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말씀의 불확실성, 말씀의 확실성 - 히브리서 4:12~13; 이사야서 55:8~11[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2-20 17:16
조회
7336
2022년 2월 2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말씀의 불확실성, 말씀의 확실성
본문: 히브리서 4:12~13; 이사야서 55:8~11



오늘 우리는 아주 익숙하지만 정작 그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되는 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히브 4:12~13)
앞서부터 이어지는 말씀의 결구로 제시된 이 말씀은 크게 두 가지 차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대목(12절)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두 번째 대목(13절)은 그 말씀 앞에 선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대목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 칼보다 더 날카로워 사람의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완전히 밝혀낸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리한 양날 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말씀의 뉘앙스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도살당한 가축의 살과 뼈를 갈라는 내는 칼처럼 한 치의 오차 없이 인간의 삶과 생각을 드러내준다는 것입니다. 혼과 영, 관절과 골수, 생각과 의도가 어떻게 구별되는지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그 구분의 의미보다는 인간의 정신적인 삶과 육체적인 삶 모두를 낱낱이 드러내준다는 의미가 중요 초점입니다.
두 번째 대목은 그 의미를 다시 풀어,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피조물도 숨겨질 수 없고, 그 앞에 투명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강조하고, 우리는 모두 그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편의상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눠 생각했지만 사실상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을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인간의 실상이 온전히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말씀의 위력입니다. 로고스, 곧 진리로서 진정한 도 앞에서 인간의 실존은 투명하게 밝혀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내가 어느만큼 와 있는지 혼자서는 알 수 없을지라도 말씀 곧 진리 앞에 대면할 때 환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 앞에 진실로 겸허히 나서야 한다는 것으로 집약됩니다.

이 말씀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 뜻을 헤아림으로써 진리 앞에 선 인간의 도리를 되새겨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말씀은 앞서부터 이어져 온 말씀의 결구로 제시되는 맥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앞 구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씁시다. 아무도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11절)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 진정한 안식을 누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안식’은 무엇을 뜻할까요? 히브리서가 말하는 안식은 공관복음서가 말하는 ‘하나님나라’ 또는 ‘하늘나라’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요한복음이 말하는 ‘생명’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삶으로서 의미를 지닙니다. 지금 살아서 누리는 진정한 삶입니다. 그 삶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 앞에서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고 바른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위력, 그 앞에 선 인간의 도리를 말하고 있다면, 이사야서의 말씀은 같은 뜻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은유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셔서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고 나서야,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이사 55:8~11)
이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과 길, 인간의 생각과 길을 대비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생각과 길, 곧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이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통념으로 말씀의 의미를 헤아려서 안 될 것 없지만,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서 헤아릴 때 그 의미가 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지금 이사야서의 본문말씀은 두 번째 이사야의 선포입니다. 두 번째 이사야는 바빌론 포로기에 활동했던 예언자로서, 바빌론으로부터의 해방을 제2의 출애굽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머지않아 해방의 새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희망을 선포하는 말씀의 결구입니다. 바로 그 맥락에서 인간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생각을 대비하는 것은 당대의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대비되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 것입니다.
당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지금 당장 포로로 잡혀 있는 현실에 절망했습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에 매인 태도입니다. 몇 주 전 인용한 비유를 다시 환기하자면, 밭가는 농부가 저 앞의 소나무를 기준점으로 삼지 않고 소 엉덩이만 쳐다본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더디다고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그와 다르다고 합니다. 더디게 느끼고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후반부의 말씀입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비유로 그 진실을 전합니다. 비와 눈의 비유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 땅을 적시고,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을거리를 주고 나서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는 비유입니다. 생명의 질서가 존속하는 이치를 이렇게 아름다운 비유로 설파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의 운동 속에, 생명의 약동 가운데, 사람의 삶 가운데 마땅히 이뤄져야 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시 하나님의 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마침내 이루어진 그 일을 보고서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 아닐까요?
사필귀정(事必歸正), 반드시 바른 데로 돌아갑니다. 바르지 못한 것이 기승을 부리는 것 같지만, 반드시 바른 데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질서는 무너지고, 생명은 죽음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은 그렇게 살아 있는 생명의 운동 가운데서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인간이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한 순간도 끊이지 않고 있기에 생명을 살리는 말씀으로서 권능을 발휘합니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시편 19:3~4) 바로 그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불확실하게 느껴지느냐, 그렇지 않다, 이렇게 확실하게 입증되는 것을 모르겠느냐?’ 이사야서의 말씀은 그렇게 집약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의미를 그렇게 헤아릴 수 있다면, 다시 히브리서의 말씀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심원하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삶을 비추어보라는 뜻입니다.
그저 율법 조문 몇 마디, 문자로 기록된 말씀 몇 구절,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습니까? 딱 펼쳐서 나오는 말씀대로 살아야겠다 생각한 사람이 난처한 상황에 빠진 이야기 말입니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죄짓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누가 17:2; 마가 9:42; 마태 18:6). 이게 아니겠지 하고 펼쳤더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 하는 말씀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오용하면 안 됩니다. 문자를 넘어서 진정으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즉문즉답이 순간적 깨달음을 주기도 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즉각적으로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살아 움직이고 있으나 순간적으로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그 말씀의 위력을 일깨워주고 있으며, 이사야서는 그 말씀을 어떻게 깨달아 알 수 있는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생명을 살리는 말씀을 깨달아 알아들어야 합니다. 사물의 이치 속에, 생명 가운데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 무엇인지 바른 삶인지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실은 그와 같은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망과는 거리가 멉니다. 말이 난무하지만 진실한 말은 듣기 어렵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말은커녕 죽이는 말만 난무합니다.
<말이 칼이 될 때>, 혐오의 시대에 서로를 포용하며 안전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법학자 홍성수 교수의 책 제목입니다. 차별과 폭력의 말들이 어떻게 사회를 파괴하는지, 공존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책입니다. 말을 칼로 비유한 것은 히브리서와 같은 수사법이지만, 그 의미가 정반대라는 것은 금방 알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비유가 그만큼 예리하게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의 위력을 말한다면, 이 책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안기는 혐오의 말을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말이 상처를 안기는 사회 현실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의 혐오발언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혐오의 논리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하고 거기에 민심이 휩쓸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집니까? 일상의 삶 가운데서도 편견과 혐오의 발언이 넘쳐납니다. 심지어 구원의 복음과 생명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교회가 혐오발언의 진원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통탄스러운 현실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말씀의 진실 앞에 서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상처를 안기는 말을 내뱉지 않을 때,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에 마음이 동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깊이 성찰할 수 있을 때, 선한 사람들과 더불어 더 좋은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데서 기쁨을 맛볼 때, 오묘한 세상을 보며 그 어느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며 돌보는 마음을 가질 때, 현실이 개탄스럽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간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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