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의 정의,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는 손길 - 예레미야서 9:22~24[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2-13 18:52
조회
6307
2022년 2월 1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의 정의,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는 손길
본문: 예레미야서 9:22~24



오늘 우리는 예사롭지 않은 예레미야서의 한 본문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저 좋은 말씀,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상투적인 말씀으로 지나쳐버릴 수 없는 비범한 말씀입니다.

성서의 신앙세계 안에서 예언자의 활동과 그 말씀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왕과 사제로 대표되는 세습적 지도자와 구별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 예언자의 역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왕과 사제가 주어진 질서를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면, 예언자는 그 주어진 질서의 부조리를 타파하고 새로운 세계의 전망을 선포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무엇보다 예언자들의 선포에서 핵심적인 것은 부조리한 세계 안에서 고통을 겪는 가난한 사람들을 주목하고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는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성서의 독특한 정신세계, 신앙세계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출애굽이라는 해방의 사건으로부터 출발한 성서의 정신세계는 바로 예언자들의 선포를 통해 끊임없이 증폭되고 계승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의 멸망 시기에 활동하였던 예언자로서 그의 예언활동이 매우 독특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예언자가들 가운데서 튀었다기보다는 가장 극적으로 예언자의 역할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두드러집니다.
국가 멸망의 위기 상황 가운데서도 예언자 예레미야는 국가안보의 중요성보다는 민중들 가운데 이뤄지는 정의와 평화를 역설했습니다. 기존하는 체제와의 어떤 타협의 여지없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정의를 역설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언자 예레미야는 어떤 정치세력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을 수 없었고 온갖 비방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은 그야말로 그의 실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가운데서 선포된 그의 예언의 빛은 성서의 세계 가운데 가장 빛나는 한 줄기 빛이 되었고, 그것은 오늘까지 인류문명의 소중한 지혜가 되었습니다.

