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마땅히 그렇게 될 것을 - 마가복음 4:26~29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5-13 15:53
조회
5049
2017년 2월 1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마땅히 그렇게 될 것을
본문: 마가복음 4:26~29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표준새번역에는 “자라나는 씨의 비유”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고, 개역에는 “씨의 성장에 관하여”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는 비유입니다.
제목 자체가 이미 비유의 핵심에 대한 해석을 함축하고 있기에 대개 제목을 보는 순간 이미 그 의미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경우 제목 그 자체로 과연 어떤 교훈을 주고자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을까요? 금방 알 수 있다면 참 다행이겠습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이야기하지만, 애초 비유라는 게 너무나도 쉬운 이야기이고, 쉬운 이야기 방식으로 핵심적인 메시지를 아주 인상 깊게 전하는 이야기인데, 오늘날 우리는 성서의 비유 말씀을 대할 때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습니다. 2천년 이상의 세월의 간극, 그리고 다른 문화적 맥락의 차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서에 기록될 때부터 이미 본래 자리에서 이야기되었던 형태 그대로라기보다는 상당한 해석이 덧붙여졌다는 점도 비유를 이해하기 어렵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야기 그 자체로 보자면 하나도 어려울 게 없는 말씀입니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쉬운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과연 뭘 말씀하시고자 한 것일까 생각하면 그 답이 간단하게 찾아지지 않습니다. 성서의 많은 말씀, 그리고 복음서의 많은 비유들이 오용되고 있는 것처럼 오늘 본문말씀의 비유 또한 그렇습니다. 성서 주석가들도 이 본문을 놓고 저마다 다른 의견을 내놓을 정도로 그 견해가 다양합니다.
아마도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의 문제는 초기 교회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개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비유들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약간 변형된 형태로 등장하는데, 이 간결한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서 반복되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이 이 비유를 너무 밋밋한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거나, 아니면 어디에 초점을 맞춰 해석해야 할지 곤란을 겪었기 때문에 제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농부였던 예수님은 하나의 알곡이 맺히기까지의 오묘한 이치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목수 출신이었다는 점 때문에 농삿일과는 상관없는 분으로 알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목수와 같은 신분은 보조적 지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농민이지만 평균적인 농민보다 더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보조적으로 수공업에 종사한 것이 예수님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농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서의 거의 모든 비유가 농사짓는 일과 관련된 것은, 청중의 대부분이 농사짓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께서 스스로 그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를 다시 확인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땅은 열매를 저절로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의 알찬 낟알을 낸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성서의 말씀을 대하면서 여러 가지 상상을 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허용된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대하면서 저마다 그 의미를 생각하고 저마다 나름대로 어떤 진실을 깨닫는 것 역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비유가 많은 초점을 지닌 이야기 방식이 아니라 단 하나의 초점을 간명하게 말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 본문말씀의 초점은 무엇일까요?

이 비유를 이해하는 견해가 매우 다양하지만, 그 다양한 견해를 일일이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가장 널리 오용되고 있는 하나의 견해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장 흔히 이해되는 방식은, ‘인간은 할 일이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하신다.’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 비유를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비유는,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고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마침내 열매를 맺어 추수하는 일련의 과정을 하나님 나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일상적이며 자연스러운 과정에 대한 묘사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해석의 열쇠가 되는 말은 씨를 뿌린 사람이 그 과정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열매를 맺기까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본문에서도 분명히 말하고 있듯이 사람은 씨를 뿌립니다. 그것으로 끝일까요? 이 이야기가 들에서 자라나는 식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농사를 짓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가 분명한다면, 그 다음에 또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거름을 주기도 하고 김을 매주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물을 줘야 하기도 합니다. 농사를 지어 열매를 거두게 되는 데 사람의 노력이 일단 결코 배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말씀은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고 말함으로써 사람의 노력으로만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것 또한 중요한 이치를 말합니다. 이것 또한 이 비유를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비유의 문을 여는 열쇠가 두 개 아니냐는 물음이 제기될 법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십시오. 이 이야기가 하나의 교훈을 말하는 비유라고 할 때 어떤 것이 핵심적인 열쇠일까요?
