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세계 교회사 02] 교회의 질서와 초기 카톨릭 교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06-08 22:49
조회
1772
천안살림교회 2011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1 - 세계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1년 6월 8일 / 최형묵 목사


제2강 교회의 질서와 초기 카톨릭 교회


성서 이후의 교회의 시대는 대개 2세기 전후로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는 박해의 시대와 겹친다. 박해의 상황에서도 교회는 점차 조직화되어가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 박해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교회는 세상의 일반 조직이나 다른 종교집단과는 구별되는 뚜렷한 성격을 갖추어 갔다. 이 시기에 교회가 하나의 보편적 성격을 지닌 교회로서 모습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그 교회를 일러 ‘카톨릭[Cotholic] 교회’(보편적 교회 / ‘거룩한 공회’)라 한다. 물론 여전히 다양한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다양성 속에서도 보편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뚜렷했고 외적으로도 그 표지가 분명하게 나타났다.            


1. 재림의 지연과 윤리


이 시기의 신앙을 결정지은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재림의 지연’(파루시아)이었다. 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임박한 종말론을 믿고 있었고 자신들의 생애에 주님의 재림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재림은 지연되었고, 게다가 박해는 날로 심해졌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위기를 맞는다. 주의 재림은 허망한 기대라는 회의론에서부터 환상에 불과하다는 조롱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기초를 흔드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해명의 절박한 필요성을 느꼈고, 동시에 지연된 재림 기간 동안 실제적인 신앙생활 양식을 대비해야 했다. 그 한 대안으로 교회 공동체의 질서의 유지와 삶 속에서의 윤리가 중요하게 제기되었다.


2. 공동체의 제도(교회의 직제)와 교회생활


주의 재림이 늦어질수록,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계시된 구원이 복음선포와 성례전 속에서 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에게 벌써 여기서 이미 주어진다는 사실을 교회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회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신앙과 더불어 ‘구원의 기관’으로서의 교회의 위치가 확고하게 되었으며, 교회의 직제와 성례전이 점차 분명한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교회의 직제: 초기에는 다양한 직분이 혼재 - ‘사도’, ‘예언자’ 등과 함께 유대계 그리스도인의 경우 개교회 내의 장로(유대교를 따라), 집사(구제사업), 교사, 감독(재정관리) 등이 혼재, 이방 그리스도인의 경우 대개 ‘지도자들’이라는 명칭 사용. 점차 직무담당 서열이 형성되어 장로들이 장로회를 구성하고 전 공동체의 지도는 한 사람의 감독에게 맡겨지고(장로회의가 사도회의를 대신하고 감독이 의장이 됨), 성례전도 감독에 의해서만 가능해짐 - 집사의 도움을 받는 장로회의 보좌를 받는 한 감독에 의해 통솔되는 지역교회. 개별 교회의 대표권을 갖는 감독들은 지역 중심지를 거점으로 총회를 구성하고 그 중심지역의 감독이 ‘대주교’가 되고 몇몇 주요도시의 감독들은 ‘총대주교’가 됨. 그리고 아직 2~3세기에는 법적으로 확립되지는 않았지만(‘에큐메니칼 공의회’도 아직 구성되지 않음) 베드로와 바울로부터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고 또한 당시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 교회가 최상의 영예를 누림.        

성례전: 입회의식으로서의 세례 - 대개 3년의 교리교육을 거쳐 분명한 도덕적 행동을 전제로 한 세례, 세례받은 자만 성찬식 참여하고 미세례자는 성찬식때 예배당 밖으로 / 대개 부활절에 / 세 번 침례(예외적인 경우 약식세례)와 안수와 기름부음(나중에 ‘견진’ ‘견신례’ ‘도유성사’로 독립) / 대개 성인에게, 그리고 가급적 세례시점을 나중으로(도덕적 의무의 부담 때문)/ 그러나 한편에서는 어린이 세례도 베풀어짐. 성찬식은 2세기중엽부터 애찬식에서 분리. 세례받은 자의 회개 문제.

