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꾼 바보들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9-06-13 15:48
조회
3143
* <주간 기독교> 목회단상 78번째 원고입니다(090601).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꾼 바보들


우리는 1970년 11월 13일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을 기억한다. 그 때 사람들은 그 죽음을 예수의 죽음이라 일렀다. 예수의 죽음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태일의 죽음 또한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졌다. 전태일의 죽음으로 한국사회에는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피땀 흘려 일을 했고, 그렇게 피땀 흘려 일한 결과 한국의 경제를 일궈냈지만, 정작 그렇게 피땀 흘려 일한 노동자들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빈곤의 악순환 사슬에 매여 있는 현실을 사람들은 비로소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 사건은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한 권리를 일깨웠고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도도한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은 그 사건을 잇는 화산맥이었다.


‘바보 노무현’이 등장한 것도 그 화산맥을 잇는 것이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물결 속에서 노무현은 등장했고, 마침내 그 민주화의 열망으로 국민의 최고 대표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 권력의 지위가 녹록치 않았고, 결국은 ‘대통령을 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 결과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스스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 권력과 함께 할 수 없었던 인간 노무현은 그 권력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을 내던짐으로써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꾼 진정한 자기를 되살려내어 그와 더불어 꿈을 꾸었던 사람들 가운데 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전태일이 만든 조직이 ‘바보회’였고, 노무현의 애칭이 ‘바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40년 세월의 간격, 노동자와 대통령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간격만큼 크지만 그 두 사람은 ‘사람 사는 세상’의 자리, 평범한 사람들의 낮은 자리에서 하나로 만났다.


오늘 그의 죽음을 보며 예수의 죽음을 떠올리고, 동시에 그와 함께 꿈을 꾸었던 사람들 가운데 그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을 보며 예수의 부활을 떠올리는 것은 과연 불경스러운 일일까? 오늘 우리 역사의 현장에서 벌어진 일들이 예수가 겪은 죽음의 절대적 비극과 부활의 절대적 희망에 감히 견줄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진짜 바보 원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 비슷한 일들을 바로 지금 이 땅의 현실에서 실제로 겪으며 그에 견주는 것은 결코 불경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일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비로소 실감한다.  


뻔히 죽을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길을 가야만 했던 예수는 진짜 바보다. 예수께서는 단지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 때문에 권력자들의 미움을 샀고 그들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권력자들의 추악함을 들춰냄으로써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 다시 살아나셨다.


오늘 우리는 그 역사의 반복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는 죽음의 비극으로 마음 아파하지만 끊임없는 부활의 사건으로 희망을 바라본다. 부활의 희망은 죽음의 비극을 넘어선다. 진짜 바보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이들이 이 땅의 현실에서 죽음의 비극을 넘어선 부활의 희망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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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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