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몸으로 오신 하나님 - 요한복음 1:14[김경호 목사]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2-14 13:22
조회
5592
2017년 1월 1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몸으로 오신 하나님
요한복음 1:14
김경호 목사(들꽃향린교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8년간 오직 사심없이
첫째, 남이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사니 자존심이 없습니다. ,
둘째, 자기 아버지의 명예까지 다 말아 먹었으니 효심이 없습니다.,
셋째, 국민들이 아무리 외쳐도 들어먹지를 않으니 민심이 없습니다.
넷째, 사람의 꼴을 하고 있으나 인간의 마음이 없으니 인심이 없습니다.
그는 분명 사심이 없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박근혜가 그렇게 감추려고 노력한 일이 세월호 7시간인데 지금 온 국민이 가장 궁금해하는 제일의 관심사가 되었다. 박근혜가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기를 쓰고 국정교과서까지 추진했는데 반대로 지금 박근혜는 물론 박정희에 대한 허상이 벗겨지고 있다. 그렇게 공들여 가꾼 얼굴인데 온 국민이 보기 싫어한다. 제가 낙서를 해보았다.

얼굴평전/ 김경호

임기내 공들여 가꾼 얼굴
세월을 거꾸로 흘러
주름은 펴져 하얗고 뽀얗구나

어린생명들이 마지막 숨 몰아쉬는 시간에
비상상황에 걸맞는 머리를 연출하여
문화융성의 창조력을 선보일 골든타임으로 삼았으니
비명에 가신 어머니를 빼올린 머리에선
엄마, 아빠 부르는 외마디들
비명 같은 기도가 들려온다

백옥주사, 마늘주사, 태반주사
치받친 그 얼굴의 본모습은
살림살이 무너져 내린 민중의 고혈이며,
물대포 맞아 쓰러진 농민의 절규이다.
하루 이교대 잔혹 노동으로
반수가 병들어 일그러진 유성기업 노동자의 얼굴이다.

송로버섯, 캐비어
멸종위기의 상어지느러미 요리
새누리의 무리들과 청와대의 한낮 상차림은
깎아버린 유아들의 누리예산이며
몰표얻고 뺏어버린 기초노령연금이고
송파구 세모녀가
‘죄송하다’며 남기고 간 공과금 봉투의 잔치이다.

발길 머무는 곳마다 화장실을 바꾸고
남이 쓴 변기는 앉지 못하는 특급 엉덩이
700만원짜리 침대
550만원짜리 책상
90만원짜리 화장실 휴지통
박정희의 똥은 역사교과서로 꾸미고
제 똥은 변기로 숨기려 했지만
감출수록 드러나고 꾸밀수록 추하구나

한해에 지은 새 옷만 122벌
한번만 입고 버려진 옷이 40여벌
휘두른 솔로몬의 영화는
개성공단 문닫은 공로로 얻은 휘장이며
망국의 미사일 댓가로 받은 포상이다.
들에 핀 꽃들은 뭉개고 뽑혔지만
사심없이 임한 18년 공생활의 치적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펄럭인다.

조작하고 꾸며낸 정치처럼
가방먼저 치켜올린 모델 코스프레의 정상회담
그렇게 경제살리기에 매진했건만
돌아온 것 탄핵이요 이백만 촛불이니
억울함에 피눈물이 난다하나
이 땅의 민중은 눈물이 말라 생피를 흘리도다

힘주어 가꾸었으나 모두가 싫다하고
그리 예뻐지려 했으나
쇠창살 독방에는 아무도 보아줄 이가 없구나

툭불거진 노동자의 손마디가
햇빛에 그을린 농민의 검은 얼굴이
검버섯에 주름진 노모의 얼굴이
더욱 그립고 아름다워 눈물짓는다

지금 대한민국은 광장의 정치가 모든 정치를 끌고가고 있다. 광장은 정확하다. 정당이나 언론은 통제가 가능하지만 광장에 모인 민의 입은 통제할 수가 없다. 삼성 백혈병 환자가 나와서 말한다. “최순실에게는 수백억 부정한 돈을 주면서 자기 공장에서 생긴 백혈병 환자는 단돈 5백만원으로 입막음 했다.” 고등학생이 나와서 외친다. “누구는 한해에 15일 간 학교를 나가면서도 일류대학을 쉽게 가는데 왜 우리는 입시 때문에 자살하는 세상을 만들었느냐”고 어른들에게 치는 호통은 통렬하다. 밑바닥을 살아가는 민초들의 함성이 터져나오고 있다. 이런 소리들 바닥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가 진짜 왜곡되지 않은 민심이다.