땅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결코 인간의 땀의 결과로써만 열매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에서도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는 합니다. 그 진실이 주는 교훈이 결코 사소하지는 않습니다. 하나의 씨앗이 많은 알곡을 내기까지는 인간의 손길, 인간의 땀만 배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일깨워 주며, 그것은 어떤 일이든 자신의 노력만으로 성취되지 않는 삶의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성서는 도처에서 그 진실을 일깨워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 본문말씀 비유가 그 초점을 강조하는 데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아무래도 그 초점은 사람이 그 과정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사람이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만의 힘으로 열매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땅이 열매를 맺히게 하기 때문에 사람은 그 과정을 하나하나 인지할 수 없다는 것으로 집약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씨앗이 변모하고 성장하여 어느 순간 많은 열매를 내는 과정을 일일이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알곡을 거두게 되는 기쁨을 누리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씨앗이 심겨져 싹을 틔우고 자라나 열매를 맺는 과정을 사람이 일일이 인지하지 못하지만 마침내 알곡을 거두게 된다는 이야기가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사람은 할 일이 없다는 것일까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분명히 씨를 뿌리고 가꾸는 사람의 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교훈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쯤에서 우리는 이 이야기의 청중이 누구일까를 헤아려야 합니다. 성서 주석가들은 이를 두고도 논란을 벌이지만, 성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 청중들은 제자들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개연성이 높습니다.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이 비유의 청중이 그 제자들이라면, 이 비유의 말씀은 바로 그 제자들에게 주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째서 이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을 격려하고자 하였을까요?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며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도 뭔가 손에 잡히는 열매가 아직 없어 실망하고 낙담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도 합니다. 바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이런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씨를 뿌리고 가꿔라. 그것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일일이 알지 못하지만 마침내 열매를 거두게 되지 않느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하면 마땅히 그렇게 되는 이치를 잘 알지 않느냐 하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신 것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할까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하고 그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겸허한 삶을 말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야말로 떳떳하고 여일한 삶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께서는 그 진실을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어째서 낙담하고 분노합니까?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바를 다하는 가운데 모르는 사이 어느덧 마땅히 그렇게 되는 어떤 결과를 누리는 것이 당연한데, 그것이 통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21세기 전도양양한 대한민국이 아니라 낙후하고 퇴보한, 거꾸로 돌아가도 한 참 돌아간 ‘헬 조선’이라고 우리의 젊은이들이 말하는 것도, 사람들이 알고 있고 기대하는 상식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걷는 가운데, 그 여정에서 비록 목적지를 매 순간 직접 목격하지는 않지만 그 길을 가면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사람들은 저마다의 길을 찾아 나갈 수 있습니다. 그 상식과 믿음이 무너졌기에 오늘 우리는 분노하고 있습니다. 제 할 바는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억지로 떼를 쓰는 사람들이 그간 판쳐 왔지 않습니까?
그것을 바로 잡고 정말로 상식적인 진실이 통용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기로에 우리는 지금 서 있습니다.
이러한 오늘 우리 현실의 맥락에서 보면, 본문말씀의 비유는 그러한 우리 사회를 향한 질타이자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식적인 진실을 믿고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을 향한 격려가 됩니다. 현실의 난관을 헤치고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을 향한 진정한 격려의 말씀입니다.
저는 바로 지금 정치적 국면에서 이 말씀의 의미를 더욱 실감하고 있습니다.
몇 주 전에는 헌정을 유린하고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김기춘)이 구속되었습니다. ‘헌정파괴’라든지, 또는 국제적 규범으로 인정되고 있는 ‘인도에 반하는 범죄 행위’에 대한 책임을 이유로 법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은 아니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이유로 고작 ‘직권남용죄’로 기소되기는 했지만, 중대한 범죄행위자가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정의로운 가치기준의 확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지난 금요일(17일)에는 최고 재벌의 사실상 최고 책임자(이재용)가 구속되었습니다. 그 의미를 말하자면 많은 것을 이야기해야겠지만, 경제정의와 경제민주화의 차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 수 십년간 쌓여온 또 하나의 중대한 적폐를 청산할 첫 걸음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재벌의 총수를 구속시킨 것이, 그 기업이 국가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할 때 경제적 위기를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지 않겠느냐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미 사실상 사회화되어 있는 기업의 소유구조를 바꿈으로써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고 그야말로 창의적 경영을 가능하게 하면 기업 자체에도 나쁠 것이 없습니다. 황당한 꿈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스페인의 몬드라곤 모델로 바꿔 나갈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 날 또 하나의 의미 있는 판결이 바로 천안지방법원에서 있었습니다. 유성기업, 그 노조를 파괴하기 위하여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던 그 기업의 회장(유시영)이 노조파괴를 하려 한 바로 그 행위로 유죄판결을 받고 법정 구속되었습니다. 우리 사회 노동권 보호의 진일보를 뜻합니다.

사회적 정의를 외치고 민주주의를 외치면서도 그것이 실현될 것 같지 않아 냉소하고 낙담하였지만, 그 목소리가 끊임없이 지속되었기에 어느 순간, 바로 지금 그 열매가 맺히는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불공정한 규칙을 깨고,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지향해야 할 가치기준을 함께 세울 수 있다는 희망, 그래서 저마다 마땅히 성실하게 자신의 몫을 감당할 때 저마다 그 열매를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 주는 일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공동체로서 우리의 교회,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늘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기며 살아가는 가운데, 진정으로 기쁨의 열매를 누리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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