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한국 교회사 07] 기독교의 항일운동과 3.1독립운동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12-21 21:55
조회
2172
천안살림교회 2011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2 - 한국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1년 12월 21일 / 최형묵 목사


제7강 기독교의 항일운동과 3.1독립운동

              

1. 3.1운동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항일운동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 가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민족운동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것은 물론, 무장투쟁과 경제적 저항운동, 그리고 해외에서의 민족운동 지원 등이 그것이다.


1) 기독교인들의 항일무장투쟁

무장독립운동(요인암살 및 무력항쟁)은 식민지화 전 과정에서의 민족운동 형태 중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무장독립운동에 ‘일당백의 기개를 가진’ 다수의 기독교인들 역시 참여하였다. 기독교인의 폭력사용 문제는 신학적ㆍ교리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기는 하나, 무장투쟁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분명한 신앙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1905년 전덕기ㆍ정순만 등이 박제순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한 시도/ 같은 해 최재학ㆍ이시영 등이 을사오적 처단과 을사조약 철폐요구 시위 / 경기도 양주 홍태순 목사 고종 강제퇴위에 항거하여 자결 / 정재홍의 이토오 암살 미수 후 자결  

1908년 장인환ㆍ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사건: 구한말 외교 고문인 미국인 스티븐스가 한국민족은 독립할 자격이 없는 우매한 민족이라는 취지의 기자회견을 하자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기독교인 장인환이 총격. 이로 인해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아울러 미주지역 독립운동단체 결성(대한인국민회)

1909년 10월 26일 천주교인 안중근과 개신교인 우연준 이토오 암살사건: 일찌기 진남포에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설립운영한 바 있는 안중근은 국권회복을 위해 고급인재를 양성하려고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으나 프랑스신부들의 비협조로 좌절 - “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되며, 가르침을 받을지언정 프랑스 말은 배우지 않기로 하였다.” 이토오 암살 성공 후 심문 내용 - “문: 그대가 믿는 천주교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겠지. 답: 그대로이다. 문: 그렇다면 그대는 인도에 반한 행위를 한 것이 아닌가. 답: ...성서에도 사람을 죽임은 죄악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다.” 거사 직후 우연준의 기도문 성격의 시: “만났도다/원수 서로 만났도다/.../앉을 때나 섰을 때나/앙천하고 기도하길/살피소서 살피소서/주예수여 살피소서/동반도의 대제국을/내원대로 구하소서/오호 간악 이 도적아/ 지금 네 명 끊어지니/너도원통하리로다/덕 딱으면 덕이오고/죄범하면 죄가 온다”

1909년 이재명의 이완용 저격사건, 그리고 강우규, 이동휘 등에 의한 항일테러운동은 계속되었으나 이는 개별적 성격이 강하고, 기독교인의 조직적인 무장투쟁은 미국, 만주, 노령 등의 해외독립운동에서 본격화된다.              


2) 항일 경제운동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맞서 민족세력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대항하였다. 실력양성에 입각한 민족자본 형성운동이 전 민족적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전개된 것이라면, 일본상품 불매운동 및 시장세 등 잡세에 대한 항세운동(“교회에 헌금으로 1년에 16만원씩이나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들이 1~2전 하는 시장세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었던 운동이다. 또한 일제의 차관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그 보상비용 마련을 위하여 금주ㆍ금연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도 한다.


3) 해외에서의 민족운동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민족운동은 점차 중국, 미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 등 해외에 그 거점을 마련하여 본격적으로 전개되는데,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의 민족운동은 무장독립전쟁론이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 무장독립운동은 대개 학교의 설립과 병행하여 이루어졌고 여기에 많은 기독교인이 참여하였다. 당시 잘 알려진 기독교계 대표적 인물들로는 안중근, 이재명, 이동녕, 조성환, 김 구 등이 있었다.

이처럼 여러 방면에서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참여가 두드러진 것은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 외에도, 기존의 모든 사회 조직들이 와해되어가는 중에 거의 유일하게 전국적인 조직체계를 형성하고 있던 교회의 성격에 힘입은 바 크다. 바로 이러한 복합적 요인이 3.1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이 중요한 몫을 담당하게 되는 현실적 요인이 된다.


2. 3.1운동과 기독교


근대적 민족의식과 독립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3.1민족운동은, 교회의 입장에서는 기독교가 ‘민족의 종교’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분명한 계기였다.


