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창세기 18] 영원한 계약과 그 징표 - 창세기 17:1~27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2-28 21:51
조회
2278
천안 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10 <창세기 읽기>  

2006년 6월 21일부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최형묵 목사



18 (2/28) 영원한 계약과 그 징표 - 창세기 17:1~27



1. 하나님의 약속과 새 이름(17:1~8)


이미 15장이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의 약속을 전하고 있는데, 17장은 그 약속을 다시 반복하여 전한다.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이라는 점에서 두 본문은 다를 바 없으나 그 전하는 방식과 성격은 전혀 다르다. 15장은 야훼문헌(J 기자)으로 아브람의 인간적인 정황을 선명하게 그리고 있다. 반면에 제관계문헌(P 기자)으로 하나님만이 말씀하시고 있는 것으로 전하며 따라서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제관계문헌이 형성된 바빌론 포로기의 역사적 상황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요구는 포로기의 곤고함과 정체성 위기의 상황을 반영한다. 여기서 계약의 조건으로서 어떤 윤리적 책임이 요구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전적인 순종만이 요구된다. 인간의 행위 여하에 따라 계약의 성사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어진 이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의 영속성과 그에 대한 전적인 순종은 포로기의 곤고함과 정체성 위기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희망을 말한다.

‘야훼’와 ‘전능한 하나님’이 혼용되고 있는 것은 이 대목이 야훼문헌의 전승을 의식하는 가운데 제관계문헌 기자의 시각에서 새롭게 편집된 흔적이다. ‘전능한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샤다이’로, 본래 그 뜻이 ‘산의 하나님’으로 추정되는데 훗날 칠십인역 성서가 ‘전능의 하나님’으로 번역함으로써 그렇게 정설로 굳어진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 대목에서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뀐다. 이 변화는 사실 동일한 이름의 변형에 불과한 것이지만, 성서 기자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존귀한 아버지’에서 ‘많은 사람의 아버지’로 바뀐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성서에서 새로운 이름은 곧 새로운 존재를 뜻한다. 지금 성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동시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은 계속 반복되고 있는데, 존재와 정체성을 부정당해야 했던 포로기 상황에서 그 약속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2. 계약의 표징으로서 할례(17:1~14)


아브라함이 침묵하는 가운데 계속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을 믿는 표징으로 할례를 요구한다. 할례를 뜻하는 히브리어 ‘베리트’는 곧 ‘계약’을 뜻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계약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확증하는 가시적 징표이다.

원래 할례는 이집트와 가나안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관습이었다. 그 기원에 관해서는 위생적인 고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합리적 해명도 있으나, 아마도 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지닌 관습이라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그런데 성서에서 그 할례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백성의 표징으로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 할례는 바빌론 포로기에 할례를 하지 않은 바빌론 사람들과 구별된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가나안 주민 가운데 역시 할례를 하지 않았던 블레셋 사람들과 구별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 할례는 그리스 로마 시대에도 역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강조되어 어린남자 아이들에게 필수적으로 행해졌고, 필수적인 유다교 입문의식으로 치러졌다. 이 할례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표징으로 간주된 까닭에 초대교회에서도 끊임없이 논란이 되었고 바울은 그 할례를 과거의 존재 곧 율법에 매인 존재의 표상으로 보았다(사도행전 15장, 갈라디아서 5장 참조). 신약성서는 율법을 준수의 표징으로서 할례가 아니라 진정으로 거듭난 존재의 표징으로서 그리스도의 할례(골로새서 2:11)를 말하고 있는데, 구약에도 이미 그와 같은 동기에서 마음의 할례를 말하고 있는 점 또한 주목해볼 만하다(신명기 10:16; 30:6).

    


3. 이삭 출생의 약속(17:15~27)


하나님으로부터 확약을 받았지만 아브라함은 여전히 자신이 선택한 방법이 보증받는 식으로 그 약속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다. 그는 이스마엘에게 내리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내 사래가 낳은 아들을 통한 복을 말씀하신다. 더불어 사래의 이름 또한 사라로 명명한다. ‘사래’에서 ‘사라’의 변화 또한 ‘왕후’를 뜻하는 동일한 이름의 변형에 불과하지만, 성서기자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 대목에서 아브라함의 모습은 다소 익살스럽다.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이를 낳는다고?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약속에 대한 신뢰에 맥락에서 불신을 드러내는 듯한 에피소드와 같다. 하지만 불신의 표시라기보다는 성서기자의 재기 넘치는 반전 아닐까? 혹시 너무 좋아 그렇게 키득댄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이 생각하는 차원을 벗어난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것인데, 그 이야기를 재담처럼 가볍게 슬쩍 내던지는 격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에게 복을 내리기로 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재삼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지만, 그 방법 말고 또 다른 방법으로 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신다. 아브라함의 상상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또 다시 복을 내리시겠다는 것이다.  




* 다음 주제는 “아브라함과 천사들”(창세기 18:1~15)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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