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격랑의 한 가운데서 - 마태복음 14:22~33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2-14 13:25
조회
5200
2017년 1월 2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격랑의 한 가운데서
본문: 마태복음 14:22~33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격랑의 한 가운데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또 하나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로 보일지 모르지만, 단순히 초자연적인 어떤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야말로 역사의 격랑 가운데 있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이 전하는 바를 따르면, 세례 요한이 처형된 이후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그 놀라운 일이 있고 난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보내십니다. 당신은 남아 모여 있던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그리고 따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냥 예사로운 상황 묘사 같지만, 예수께서 군중들 가운데 계시다가 따로 떨어져 기도하는 모습은 일관된 행동 패턴입니다. 기도하면서 성찰하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입니다.
그 즈음 제자들이 탄 배는 육지로부터 멀어지면서 풍랑에 시달립니다. 제자들이 풍랑에 시달리며 두려워하고 있는데, 새벽녘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을 향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유령이다!” 하고 외칩니다. 깜짝 놀라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물 위를 태연하게 걷는 이가 예수님이라니 제자들은 일단 안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 보면 아직 완전하게 확신하고 있지는 못한 상황입니다. 베드로가 확인하려고 듭니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를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말씀하십니다. “오너라.”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께로 향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 물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살려 달라 외치고,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그때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외칩니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기적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에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확실히 믿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서의 기적 이야기는 그저 초자연적 사건을 객관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기적 이야기는 그 사건이 일어나는 데 관여된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 가운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할 겁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서야 믿으려 한다.’ 그것은 사람들의 중병을 진단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시적으로 기적을 보여 줌으로써 사람들을 믿게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에는 항상 그에 관여된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기적은 예수님과 그 주인공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이지, 그 관계를 떠난 객관적인 초자연적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는 기적 이야기의 초점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분열된 두 시선입니다.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을 향하던 베드로는 자신의 시야에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들어 왔을 때 물에 빠져듭니다. 예수님을 향하던 시선이 풍랑으로 향하게 되면서 베드로는 위기에 처합니다. 예수님을 향하던 믿음이 주변의 불안정한 상황을 보면서 혼란에 빠진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진정한 뜻은 예수님을 바라볼 수도 있고 풍랑을 바라볼 수도 있는 두 가지 시선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다양한 시선을 가진다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훌륭한 능력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목표에 시선을 맞춰야 하지만 동시에 그 목표를 이루는 데 고려해야 할 현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두 가지 시선이 균형을 이뤄야 우리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이라고 한 것은,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가운데서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 점에서 오늘 베드로가 위기에 처한 것은 인간이면 누구에게 불가피한, 아니 오히려 풍요로운 ‘두 가지’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위기는 목적을 상실한 방황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했을 때, 여기서 ‘의심’은 두 마음을 품는 것을 뜻합니다. 한 마음으로 집중하지 못하고 두 마음을 품는 것을 뜻합니다. 두 가지 방향으로 동시에 가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시선은 요동치는 풍랑 앞에서 혼란을 겪고 풍랑으로 향한 시선에 압도를 당하고 맙니다. 요지부동 평안하게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이 아니라 현실의 격랑에 휩쓸려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평범한 인간들의 실존일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안 되고, 저것 때문에 안 되고... 하는 핑계에 매여 있는 삶입니다. 품고 있는 꿈을 이루기 위해 현실적인 조건을 헤아리려는 태도가 아니라, 꿈을 이루려고 해보지도 않은 채 이런저런 현실적인 조건들과 핑계에 매여 좌절하는 태도에 빠진 인간의 상황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는 상황설정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오히려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말씀으로,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마태복음 8: 23~27; 마가복음 4:35~41).
예수님과 제자 일행이 배를 탔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데 바다에 풍랑이 일었습니다. 바다가 요동을 치고 따라서 배가 요동을 치고 결국 그 배에 탄 사람들도 안절부절 요동을 치는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다급하게 살려달라고 호소할 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배가 요동치는 대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허둥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태연스럽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요동치는 바다 한 가운데 떠 덩달아 요동치는 배, 그 배 밖에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과 똑같은 배 위에 계셨습니다. 한 배를 탔는데도 모든 사람들은 허둥대고 있는데 반해 단 한 사람 예수께서는 평안하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요동치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기 전에 그 요동과 상관 없이 스스로 잠잠한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놀랍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놀랍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그 요동치고 소란스러운 상황 가운데서 태연스럽게 잠을 잘 수 있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언뜻 보면 풍랑이 일어 배가 요동치는데 사람들이 허둥대는 것이 당연한 것이요 그 안에서 잠을 자는 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중요한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요동치는 바다 한 가운데, 그 위에 역시 요동치는 배 위에서 허둥대는 것으로 사태가 수습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잠잠함으로써만 그 사태를 수습할 수 있습니다. 격랑 한 가운데서 중심을 잡을 때 비로소 요동치는 상황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허둥댔고 예수님은 잠잠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세태를 따랐고 예수님은 중심을 지켰다는 것을 말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변하는 것을 대처한다(以不變 應萬變)”는 말이 있습니다. 호치민의 좌우명입니다. 변화를 외면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지혜를 말합니다.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사태에 매몰되고, 즉각적으로 솟구치는 욕망에 매달리면 전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면 움직이는 사물만 볼 수 있을 뿐 전모를 볼 수 없습니다. 마음에 변하지 않는 중심이 있어야 변하는 사태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밭갈이를 배우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처럼 이랑을 반드시 일굴 수 있습니까?” 아버지가 말하기를 “앞을 똑바로 보고 가라!” 했답니다. 그런데도 아들이 일군 밭의 이랑은 삐뚤빼뚤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반문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했느냐?” 아들이 답하기를 “아버지 말씀대로 앞을 똑바로 보고 갔습니다.” 했습니다. “앞에 뭐가 있었느냐?” “바로 제 앞 소 엉덩이만 바라보고 좇아갔습니다.” “바로 저 앞에 나무를 기준으로 삼았어야지!” 그와 같은 이치입니다. 마치 제자들은 소 엉덩이만을 바라본 꼴이었고, 예수님은 저 앞의 나무를 바라본 것과 같습니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드릴 수 있는 고요함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바꾸어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주십시오.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우리에게 주십시오.”

지금 우리는 역사의 격랑 한복판에 있습니다. 격랑의 역사가 어떻게 하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삶을 위해 지켜야 할 가치를 중심에 세우고 그 가치를 굳건하게 지키는 것이야말로 격랑을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이 됩니다.
저는 특별히 이번 1~2월을 큰 부담을 갖고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사회선교정책협의회에서 발제를 맡았고, 이번 주간에는 성공회 사회선교정책협의에서, 그리고 다음 주간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사회선교정책협의회에서 주제강연을 맡은 상태입니다. 격랑의 역사 한복판에서 교회의 역할을 모색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어주는 몫입니다. 유능한 분들이 많은데 어리숙한 제가 그 말문을 여는 역할을 어쩌다가 한꺼번에 줄줄이 맡게 되어 큰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것은, 요동치는 역사 한 복판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중심 가치가 무엇인지, 역사의 방향을 판가름할 수 있는 가치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지혜가 아니라 성서에서 비롯되고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 가운데서 지속되어 온 지혜를 오늘의 상황에서 재음미하는 것이기에 감히 할 수 있다면 한다는 마음으로 부심하고 있습니다.

그 지혜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진정한 삶의 푯대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격랑을 칩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풍랑 위에서 요동치는 배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러주신 길을 따름으로써 그 격랑을 넘어 진정한 삶의 희망을 이루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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