제가 시무하던 향린교회는 6월 항쟁의 출발지였다. 당시 집회가 엄격히 통제받던 때인데 어느날 새벽에 교회로 전국의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그 자리에서 6월 항쟁을 이끈 국민운동본부가 조직되고 6월 항쟁의 투쟁방법들이 결정되었다. 항쟁이 전국에서 불길처럼 타오르자 노태우가 나와서 직선제 수용등 6.29선언을 하였다. 온 국민이 환호하고 국민운동본부까지 승리라고 외치며 집회를 마무리 하였다. 당시 홍근수 목사님은 땅을 치면서 슬퍼하셨다. 이제 국민들이 벼랑끝 까지 몰고 왔는데 노태우랑 전두환이 무엇이 다르다고 여기서 멈춘다는 것인가? 한발만 더 밀면 아예 끝장 낼 수 있는데 그리고 새로운 틀을 짜야 하는데 너무 답답하다고 한탄하셨다. 6월 항쟁은 불완전한 혁명이었다. 얼굴이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바뀌었지만 그 정권의 기득권틀은 그대로였다. 노태우 다음에 야당에는 김대중 김영삼들 막강한 지도자가 있었지만 여권에 이렇다할 인물이 없자 야권의 김영삼을 3당 합당으로 끌어들여 다시 간판을 김영삼으로 바꾸었지만 역시 지배구조는 그대로였다. 역사의 기회마다 한번도 기득권은 물러난 적이 없다.

6월 항쟁이 불완전한 혁명이었기에 청산되어할 사람들이 계속 권력을 잡고 심지어는 야권으로도 들어와서 혼선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 이후 30년 동안 대한민국의 정치가 이렇게까지 망가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기에 이번 촛불 항쟁이 하도 거세니 지금 기득권들이 잠시 눈치보고 있는 주춤정국일 뿐이다. 탄핵 결정이 되었다는 것 외에 하나라도 바뀐 것이 있는가? 만약 광장의 촛불이 조금이라도 약해지는 기미가 보이면 이들은 그동안 숨죽여 오던 공작들을 일제히 재기하여 판을 다시 웅켜 잡으려 할 것이다.

혹자는 “아무리 많이 모인들 그냥 촛불들고 왔다갔다 한다고 무슨 해결이 되겠냐”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청와대, 정부, 새누리, 검찰, 언론, 재벌들은 숨어서 떨고 있다. 우리들은 별로 잃을 것이 없지만 그들은 한 번도 잃어 본 일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오금이 저리다. 돈으로 막아지지도, 회유할 수도 없는 괴상한 존재들이 외치는 걸러지지 않은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제까지 그들은 최고의 학벌을 가진 먹물들과 세치 혀를 가진 사람들을 수없이 매수할 수 있었지만 여긴 다르다. 그들은 소수를 매수해서 전체를 떡주무르듯 착취할 수 있었는데, 그게 그들이 말하는 소위 ‘법과 원칙’이었는데, 이 민(民)의 광장에서는 먹히지 않는다. 물론 그들의 능력은 탁월해서 광장도 매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다 매수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복지’이다.

의회정치, 대의민주주의는 광장의 정치가 사라지면 귀족화된다. 그들 자체가 다시 특권계급이 되어버리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지 않았나? 그런 상황에서 여야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여당은 아예 말할 가치가 없으니 정치가 이 모양이 되기까지 반역사, 반민중, 반통일, 반민주, 비인간적인 정책들이 난무할 때 여당은 그렇다 치고 이들과 싸우지 않는 야당이라면 무슨 야인가?

