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한국교회사 14] 1980년대 한국사회와 기독교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2-03-21 22:30
조회
1725
천안살림교회 2012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2 - 한국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2년 3월 21일 / 최형묵 목사


제14강 1980년대 한국사회와 기독교


1. 신군부의 등장과 광주 민중항쟁


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의 피살로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한 것처럼 보였다. 국민들의 민주화의 기대(‘민주화의 봄’ ‘서울의 봄’)는 높아졌고, 유신체제를 넘어뜨리고 민중의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열기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유신철폐, 계엄해제 요구): 11.24 YWCA 위장결혼식사건 / 3김의 활동/ 80년 5월 17일까지 무려 879건에 달한 노동쟁의(80년 3월 해태 노동자 8시간노동제 관철, 4월 청계피복노조, 4.21-24 사북노동자항쟁, 금속노조연맹 쟁의, 5월 경인지역 노동자 쟁의, 중동 파견 노동자 쟁의...) 그러나 유신잔당들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일정을 추진해나갔고(12.6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10대 최규하대통령 선출), 한편으로는 권력의 공백을 틈타 가장 기민하게 움직인 보안사를 중심으로 한 군부세력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해 나간다.(12.12사태, ‘이원집정부제’ 개헌 발표, 5.17비상계엄령/ !!! /6.1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8.27 11대 대통령 선출, 81.2.25 12대 대통령 선출...) 유신잔당세력과 신군부세력의 체제유지 및 권력장악 기도와 이를 뒷받침하는 외세(미국)의 역할은 정국을 혼미 속으로 몰아넣었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적 열기를 제지하기 위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바로 그 시점 5.18일 광주 민중항쟁 발발. 이로써 80년대 초반, 나아가 80년 이후 한국사회는 광주민중항쟁을 통해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2.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의 일상화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급속히 성장한 민중운동 세력은 급격히 성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체제를 구축한 권력 역시 그 나름의 고도의 통치술을 통해 권력재생산에 성공한다(1986년 6월 민주화항쟁, 6.29선언과  6공화국 탄생). 한편 이 시기에는 80년대 초반 호황에 힘입어 한국 자본주의의 외형적 성장이 급속히 이루어지고, 이와 더불어 고도 소비사회를 경험한다. 한국 역사에서 사실상 소비자본주의의 ‘향유’는 이때부터이다(소비사회의 대중문화와 ‘신세대’ 탄생의 배경). 그러나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소비문화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보다 더 근본적인 대안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을 일깨웠고, 그것은 다양한 형태의 민중운동/시민운동을 통해 나타나게 되었다.


3. 민중운동의 성장과 새로운 사회 대안 찾기


80년 광주민중항쟁은 특별히 세 가지 점에서 독재권력에 저항했던 세력들을 일깨웠다. (1) 기존 정치권세력에 대한 회의 (2) 외세(미국)의 실체에 대한 인식 (3) 조직화되지 않은 민중운동 세력의 무력감. 이러한 반성을 통해 한국 민중세력은 근본적 사회변혁의 전망(단순히 독재에 저항하는 차원을 넘어 혁명적 변화를 통한 새로운 사회 건설)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화해나기 시작한다(민중운동의 조직화). 이로써 민중운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이제 한국은 또 다른 측면에서 세계인들의 주목을 끈다(냉전의 최전방/ 비약적인 경제성장 / 개발독재의 전형에 이어 민주화운동의 실험장으로서).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는 이와 같은 민주화운동의 경험이 대중화되면서 ‘민주주의적 의식’이 점점 생활화 되어 간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그 성과는 어찌 되었든...)          


3. 교회의 두 가지 길


1970년대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루로서 독재권력에 맞서 최전방에 나섰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 교회 자체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들이 있었던 것과 같은 현상은 8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본질적인 면에서 이 양극화의 경향은 80년대에 비로소 최고조에 달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혹독한 군사독재에 맞서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혼신을 다하고 있을 때(기독교의 민주화 세력 역시 조직화: NCC 전국 조직 활성화, 교단ㆍ교단연합 목회자ㆍ청년ㆍ학생ㆍ여성 조직의 강화, 사회선교/기독교사회운동 단체의 조직, 민중교회 탄생...), ‘발전하는’(?) 한국 자본주의와 더불어 거대 조직화한 교회들이 곳곳에 자리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개혁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또한편에서는 급진화한 학생운동세력이 거대 교회를 ‘불사르겠다’고 한 것(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그와 같은 소문이 나돌았던 것은 사실)도 이 시기의 일이다.        


4.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향한 교회의 발걸음


어쨌든 꾸준히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해 달려왔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80년대 변화된 상황에서도 그 몫을 다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80년대 교회는 70년대와는 다른 상황을 경험했다. 70년대 교회(학생들과 더불어)가 민주화운동의 최일선에 섰다면, 80년대에는 여타의 민중운동 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그 선봉에 서기보다 지원자 및 후원자로서 몫이 두드러진 상황이 되었다. 교회의 민주화운동 역량이 사실상 더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몫에서 상대적으로 그 비중이 줄어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자신의 몫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통일운동을 주도한 것이다(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과 그에 이은 1995년 평화통일 희년운동은 그 대표적 경우, 그리고 문익환 목사의 방북 등). 이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전세계적 네트워크, 그리고 기독교의 뿌리깊은 정의와 평화에 대한 희망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반공주의’에 대한 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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