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도마복음 다시읽기 12] 나는 불이다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3-06 21:03
조회
57
2024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도마복음 다시읽기
2024년 3월 6일~27일 4주간 매주 수요일 저녁 7:00~8:30
최형묵 목사

12강 (3/6) 나는 불이다

82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나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은 불 가까이 있는 것이고, 나에게 멀리 있는 사람은 그 나라에서 멀리 있는 것입니다.”
83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형상들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 형상들 안에 있는 빛은 아버지의 빛의 형상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의 빛은 드러날 것이지만, 그의 형상은 그 빛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84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닮은 모습을 보면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기 전부터 생겨서, 죽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여러분의 형상을 보면 얼마나 견딜 수 있겠습니까?”
85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은 큰 능력과 큰 부요함에서 생겨났지만, 그는 여러분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상대가 되었다면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86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지만 사람은 누워서 쉴 곳이 없습니다.”
87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몸에 의존하는 몸은 얼마나 비참합니까? 이 둘에 의존하는 영혼은 또 얼마나 비참합니까?”
88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자들[천사들]과 예언자들이 와서 여러분의 것을 돌려 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진 것을 그들에게 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스스로 말합니다. ‘그들이 언제 와서 그들의 것을 가지고 갈 것인가.’ 하고.”
89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잔의 바깥을 씻습니까? 안을 만드신 이가 바깥도 만드셨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90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로 오십시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다스림]은 가볍습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쉼을 찾을 것입니다.”
91 그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말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늘과 땅의 기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도 여러분 중에 있는 이를 알아보지 못하니, 지금 이 순간도 분별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 오강남, <또 다른 예수>; Thomas O. Lambdin 외 번역본; <도올도마복음한글역주> 참조

82.
* 하나님 나라의 불씨: 10절에서 세상에 불을 지피러 오신 예수 당신을 말하는 내용과 상통한다. 여기서 ‘불’은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으로 ‘내면의 빛’을 말한다. ‘빛’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밝힌다’는 데 초점이 있지만, 그 빛의 근원으로서 ‘불’은 기존하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원천적인 힘이다. 내면의 빛은 그만큼 강렬하다는 것이다. 신성과 동일시되는 그 ‘내면의 빛’, ‘참 나’에 가까운 것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는 것을 말한다.

83.
* 사람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 난해한 구절로 보이지만, 창세기 1장의 신화구조를 전제하면서 본문을 음미하면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가장 핵심적인 개념으로서 ‘형상’과 ‘빛’의 의미를 잘 새겨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외적 형상은 눈으로 볼 수 있지만 그 형상 속에 담겨 있는 내면의 빛은 그 빛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형상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신의 본성과 일치하는 인간의 내면의 ‘참 나’는 눈에 보이는 어떤 형태를 취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다음 구절은 언뜻 보기에 앞 구절과 상반된 논리를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인간의) 보이는 형상 가운데 있는 보이지 않는 빛’ 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형상 가운데 있는 보이는 빛’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피적인 언어의 논리 차원이 아니라 심층적인 그 의미의 차원에서 접근하자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곧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외적인 형태로 그릴 수 없지만(일체의 형상 금지), 빛으로 자신의 본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인간이 그릴 수 있는 신의 형상을 그려놓고 그에 집착하는 것의 무모함, 그것에 의존해서 자신의 참모습을 오해하는 믿음의 무모함을 말한다.

84.
* 보이는 형상과 보이지 않는 형상: 앞 구절과 계속 연결된다. 앞에서는 일반론을 말했다면 이 구절에서는 구체적인 청중, 곧 제자들을 겨냥해서 말하는 점이 다르다. 보이는 형상, 곧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보고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함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차원을 말하고 있다. 보이는 형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형상을 알아차렸을 때의 경이감을 말한다. 이 내용은 앞 구절의 보이는 인간의 형상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의 대비와 연계되어 있다.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는 인간의 형상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 형상은 나기 전부터 생겨 죽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지만 ‘자신’ 안에 있다. 아브라함이 탄생하기 전부터 계신 예수라는 말과 상통한다. 우주적 자아와 각 사람의 참된 자아가 일치하는 경지이다.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의 경이감은 2절에서 “찾으면 혼란스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면 놀랄 것”이라는 것과 상통한다.

