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창세기 19] 아브라함과 천사들 - 창세기 18:1~33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3-07 21:39
조회
2481
천안 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10 <창세기 읽기>  

2006년 6월 21일부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최형묵 목사



19 (3/7) 아브라함과 천사들 - 창세기 18:1~33



1. 아들을 약속받은 아브라함(18:1~15)


아브라함의 새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점점 가시화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아들이 태어날 것을 구체적으로 약속하신다.

한창 더운 어느 날 아브라함이 자기 장막 어귀에 앉아 있는데, 마므레 상수리 나무 곁에 낯 선 세 사람이 나타났다. 흔히 세 천사로 불리는 이 나그네들은 1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하나님의 현신이다. 하나님이 세 분신으로 나타난 것인지 그 가운데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현신이고 나머지 둘은 동반자인지 알 수는 없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를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시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으나 그것은 사실 삼위일체교리가 확립된 이후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아닌 세 사람 곧 복수로 나탄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성서의 이 대목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분명히 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그 낯선 존재들을 하나님으로 인식했는지 여부는 첫 대목(2~8)에서는 아직 불분명하다. 성서를 읽는 독자는 그 존재들이 하나님의 현신인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지만 그 현장에서 아브라함에게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그들을 특별한 하나님의 사자 또는 하나님의 현신으로 인식했다기보다는 그저 낯선 나그네로 받아들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사실은 고대 근동의 나그네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대의 관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의 의로운 모습을 부각시켜 준다. 낯선 사람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관습이 살아 있는 사회는 살 만한 사회이며, 그렇게 기꺼이 맞이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일 수 없다. 이 사실은 뒤 소돔의 타락상(특히 19:4이하 참조)과 대조하여 볼 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브라함은 아무런 의혹도 없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낯선 나그네들을 후히 대접한다.

그렇게 후히 환대를 받은 나그네들은 아브라함의 가정사에 개입한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 다음 해 이맘때에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 예고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고 사라는 월경마저 그친 상태였다. 그러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나 당장 아이를 갖게 되리라는 예고는 더더욱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저번에는 아브라함이 웃었는데 이번에는 사라가 웃는다.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사라 역시 속으로 중얼거리며 웃는다. 이 역시 약속에 대한 불신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사태에 대한 당혹스러움, 경이감의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 웃는 사라를 보고 하나님은 스스로 정체를 밝히며 다그친다.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 사실을 굳게 믿으라는 확언인 것 같다. 이 대목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그네들의 정체를 비로소 인식했을 것이다. 사라는 정색을 하며 두려워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경이로움을 재삼 강조한다.



2. 소돔 멸망 예고에 탄원하는 아브라함(18:16~33)


이미 스스로의 정체를 밝힌 하나님은 또 다른 일을 위하여 자리를 뜬다. 하나님은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알려준다. 하나님께서는 그 대목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유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를 대비시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의롭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속 신뢰를 보내고 당신의 비밀을 알려주고 있는 것은 그가 옳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의롭지 못하다. 이 대목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일 뿐 아니라 정의의 조상으로서 면모를 드러낸다. 동시에 하나님 또한 약속의 하나님에서 정의의 하나님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신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왕조의 역사와 바빌론 포로기 경험 이후 심각한 신학적ㆍ윤리적 반성을 반영하고 있다. 자손만대 번영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어째서 가혹한 시련을 안겨주시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바로 그 다음 대목에서부터 나그네들 가운데 두 사람은 소돔과 고모라로 향하고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대화를 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 대화는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물음의 심각성을 드러내준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예고를 듣고 하나님께 탄원한다. 그렇게 그 두 도성을 멸망시킬 때 의롭고 무고한 사람들마저 희생되는 사태를 어찌할 것인지 항변하듯 탄원한다. 마치 욥의 물음과도 같다. 의로운 사람이 50명이라도 있으면, 아니 45명이라도 있으면, 40명이라도 있으면, 30명이라도 있으면, 20명이라도 있으면 어찌하실 것인지 묻다가 마침내 10명이라도 있으면 어찌하실 것인지 묻는다. 아마도 10명은 최소한의 집단 단위를 일컫는 것 같다. 하나님의 답변은 최소한의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결코 그 도성들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결코 혼동하지 않는 정의로운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시며, 동시에 소수의 의인일지라도 그 의인이 존재한다면 그 집단을 멸망시키기보다는 그 가능성을 믿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롯 가족의 구출 이야기는 어떤 집단에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멸망시킬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있는 무고하고 의로운 이들은 구출해내는 정의로운 하나님의 섬세함을 드러낸다. 아마도 이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와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했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그들의 존재에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는 믿음의 표현일 것이다.




* 다음 주제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창세기 19:1~38)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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