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세계 교회사 01] 그리스도교의 역사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06-08 22:48
조회
1886
천안살림교회 2011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1 - 세계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1년 6월 1일 / 최형묵 목사


제1강 그리스도교의 역사관


1. 기독교적 이상과 역사관의 형성


기독교는 나름대로 일정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모든 다른 종교나 사상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하나의 근본 동기를 갖고 있으며 그리고 그 근본 동기는 인간들의 실존적 정황으로부터 출발하는 어떤 이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성서에 나타나는 기독교적 이상은 창조질서에 관한 이야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창조질서란 본래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질서로서, 그것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의 온전성을 갖춘 것이며 그것의 최종적 집약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의 온전성으로 표현되었다. 그 질서에 갈등이나 적대적 대립은 없으며 오직 온전하게 서로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따라서 그 질서내에는 슬픔과 눈물, 고통 그리고 죽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성서에 나타나는 기독교적 이상이며 이것은 기독교적 인간이해 또는 역사이해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실재하는 현실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현실에서는 인간이 결코 세계의 중심으로서 몫을 감당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끊임없는 고통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의 세계를 보고 고대인들은 선하고 의로운 질서와 악한 질서가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 점에 있어서, 즉 대립 갈등하는 세계 현상에 대한 통찰에 있어서 모든 종교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통시적 차원에서 그것들의 전개과정에 대한 이해는 서로 달랐다. 흔히 대별하듯 자연종교와 역사종교라는 구분이 사실상 이러한 서로 다른 이해를 나타내준다. 즉 자연종교란 세계 안의 대립현상을 자연의 순환과정과 같은 것으로 보았고, 역사종교란 그것을 자연의 순환과정과는 다른 고유한 사회, 역사적 현상으로 보아 일정한 출발점으로부터 목표를 향해가는 전진적 과정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역사종교의 세계현상에 대한 이해는 일정한 시점에서 일어난 어떤 일이 자연의 순환과정처럼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화되어 간다고 하는 통찰을 담고 있다. 성서 안에서 이러한 차이는 바알종교와 야훼종교와의 대립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즉 바알종교는 건기와 우기라는 자연의 순환계기에 따라 신의 활동을 이해했지만 야훼종교는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출발하여 종국적인 구원과 해방의 완성이라는 과정 속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이해했다. 바알종교뿐 아니라 대다수의 고대 종교들이 세계현상을 단순히 순환적인 것으로 보았던 데 반해 그것을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으로 파악한 기독교적 역사이해의 특이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역사관은 그 안에서도 서로 다른 몇 가지 유형을 포함하고 있다. 그 하나는 기독교적 역사관의 가장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예언자적 미래주의와 그와 직결된 묵시문학적 종말론으로 대표되는 역사관이요, 또 하나는 신약시대의 루가복음에서부터 그 구체적 형태를 띠기 시작해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완성을 보게 된 점진적 진보주의역사관(진화론적 발전사관)이다. 그리고 이 양자를 발전적으로 종합하는 제3의 유형이 있다. 이러한 유형들로의 분화는 역사적 상황의 변화 및 신앙주체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2. 기독교적 역사관의 몇 가지 유형


1) 예언자적 미래주의와 종말사관

예언자적 미래주의로부터 발전하여 후기 유다교의 묵시문학에서 본격화되었던 종말론적 역사이해는 본래 아브라함적 신앙의 두 기둥 즉 계약과 약속의 두 기둥 안에서 형성되었다. 즉 기대되었던 약속의 성취는 타계적 구원이 아니라 공동체적 이상으로 역사적인 목표를 견지하는 미래의 세계적 시대에 이루어질 일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계속되는 추방과 고난, 정복자에 의해서 억압받고 조롱받음으로써 그리고 약속과 성취의 기대가 계속 지연됨으로써 기대된 목표의 개념은 점점 급진적이고도 이원론적인 색조를 취하게 되었다. 약속된 시대는 현재 세계사와의 연속성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기대한 선한 시대의 전망이 극단화함으로써 인간의 현재 딜레마의 적대자들도 역시 극단화되었다. 구원은 이제 자연과 역사의 현재적 구조는 사탄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이런 현재의 세상을 급격하게 파괴함으로써만, 그리고 급진적인 새로운 세계의 개벽과 완전히 다른 질서의 수립에 의해서 올 수 있다. 여기에는 점진적 과정으로서의 구원의 진화론적 관점을 포함하지 않는다. 미래시대의 양자택일적 모형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종말론적 역사관의 특징은 한마디로 현존하는 세계질서와의 철저한 단절 혹은 그것의 철저한 파괴를 통해서만이 미래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종말론적 역사관 속에서 현실에서는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는 피압박자들의 동기를 발견할 수 있다.


2) 진화론적 발전사관

반면에 루가복음에서 비로소 언급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신국]에서 고전적으로 발전된 진화론적 발전사관은 묵시문학적 역사관과 동일하게 인류의 구원을 하나의 역사적 드라마로 구성하되 날카로운 대립이나 전환의 드라마가 아니라 긴 진화과정에 참여하는 드라마이다. 이런 역사적 과정은 본래의 선한 상태와 타락에서 시작되어 하느님의 나라에서 마지막으로 완성될 때까지 역사의 나머지 부분을 규정하는 긴 구원의 과정을 걸어간다. 이러한 진화론적 관점은 다른 실존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양극화와 날카로운 대립은 당면한 과제로서는 배제되는데 그 까닭은 선과 악의 세력들이 모두 현재의 질서 안에 내재하고 있으며 그 결과가 보증된 필연적인 과정에 의해서 정의의 최후의 승리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관이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하나의 대종합을 이루게 되었을 때 그 최후의 승리(하느님나라의 도래)를 현존하는 가시적 교회가 담지한 것으로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 안에서 지배권을 획득한 세력의 역사이해를 보게 된다. 확실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철학은 실질적으로 중세기의 지배지가 된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역사관에서 우리는 역사의 실질적 주체로 등장하는 세력의 자신만만한 역사이해를 보게 된다.


