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창세기 16]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약속 - 창세기 15:1~21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1-03 21:58
조회
2457
천안 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10 <창세기 읽기>  

2006년 6월 21일부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최형묵 목사


16 (1/3)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약속 - 창세기 15:1~21



1. 자손에 대한 약속, 그리고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15:1~6)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은 계속 되풀이되는 주제이지만, 이 대목에 이르러 그 약속은 절정에 이른다. 하나님의 약속은 고대적 제의 형식을 갖춘 계약의 형식으로 확증된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자손에 대해 약속을 한다. 아브람은 자식이 없는 것을 한탄한다.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 그가 가진 재산은 데리고 있는 종인 다마스쿠스 출신 엘리에셀에게 물려줘야 할 판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대를 물리는 의식이 강력히 살아 있는데, 경제활동을 포함한 생활 자체가 가족단위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의 상황에서 그와 같은 의식은 더욱 강력했다. 아브람에게 자식이 없었다는 것은 커다란 결손을 의미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불러 말한다. 종이 아니라 아브람의 몸에서 태어날 자식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 한다. 게다가 그 후손은 하늘의 별처럼 헤아릴 수 없으리라 한다.

당장 자식 하나 없는데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지리라는 약속을 믿을 수 있었을까? 당장 아무런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어떤 미래의 희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브람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람의 믿음을 보고 의롭게 여겼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전해진 상황은 믿음의 상실 시대였다. 아마도 유대 국가의 멸망과 포로 생활을 경험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어떤 것에도 희망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식이 없는 상황은 훗날을 기약할 수 없는 상실의 상황을 말한다. 믿음과 희망의 상실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아브람의 이야기는 그 상실과 환멸의 시대를 견디어내게 하는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이 이야기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훗날 ‘믿음의 조상’으로 기억되는데(로마서 4:11),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상실과 불신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고자 했던 모든 사람의 믿음이다.



2. 땅에 대한 약속, 이스라엘의 염원(15:7~21)


후손에 대한 약속과 그에 대한 아브람의 믿음을 전하는 이야기가 신학적이고 내면적인 성찰에 가까운 이야기라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땅에 대한 약속과 계약의식은 고대적 제의의 형태를 강하게 띠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서에서 익숙한 표현 곧 ‘...로부터 이끌어낸’ 분으로서 스스로를 밝히며 아브람에게 땅에 대한 약속을 하신다. 앞에서 그냥 믿었던 것과 달리 여기에서 아브람은 그걸 어떻게 믿느냐고 묻는다.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을 가져와 둘로 쪼개어 바치도록 한다. 이와 같은 의식은 고대에 계약을 맺을 때 흔히 행했던 것으로, 계약을 위반할 경우에는 그 동물들과 같이 되리라는 비장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예레미아 34:18 참조).

해가 질 무렵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다. 깊은 어둠과 공포가 아브람을 짓눌렀다고 했는데, 그 상황은 일상의 감각적 활동을 벗어나 경험하는 신비한 체험의 상태를 말한다. 그런 상태에서 아브람은 후손들의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 나그네와 종으로서 오랫동안 고생을 한 후에야 비로소 예정한 땅에 자리를 잡게 해주리라 한다. 아모리 사람들이 아직 벌을 받아야 할 만큼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기에 그들을 내쫓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로 부가되었다. 이 아모리 사람들은 가나안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통칭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기록되고 전해질 당시 이 이야기는 과거 역사에 대한 회상이요 동시에 당대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꼭 지켜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녔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더욱 극적으로 표현되었다. 연기와 함께 횃불로 현신한 하나님께서 쪼개놓은 동물들 사이로 지나갔다. 굳건한 계약의 의식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치르셨다는 것을 말한다. 어쩌면 하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한 아브람에게 확고한 약속의 표징을 드러내주셨다는 것을 말한다. 이 이야기는 그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절망의 시대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자손에 대한 약속과 아브람의 믿음을 전하는 이야기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렇게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드러내신 하나님은 아브람의 후손에게 줄 땅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여기에 언급된 부족들의 땅은 다소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의 판도(성서가 전하는 바를 따르면 솔로몬 시대, 그러나 사실은 그보다 후대인 요시야 시대, 그것도 과거 북이스라엘을 포함한 범위?)를 나타낸다. 언급된 부족들은 대개 가나안 일대의 작은 부족들을 말하지만, 이 가운데 헷 족속은 사실 작은 부족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헷은 히타이트를 일컫는 말로, 한 때 가나안 북부와 터키 일대에서 고도의 문명을 일구고 제국을 형성하였다. 성서는 히타이트 제국을 시사하는 내용은 없고 언제나 작은 부족으로서만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성서를 전승한 사람들의 역사적 경험의 반영이다. 히타이트 제국의 번성기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거주하는 기간과 일치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 히타이트 족은 다시 소수의 흩어진 부족들로만 존재하였다. 그 탓에 성서는 작은 부족으로서만 헷 사람들을 언급한다. 동방의 역사는 거의 성서에만 의존한 탓에 19세기에 이르기까지 히타이트 제국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는 히타이트 제국의 존재를 드러내주었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자신들이 살고 있던 땅에서마저 쫓겨난 신세가 되었던 시대에 희망을 주는 이야기였다.





* 다음 주제는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창세기 16:1~16)입니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