무슨 장외정치니 장내로 들어오라느니 하는 되지도 않는 이분법 논리로 여당이 야당을 길들여 왔다. 국회의원들은 장내에만 있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장외는 선거 때만 필요한 것인가? 왜 국회의원을 지역별로 직능별로 뽑는가? 각 지역, 각 직능별로 민심을 살피고 그들의 여론을 반영해서 국정을 운영하라는 것 아니가? 그런데 당선되면 장내에만 있어야 한다니 그에 길들여져서 고분고분해지면 야당이 아니다. 왜 야당(野黨)인가? 들판에 나와서 힘드니 야당이지, 들판에 나오지 않는 야당은 야당이 아니다.

쌍용차, 유성기업, 재능교육등 수많은 노동자가 7-8년 씩 거리에 나와서 외치고 3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씩 목숨을 끊고 유성기업은 일일 2교대로 노동자의 반수 이상이 병을 앓도록 그들을 대변하지 못하는 정치권이 무슨 소용인가? 그동안 엄밀히 말하면 대한민국은 아주 소수의 의원들이 현장과 호흡하려고 했을 뿐 길거리 외에는 정치가 없었다. 민이 버림받고 고아와 같이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을 때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

이 광장의 정치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적인 민주주의이다. 박정희가 말한 변칙 민주주의가 아닌 서구가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변질시킨 직접민주의의 아름다움을 이어가는 정치여야 한다. 광장의 소리만이 돈으로도 힘으로도 바꾸지 못하는 진리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삶이고 우리들의 눈물이다.

그들은 개헌에 말을 맞추고 있다. 개헌 좋다고 생각한다. 의회에만 모든 것을 맡겨놓는 대의민주제도는 직접민주제도에 의해 보완, 국민발안, 직접 법안을 발의할 수 잇게 또 국회의원이 잘못된 법안을 내면 이를 일정한 국민들의 서명과 국민투표로 무효화-그럼 함부로 엉터리 법을 올리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불공정한 선거법개혁과 다당제등을 위한 전면 비례대표제, 권력분산도 지방자치단체에 권력을 나누는 분권제도로 되어야 한다. 기업에 대한 징벌적 보상제도 등으로 재벌개혁이 이루어지게하고 공수처 신설해서 공직자, 검찰, 경찰, 국정원등 사정기관도 정화되도록 해야한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세력들이 개헌하자는 것은 이런 국민적 요구를 다 담아서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럴 마음이 없다. 단지 지금 자기들이 심판 받고 책임져야 되는 위기에 있는데 이를 개헌이라는 명분으로 오히려 권력을 나누어 먹자는 것이다. 시민이 차려놓은 밥상에 청산대상들이 숟가락들고 달려든다. 인적 청산이 우선이다. 지금의 친박이니 비박이니 하는 사람들이 지금 의석수 대로 힘을 행사하고 그 비율로 권력을 나누어 영구집권의 토대를 놓으려 하는 것이다. 새음식에 어찌 쓰레기를 함께 버무리겠는가?

광장의 정치는 민주정치의 근원
로마- 희랍- BC500년전 공화정-긍지-페르시아에 승전
민회- 에크레시아- 모든 중요한 결정, 대표선출, 심지어 왕까지도 선출
최고의 권력기관, 의회 불레, 원로원 자문기관
교회- 에클레시아- 시나고그
로마 시민- 특권- 재산, 자유인, 로마인, 남자, 성인
하나님 나라의 시민- 가난한자, 종, 유대인, 여자, 어린이