3) 파국의 종말과 점진적 발전의 대종합

기독교 전통 안에 계승된 두 갈래의 역사이해를 통해, 우리는 한편으로는 현실의 악의 지배 앞에 신음하는 피압박 민중들의 현존하는 질서의 철저한 종말에 대한 염원을 보게 되며, 한편으로는 지배권을 획득한 자들의 파국이 아닌 세계의 점진적 발전에 대한 염원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전통 안에 흐르는 또 하나의 역사이해에서 양자의 통일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지는 못했으나 여러 가지 양태로 실질적 영향을 주고 있는 중세기의 인물 플로리스의 요아킴(Joachim, 1145~1202)의 성령의 제3시대론에서 드러나는 역사이해이다.

중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철학이 지배적 기독교의 신학과 봉건적 질서를 뒷받침하는 세계관으로 분명하게 자리잡게 되었을 때, 그와 상반되는 또 다른 거대한 역사철학으로 등장한 것이 요아킴의 성령의 제3시대론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의 천년지배를 현재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고 이 지배를 교회의 계층구조체제와 그것의 신적 은총에 의한 지배와 동일시한다. 교회는 그의 성례전적인 힘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직접 매개하는 매개자이며, 천 년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군주적 지배는 교회의 군주적 지배와 일치한다. 이에 반해 요아킴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의 도래라는 개념을 새롭게 했다. 그는 진정한 역사철학적인 표현방식으로 역사를 하느님의 시대, 아들의 시대, 성령의 시대라 구분했다. 그의 이러한 시대구분은 단순한 종교 교리적 차원에서만의 구분이 아닌 사회사적 통찰을 지닌 구분이었다.

첫 번째, 아버지의 시대는 아담으로부터 세례요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기간으로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제약당하며 노예제도라는 형태에서 사용된 노동력과 봉건제도의 규정을 받는 율법시대라 보았다. 두 번째, 아들의 시대는 우찌야 왕으로부터 1260년에 이르는 기간으로, 성직자나 교회의 계층구조체제가 사회를 규정하고 은총의 수단 즉 성례전적 실재가 율법을 필요없는 것으로 만드나 성직자가 모든 사람을 위해 신적인 것의 현존을 대신하고 있는 타율의 시대라 보았다. 세 번째, 성령의 시대는 6세기 베네딕트 수도원의 창시로부터 시작되는 마지막 시대로서, 사람들이 국가의 권위에도 교회의 권위에도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 자율의 시대라 보았다.

이처럼 성령의 제3시대를 역사의 최종의 완성단계로 보았던 요아킴의 역사철학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기독교적 역사이해의 대종합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이었다. 첫째, 현대적 의미에서 정교하거나 과학적인 분석이 수반된 것은 아니나, 새로운 시대란 각각 그보다 앞선 시대 속에서 잉태되어 거기에서 태동해 나온다는 역사적 발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전개과정이란 단절성과 연속성을 동시에 수반한다고 하는 통찰이다. 각각의 시대를 고유하게 규정짓는 요소가 있다는 것은 각각의 역사적 단계가 순환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옛것과 새것이 명백히 다르다는 역사의 단절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것은 옛것 속에서부터 배태되어 나온다는 것은 역사는 단순히 단절의 마디가 묶여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진화론적 전개과정의 연속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역사란 양적 발전 속에 질적인 비약을 이루어내는 하나의 전진적 과정이라는 것을 통찰한 것이다. 둘째는 정적인 수평적 차원의 삼위일체론적 지평을 동적인 지평으로 옮겨 하나의 역사적 운동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시대사적 경륜에 대한 통찰로서 하느님을 정적으로 ‘존재하는 자’라는 차원에서 파악하지 않고 이 역사속에서 ‘활동하는 자’로서 의미있게 한 것이다. 셋째는, 성령의 진리에 의해 완성되는 역사의 발전은 기존의 단계나 체체를 모두 상대화시킨다고 하는 통찰이다. 이것은 역사의 완성이라는 목표에 비추어 현존하는 모든 것을 상대화시킴으로써 세계의 혁명적 변화가능성을 예측한 것이지만, 이러한 통찰의 내용 가운데 주목해야 할 하나의 초점은 역사의 완성단계인 성령의 제3시대에는 인간이 비로소 완전한 자율을 누리게 된다고 하는 기독교적 역사관의 최종적 목표와 관련된 핵심적 내용을 지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넷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역사는 종말에 외부적 힘으로 초월된다고 본 반면에 새로운 것은 역사의 내부에서부터 이루어진다고 통찰한 것이다. 이점은 이미 다른 요소 속에서 이미 관련된 내용들을 통해 지적되었지만, 특별히 이를 통해 우리는 구체적인 하나의 현실로서의 역사와 하느님의 초월의 의미가 진정한 결합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성령의 제3시대론은 메시야 시대를 교회의 이미 성취된 시대로 통합시켜버린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에 상실된 혁명적 기대를 회복시켰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고난의 담지자이며 동시에 역사의 주체인 사회적 세력에 의해 계승되었고 기독교적 전통 또는 형식 안에서보다 세속적 형식과 전통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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