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교회와 권력의 유착 고리, 국가조찬기도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9-04-02 19:00
조회
2902
*<뉴스앤조이> 기획기사 기고문입니다(090402).


교회와 권력의 유착 고리, 국가조찬기도회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1.


기독교 국가도 아닌 한국에서 마치 미국과 같은 국가조찬기도회가 실시되고 있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으로서, 내외부적으로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우선 기독교 외부의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기독교가 배타적인 국교로 인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의 종교로서 기독교가 주도하는 국가조찬기도회가 과연 얼마나 적절한 것인지 논란이 제기될 수 있다. 여러 종교가 병립하고 있는 한국 상황에서 특정한 종교가 국가 내지는 정치권력과 관계를 맺는 일은 언제나 민감한 사안 가운데 하나이다. 국가조찬기도회가 국가의식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타의 종교세력을 배제하거나 또는 종교세력들간의 경합관계를 야기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


다음으로 기독교 내부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국가조찬기도회가 과연 복음의 본질을 구현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논란이 제기될 수 있다. 국가조찬기도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는 일은 당연히 복음의 본질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국가를 사실상 경영하는 국민의 대표들과 최고의 위정자까지 참여하는 국가조찬기도회는 복음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기회라 믿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다 권력체제의 희생제물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구현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모종의 정치적 동기와 야망을 실현하고자 한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논란은 국가조찬기도회가 지속되는 한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고, 그 논란은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으면 안 된다.


2.


국가조찬기도회를 둘러싼 논란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지속적인 검토를 필요로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시행되어 왔던 국가조찬기도회에 대해서는 비교적 분명하게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국가조찬기도회는 교회가 국가권력 내지는 정치권력과 유착하는 고리로서 역할해 왔다.


기독교 인구가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국가권력과 기독교의 관계는 매우 밀착되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국가조찬기도회와 같은 형태의 모임은 없었다. 국가조찬기도회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정권의 성격으로 보자면 오히려 이승만 정권 시절에 이뤄졌을 법한 일이 박정희 정권 시절에야 이뤄졌다는 것은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기독교의 양적 성장을 반영한 현상이지만, 더 나아가 그렇게 힘을 확보한 기독교가 더욱 공세적으로 권력과의 유착을 지향했다는 것을 뜻한다.


5.16 군사쿠데타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교회는 ‘시대의 징조’를 구별하지 못했다.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거의 한 목소리로 ‘혁명’을 지지하고 나섰던 데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민정이양이 이뤄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후 한일협정 체결과 삼선개헌 과정을 지켜보면서 교계는 반성을 하기 시작했고 정권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교회의 흐름을 뚜렷하게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 흐름은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와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선 한국교회의 전통을 형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를 유대기반으로 박정희정권과 유착을 하기 시작한 교회는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정권의 지지세력으로서 자리를 잡아간다. 그 유착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사례가 국가조찬기도회이다.


애초 국가조찬기도회는 1966년 2월 3일 기독교인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원내 조찬기도회가 조직되어, 3월 8일에 조선호텔에서 대통령 조찬기도회를 개최한 데서 유래한다. 이후 연례행사로 치러왔는데 1976년부터 국가조찬기도회로 이름을 바꾸어 지속되었다. 1980년대 신군부 통치시대에도 지속되었고, 이후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 그리고 오늘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질긴 생명력을 갖고 지속되고 있다.  


정권의 입장에서야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장도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리 없었다. 교회의 입장에서도 체제를 뒷받침해주고 협력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실리를 생각하였다. 정권과 유착한 교회의 그와 같은 속내는 1973년 제6회 조찬기도회에서 한 김준곤 목사의 설교에서도 잘 드러난다.


“민족의 운명을 걸고 세계의 주시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10월 유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기어이 성공시켜야 하겠다. ... 당초 정신혁명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는 이 운동은 ... 맑스주의와 허무주의를 초극하는 새로운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켜야 될 줄 안다. 외람되지만 각하의 치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군 신자화운동이 종교계에서는 이미 세계적 자랑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만일 전민족신자화운동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면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이다.”(「교회연합신보」1973년 5월 6일)


정권의 비호 속에서 안정적으로 기독교 신자를 늘일 수 있다는 실리 계산이 숨겨지지 않은 채 드러나고 있다. 폭압적인 유신통치가 시행되고 이에 대해 저항하는 기독교인들 다수가 탄압을 받고 있는 바로 그 시기에 보수적 교회와 교계 인사들이 주도하는 각종 대형집회들이 정권의 비호 속에서 매우 빈번히 열렸고, 그와 같은 대형집회들은 기독교인들의 양적 성장을 가져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와 같은 사실은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의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1974년 기독실업인회가 주최한 조찬기도회에 참석한 김종필 총리는, 정권에 저항하는 기독교인들을 법으로 처리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10여 년간 교회증가 숫자는 2배, 교역자는 무려 6배의 증가를 보였다.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러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겠는가.” 이 때 그는 로마서 13장을 인용해 “교회는 정부에 순종해야 하며 정부는 하나님이 인정한 것이다”라고 발언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의 탄압을 정당화했다. 한편의 교회와 정권은 그런 식으로 밀월관계를 지속하였다. 국가조찬기도회는 그 밀월관계의 상징이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하고 난 후 완전하게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과도 교회는 손쉽게 손을 잡았다. 광주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 그 해 8월 6일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유력한 교계 인사들은 서울 롯데호텔 에머랄드룸에서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어 전두환을 앞에 두고 군권찬탈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의 장도를 축복하였다. 신군부에 대한 교계 인사들의 협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1980년 5월 초헌법적 기관으로 ‘국보위’가 만들어졌을 때 다수의 교계 인사들이 입법위원 또는 국보위 종교부 담당자들로 협력하였다. 계속해서 신군부 치하에서의 국가조찬기도회 역시 끊이지 않았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거센 국민적 저항이 일어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도 계속되었다.