촛불이 계속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힘의 근원이 되어야 하는데 박근혜와 청와대가 아주 역할을 잘해주고 있다. 자기는 아무런 죄가 없다며 헌재에 소명서를 보냈고, 국회 청문회 증인은 휴가보내고 출석시키지 않았다. 국가안보니 비밀이니 하는 이유로 아무런 자료도 내놓지 않는다. 청와대를 찾아간 국회의원들은 문밖에서 돌려보내고 한낮 구치소에서 조차도 폭도 취급의 수모를 당한다. 이런 일들로 국민의 공분을 일으켜 주고 있으니 날씨가 추워 촛불이 꺼질세라 분노의 불을 계속 당겨주니 얼마나 감사한가(?) 촛불을 들라고, 계속들라고, 지치면 안된다고 부채질하는 셈이다. 바라기는 이 나라의 적폐가 완전히 청산되고 인적쇄신이 철저하게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버텨주기를 바란다. 박근혜가 덜컥 하야하면 그다음 바로 대선 국면으로 넘어간다. 그러면 낡은 세력들을 청산하는 것은 뒷전으로 가고 누구를 뽑느냐는 관심으로 넘어가 버린다. 새로운 역사는 선(善)의 역사, 긍정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가 매우 잘해서 96%의 지지를 끌어내기는 매우 힘들다. 역사에는 악(惡)의 역할도 필요하다. 부정의 힘으로 박근혜는 96%의 국민을 하나가 되게 했다. 악의 주동자들을 하나씩 감옥으로 끌어들여 인적청산이 대세가 될 때까지 강한 멘탈로 버텨주길 바란다. 그래야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세울 수가 있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는 아주 잘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 본문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한다. 매우 중요한 신학이 담겨있다.

# 당시 로마-그리이스의 희랍 철학은 참과 진리는 이데아의 세계에 있을 뿐 지금 우리 세상에 나타나는 것은 단지 환영, 그림자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 희랍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어차피 인간은 죽음을 통해서 이데아의 세계, 완전한 세계로 복귀할 테니 지금 여기서는 무조건 참고 지내라는 것이다. 현실의 삶은 본질이 아니니, 큰 의미를 두지 말고 저 세계에 의미를 두라는 것이다. 이는 현실사회의 불합리와 불평등을 운명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기독교에도 이런 희랍사상이 들어왔다. 이를 ‘영지주의’라고 하는데 이들은 초대교회에 의해서 최초의 이단으로 정죄받고 퇴출되었다. 초대교회는 일찍이 영지주의와의 싸움을 통해 “성육신 교리”를 확립했지만 참다운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교회의 역사는 오랫동안 성육신을 역사적으로 인정하지 못했다.

기원후 3세기 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심지어 그리스도가 음식을 실제로 소화시키고 배설한 사실까지 부인했다. “어떻게 거룩한 예수가 배설을 하셨겠는가?”라고 해서 그는 먹기만 하고 배설하지 않은 묘한 인간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성육한 것은 인정하더라도 그가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는 몸을 입는 순간에 단번에 완성되었다고 보았다. ‘예수께서 몸으로 오셨지만 어떻게 아이들이 범하는 똑같은 미숙하고 철없는 행동들을 하실 수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해서 그는 아기가 ‘응애!’하고 태어난 순간 ‘여인이여, 내가 이 땅에 올 것을 그대는 몰랐는가?’라고 말하듯이, 몸은 어리지만 모든 지혜를 갖추고 도덕적으로도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성육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 왜 오랫동안 성육신 신학이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했을까? 그들이 ‘몸은 부정하다’고 하는 것은 몸을 입은 인간 전체를 부정하고 더럽다고 정죄하기 위해서이다. 몸을 입지 않은 인간이 어디있겠는가? 인간은 몸 자체다. 그러나 그들을 차별할 근거로 영을 등장시켜 이를 몸과 대립시킨다. 누구나 몸을 가졌기에 몸을 인정하면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영을 이용해서 임의대로 사람을 나누고 구분하는 것은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주장하며 하나님을 오직 영적인 영역에 밀어넣는다. 이것은 하나님을 차별의 근원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 아이들이 영으로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과 다시 몸으로 만나길 바란다. 만약 우리가 몸을 쉽게 포기한다면 그래서 영을 얻는 것으로 현실의 모순을 얼버무리려 한다면 이는 속이는 것이다. 아편의 종교이다.

