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미FTA는 정의로운 삶의 질서를 파괴한다 - 기독교 윤리적 평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11-29 20:34
조회
3027
* <기장회보> 2011년 12월 원고입니다(20111129).


* 이 글은 2007년 한미FTA협상 타결 직후 발표한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신학적 성찰”(2007년 5월 <기장회보> 수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한미FTA의 국회비준을 계기로 그 의미를 다시 환기하는 뜻에서 편집자의 시급한 요청으로 수정한 것이다. 한미FTA는 재협상으로 다소 달라진 부분이 있으나, 기독교 윤리적 평가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달라진 내용은 더 악화되었을 뿐 결정적인 차이를 지니지 않으므로 타결 시점의 윤리적 평가와 비준이 이뤄진 현재의 윤리적 평가는 크게 다를 수 없다. 2007년 타결 시점의 비판적 관점을 2011년 국회 비준이 이뤄진 현재 시점에서 변경 없이 그대로 재확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비극적’이다.



한미FTA는 정의로운 삶의 질서를 파괴한다

-한미 FTA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평가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1.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보는 기독교인의 시선


2007년 4월 2일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타결되었던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이 2011년 11월 22일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되고 말았다. 2007년 타결 이후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애초 그 협정을 추진할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주당마저 ‘반성’하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였을 뿐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여론이 비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재협상으로 더 개악된 내용의 비준안이 현 집권당인 한나라당의 날치기로 통과되고 만 현실이 개탄스럽다.

국회에서 비준까지 마쳤으니 이제 기정사실화되는 것일까? 날치기까지 감행해가면서 비준안을 통과시킨 세력의 입장에서는 기정사실화하고 싶겠지만, 그로 인해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대다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기정사실화할 수 없는 것이다. 국회 비준을 저지하지 못한 일은 유감이지만,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로 인한 폐해를 막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특별히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문제점을 헤아리고 그 대안을 찾는 일은 유기할 수 없는 신앙적 과제에 해당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기독교계 내부에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지니는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다. 애초 2007년 협상이 타결되었을 즈음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이를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거니와 그와 같은 견해는 상당수 기독교인들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한기총이 내부 비리와 쌓인 문제로 내홍을 앓고 있는 까닭에 특별한 입장을 천명하지 않았지만, 한국 보수 기독교계에서 그 정서는 여전히 다르지 않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의 상당수가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발효로 수혜를 누리는 층에 속해서가 아니다.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는 세력과 기독교 내 세력간의 모종의 이데올로기적 공모관계 때문이다. 그 이데올로기적 공모관계는 사실 한국 기독교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그 탓에 실제적 이해관계와 괴리되는 판단이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경우가 빈번하고 그 판단은 보수적 사회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그와 같은 그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공모관계의 허울을 벗어버리고 기독교 신앙 본연의 입장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지니는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는 우선 그 경제적인 실제효과 측면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이어 기독교 신앙에 따른 윤리적 입장에서 문제점을 진단한 후, 마지막으로 냉철한 판단을 저해하는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오늘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가늠해보고자 한다.


