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믿음의 기적 - 요한복음 4:46~54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2-14 13:23
조회
5160
2017년 1월 2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믿음의 기적
본문: 요한복음 4:46~54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의 본문말씀은, 예수께서 고관 아들의 병을 고친 기적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본문말씀은 이 이야기 말미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일으킨 두 번째 표적, 곧 기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에 이은 두 번째 기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동일한 지역에서 연이어 일으킨 기적 사건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나에서 기적을 일으키신 다음 그곳을 떠나 사마리아 지역을 돌아 다시 가나에 이르렀을 때 왕의 신하가 찾아 왔습니다. 어떤 왕의 신하였을까요? 세례 요한을 처형한 헤롯 안티파스의 신하입니다. 저 지난 주에 이야기했지요? 바로 세례 요한을 처형했고, 또 바로 그 때문에 결과적으로 예수께서 공적 활동을 개시하도록 계기를 부여한 통치자의 신하입니다.
이 사람은 가버나움에서 자기 아들이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로 앓고 있어 예수님께 자기 아들을 살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지체 높은 신분으로서, 더욱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결코 예수님께 그 어떤 호감도 가질 수 없었으리라 예상되는 사람이 예수님께 매달리는 상황이 놀랍습니다. 서 있는 입장이 전적으로 대비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예수께 다가와 간청하는 상황입니다. 김기춘이 촛불광장에 와서 간청하는 상황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요? 그럴 일이 없지만, 이 상황 자체만 놓고 보면 그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것은 겉으로 드러난 그 상황이 아닙니다. 간청하는 고관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던집니다. “너희는 표적이나 기이한 일들을 보지 않고는, 결코 믿으려 하지 않는다.” 무슨 뜻일까요? 예수께서는 지금 자기 아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을 앞에 두고 그것보다 훨씬 위태로운 사람들의 보편적인 중병을 진단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보여 주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일반적인 사람들의 심리를 그저 꼬집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그 사실을 꼬집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 곧 아들의 목숨이 절박한 위기 상황 앞에서 절박하게 호소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던진 이 말씀은, 그보다 더 심각하게 모든 사람들의 삶 자체가 위태로운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기적을 보여 주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상태는 곧 사람들의 삶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 앞에서도 왕의 신하, 곧 고관의 태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더욱 더 절박하게 예수님께 호소합니다. “선생님,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와 주십시오.” 정말 놀라운 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지위 높은 고관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예수를 찾아와 머리를 조아린다는 것도 놀랍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의 믿음입니다. 누구도 기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 사람은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현재 삶의 기반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그 길과는 너무나 다른 데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세례 요한을 처형한 장본인인 헤롯 안티파스의 신하로서 그 권력의 편에서 자신의 삶을 보장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회개, 전향을 뜻합니다. 자기의 가장 소중한 아들이 죽음에 이르게 된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용감한 전향을 감행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믿음을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극한상황에 이르러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더 더욱이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강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현실을 볼 때, 비록 뒤늦게 극한상황에서 돌이켰다 할지라도 그렇게 돌이킬 수 있었다면 그 돌이킨 행위를 결코 폄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고관이 극한상황에 이르러서 믿음을 갖게 되었을지언정 그의 믿음은 소중합니다.
‘기적을 보지 않고는 결코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실제로 절박한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사람들이 그 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자기가 처한 위기의 상황을 알아차리고 나섰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믿음을 인정합니다. “집으로 돌아가거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 성서 번역문은 이렇게 되어 있지만, 그 상황을 더욱 실감나게 그린다면, “집으로 돌아가시오. 당신의 아들이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어쨌든 그 고관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한 이야기를 믿고 떠나갔습니다.
이 사람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중 나온 종들을 통해 자기 아들이 병에서 나아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자기 아들이 나은 때를 확인해보니, 바로 예수께서 “당신의 아들이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하신 바로 그 시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고, 오늘 본문말씀은 전합니다.

기적을 보고서야 믿는 사람들 틈바구니 가운데서, 믿음으로 기적을 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왜 하필 그 사람이 고관이었을까요? 이 이야기는 다른 어떤 것은 믿을 수 있는 것이 일체 없어서 그저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대 최고권력의 슬하에서 누리는 것이 많았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실은 중요한 점을 시사합니다. 최고권력의 슬하에서 많은 누려도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은 삶의 위기 상황을 말합니다. 아마도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여겼을 아들의 목숨은 지금껏 자기가 누린 것으로 보장받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 사실은 모든 인간이 처할 수 있는, 아니 처해 있는 어떤 위기 상황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누리며 저마다 삶의 행복을 보장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닥치는 위기의 상황,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닥쳐오는 위기의 상황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 진실을 모르는 것이 진정한 위기입니다.
‘기적을 보고서야 믿으려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진실을 일깨웁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정말 일상화된 삶의 위기를 겪는 사람 말고, 어찌 보면 그런 것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마저도 절박한 위기의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오늘 본문말씀은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람이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택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는 진짜 기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죽어가던 아들이 되살아난 사실이 기적이라기보다는 바로 그 아버지의 믿음이 기적인 셈입니다.

지난 주간 삼성 부회장 이재용의 구속이 기각되었고, 어제 김기춘이 구속되었는데, 앞으로 어찌될지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현재로서 이 사실은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매우 의미심장한 하나의 지표일 것입니다. 김기춘이 구속된 것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관련하여 직권남용 혐의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훼손한 혐의입니다. 이재용은 대가를 주고받는 거래, 그러니까 뇌물공여 혐의로 구속 신청이 되었지만 증거가 불충분하다 하여 구속이 기각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현재 국면에서 그나마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 가치기준이 작동되고 있는 반면, 경제사회적 정의의 가치기준은 여전히 뚜렷하게 서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수 해 전 삼성회장 이건희가 의미심장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2010).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 거짓말 없는 세상이 돼야한다.” 저는 그 때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과연 우리 사회의 도덕적 가치를 제시하려는 것이었을까요? 그보다는, 현실을 용인하라는 의미로,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억측일까요? 억측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재벌을 비판하지만, 재벌 덕에 살고 있지 않느냐, 그러면서 뭘 안 그런 척 하느냐, 그 점을 정직하게 용인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의미입니다. 현실을 용인하라, 그 점에서 정직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주문의 위력은 아직도 살아 있고,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방식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정의로운 윤리적 가치기준과 도덕적 가치기준은 흐려지고, 현실을 그대로 용인하는 결과가 발생합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문제 삼느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하는 통념이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존재하는 삶의 방식이 마땅히 존재해야 할 삶의 방식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현재의 삶의 방식이 꼭 정당한 삶의 방식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많은 사람이 따르는 대세라고 해서 그것이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대해 어떤 기대와 소망을 갖느냐, 곧 어떤 믿음을 갖느냐에 따라 우리는 마땅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을 수 있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회를 모색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은 지금 존재하는 삶의 방식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을 새롭게 추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오늘 이 시대에 진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그 길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방식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삶의 방식과는 너무나 다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대다수 사람들마저도 사실은 포장만 살짝 바꿨을 뿐 오늘 이 세대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현실에서, 그것을 거슬러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들이 그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세대의 삶의 방식과는 다른 삶의 방식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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