성자숭배의 시작: 재림의 지연(중간시기)과 관련. 후기 유대교의 중보자 개념에 기초. 순교자들을 숭배하다가(사망일에 성찬식, 무덤에서의 기도 - 비그리스도교적 영향) 나중에는 훌륭한 다른 사망자들까지도 숭배, 유골수집(성물숭배 시작).


3. 신앙고백


주변의 여러 거짓 가르침에 빠져 잘못된 신앙에 빠지거나 배교를 막기 위하여 올바른 신앙내용을 분명히 제시할 필요에 따라 신조(Credo)가 형성되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단순한 외침만으로 충분치 않았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명해야 했으며, 특히 이방지역에서는 한 ‘하느님’(신)에 대한 신앙이 해명되어야 했다. 처음에는 각 지역교회에서 고백한 신앙고백의 어휘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으나 로마교회의 세례고백서에서 짤막하고 함축적인 공식으로 기술되었다: 사도신경        


4. 정경화


신앙의 표준의 확립은 정경의 확정으로 이어졌다. 사도들의 편지와 복음서 그리고 구약이 함께 읽혀졌던 전통이 있었는데, 2세기 중엽에 그 문서들이 집성되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결국 27권으로 확정되었다(최종확정은 주후 393/397 회의). 이 정경화 과정은 유대교의 미쉬나 형성으로 자극을 받기도 하였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교회에 의해 배척받은 이단종파에 의해 먼저 정경이 확정됨으로써 이에 대한 분명한 잣대를 제시해야 할 필요성이 따랐다(구전의 종식). 이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사도성’이었으며, 이 기준은 이후 신학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 구약성경: 주후 90년 얌니아 회의 39권 - 오늘날 개신교/ 알렉산드리아 회의 27+15(트리엔트 회의 12) - 오늘날 구교    


5. 변증론과 신학, 그리고 윤리


교회는 내외의 도전(교회 내의 이단과 교회 밖의 박해와 비방)에 대해 자기를 방어하고 해명하고자 하는 노력을 집중하였다. 특별히 교회 내의 도전에 대해 신조와 정경의 확립으로 대응했다면, 교회 밖의 도전에 대해 변증론을 발전시켰으며, 그 변증론이 점차 학문으로서의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방세계에 대해 그리스도교를 변증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는 위대한 철학체계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변증하는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윤리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변증론은 대개 이성 중심의 당시 철학 사상에 대응하여 그 원리에 의해 그리스도교를 해명함과 아울러 생활윤리 차원에서 당시 그리스ㆍ로마세계에서 통용되는 금욕과 절제 등을 수용함은 물론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해명하였다. 그러나 단순히 동등하다는 것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등한 측면과 차이가 나는 것을 논리적으로 충분히 해명하는 데서 신학이 발전한 것이다. 이 때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 로마의 스토아 철학(그리고 플라톤의 철학 / 이후 중세시대후반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이었다(* 스토아 철학 - 보편이성과 함께 철저한 금욕주의를 제창).

그러나 당시 사상과 관계에서 전개된 신학은 단일한 색조를 띠지는 않았다. 크게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신학(스토아 철학과의 관계/ 로마의 자연법적 사고방식)과 알렉산드리아(또는 이후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방신학(플라톤 철학과의 관계 / 신비주의적 요소)의 경향은 분명하게 대별되었다. 또한 교회의 문제들(예> 성탄절, 부활절, 배교자의 성례전...)에 대해서도 양 교회 전통은 달랐고, 교회를 지배하는 주도권에서는 서방교회가 우위를 점해갔으며,  결국 중세기에 이르러 두 교회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분립하게 된다.

어쨌든 이 시기의 변증론과 신학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신학이 다른 사상과 만났을 때 어떠한 관계를 맺게 되는가를 보여 주는 범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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