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평화의 구세주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11-28 16:15
조회
2862
* 월간 <새가정> 2011년 12월호 원고입니다.


평화의 구세주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복음서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원후 6년 로마의 인구조사를 배경으로 하는 누가복음의 탄생 이야기와 기원전 4년 헤롯왕의 유아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마태복음의 탄생 이야기다. 미시적인 시대 배경이 다를 뿐 아니라 줄거리와 등장인물도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복음서의 탄생 이야기는 근본적 메시지에서 다르지 않다. 두 복음서는 공통적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로마의 평화’(Pax Romana)와 대극되는 의미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안목을 가진 누가는 처음부터 예수의 탄생을 세계사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누가가 예수 탄생의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재위 기간은 그저 막연한 배경이 아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통치와 예수의 탄생은 직접적으로 얽혀 있다. 말하자면 대극을 형성하고 있다. 누가는 단순히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예수께서 태어나셨다’ 하는 것을 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문에 예수께서 이렇게 태어나실 수밖에 없었다’ 하는 것을 전하려고 한 것이다.

로마제국 내의 내란을 종식시킨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의 평화를 연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당대에 세계의 진정한 구원자로 칭송 받았다. 당대의 철학자 세네카는 그를 이렇게 칭송했다. “그는 국가를 결속시키는 기반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들이마시는 삶의 숨이다. 그가 제국에서 떠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다. 왕이 살아 있을 때에만 모든 것이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되며 그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게 그의 존재는 당대 세계의 운명과 동일시되었다. 그에 비해 예수는 어떤 존재일까? 한마디로 보이지도 않는 존재다. 변방 속국의 신민,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이면 이리도 가야 하고 저리도 가야 하는 사람들, 그 여행지에서조차 방 한 칸 구하지 못하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존재다. 제국의 황제는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명하지만, 인구조사를 받아야 하는 대열에 낀 사람들은 하나의 통계수치 말고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 자신들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삶을 지켜 가는 사람들이고, 그야말로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지닌 존재들이지만 제국의 권력자 앞에서는 한갓 통계숫자에 불과한 존재들이다. 예수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가는 그 아이를 구원자로 선포한다.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진정한 구세주요, 그로부터 이룩된 로마의 평화가 진정한 평화인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상실해버린 사람들의 자리에서 진정한 평화가 시작된다는 선언이다. 그러기에 누가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가장 기뻐한 이들이 가난한 목동들이었다고 전한다.


마태복음이 전하는 아기 예수 탄생의 배경으로 설정되고 있는 헤롯왕의 통치 또한 로마제국의 지배와 직결되어 있다. 헤롯왕은 유대 민족 사회에서 어떤 정통성도 지니지 못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역사상 가장 혐오스러운 독재자의 면모를 지닌 왕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의 유대 분봉왕으로서 가혹한 조세정책으로 민중들을 수탈하였다. 그렇게 수탈한 재물을 로마황제와 귀족들에게 바쳤고, 쉴새없는 건축사업을 하여 그 건축물들을 로마황제에게 헌납하였다. 그에 저항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로마군대의 힘을 얻어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그의 말년에는 편집증 환자로서 광폭한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의 충성을 받던 로마황제마저도,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아들들마저도 죽인 그의 행위를 두고 “헤롯의 아들이 되느니 차라리 헤롯의 돼지가 되는 것이 낫다”고 할 만큼 잔인하고 무모한 인물이었다.

마태 또한 누가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탄생을 세계사적 사건으로 전하고 있다. 마태는 로마의 분봉왕으로서 헤롯왕의 존재를 부각시킴과 아울러 또 하나 의미심장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동방박사들의 등장이다. 동방박사의 등장은 유대 민족에게 오랜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의미를 전하는 것만은 아니다.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동방박사의 등장은 로마의 평화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 질서의 탄생을 고대하는 당시 세계 사람들의 열망을 나타내 준다.  

왜 동방박사일까? 성서의 세계 안에서 동방은 페르시아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동방박사는 페르시아에서 온 현인들 쯤으로 간주될 수 있다. 로마제국 당시 페르시아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스 알렉산더대왕의 침략으로 페르시아제국은 오래 전에 붕괴되었고, 그 지역은 한동안 서방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그 지역에 파르티아왕국이 등장하여 로마제국이 견제해야 할 세력이 되었다. 아마도 유대의 헤롯왕은 그 세력을 견제하는 로마의 충견으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 즈음 옛 페르시아제국 현인의 후예들이 동방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옛 제국의 기억을 간직한 이들이 지금 당면한 로마의 평화에 비판적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쉽사리 상상할 수 있다. 동방박사들의 등장은 로마제국의 지배에 신음하는 민족과 민중들의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열망과 연대를 말한다. 마태는 동방박사들로부터 예수의 탄생 소식을 접한 로마제국의 유대 분봉왕 헤롯왕이 불안해했다는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로마의 평화가 파열되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아기 예수 탄생의 의미를 기리는 것 또한 복음서 기자들의 뜻과 다르지 않다. 군사적 폭력과 맘몬의 지배가 계속되는 오늘 세계 현실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것은 진정한 삶의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희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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