# 예수는 인간을 위해 성육신하셨고 우리 삶의 고통과 죽음을 하나님 안에서 경험하신 분이다. 그러나 통속신앙이 떠받드는 예수는 하늘에 뜬 우상적 존재일 뿐이다. 그는 출생부터 우리와는 다르게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요란한 하늘의 징조가운데 오시고, 우리가 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일들을 말씀으로 척척 해치우고, 하늘과 땅을 잠잠케 하신분이라고 한다. 그는 죽으셨지만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존재라고 한다. 이는 발이 땅에 닿지 않아 이리저리 하늘을 날아다니는 슈퍼맨이나 홍길동 같은 초월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이런 신앙고백은 우리들의 삶과 생활 속에 재해석되어야 한다.

# 우리는 성육신하신 예수를 다시 하늘 위의 존재로 밀어 올리고 공중의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이는 예수를 우리와는 무관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며 불순한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내가 욕심껏 사는 물질생활에 하나님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신 그 앞에 엎드려 절하는 종교 생활을 통해서 그분에게 깍듯할 수는 있으나 나의 물질적 생활에는 영향을 미치지 말라는 거부이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생활로 양심의 면죄부로 삼고자 하지만 여전히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을 죽이고 멸시하고 차별한다.

이랜드 박성수장로가 십일조는 수억씩 하면서 천사의 얼굴을 가장 하지만 자기 회사에서 시급을 받고 아르바이트하는 노동자들 초과 근로수당을 84억이나 횡령하다가 고용복지부에의해 덜미가 잡혔다. 이것이 크리스찬 기업이라고 내 놓고 광고하는 기업이 올해 성탄절에 대한민국에 내놓는 성탄소식이다. 그들이 면죄부용으로 헌금을 다소 내놓는 것보다 자신들의 몸속에서, 생활 속에서 예수를 배제해서 부정한 돈을 얻는 것이 훨씬 득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벼룩이 간을 내어 먹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민중의 고혈을 뜯어 바치는 헌금을 원하지 않으신다.

X# 이 천년 전 예수만이 특별한 성육신의 존재가 아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모든 인간의 변화를 말한다. “보이는 형제, 자매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정 할 수 없다”(요일 4:20). 우리는 주변에 수많은 그리스도들을 대하면서도 아직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고, 여전히 엉뚱한 곳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다. 성육신은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 변화된 인격들이 새로운 관계를 맺는 곳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집단의 인격과 의지로 오늘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해 나간다. 몸이 없이 어찌 활동하겠는가? 교회의 활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은 확장되어 간다.

X#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몸으로 직접 나타내 보이신 것이 성육신 사건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직접 계시의 사건이다.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예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서이다.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간에게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예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신다.

X#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인간”이라는 전통적인 고백은 우리의 통념 속에 있는 가장 귀한 것과 가장 천한 것,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것의 가치를 역전 시키는 혁명이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의 갈등, 억압받는 자와 누르는 자의 갈등, 계급, 민족, 이념의 모든 갈등을 갈아엎고 화해와 평등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이러한 갈등을 갈아엎는 한 방법으로 가장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비천한 인간의 몸을 스스로 입으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낮아지심이며 하나님의 자기 위임 사건이다.

X#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자기포기의 혁명이다. 절대 권위와 능력으로 인간의 섬김을 받고 높임을 받으시던 하나님이 자리를 비우시고 인간이 되신 사건이다. 이제 하나님은 하늘에서 인간의 찬양을 받거나 예배를 받는 자리에서 내려오신다. 성육신은 인간과 세상과 몸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이다. 하나님께서는 정죄받고 더럽다고 여긴 몸으로 오셔서 이 세상 더러운 모든 것들을 새롭게 품으신다. 이것이 성육신 이후에 나타난 신관의 혁명이고 변화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그분이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가 “참 인간”이하는 것은 친히 인간이 되셔서 참인간의 길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예수가 “참 인간” 이라는 것은 우리의 인간다움의 표준은 “예수다운” 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답다”는 말은 “예수답다”는 말이다. 예수를 바라보고 그 분의 삶을 닮아 가도록 노력하는 것은 “인간이 되어 가려는 노력”이다. 우리는 아직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의 삶을 실천함으로서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인간”이다.