1) 3.1운동의 배경

3.1민족운동의 일반적 배경은 일제의 본격적 식민화 정책으로, 구체적으로 헌병경찰제도에 의한 무단통치, 토지조사사업으로 대표되는 약탈적 경제정책, 우민화 내지는 동화를 목표로 하는 식민지교육, 열악한 사회적 지위를 가용하는 민족차별정책이었다. 이러한 일반적 요인에 더불어 일제는 민족적 성향의 종교를 탄압(기독교에 대해서는 간섭과 와해 공작, 천도교와 대종교 등 민족종교에 대해서는 아예 유사종교로 취급)하였는데, 거꾸로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세력은 시련과 박해 속에서 오히려 급성장을 한다(3.1운동 당시 교세: 장로교인 16만, 감리교인 3만 등 중소교파 합하여 대략 20만). 일제는 1915년 포교규칙을 마련하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전도회ㆍ사경회ㆍ부흥회ㆍ기도회ㆍ예배 등을 방해하고 설교ㆍ기도내용, 출판물 등을 문제시하였다. 한 예로 성서공회 발행 전도 팜플렛 문제시: “조선의 형제여, 각각 마음 속에 있는 악마를 격퇴해야 합니다.”        


2) 3.1운동의 발단과 전개

1918년 파리평화회의에 김규식 파견/  1919년 2.8 독립선언 등의 과정 등을 거쳐 국내에서의 종교계 지도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3.1만세운동 준비(33인 민족대표 가운데 기독교 16, 천도교 15, 불교 2) / 3월 1일 서울을 비롯 주로 기독교나 천도교가 강한 지역에서부터 시작하여 전국으로 확산/ 초기 교사ㆍ학생ㆍ종교인 등 지식인이 선도하여 일반민중들이 참여하는 형태로 만세운동 전개/ 시위 자체를 기독교인이 주도한 몇 사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유여대 목사 3월1일 의주서부교회당 터에서 8백여명 시위 주도/ 당시 장로교 총회장 김선두 목사 주도로 숭덕학교에서 평양의 6개교회 연합 1천수백명 시위/ 경북노회에서는 노회임원들이 나서 학생들과 시장의 군중을 지도/ 공주읍교회 현석칠 목사 4월 1일 장날 시위/ 강화읍 장날 강화도 교인들을 중심으로 1만여명 시위            


3) 교회의 수난과 의의

3.1운동 초기 지도자와 조직을 제공함으로써 중요한 기폭제 역할을 한 교회는 일제의 주목을 받아 핍박과 수난 또한 컸다: 4월3일 평남 강서 사천 학살사건/ 3.4-4.2 정주 학살ㆍ방화 사건/ 3.9 서울 기독교인 십자가 학살사건/ 3하순 의주교회당 방화ㆍ파괴사건/ 4.1 천안 병천 학살사건/ 4.15 수원 제암리교회 방화ㆍ학살사건. 그 해 장로교 총회는 총회장의 구속으로 부총회장 마포 삼열 목사가 회장 직무 대행하였으며, 감리교의 평양지방회(목사 24인 중 14명 금고, 4명 은퇴, 남은 자 10명)는 ‘감옥에서 여는 것이 좋겠다’고 할 상황이었다. 당시 피검자 19,525 명 가운데 기독교인 3,426명으로 17.6%(당시 기독교인 인구 1.5%)./ 목사 등 교역자는 244명으로 천도교나 불교의 2배/ 여성 피검자는 총 471명 가운데 309명 기독교인(65.6%). 이러한 피해 외에도 교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으나 한국 민중의 신뢰를 얻은 교회는 3.1운동 이후 오히려 급격히 신장한다. “독립운동, 그 결과가 무엇이든, 그것은 조선 민중의 마음과 심정을 열어주었다. 지난 50년의 평범한 날들이 못한 일들을 한 셈이다. 새날이 다가왔다.”(감리교 평양지구선교사 무어)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를 폐하고 소위 ‘문화정치’를 실시하였고, 이에 따라 민족운동 역시 변화한다. 기독교 역시 그 신앙양태의 변화를 경험하는데, 한 갈래는 초월적 신비주의 신앙운동으로 한 갈래는 현실적 계몽주의 신앙운동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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