2.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불투명한 경제적 효과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판단할 때 가장 일차적으로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은 역시 경제적 효과의 문제다. 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한 경제 효과로 국내총생산(GDP)이 5.7% 증가하고 일자리 또한 늘어날 것이라 예측하고 있지만, 또 다른 예측방법에 의하면 그 효과가 0.08~0.13%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이해영).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는 입장에서는 그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두고 ‘쇄국’을 하자는 것이냐고 되묻지만, 사실상 한국경제는 이미 개방될 대로 개방되어 있는 만큼 한미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한 추가적인 경제효과는 미미하다는 것이다. 애초 가장 큰 수혜를 누릴 것으로 꼽혔던 자동차 분야는 재협상으로 그 기대효과가 축소되었고, 섬유 분야 등 여타분야마저도 그 실익은 크지 않다. 기대되는 경제효과는 미미하면서 그것이 지니는 문제로 인해 심각한 폐해가 우려되는 것이 현재 한미 자유무역협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는 세력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관세 철폐로 인한 수출 증대 효과, 외국인 직접투자를 비롯한 투자 확대, 경쟁촉진을 통한 경쟁력 강화가 소득증대효과를 가져오는 한편 물가안정과 소비의 선택폭 확대로 인한 소비자후생의 증대가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이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수사는, 최고 선진경제권인 미국 경제와의 접목으로 한국 경제의 선진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보수언론은 ‘경제영토의 확장’이라고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과연 그와 같은 기대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을까? 경제적 효과에 대한 예측은 단언하기 어렵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오히려 한국 경제의 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예측이 타당성을 지닐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단순히 상품의 관세철폐를 주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비관세장벽을 철폐하는 데 주목적이 있다는 점에서 한국 경제와 사회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는 입장에서는 오래 전부터 ‘제도의 선진화’를 역설해왔지만, 과연 제도의 선진화인지도 의문이거니와 설령 선진화가 맞다 하더라도 대자본의 공세 앞에 그 목적을 달성할 여유는 있는지 의문스럽다. 필경 경쟁력 있는 대자본만 살아남고 여타의 부문은 붕괴하는 파국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고, 그 경우 일반 국민들의 삶의 질은 현저히 떨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으로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발상은 마치 도박을 하듯이 외부충격에 의한 한국 경제의 활로를 찾으려 하는 셈인데, 그 미래는 지극히 불투명하다.


3.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평가


그러나 더 우려되는 것은 소위 경제 선진화가 이뤄진다 하더라도 그와 동시에 전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들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경제적 실패로 귀결될 경우 그 피해는 국민들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고통을 안기겠지만, 경제적 성공으로 귀결된다 하더라도 대다수 평범한 국민들에게 고통이 완화되기는커녕 더욱 강화될 수도 있다는 점이 정말 심각한 문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평가하는 것은 그 결과의 경제적 성패를 넘어 전사회적으로 야기될 수 있는 제반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평가를 뜻한다.

기독교 윤리적 평가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전제되는 것은 약자에 대한 관심사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출애굽한 히브리 민중을 계약의 상대로 삼은 구약성서의 전통과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예수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성서는 가장 연약한 사람들과 생명이 그 존재를 인정받고 그 권리를 누릴 수 있을 때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고 피조세계의 모든 생명이 존속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기독교 윤리는 그와 같은 성서적 전통을 기본적인 출발점으로 한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설 때,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효과로 야기될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의 위기, 사회적 정의와 공공성의 훼손, 국민건강과 생태계보존의 위협, 문화적 다양성의 침해, 동북아시아 평화체제 수립의 저해 등은 주목해야 할 문제들이다.


1)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의 위기

첫 번째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의 위기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을 안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타결과 비준 과정은 그 자체로 이미 민주적 절차를 심각하게 훼손하였다. 국민적 여론수렴의 정상적인 과정이 생략되었고, 국회 내부의 절차도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사실상 국민으로부터 그 권한을 위임받은 바 없는 소수의 통상관료들에 의해 협상이 추진되었을 뿐 아니라,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의 의견수렴은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고, 급기야는 날치기라는 비정상적 방법으로 그 비준안을 가결하였다. 게다가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한국과 미국 양국 사이의 법률체계 안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심각한 불평등 요소를 안고 있고 이에 따라 한국의 사회체계를 미국의 사회체계 안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어 있다. 미국은 자신들의 국내법이 자유무역협정에 우선하는 까닭에 이로 인해 고쳐야 할 법률도 없고, 자유무역협정의 내용이 국내법과 충돌할 경우에는 자유무역협정 조항이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한국은 자유무역협정이 국내법에 준하는 위상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신법 우선 원칙으로 수없이 많은 국내 법률을 개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있다. 이미 수십 개의 법률들이 개정되었다. 이것은 심각한 국민주권의 훼손을 뜻한다.      


