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이토 히로부미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0-07-24 11:46
조회
3976
* <주간 기독교> 다림줄 일곱번째 원고입니다(100724).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이토 히로부미


한일합방, 합병, 병합, 병탄 또는 일제의 강점, 경술국치 등 다양하게 불리는 그 사건이 일어난지 100년을 맞이한다. 그 일이 8월에 일어났으니 100년만에 맞이하는 8월이 예사롭지 않다. 일본의 교토와 오사카 지역의 교회들로부터 그 의미를 되새기는 강연을 요청받고 준비하는데 그 사건의 개념을 정의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결국 일본에서의 일반적인 용어인 ‘병합’에 한국의 시각을 분명히 해 ‘강제’라는 말을 덧붙여 ‘한일강제병합’이라 하기로 했다.


강연을 준비하면서 여러 자료들을 들추어보자니 그 100년을 맞이하는 일본인들의 심정도 예사롭지 않은 모양이다. 눈에 띄는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가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재평가였다.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인 올해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서거 100년이 되기도 하는 해이다. 일본에서는 안중근의 이토 저격으로 오히려 한일병합이 앞당겨졌다는 견해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만, 최근에는 이토가 한국 ‘병합’에 반대했다거나 그나마 나은 제국주의자였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그와 같은 견해를 종합해서 이해하자면, 결국 민족주의자 안중근의 ‘테러’로 한국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식민지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실소(失笑)할 수밖에 없는 견해이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 행위는 단순히 민족주의자의 무모한 행위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는 민족주의적 행위 자체가 정당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십분 감안한다 하더라도, 안중근의 생각과 행위는 민족주의적 한계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토야말로 민족주의자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동양평화’를 말했지만, 안중근이 한국과 일본, 중국의 자주권을 전제하면서 동양평화론을 개진한 반면 이토는 일본의 패권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평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추진된 동양평화, 곧 대동아공영은 평화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열강의 대결을 인종적 대립구도에서 이해하는 등 시대적 제약을 갖는 측면도 있고, 또한 이상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갈등의 중심지였던 뤼순(旅順)을 근거지로 삼아 동아시아 삼국의 자주권을 바탕으로 한 평화회의를 결성하자는 그의 주장은 여전히 퇴색할 수 없는 혜안을 담고 있고 따라서 오늘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것이 단순히 이상주의적 견해가 아니라는 것은 이후 국제연합이 결성되고, 오늘 유럽공동체가 결성된 현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신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이기도 했던 그의 평화론에는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가치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남긴 흔적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여전히 한일간 불행한 역사가 청산되지 않은 현실에서 양국간 화해를 이룰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는 길은 무엇일까? 가해자 일본 대 피해자 한국이라는 구도에서 나아가 무모한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의 실상을 인식하는 것이 양국 공통으로 그 길을 찾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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