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부활사건의 증인 - 마태복음 28:1~10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5-13 16:05
조회
5390
2017년 4월 1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부활사건의 증인
본문: 마태복음 28:1~10



부활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 부활의 체험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체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포함해 부활의 사건을 전하는 복음서 기사들은 다소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공통점은 세 가지로 집약됩니다. 첫 번째는 부활의 첫 목격자가 여인들이라는 점, 두 번째는 빈 무덤을 확인한 사실, 세 번째는 부활한 예수께서 갈릴리로 먼저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초점들은 부활사건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체입니다. 그 점이 복음서들에서 공통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사실은 복음서 기자들 사이에서는 그 부활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공유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그 요체들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오늘 본문을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으로 등장합니다. 이 사실은 매우 이례적이고 특기할 만한 사실입니다.
복음서에는 이 여인들이 드문드문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주변적인 인물처럼 묘사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대목에서 이 여인들이 주도적인 몫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결정적 사건의 첫 증인으로 여인들이 등장하는 것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이 여인들의 몫을 말합니다. 이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모시고 따라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이들의 몫은 제대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그 능력이나 헌신성에 상관없이 정해진 질서 밖의 비주류 또는 주변인으로 간주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언자로 등장합니다. 그것은 이 여인들의 열성과 헌신을 말하는 동시에, 부활사건의 성격을 말합니다. 기성의 질서로 굳어진 사회에서는 주변부 인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부활사건의 현장에서는 선두에 나섭니다. 부활사건은 기존의 질서가 뒤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껏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용기를 얻고 앞자리에 서는 일이 벌어지는 것, 그것이 부활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은 빈 무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관한 첫 증언인 바울의 서신에는 빈 무덤에 관한 증언이 없는데(고린도전서 15장),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빈 무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사건이 지니는 성격을 분명히 강조하려는 의도를 지닙니다. 그것은 시체가 소생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논란을 넘어서는 진실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선 예수님께서 죽임의 권세를 떨치고 일어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굳게 닫혔던 돌문이 열렸다는 것은 어떠한 권세도 진실을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떠한 권력도 진실을 영원히 침몰 가운데 내버려둘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갇혔던 굴속에서 나왔다는 것은 재생, 새로운 탄생, 거듭남, 진정한 부활 그 자체를 말합니다.
또한 빈 무덤, 빈 공간은 역설적으로 존재의 확인을 의미합니다. ‘비어 있다’는 것은 ‘없음’(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음’(有), ‘가능성’을 말합니다. 빈 무덤은 진실을 가두려 했던, 진실을 수장하려 했던 그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사람들 가운데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사람들 가운데 드러난 진실, 인양된 진실을 나타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오늘 본문말씀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시겠다고 전합니다. 무덤에 있던 천사가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그대들은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십시오.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그들보다 앞서서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이 거기에서 그를 만날 것이라고 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를 갈릴리에서 만나리라는 것은, 원점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원점으로서 갈릴리는 예루살렘과 대비됩니다. 예루살렘은 모든 기회와 모든 부와 권력이 집중된 중심입니다. 반면에 갈릴리는 모든 기회와 모든 부와 권력을 중심에 빼앗긴 주변부입니다. 하찮은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는 오늘 본문말씀의 증언과,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뵐 수 있다는 이 증언은 일관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기회를 박탈당했지만, 그래도 질기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 그곳이 바로 ‘갈릴리’입니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모든 기회를 빼앗기고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희망이 되신다는 선언입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입니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좌절이 있는 곳에 용기를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상과 같이 일치하는 복음서들의 증언 내용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의미를 새깁니다. 모든 복음서들이 부활의 첫 증인으로 여인을 내세우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오늘 함께 읽은 마태복음서는 여인들의 적극적인 역할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믿기 어려운 부활의 현장을 목격한 여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모든 복음서가 증언하고 있는데, 마태복음서는 두려움과 함께 큰 기쁨이 엇갈렸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곧바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고 증언합니다. 이렇게 마태복음은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 여인들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여인들이 빈 무덤을 확인함으로써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은 가려져 있던 여인들의 역할을 증언하는 이야기의 절정입니다.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함께 했고, 고난을 겪을 때에도 함께 했고,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실 때에도 함께 했고, 무덤에 묻힐 때에도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지켜봤던 이들이 바로 여인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곁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가운데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을 때에는 물론, 사람들에게 야유를 받고 버림받는 순간에도 이들은 예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마저 예수를 저버린 마당에도 이들은 예수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만난 증인, 부활사건의 처음 체험한 사람들이 된 것은, 기존의 삶의 질서 안에서 존재하지 않는 자들처럼 취급받고 배제되어 있었지만, 바로 그들의 자리에 다가와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며 저마다의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을 온전히 따르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해관계를 계산하며 일희일비,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온전히 인정해 주신 분의 뜻을 따라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진실한 삶을 지키고자 했던 마음과 자세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물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위대한 결단을 한 사람들이지만, 남성 제자들은 심사가 복잡했습니다. 성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기까지 남성 제자들은 일말의 권력에의 욕망을 떨쳐버리지 못한 모습을 증언합니다. 그러기에 남성 제자들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고통의 현장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부활사건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적어도 그들은 가장 극적인 부활사건의 첫 증언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캄캄한 바다 속에 3년간 갇혀 있던 세월호가 밝은 빛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세월호 침몰 딱 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온전히 그에 대한 믿음을 지킨 이들에게 부활사건의 첫 체험자요, 증언자로서 영광이 안겨졌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진실은, 극한의 고통의 상황 가운데서도 그 현장에서 눈을 떼지 않고 진실에 대한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고통스럽기에 더욱 절실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소중한 삶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와 희망에서 비롯됩니다.