2) 사회적 정의와 공공성의 훼손

두 번째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사회적 정의와 공공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자유무역협정은 자본과 상품의 자유는 철저하게 보장하되 사람의 자유는 보장하지 않는다. 특히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그 어떤 자유무역협정보다 그 점에서 강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본적으로 자본의 경쟁과 효율성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무역 체제는 경쟁력 있는 자본의 우위만을 보장할 뿐 경쟁력 없는 일체의 부문을 도태시킬 수밖에 없다. 게다가 경쟁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민영화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결국 사회 전반적으로 양극화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이는 기업 및 산업의 양극화, 고용의 양극화, 소득의 양극화, 교육 및 건강의 양극화,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인간 자체의 양극화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정부의 공공정책도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특히 한미 자유무역협정상의 투자자-국가제소 조항은 공공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정부의 어떤 정책이든 그 시도 자체를 제약하게 될 것이다.    


3) 국민건강과 생태계보존의 위협      

세 번째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국민의 기본 건강생활 및 생태계 보존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예컨대 신약특허 관련 조항 및 사실상 약값적정화 실패는 전반적으로 의료비 부담을 가중시킬 뿐 아니라 빈곤층 중환자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줄 것이며, 광우병 감염 위험이 있는 쇠고기의 수입개방, 유전자조작식품의 규제 완화 등은 국민들의 건강을 항상적인 위험상황에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 자동차 배기량에 따른 세제 철폐는 가중되고 있는 대기오염을 막고자 하는 사회적 가치기준의 후퇴를 의미한다. 농업의 피폐화는 가장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단순히 경제적 차원에서 한 산업부문의 위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농업은 식생활문화를 포함한 우리의 생활문화의 원천을 이루고 있고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생태계의 평형유지에도 중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으로 농업은 최대의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경제적 피해를 넘어 우리의 생활양식과 생태계에 심대한 타격을 줄 것이다. 이 점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지극히 반생명적이다.


4) 문화적 다양성의 침해

네 번째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문화적 다양성을 침해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스크린쿼터는 한국 문화의 자존심과 같은 것이었다. 그 덕분에 대자본을 배경으로 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잠식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스크린쿼터의 철폐는 할리우드 영화의 대거 잠식현상 가져올 뿐 아니라 그나마 제한된 한국 영화 가운데서도 흥행에 성공을 거둔 영화만이 생존할 수 있는 구도를 고착시킬 것이다. 여기에 미국 유선방송의 진출로 인한 시청자의 선택권 제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적 재산권 연장과 인터넷상의 지적 재산권 강화 등은 출판을 포함한 여러 문화산업의 위축과 편중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제도의 선진화라는 명분으로 이뤄지는 제도의 변화 등은 경제적 차원에서뿐만 아니 문화적 차원에서도 미처 예측하지 못한 우려스러운 사태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 그러기에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도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심각한 위험 요소를 안고 있다.


5) 동북아시아 평화체제 수립의 저해

다섯 번째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동북아시아 평화체제 수립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과거 정부 시절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개성을 포함한 북한지역 생산 제품을 한국산으로 인정받을 근거를 확보함으로써 남북화해의 중요한 기틀을 마련한 것처럼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무근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나마 사실무근이라면,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남북화해나 동북아시아 평화체제 확립에 적극적인 동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한국과 미국간의 정치군사적 동맹에 더하여 실질적인 경제적 통합의 효과를 가져와 동북아시아 지역 내에서 균형자로서 한국의 역할이 무위화되고 미국 주도의 동북아시아 정책이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같은 역내 국가로서 긴밀히 협조해야 할 중국과 일본을 경쟁과 견제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가운데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그 여파가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소지는 더욱 협소해진 상태다. 결국 남북한과 동북아시아 평화체제 수립과 관련해서도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잘못된 선택이다.  


