과 걱정거리가 부질없이 되어 버린 사태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이 곧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케노시스’(자기비움)의 의미와 통한다. 도마복음의 핵심적 메시지이다. 모든 욕망에 말씀을 덮어씌우는 태도가 아니라, 모든 욕망을 비우고 그 빈 자리에 말씀이 자리하게 하는 태도라 할 것이다.

98.
* 이기적 자아와의 싸움: 여기서도 비유는 사태가 아니라 인격적 주체에 초점이 있다. 여기서는 남성 주체로, 힘센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다. 비유라 해도 이렇게 폭력적인 사태를 언급한 점은 놀랍지만, 그러기에 오히려 역으로 가필된 기록이 아니라 본래의 어록이었다고 볼 수 도 있다. 여기서 힘센 자는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것은 각기 내면의 이기적 자아를 뜻할 수 있고, 나아가 그 이기적 자아를 부추기는 세상의 힘을 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힘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방식에서 바로 앞 구절과 다소 다른 태도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앞 구절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도달하고 깨닫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면, 이 구절은 의도적인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일까?

99. (* 유사병행구: 마가 3:31~35, 마태 12:46~50, 누가 8:19~21)
*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 예수운동의 실제적 정황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보인다. 비범한 예수의 언행에 그 어머니와 형제들은 조바심을 가졌을 것이다. 예수는 이에 대해 모진 발언으로 기존의 가족을 부정하고 새로운 가족을 말한다. 그 새로운 가족이야말로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 선포한다. 새로운 가족의 유대를 이루는 근거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가 부정한 가족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혈연적 유대관계로 얽힌 가족관계이다. 예수는 그 혈연적 유대관계를 넘어 새로운 의지로 결합하는 관계를 지향한다. 다른 복음서와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수는 과연 혈연적 가족관계를 어떻게 체험했을까? 본문에 따르면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가족관계 자체를 송두리채 부정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부정했다면 ‘아버지’라고 했을까? 혈연적이고 인습적인 관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족관계를 지향한 것이다. ‘출가공동체’라고 할까?

* 14강(3/20) 하나님 어머니 – 100~106, 다음 주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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