85.
* 아담보다 위대한 사람: 창조신화의 구조가 계속되고 있다. 큰 능력과 큰 부요함 가운데 태어난 아담의 존재는 모든 인간 존재의 고귀함을 말한다. 그러나 그 아담은 평범한 모든 인간 존재를 상징할 뿐이다. 보이는 형상에 자족하는 인간이다. 예수를 따르는 도반들은 거기서 나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 곧 참나를 추구하는 이들이라는 점에서 아담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이다.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 예수에 대한 바울의 비교(로마 5:12~21)는 당대에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유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6. (* 유사병행구: 마태 8:20; 누가 9:58)
* 인간의 조건: 이 구절에서 사용된 ‘사람’의 의미를 헤아릴 필요가 있다. 정확하게는 ‘사람의 아들’ 곧 ‘인자(人子)’를 말한다. 이 개념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자신을 지칭할 때 쓰이며, 종말론적 맥락에서 메시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말은 특정한 호칭이라기보다는 그저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우나 새는 안주할 곳이 있지만 사람은 안주할 곳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여우나 새 등 금수(禽獸)는 이 세상의 것 이상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삶을 따르기에 이 세상 자체 안에서 안주할 곳을 찾지만, 인간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기에 이 세상에서 영원한 안식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과연 축복일까, 저주일까? 본문의 문맥상 그 의미는 축복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고단한 삶에 대한 탄식이라기보다는, 그러기에 인간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87.
* 몸에 의지하는 몸의 비참함: 여기서 몸은 일차적으로 몸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나아가 더 포괄적으로 물질적 삶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몸 그 자체로서 몸은 다른 몸일 수도 있고, 자신의 몸일 수도 있다. 다른 몸이라면 육식의 비극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예수 일행이 채식을 했다는 증거는 없고, 그렇게 보면 의미가 너무 협소해진다. 육체적인 삶, 나아가 물질적인 삶에만 매여 있는 몸의 비참함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앞 구절과도 상통한다. 물질적인 삶에만 의존하는 자기에 매여 있을 때 그 영혼은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몸’의 현실에 갇힌 ‘영혼’, 진정한 주체의 부재 상황을 말한다. 자기 삶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고 외부의 조건과 시선에 매여 사는 삶의 비참함입니다. 도마복음은 죽은 것을 먹을지라도 죽은 것을 살아나게 하는 경지(11절)를 일깨운다.

88.
* 천사들 및 예언자들과 주고받는 것: 난해한 구절이다. 도대체 무얼 주고받는다는 것일까? 특별한 사람들이 뭔가를 주었는데, 그것은 이미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들로서, 도마복음의 일관된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내면의 빛을 일깨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그에 고마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깨달음을 하게 해 준 사람에게 주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일단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들 사이에서의 상호교통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천사들과 예언자들이 가져가야 할 그들 자신의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렇게 자신들의 것을 가져가는 것이 어떤 사태를 말하는지는 쉽게 헤아리기 어렵다. 처음에는 천사들과 예언자들의 도움으로 깨달음에 이르렀던 이들이 오히려 천사들과 예언자들로 간주되는 이들을 깨우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도올)는 것일까? 높은 경지에 있는 이들이 깨우침을 줬는데, 거꾸로 그렇게 해서 깨우침을 얻은 이들이 다시 높은 경지에 있던 이들을 다시 깨우치게 하는 상황이다. 천사와 예언자들보다 못했던 도반들이 천사들과 예언자들보다 우위에 서는 상황이다. 커뮤니케이션이 동일한 수준에 머물지 않고 상승작용을 하는 경우이다. ‘여러분이 옛 위인들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새길 수 있다.

