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창세기 17] 하갈과 이스마엘 - 창세기 16:1~16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2-21 21:28
조회
2239
천안 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10 <창세기 읽기>  

2006년 6월 21일부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최형묵 목사



17 (2/21) 하갈과 이스마엘 - 창세기 16:1~16



1. 약속의 지연과 갈등(16:1~6)


하나님으로부터 자손에 대한 약속을 받았으나 아브람에게는 여전히 자식이 없었다. 아브람의 가족은 여전히 심각한 ‘결손’ 상태였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심각한 결손이었다.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고 희망은 가시화되지 않았다. 바라던 바가 이뤄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 희망을 확증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을 찾기 위해 부심할 수밖에 없다. 그 때 선택하는 것은 방법은 대개 사람들에게 익숙한 방법이다. 도통 희망이 가시화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브람과 사래는 초조해졌다. 그들은 결국 당대 사회에서 아주 익숙한 방법을 찾는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하나님이 약속을 이뤄주시지 않는 것으로 알고 남편 아브람에게 방법을 제시한다. 자신의 몸종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는 방법을 제안한다. 어정쩡한 아브람은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고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 같다. 그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때가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년 후였다고 하니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말한다. 그 상황에서 그들은 매우 익숙한 당대의 관습을 따른다.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할 때는 부인이 결혼할 때부터 데리고 온 몸종을 통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부인의 친자식으로 간주되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다. 그 때 몸종은 부인의 무릎 위에서 아이를 낳음으로써 그 아이가 주인의 친자식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승인하였다. 아마도 아브람과 사래는 그 관습을 채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희망을 이루기 위한 정도를 따르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정당하고 합법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성서 기자는 당대의 관습을 따르는 그 방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내비친다. 아브람과 사래 부부가 궁리 끝에 찾은 방법을 시행한 순간 그 가족은 심각한 갈등관계에 빠지고 만다. 사래의 몸종 하갈이 잉태했다는 사실을 안 순간 하갈은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한다. 사래는 그 사태를 용인할 수 없었다. 사래는 사태 해결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남편 아브람에게 항변한다. 자신의 몸종이었던 하갈이 종의 신분을 벗어나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당연히 취할 수 있는 태도였다. 그러자 아브람은 그야말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다. ‘당신의 종이니 당신 뜻대로 처분하라’는 태도를 취한다. 당시 관습에서 여주인의 몸종은 여주인의 권한 안에 있었으므로 아브람의 태도가 그 관습에 비추어 잘못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아브람은 그 골치 아픈 상황을 스스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아내에게 떠넘긴 셈이다. 사래는 하갈을 학대한다. 그 학대를 견디지 못한 하갈은 결국 스스로 도망을 치고 만다. 주인의 아기를 가진 여종의 경우 부인으로 대접을 하지 않더라도 내다 팔거나 쫓아낼 수 없도록 한 것이 당시 관습이었다. 사래는 하갈을 쫓아낼 수는 없었다. 결국 스스로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도망치도록 유도한 셈이다. 이와 같은 상황 또한 인간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아브람의 역할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가 이 사태를 두고 수수방관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드센 두 여인네 앞에서 아브람은 어쩔 줄 모르는 어정쩡한 가장이었다.              



2. 쫓겨난 하갈과 돌보시는 하나님(16:7~16)


사실상 쫓겨난 셈이지만, 도망치는 길을 택한 하갈의 모습은 그 성격이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종이 생존하는 방법은 주인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다. 여종의 처지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하갈은 여주인에게 당하는 굴욕을 참을 수 없었다. 그에게 무슨 묘책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도저히 스스로 용인할 수 없는 사태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도망치던 하갈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 하소연한다. 하나님의 천사는 그에게 해법을 제시한다. 주인에게 돌아가 순종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단순히 되돌아갈 것만을 명하지는 않는다. 하갈과 그 아들을 축복하는 약속을 한다. 하갈의 하소연을 하나님께서 들었다는 의미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도록 하고 그 자손이 번성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한다. 고통의 울부짖음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곤경에 처한 이들의 고통의 호소를 들으시는 분이다. 성서의 일관된 증언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자식이 아니라 인간적 계획을 따른 자손이라 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저주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희생자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주목하고 고통의 호소를 들어 주신다. 그 고통의 호소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하갈은 감격한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진 곳을 ‘브헬라해로이’ 곧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샘’이라 부른다. 본문에서 그 장소를 가데스 부근 술이라고 부르고 있어 팔레스타인 남부에 해당하지만, 아브라함의 장자 이스마엘을 자신들의 직계로 여기고 있는 아랍인들은 그 장소를 메카 부근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의 호소를 듣고 그 후손에 대한 축복을 할 때 흥미로운 이야기를 또한 전한다. 그 후손들은 마치 들나귀와 같고 모든 사람과 싸우고 자기 친척을 떠나 살 것이라 한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아라비아 사막 지대를 살아가는 베두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 이야기는 보기에 따라서 경멸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은 경멸의 의미보다는 경탄의 의미가 강하다. 강인한 삶을 살아가는 베두인에 대한 경탄의 의미이다. 그것은 굴욕적인 삶을 거부한 어머니 하갈의 삶과 닮았다.  

천사를 만난 후 하갈은 집으로 돌아 왔고, 마침내 이스마엘을 낳는다. 이스마엘이 태어날 때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 여섯이었다.  

              



* 다음 주제는 “아브라함의 할례”(창세기 17:1~27)입니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