괴롭다고 해서 고통의 현장을 외면하거나 덮어버리려는 이들에게 부활사건을 체험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그래서 속절없이 스러져간 생명을 두고 절통해하는 마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비용의 문제로 처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의미가 그들이 설령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한들 깨우쳐질 수 없습니다.

“세월호는 한국의 괴로운 자화상이다”라는 작가 김훈의 글(한겨레, 2017.4.13)은 뼈저린 사연들은 그 길지 않은 글 가운데 담아내고 있습니다. 무엇이 무너져 내렸고, 그래서 어째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지 그려내는 작가의 통찰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한 대목입니다.
“숨진 단원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갈 때 받은 용돈은 5만~10만원 정도였다. 나와 말을 나누었던 여러 학부모들이 그렇게 말했다. 이 학부모들은 대체로 시화공단을 중심으로 일하는 근로소득자들이거나 소규모 자영업자들인데, 살림 형편이 “다들 고만고만하다”고 말했다. 수학여행 용돈 5만~10만원은 그 ‘고만고만’한 살림 규모에서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액수일 것이다. 이 액수에는 생활의 고난과 소망의 무게가 실려 있다. 고난과 소망이 교차하면서, 생활은 영원하다. 이 5만~10만원은 삶을 통과해 나온 숫자로 거품이나 과장 없는 생활의 지표다. 나는 정부가 발표하는 물가동향이나 거시경제지표보다도 이 5만~10만원의 지표를 더욱 신뢰한다.
막내로 태어난 한 학생은 15만원을 받았는데 아버지가 10만원을 주었고 취직한 형이 3만원, 누나가 2만원을 주었다. 갓 취업해 받은 월급으로 수학여행 가는 막내에게 용돈 2만~3만원을 주는 큰 자식들의 성취감과 자부심, 그 돈을 받는 막내의 기쁨(용돈은 아버지한테서 받을 때보다 형한테 받을 때 더 신난다. 이때 형과 동생은 혈맹이 된다), 그 돈을 주고받는 자식들의 모습을 보는 부모의 뿌듯한 - 이 작은 행복을 위해 부모는 평생의 노동을 바쳐서 자식을 기르고 가르쳤던 것인데, 이 소중한 행복은 지금 바다 밑에 잠겨서 돌이킬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사소한 것들이 부모들의 슬픔에 불을 지른다.
죽은 아이의 목소리, 웃음소리, 노랫소리, 빛의 폭포처럼 흘러내리던 딸아이의 검은 머리채, 처음으로 립스틱 바르고 깔깔 웃던 입술, 아들이 동네에서 축구 하고 돌아온 저녁의 땀 냄새, 학교 가는 아이를 먹이려고 아침 밥상을 준비할 때 찌개가 끓으면서 달달거리는 소리…. 이것들은 모두 하찮은 것인가. 이 사소한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그것을 잃고 슬퍼하는 엄마들을 보면서 비로소 안다.”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침몰했는지, 그저 평범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이 이야기로 이렇게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절기상으로 부활주일이지만, 오늘 한국사회는 과연 부활의 아침을 맞이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3년간 수장되어 있던 세월호가 밝은 빛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 끝끝내 진실을 밝히기를 거부한 최고권력자가 그 높은 자리에서 내쳐져 감옥에 갇힌 사실은 그나마 부활의 아침을 예고하는 미명일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도 미수습자가 남아 있고 그 가족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건의 진실이 온전히 드러나 있지 않고, 더욱이 산업재해로 사망에 이르는 이들이 매년 세월호 사망자의 6배이상(1,800~2,000여명)에 달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바다 속에 잠긴 캄캄한 세월호’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 죽음의 현장, 고통의 현장에서 눈길을 돌리지 않는 이들에게 부활의 아침이 예비된다는 진실을 이 시간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 진실을 믿음으로서, 그 진실을 포기하지 않음으로 부활의 역사를 맞이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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