긴박하게 제기되는 민의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국가조찬기도회는 그 자체로 그 성격을 웅변해 준다. 그것은 권력자들의 놀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세력들과 교회의 권력을 장악한 인사들의 화려한 놀음이었다. 그들이 화려한 처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회를 갖고 있을 때에도 국가와 민족은 결코 평안하지 않았다.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바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그들 때문에 평안할 수 없었다. 그래도 교회의 편에서 보면 국가를 경영하는 유력한 인사들에게 복음의 감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니 복음화에 기여한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권력을 지향하는 기독교의 욕망을 드러내고, 마침내 최고 권력자와 밀월관계를 누릴 만큼 기독교가 성장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일 뿐 복음화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3.


이후 김영삼의 문민정부에서부터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의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국가조찬기도회는 계속되었고, 그리고 오늘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서도 계속되고 있다.


1987년 이후 정권들은 절차적 정당성을 지니고 있었던 만큼, 그 정권들 아래서 이뤄진 국가조찬기도회는 최소한 정당성 없는 정치권력을 정당화해주는 수단으로서 역할한다는 비판은 면하게 되었다. 일종의 ‘스캔들’로서의 성격은 탈색된 셈이다. 게다가 국가조찬기도회를 이끌어간 인사들의 쇄신도 이뤄졌다. 과거 군사정권하에서 그 주도세력이 보수 교계 유력 인사 일색으로 이뤄진 데 반해 민주화 이후에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진보 교계 인사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그런 만큼 국가조찬기도회는 범기독교계의 지지를 받는 행사로서 모양새 또한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교회와 국가권력간의 유착 고리로서 국가조찬기도회의 성격이 바뀐 것일까? 아니, 오히려 그 성격은 더욱 강화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과거 군사정권하에서 국가조찬기도회는 겉으로는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사실상 정치권력과 거래를 해온 보수 기독교의 전유물처럼 되었으나 이제 과거 그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했던 진보 기독교 인사들마저 가세한 형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 보수 교계 인사들이 국가조찬기도회를 열면서 민족 복음화의 계기로 삼고자 했던 동기를 지녔던 것과 유사하게 진보 교계 인사들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더욱 신장시키고자 하는 동기를 지녔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헤아려 볼 만하다. 그러나 그 순수한 동기 그대로 진보 기독교의 정권에 대한 협력,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국가조찬기도회의 참여가 그 소기의 목적을 이뤄냈는지는 냉정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진보 기독교계 인사들의 정권 참여가 민주주의의 진전과 인권의 신장이라는 과제를 상기시키고 실질적 진전을 이뤄낸 데 기여한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정권을 장악한 이후 상당 부분 민의를 이탈할 수밖에 없었던 민주화 이후 정부들의 한계를 타개하는 데 교계의 역할은 미진했다는 것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민주화 이후 정부들 역시 예외없이 경제성장주의를 고수했고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사실상 민주주의를 퇴보시키는 한계를 지녔다. 민주화 정권에 참여한 진보 교계 인사들은 그 한계를 비판하고 타개책을 내놓는 데는 역부족이었고, 결과적으로 정권의 한계 안에 갇혀버린 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뤄진 국가조찬기도회는 여전히 그 한계 안에 있었던 것이다.


국가조찬기도회는 그 이름 자체가 시사하듯이 처음부터 ‘국가’의 한계 안에서 이뤄진 종교적 행사일 뿐이다. 과거 군사정권하의 국가조찬기도회가 정치적 정당성이 없는 최고 권력자를 민망할 정도로 찬양하던 태도 일변도에서 벗어나 민주화 이후 정권하의 국가조찬기도회는 더러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 제목도 내비춰 주었지만, 언제나 국가조찬기도회를 지배하는 담론은 ‘국익’의 논리 한계 안에 있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국가조찬기도회는 국가번영의 신학을 화려하게 선포하는 계기일 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계기는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특히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에 가까운 보편적 인권이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권리를 옹호하는 선포가 끼어들 틈은 거의 없다.


이명박 정권의 등장으로 다시 최고 권력자에 대한 찬가 곧 ‘명비어천가’가 울려 퍼지고 국가번영의 신학이 아무런 성찰 없는 가운데 적나라하게 울려 퍼지게 된 것은 국가조찬기도회의 타고난 운명상 불가피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국가조찬기도회가 지속되는 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정한 육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은 그 기도회를 ‘좋지 않은’ 기도회로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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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