본문말씀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그와 같은 입장을 헤아리며 볼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일련의 이어지는 선포의 한 대목이지만, 본문말씀 첫머리는 섬뜩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나 주의 말이다. 너는 이렇게 전하여라. 사람의 시체가 들판에 거름 더미처럼 널려 있다. 거두어 가지 않은 곡식단이 들에 그대로 널려 있듯이, 시체가 널려 있다.”(22절) 그보다 앞선 구절은 더 구체적입니다. “죽음이 우리의 창문을 넘어서 들어왔고, 우리의 왕궁에까지 들어왔으며, 거리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사정없이 죽어 가고, 장터에서는 젊은이들이 죽어 간다.”(21절)
온통 죽음이 지배하는 현실입니다. 위기에 처한 이들이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는 현실, 살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일터에서 죽어가는 현실, 그저 평범하게 한 몫 감당하면서 살고자 하지만 그마저도 버겁게 느끼는 젊은이들이 절망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현실, 그래도 그 원인규명을 제대로 하지도 못할뿐더러 누구도 책임지는 일 없는 사회의 실상입니다. 죽음의 원인 제공이 분명한데도 법적으로 면책되는 사회 현실입니다. 김용균씨 사건 재판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본문말씀 후반부(23~24)는 그 현실을 넘어설 길을 제시하는 가운데, 바로 그 현실을 빚어낸 원인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요즘 식으로 말해 학력과 권력과 재력으로 이해하면 실감날까요? 그 인간적 성취가 자랑거리가 되고 그 성취와 업적에 따른 사회의 실상을 말합니다. 그 성취의 토대 위에 세워진 사회가 죽음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앞부분의 말씀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내가 얼마나 성취하였는가, 내가 얼마나 우월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뜻이 무엇일까요? “긍휼과 공평과 공의” 또는 번역에 따라 “인애와 공평과 정직”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삶의 관계를 규정하는 가치들입니다.
어떤 업적의 규모에 따라 쌓아올려진 체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내적인 관계가 우선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겉껍데기 규모의 형체로 드러나는 삶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마주치며 형성되는 자애롭고 공평한 관계, 그것이 옳다는 것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서의 정의, 곧 하나님의 정의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알고 있는 통상적인 정의와는 다른지 확연하게 보여주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말씀을 마주하는 순간 곧바로 연상되는 것은 철학자 플라톤이 <국가>에서 말한 정의론입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말하는 사주덕(四主德), 곧 네 가지 중요한 덕목으로서 정의, 절제, 용기, 지혜를 떠올립니다. 여기서 절제, 용기, 지혜가 조화를 이뤄 균형을 잡으면 정의가 됩니다. 플라톤은 이를 도시국가의 구체적 계층관계 안에서 구상했습니다. 수공업자ㆍ상인ㆍ농부ㆍ창작자 등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절제, 국방과 행정, 치안을 담당하는 사람에게는 용기, 최고 통치자인 철인에게는 지혜의 덕목이 요구된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계층간 조화를 이루는 것이 정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금ㆍ은ㆍ동의 역전입니다. 각 계층은 그 내면에 각기 금ㆍ은ㆍ동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생산자에게는 동, 보조자에게는 은, 통치자에게는 금입니다. 따라서 현실에서는 이를 뒤집어 적용할 때 정의가 이뤄진다고 보았습니다. 생산자에게는 사유재산이 허용되지만, 통치자와 그 보조자에게는 재산과 가족이 허용되지 않는 원칙입니다.
이런 구상은 매우 고전적인 정의의 원칙을 확립합니다. ‘각자에게 마땅한 몫을!’이라는 원칙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정의를 말할 때 통용되는 원칙입니다. 여러 계층이 뒤엉켜 갈등하는 현실에서 이렇게 명징한 원칙을 확립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새롭게 구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교환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를 구별하여 교환정의에서는 등가교환, 분배정의에서는 기여에 따른 비례정의의 원칙을 확립하였고, 그 원칙은 오늘날까지 철칙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긴 이야기 줄이고 다시 플라톤의 정의의 요체를 확인하면, 각기 다른 계층들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 안에서 각기 자기의 몫을 맡음으로써 균형을 이루는 것을 정의로운 상태로 본 것입니다. 이것이 갖는 적극적인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예컨대 정경분리), 기본적으로 주어진 질서 안에서 능력주의를 따라 조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역시 그 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본문말씀에서 예레미야의 선포는 완전히 그 발상을 벗어납니다.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자기 힘을 자랑하지 말라, 재산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은 각기 소유한 금ㆍ은ㆍ동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각자의 능력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발상입니다.
이쯤 되면 예레미야와 플라톤의 시대를 비교해 보고픈 의문이 듭니다. 그냥 알려진 연대기로 보면, 예레미야는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하였고, 플라톤은 기원전 5~4세기에 걸쳐 활동했으니 예레미야가 앞섭니다. 기록상으로는 <예레미야서>와 <국가> 가운데 어느 것이 앞서는지 확인하기 어려워 그 선후관계를 따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크게 차이나지 않은 시대(이른바 ‘차축시대’) 서로 인접한 문명권 안에서 전혀 다른 발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비단 예레미야에게서 나타난 것이 아니고 오랜 예언의 전통이라 보면 훨씬 오래된 지혜입니다.
예레미야의 선포는 하나님의 정의를 함축합니다.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정의를 깨달아 알고, 그것이 땅 위에 실현되는 것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각자의 능력을 자랑하며 그것으로 정의를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고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이루는 하나님의 손길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에서는 기존 사회 안에서의 능력을 위주로 짜여진 소위 조화로운 질서의 부조리를 질타하고, 각자의 능력을 상대화할 것을 요청할 뿐 이 땅 위에 이뤄질 하나님의 긍휼과 공평과 공의가 어떤 모습을 띨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지혜를 자랑할 것을 선포합니다. 실러는 그의 작품 <빌헬름 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억압당하는 자가 어디서도 정의를 발견할 수 없다면, 만약 억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는 확고한 용기를 찾아 하늘로 손을 뻗어 하늘의 영원한 정의를 가지고 내려온다. 높은 곳의 그것은 저 하늘의 별처럼 결코 남에게 양도될 수 없고 파괴될 수 없다.”
진정한 정의를 요구하는 것, 그것은 막연한 갈망이 아닙니다. 예언자들의 공통된 선포 가운데서 그 모습은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이 생존을 보장받고 존엄하게 살아가는 현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정의라고 선포합니다. 그 정의의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가운데서 더욱 증폭됩니다. 오늘 성서일과에 본문말씀과 더불어 제시된 마태복음의 포도원 노동자의 비유(마태 20:1~16)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노동 시간에 상관없이 누구나 저마다 존엄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자격과 지위, 업적과 능력에 따른 분배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저마다 누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의 정의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서나 이뤄질 일이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 아니냐고 말하면 안 됩니다. 오늘 말씀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따라 “하늘의 뜻이 땅에 이뤄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그것이 땅에 이뤄지는 것이 곧 하나님나라요 하늘나라라고 끊임없이 일깨워주셨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그 정신은 면면히 살아 인류의 문명을 지탱해왔습니다. 오늘 자본주의 사회가 파괴해버리기 이전의 여러 문명권의 공통된 상호부조의 연대, 공동체에 깃든 정신입니다. 심지어 오늘 자본주의 국가 안에서도 배제되지 않는 사회복지의 기본바탕이기도 합니다. 이를 더욱 극대화하는 것이 인류의 미래를 진정으로 보장하는 길입니다. 죽어가는 이들을 내버려두는 사회는 존속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나라를 운영하겠다는 정치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편 갈라치기를 통해 자기 표를 모으려고 혈안이 된 정치가에게 희망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일말의 연민이 있는 사람,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헤아려야 합니다. 대통령후보 토론회에서 국민연금개혁에 대한 동의가 이뤄졌지만, 그저 기금 고갈을 방지하는 대책이 근본해결책이 아닙니다. 한국형 복지국가를 어떻게 구상하고 그 안에서 연금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하는 맥락에서 대안이 모색되어야 합니다. 노자는 말하기를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물고기를 요리하듯 해야 한다(治大國 若烹小鮮).”고 했습니다(도덕경 60장). 섬세한 손길이 요구됩니다. 칼잡이가 칼 휘두르듯이 편을 갈라 치는 방식으로 국정운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지혜와 힘과 재산을 자랑하는 것에 근거한 사회질서를 거부하고,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믿음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일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분별하고 바른 길을 택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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