4.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신학적 정당화 기제 비판


이처럼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경제적 득실의 차원에서도 그 전망이 불투명하고, 기독교 윤리적 가치판단의 기준에서도 매우 위험스러운 결과가 예측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기거나, 아니면 혼미하게는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앞서 지적한 대로 그 태도는 모종의 이데올로기적 공모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우리는 그 이데올로기적 공모관계를 가능케 하는 신앙적 정당화 기제들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신앙적 정당화 기제들은 개별 기독교인들에게 스스로의 실제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서까지 사실적 판단을 흐리게 할 뿐 아니라 기독교 윤리적 가치기준을 외면하게 만들고 있다. 평범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해악을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그 신앙적 담론들을 신앙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내면화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기독교 윤리적 가치판단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에 덧붙여 몇 가지 주요 신앙적 담론들을 살펴보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첫 번째 한국 기독교는 신앙의 국민화 내지는 신앙의 민족화를 지고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다. 간단한 예를 들어 한국 기독교인들이 기도할 때 최고의 목표는 언제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이다. 한국에서 민족주의 형성은 일제의 경험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며, 한국 기독교 신앙의 형성 또한 일제치하의 경험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그 까닭에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진보적 사회운동 역시 그 유산을 공유했고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늘날 진보 세력 내에서 민족주의는 여러 각도에서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반해 보수 세력 안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보수주의 기독교 안에서 ‘민족주의+국가주의’는 신앙 담론과 결합하여 더욱 강력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위험한 것은 그 논리가 ‘국익’ 담론과 손쉽게 결합하고 그것을 정당화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 기독교가 한국 경제의 선진화 논리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반기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그와 같은 논리가 지속되는 한 국익을 벗어난 보편적 가치기준이 자리할 틈은 없다. 기독교 신앙 담론이 이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부차화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한국 기독교는 여전히 성장주의 논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구적 근대화와 기독교 신앙을 동일시했던 한국 기독교는 1970년대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에 음으로 양으로 그 수혜를 가장 적극적으로 누리며 성장을 구가했고 성장주의를 체질화했다. 그 성장주의는 경제 성장논리와 전혀 다름없이 교회 규모의 성장 및 개별 기독교인들의 물질적ㆍ경제적 번영을 복음에 대한 믿음의 결과로 동일시했다. 그와 같이 규모의 성장을 추구하는 논리는 복음의 육화와는 거리가 먼 외적 규모의 확장 그 자체에 몰두하게 만든다. 또한 성장논리는 성장 자체에 집착하는 탓에 앞만 향해 달리는 저돌적 성공주의의 환상을 키우고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유보시키는 것을 당연시한다. 더 많은 물질적 조건을 갖추어야 행복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허덕일 뿐 지금 당장 누려야 할 삶은 뒷전을 제치게 되는 것이다. 외부의 충격을 통해서라도 경제적 규모를 키우고 그것을 경제적 성공으로 간주하는 경제 선진화 논리와 염치없는 기독교인들의 성장주의는 그렇게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성장주의는 수치심을 모르는 걸인의 철학에 지나지 않는다.

세 번째 한국 기독교는 희생과 대속의 논리를 남용하고 있다. 희생과 대속의 논리는 불가피한 희생을 정당화하고 당연시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어린양의 희생과 그로 인한 죄의 대속은 고대 종교의 제의적 맥락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고, 기독교 신앙 또한 그 유산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 사건은 희생과 대속의 악순환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다. 유일한 대속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더 이상의 희생자와 대속자가 필요 없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끊임없는 희생과 대속을 강요하는 현실의 악함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그 악순환의 종지부로서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는 데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있다. 민중신학은 이를 ‘단’(斷)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한 끊임없이 희생과 대속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제의적 표상에 사로잡힌 기독교는 끊임없이 그 논리를 신앙의 요체로 삼음으로써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희생의 사태를 불가피한 신의 섭리로 오도하게 만들고 있다. 희생과 대속의 악순환에 대한 종지부로서 십자가 사건이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숱한 희생을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기제로서 그 사건이 오용되고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국익과 성장의 논리는 그 희생과 대속의 논리로 쉽사리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농민들뿐만 아니라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희생시키는 국익과 경제적 성장이라면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단 말인가?  ‘일부 희생이 불가피하지만 전체적으로 좋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기만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는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그렇게 오용되고 있다면, 우리는 강요된 희생과 명백히 구별되는 자발적 섬김의 의미를 새삼 주목해야 하며 그 본을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새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물질적ㆍ경제적 조건의 충족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환상에서 벗어나, 그 어떤 조건에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현실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고자 했던 예수의 삶에 비추어 오늘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관철되고 있는 맘몬의 흉계를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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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