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세계 교회사 12]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탄생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10-06 11:10
조회
1749
천안살림교회 2011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1 - 세계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1년 10월 5일 / 최형묵 목사



제12강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탄생



1. 중세적 질서의 붕괴와 새 시대에의 예고


중세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봉건사회 생활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공업과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발흥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점차 새로운 사회적 관계, 곧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정착시켜나갔다. 이로써 새로운 사회적 계급인 부르주아와 임금노동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한편 봉건적 수탈과 다른 한편에서의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대두는 농민층의 동요를 항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변화는 지리상의 발견을 통하여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이제 중세적 질서는 그 밑바닥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대가 예고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새로운 사상들의 등장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사상들은 이제 자신들의 실현할 실질적 주체들을 만나게 되었다.


2. 루터의 인의론과 성서주의


새로운 사회에로의 돌파는 루터(Luther)의 종교개혁으로 본격화되었다. 루터는 선구자들이 제기하였던 원리들을 받아들여 철저화시킴으로써 중세의 교회중심적 세계관을 타파하였다.

‘오직 신앙으로만(sola fide)’ 의롭게 된다는, 신앙의 내면성에 근거한 인의론(認義論)은 루터의 중심사상이었다. 이것은 성례전에 의해 뒷받침된 위계적 교회구조 자체가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보장해준다는 중세적 신앙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중세적 질서 내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곧바로 기독교인이 되고 따라서 그가 속한 교회와 사회의 질서에 복종하는 것이 구원을 보장받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내면적 신앙의 원리는 각 개인의 진정한 신앙적 결단만이 구원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인간 스스로의 발견, 나아가 개인의 발견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루터는 중세 가톨릭의 ‘전통주의’에 대해 ‘성서주의’를 내세웠다. 카톨릭 교회는 교회야말로 사도전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어받았으며, 또한 현재에 있어서도 교회를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기관으로 여겼기 때문에 모든 진리의 근거를 교회의 전통에 두었다. 그러나 루터는 교회의 전통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으로 보지 않고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이 신앙의 근거이며 진리의 근거라 보았다.

이러한 루터의 사상은 중소 생산자 계층 및 농민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봉건적 질서 내지는 카톨릭적 질서 내에서는 숨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 체제로부터의 해방을 갈망하였고 루터의 사상을 바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농민층의 저항이 점점 급진적 색채를 띠게 되자 루터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는 마침내 농민들을 폭도와 악마로 규정하고 이들로부터 물러섰다. 그는 봉건 귀족과 부르주아와 손을 잡았다. 동시에 그의 사상도 혁명적이라기보다는 점차 카톨릭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3. 칼빈의 예정설과 시민계급의 자긍심


칼빈(Calvin) 역시 루터와 마찬가지로 성서를 최고의 권위로 보는 성서주의를 자신의 중요한 원리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 가운데 독특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설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로 나뉘어진다고 했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 숙명론처럼 보인다. 그러나 섭리와 예정의 참뜻은 구원의 확실성을 어떻게 보장받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칼빈은 이 확실성의 표징으로 몇 가지를 말한다. 그 첫째는 신앙의 행위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내적 관계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리고 셋째는 인간의 높은 도덕성이다. 결국 도덕적 생활 태도와 경제적 축복 등이 구원의 확실성의 표징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에 칼빈의 예정론이 단순히 숙명론으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부르주아적 시민계급의 생활원리로서 작용한 적극적 요인이 있다.


4. 뮌쩌의 농민운동과 급진적 종교개혁의 신학


종교개혁 초기에 농민들은 루터를 자신들의 대변자로 여기고 옹호하였고 실제로 루터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루터의 계급적 한계가 분명해지자 농민들은 루터와는 완전히 결별하였고 그들의 신학 또한 루터의 신학을 뛰어 넘었다. 농민들은 당시 주류 종교개혁을 카톨릭주의에로의 복귀(루터)이거나 시민계급의 한계에 머물고 있는 것(칼빈)으로 보았다. 농민들을 이끌고 그들을 대변한 이가 토마스 뮌쩌(Thomas Munzer)였다.

뮌쩌는 여러 가지 점에서 종교개혁의 신학을 더욱 철저화시켰다. 우선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이야말로 선택받은 자들 가운데서도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예컨대 로마 카톨릭교회는 개인의 인의(認義)에 대해 아무런 확신을 주지 못한 반면, 루터는 그 인의의 확신을 주었다. 그러나 선택에 대한 확신을 말하는 근거가 ‘성령의 내적 현존’이라는 원리였다. 즉 성령을 직접 소유할 수 있고, 자신들이 그것을 소유한 것이라 본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불타는 소명의식을 갖고 교회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의 주체임을 자각했다. 이러한 원리는 루터나 칼빈의 성서주의와는 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 것이었다. 그들은 외적인 말씀인 성서에 근거를 두지 않고 내적인 말씀, 곧 인간 안에 거하는 신의 현존에 최종적 근거를 두었다. 여기에 신비주의 전통의 영향이 나타난다.

성령의 내적 현존이라는 원리는 인간 자체에 대한 이해도 다르게 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타락한 역사적 본성에서가 아니라 본래 창조된 본성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까지 보았다. 하나님의 본성을 부여받은 인간은 하나님을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 인간의 의지는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것이라 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인격적 결단의 직접적 결과이다. 이들이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성인세례, 혹은 재세례를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급진적 종교개혁주의자들은 교회를 초월의 공동체라 이해하였다. 그것은 오고 있는 미래에 참여함으로써 현재의 세계를 뛰어 넘는 공동체이다. 다시 말해 종말론적 공동체이다. 이 종말론적 공동체는 이 현존하는 세계를 변혁시켜야 할 임무를 지닌다. 그래서 이들은 개량이라는 이념을 거부하였다. 교회가 세계를 새롭게 탄생시켜야 한다고 믿었으며, 또한 그것은 교회가 현존하는 제도적 사회로부터 다시 분리될 때 그리고 이 세계 및 그에 결탁한 교회와 대립되는 하나님의 혁명적 전위대로서 자신을 재구성할 때 가능하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들은 세계와 교회의 근본적 변혁을 위하여 매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세속적 권력과 제도적 교회의 의해 짓밟히고 말았다.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역사 변혁의 주체라는 것을 자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는 아직 자신들의 시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사의 변혁 과정은 그들의 시대를 예비하여 갔고, 그들의 혁명적 전통은 근대에 이르러 찬란하게 부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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