#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은 인간의 존재를 새롭게 하며, 달라진 존재의 자격과 지위를 밝혀준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그것도 가장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천한 말구유에 오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까지도 신적인 지위로 수용하신다는 인간 존재의 대변화사건이다. 이것보다 위대한 인권선언은 없다. 이것은 인간의 대 권리장전이며 하늘과 땅을 갈아엎는 놀라운 혁명이다.

# 예수는 모든 인간의 변화의 원형이며 장차 변화될 우리 존재의 예시이며 목표이다. 예수에 대한 이런 고백들이 만약 단지 예수 한분만의 행적이고 궤적에 그친다면, 성육신 사건은 단지 “하나님의 나들이 사건”에 불과하다. 성육신 사건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다가 다시 하나님 우편으로 회수해 가신 사건이며, 한때에만 효력이 미친 사건이라면 이 사건이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 예수에 대한 모든 고백은 우리 자신의 변화를 전제하고 동반한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혁명을 나타내는 말이고 동시에 그렇게 오신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변화를 수반하는 인간의 혁명을 나타내는 말이다.

# 누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하늘과 땅의 혁명에 대해서 반대하겠는가? 세상에 잘난 사람, 출세한 사람 내가 쟤들하고 같은 취급받기 억울한 사람들에 의해 성육신은 부정되어진다.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새롭게 하시고 새로운 지위로 초청하기를 원하시지만 이미 특권을 누리는 인간은 자신이 누리는 특별한 지위가 계속되며 자신이 받는 차별적인 대우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이미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거스르며 하나님과 적대적인 방향에서 맞서나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세상의 아들들은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었다는 놀라운 선언 보다는 그냥 죄 안에 머물러 살기를 원한다. 여전히 인간을 차별하고 인간의 가치를 구분하고, 덜하고 중한 순으로 분류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몸을 입으시되 아주 가난하고, 멸시받고, 천한 몸으로 오셨다.

#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ὁ λογος σαρξ ἐγενετο)고 했다. 사르크스(σαρξ)는 단지 인간의 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깃덩어리’로 번역되는 모든 동식물의 몸둥아리를 말한다. 부활장이라고 부르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몸의 부활에 대해 설명하면서 씨앗의 몸, 사람의 몸, 짐승의 몸, 새의 몸, 물고기의 몸....여기서는 사르크스가 쓰인다. 하나님께서 씨앗, 사람, 짐승, 새, 물고기등 모든 생명, 동식물, 만물이 나타나는 몸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하늘에 속한 몸, 땅에 속한 몸” 여기서는 ‘소마’가 쓰였다. 사르크스와 소마 둘 다 몸을 나타내며 혼용되기도 하지만 소마는 보다 철학적이고 인간학적 의미에서 사용한다. 하지만 사르크스는 구체적이며 원초적인 몸둥아리이다. 그리고 부활이란 이 몸들에 일어나는 변화이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비천한 몸이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약한 몸이 강한 몸을 입고, 자연의 몸이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을 말한다. 만물의 질적인 변화가 부활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몸으로 오셨고 그 몸들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 몸의 부활이다.

X#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이시고 만유 안에 계시고, 만유 위에 계시며, 만유를 통하여 계신다(에배소서 4:6)고 한다. 성육신은 단순히 인간의 몸 뿐 만이 아닌 모든 만유의 몸, 생명의 몸, 세상의 몸을 입으신 것이다.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내재적 존재로 모든 생명의 몸을 입으셨다. 초월과 내재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게 손으로 만지고 보고 더듬을 수 있게 오셨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자연의 몸과 육체의 몸을 가진 모든 지구 거주자들의 육체적 필요와 건강을 가장 최우선적으로 배려하기 위한 것이다.

X#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 계신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만물이 그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의 안에서 존속합니다(골로새서 1:15-17).

마태 25장에서 그리스도는 지극히 작은 자와 동일시한다. 골로새서는 이를 넘어 “만물이 그의 안에 존속한다.”고 선언한다. 그리스도는 이제 만물과 동일시된다. 그러면 이제 만물이 그리스도이다.