89. (* 유사병행구: 마태 23:25~26; 누가 11:39~41)
* 잔의 안과 밖: 다른 복음서에도 유사병행구가 등장하고 있고, 그 의미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유대교의 정결예법에 따른 외면적 정결이 아니라 진정한 내면의 정결을 말한다. 그러나 외면에서 내면으로의 전환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정한 내면과 외면의 일치를 추구하는 말씀이다. 자연스러운 마음의 발로로서 행위를 일깨운다.

90. (* 유사병행구: 마태 11:28~30)
* 내게로 오라: 유사병행구가 마태복음에 등장하지만, 많은 점에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우선 초청대상이 다르다. 마태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지만 도마에서는 ‘누구나’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당되는 것으로 보편적 인간실존을 함축한다. 초대에 응한 결과를 가져오는 주체가 다르다. 마태에서는 ‘쉬게 할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도마에서는 ‘쉼을 찾을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한 문장형태의 차이를 넘어 마태와 도마의 신학적 입장 차이를 함축한다. 믿음의 대상을 추구하는 신학과 스스로 궁극적 목적을 향해 나가는 태도를 역설하는 신학의 차이이다. 또한 멍에와 짐[다스림]에 관한 마태의 부연설명과 도마의 간결한 언명도 차이가 있다. 이것은 발화자 곧 예수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과 예수를 따르는 길에서 누리는 삶의 실제를 강조하는 것의 차이를 함축한다. 여기서 ‘멍에’와 ‘짐’[다스림]은 보편적 인간실존을 함축한다. 멍에는 소가 일할 때 매는 도구로서, 상징적 의미로는 어떤 권위에 복속하는 것을 뜻한다. ‘짐’ 또는 ‘다스림’으로 번역된 말은 ‘멍에’의 상징적 의미에 곧바로 상응한다. 땅 위에서 몸을 지니고 어딘가에 귀속되어 물질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존이다. “인간에게 몸이 없다면, 도대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노자). ‘쉼’은 궁극적으로 그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하지만, 여기서 예수는 멍에와 짐을 벗어버릴 수 있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가벼운 멍에와 짐을 지고 쉼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 무거운 굴레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볍고 즐겁게 향유되는 상태이다. 자신을 위한 진정한 쉼이다. 멍에가 일상적 삶의 조건이라면 그것에 매이는 삶이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는 삶이다. 그 멍에가 상징적인 의미로서 어떤 권위를 말한다면 자신의 삶을 속박하는 어떤 외적 권위가 아니라 거꾸로 자신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해 주는 권위를 말한다. 안식일을 위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안식일, 종교를 위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종교를 말한다.

91. (* 유사병행구: 마태 16:1~3, 누가 12:54~56)
* 당신은 누구신지: 다른 복음서의 병행구와는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우선 청중이 다르고 무엇보다도 종말론적 맥락이 제거된 점이 다르다. 흥미롭게도 도마복음에서 ‘믿음’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통상적인 교리적 믿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이에 대한 신뢰를 뜻한다. 예수 앞에 선 이들은 예수를 믿기 위해 정체를 밝혀줄 것을 요구하지만, 예수는 말로써 자신을 밝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서 있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느냐 일갈한다. 하늘과 땅의 기상을 알아본다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헤아릴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말한다. 그런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지금 바로 자신들의 눈앞에 선 존재를 알아차려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한 상황을 질타하고 있다. 구구한 언어를 넘어선 직관과 깨달음을 말한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이를 알아본다는 것은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그를 알아볼 만한 내면적 성찰에 이르렀을 때 가능하다. 자신들 가운데 살아 있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질타하고 있다.

* 13강(3/13) 왜 찾지 않느냐? – 92~99, 다음 주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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