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의 자비, 그 경이로움 - 로마서 11:30~36[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6-12 16:21
조회
2732
2022년 6월 12일(월)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의 자비, 그 경이로움
본문: 로마서 11:30~36



3주간 연이어 로마서 본문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흔히 예정론의 한 근거로 해석되고 있지만, 사실은 교리로 굳어진 예정론 이전에 사도 바울이 부딪혔던 매우 절실한 문제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 관한 문제입니다. 로마서 1~8장이 바울신학의 총강이라면, 9~11장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가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에게는 그렇게 절실하게 와 닿지 않는 문제일 수 있으나, 유대인으로서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해야 했던 바울에게는 아주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본문말씀은 이렇습니다.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그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30~32) 불순종이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야릇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와 더불어 그 오묘한 하나님의 뜻을 도대체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고 탄복하는 찬양구(33~36)가 이어집니다. 논리적 문맥을 따르면, 뒤의 찬양구는 바로 앞 구절에 이어지는 부설 정도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본문말씀의 앞 구절이 뜻하는 바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33절 이하의 말씀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지만, 앞 구절에 걸려 넘어진다면 ‘어떻게 그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도무지 납득할 수 없게 됩니다. 도대체 이 말씀의 진의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은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의 유명한 <로마서 강해>에서 이 구절이야말로 로마서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에 해당하며, 나아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함축하고 있다고 흥분해서 설파합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예정이, 한 부류의 인간들이 영원부터 선택되었고 또 다른 부류의 인간들이 영원부터 버림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예수 없이’ 버림받았지만 ‘예수 안에서’ 모든 인간이 선택되었다는 의미라고 해명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우리의 의문이 해소된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 대목에서 훗날 확립된 예정론을 말하려던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파했던 사도 바울이 직면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상황이었습니다. 어째서 이방인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유대인은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전력을 다하면 그만일 수도 있는데,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는 위대한 전통 가운데 있는 유대인들을 어떻게든 설득하고, 또 그들과 접촉하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그 유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해명해야 할 절박함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한 분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도 직결되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에게 전력을 다하면 그만이고, 더불어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르다고 선 그어버리면 그만일 수도 있었지만,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동일한 한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9~11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를 중심적으로 다루면서, 만민의 구원을 역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민을 구원하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한 분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까불면 죽어!’라고 한 전광훈의 그 하나님, 하나님 말씀을 차별과 혐오의 근거로 삼는 사람들의 그 하나님과 우리의 하나님이 다르다고만 말해버리면 간단하지만, 그러면 옳고 그름이 무의미해집니다. 저마다 정당성을 갖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하나님이라는 전제하에서, 비로소 누가 옳고 그른지 드러나고, 모두 함께 무엇을 지향해야 할지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분투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에게는 그가 하나님을 잘못 믿고 있다고 말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그따위로 믿는 것은 그렇게 믿는 자의 잘못이지 하나님 잘못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의 선민으로 간주되는 이스라엘 백성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반면 오히려 이방인들이 받아들이는 사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빈터에 새 집을 짓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오래 되었어도 멀쩡해 보이는 집을 헐고 새집을 짓고자 용단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존의 편견이 없으면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기 쉽지만, 강고한 전통 가운데 매여 있으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그런 차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물음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고 이방인을 새롭게 선택했다는 이야기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바울은 그 물음에 대해 스스로 답합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고 있고, 이스라엘이 회복되기 이전 버림받은 상태에 처해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그 현실이 만민의 구원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역설합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유대인에 대한 해명이며 동시에 그 완고한 유대인 때문에 새로운 기회를 누리게 된 이방인을 향한 호소이기도 합니다. 피차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른 것으로 오만에 빠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도대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앞부분에서 지루할 정도로 버림받은 것과 같은 이스라엘의 현실을 두고 물음과 답을 반복합니다.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물음과 답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허물이 지니는 이중적 효과를 말합니다(11:11이하).
먼저 이스라엘의 허물은 이방 사람들에게 새로운 계기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허물은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 곧 이방 사람들을 깨우치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금방 깨우칠 수 있는 진실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안에 있는 사람의 잘못은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깨우침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계 안에서 잘못된 일은 덮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눈에 띌 수 있습니다.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외쳐할 사실을 뭉개고 있을 때 밖에 있는 사람은 쉽사리 ‘아니다!’를 외칩니다. ‘저러면 안 되는데!’ 거기서 새로운 가능성이 제시됩니다. 이스라엘의 허물은 그와 같은 효과를 냅니다. ‘아니다!’라고 부정한 사람은 다른 가능성을 찾습니다.
그 부정이 되돌아올 때 부정당했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태도 여하에 따라 다른 결과가 발생합니다. 두 번째 효과입니다. 저 바깥사람들이 자기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옳은 길을 따르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자기도 변화할 수 있지만, 오히려 방어적으로 기존의 자기 입장을 강화하면 새로운 가능성은 차단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역설하는 대목에서 “내 동족에게 질투심을 일으켜서...”(11:14)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조차 하는데, 그 표현은 바로 그런 상황을 유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교회의 허물을 두고 벌어지는 논란, 유력한 정당을 둘러싼 논란의 상황도 이처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두고 말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는 인간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한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은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다.” 이 결론은 불순종의 과정을 거쳐야만 자비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적 인과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를 입기 위해서는 꼭 불순종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칭찬을 받기 위해 먼저 잘못을 저질러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미 인간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현실을 전제합니다. 그 표본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배반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의 의미는, 그렇게 모두가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그것으로 끝이란 말이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역설하는 데 있습니다. 그 어떤 계기를 통해서든 인간이 그 잘못을 깨달음으로써 영원한 버림받은 상태에 처해 있는 것과 같은 처지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한 때 하나님을 몰랐던 이방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다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유대인에게도 손길을 내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본문말씀의 참뜻입니다.

33절 이하의 말씀은 그 깨달음에서 오는 찬양입니다. 인간의 얕은 판단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깊은 속뜻을 깨닫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하나님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바라신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요 그에 대한 찬양입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으며, 누가 주님의 조언자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속뜻을 속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얕은 인간의 판단에 따라 재단되거나 독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의 판단 범위 안에서 헤아려지기 어렵다는 사실은 확실히 사람들에게 혼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 혼란은 사람들이 설정한 가치의 혼란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인간을 끊임없는 혼란 가운데 내버려두지는 않습니다. 본문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심판이나 정죄가 아니라 구원에 있다는 사실만큼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끊임없이 인간의 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해 비관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놀라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함입니다. 이 점에서 바울은 구약 예언자의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이 어째서 로마서의 핵심 열쇠가 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수에 해당할까요?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긍휼, 그것이 본문의 핵심이자 동시에 로마서의 핵심입니다. 인의(認義)론의 핵심은 자비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넉넉하심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의 깊이에 탄복하며 그분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사람은 자유를 누리고 진정한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말씀이 정죄의 도구가 되고,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어 사람을 속박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엽적으로 알고, 그 본뜻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절박하게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던, 선민으로 여긴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이어 그 관계를 역전하여 먼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방인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의 관계는 오늘 우리 현실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편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어느 편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있을까요? 율법을 받아들인 선민에게 특권이 용인될 수 없듯, 복음을 먼저 받아들인 것 역시 특권이 아니라는 진실을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기억해야 할 진실은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긍휼의 오묘함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누구나 겸허해야 한다는 진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말씀에 이어 바로 그 하나님을 뜻을 아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삶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아는 삶이며, 그러기에 서로 섬기는 삶입니다.
그 진실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넉넉함과 지혜와 지식을 따라 진정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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