#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이시다. 이제까지 기독교 신학이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구원, 해방을 위해서 오셨다. 그리스도는 “피조물도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기위"해서 오셨다(로마서 8:19)

#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물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기쁘게 자기와 화해시키셨습니다”(골로새서 1:19-20).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서 만물이 하나님의 신성으로 충만하게 만드시는 새 일을 펼치신다. 만물이 이렇게 새로워지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평화로 만물 안에 서로 상충되고 적대하는 모든 것들을 평화롭게 하시고 조화롭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 화해하게 만드신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비워 만물의 생명을 가장 충만하게 만드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비움이다. 인간처럼 게걸스럽게 자기 욕심을 위해 다른 생명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생명이 충만한 상태가 되게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비우신다.

# 우리의 구원의 대상은 영혼만이 아니다. ‘몸’이 없는 ‘영’의 구원은 추상이며, 허구이다. 결국은 차별의 근거가 된다. 만약 인간이 몸을 가지지 않았다면, 어찌 아픔을 느끼고 연민을 느끼고 사랑을 느끼겠는가? 하나님이 사랑이라거나 인간을 돌보고 긍휼이 여기신다는 모든 신학적 말들이 무용할 것이다. 그러기에 몸은 타자와 공감하는 문을 여는 것이며, 인간을 넘어서 만물과 소통하기 위한 길잡이이며, 하나님을 만나 그 품에 안길 거룩한 몸둥아리이다.

#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왜 우리는 예수가 위대한 사상을 가지고, 인류를 구원할 놀라운 자의식을 가지고 돌아가셨기를 바라는가? 그런 사상이나 철학 없으면 어떤가? 그냥 몸이 찢겨지고, 조롱받고, 죽음에 이르는 것 보다 더 큰 메시지가 있을까? 가난한 몸이건 무식한 몸이건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몸이 찢기우는 것 자체가 가장 큰 것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그 천하다고 여기던 몸둥아리를 입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여전히 지금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몸에 대한 학대들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학대이며 살육이다. 찢기워진 몸들, 불에 살라지고, 내어 쫒기고, 감옥으로 가는 몸들.....수억 년 내려온 생명의 터전이 마구 파헤쳐지고, 콩크리트로 싸발리는 현실은 오늘도 여전히 십자가를 지시는 그리스도 사건이 계속되는 것이다.

# 오늘도 여전히 십자가에 달리는 예수들은 우리에게 외친다. 찢기워진 몸은 가장 큰 웅변이고 가장 큰 저항이고 가장 큰 혁명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처해서 십자가의 길로 가셨다. 그가 무엇으로 말하겠는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는 몸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몸은 어떤 것 보다 강력한 말씀을 지녔다. 왜? 그것은 본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 우주와 하나가 된 그리스도, 우주적 그리스도는 우리가 도달해야 될 새 인격이다. 이 세상이 도달해야 될 새 세상의 모습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관계이다. 만물이 상호간에 서로가 서로를 세워가는 토대가 되며 서로가 도달할 수 있는 관계의 완성을 보여준다. 그 완벽한 조화와 사랑이 이루어지는 온전한 유기체- 그리스도의 몸을 향하여 우리는 나아가고 있다.

#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상징이다. 떡과 포도주가 단순한 특정질료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노동과 자연이 함께 빚어 만든 창조세계의 총체를 상징한다. 우리가 이렇게 자연이 빚어낸 것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신비를 경험한다면 우리의 삶을 포괄하고 있는 자연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거룩한 성소(聖所)이다. 성찬의 떡과 잔이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구체적 물질이듯이 이 세계 또한 우주적 그리스도의 임재대상이 되는 거룩한 물질이다. 유영모 선생은 “내가 먹는 낱알과 채소가 나를 위해 희생되어 나를 대속한다. 그리스도가 내 양식이라면 나를 위해 대속되는 만물은 모두가 그리스도이다.”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몸이 되어서, 충만하게 머물러 있다.(골로새서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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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