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시온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을까? - 미가 4:1~5[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11-12 15:50
조회
1061
2023년 11월 1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시온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을까?
본문: 미가 4:1~5



미가서를 읽으면 떨립니다. 처음 신학에 입문했을 때 그 이전까지 교회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예언서의 내용들을 확인하면서 떨리는 체험을 했습니다. 특히 아모스서와 미가서를 읽으며 깜짝 놀랐습니다. 현실의 불의를 고발하는 데 어쩌면 이렇게 적나라할 수 있을까? 딱 지금 현실을 두고 하는 이야기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지금 봐도 같은 느낌입니다.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는 주전 8세기 동시대의 예언자들로서, 제법 번영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현실에서 예언활동을 펼쳤습니다. 이들은 번영을 구가하는 그 현실에서 벌어지는 불의와 부패, 특히 국가지도자 및 종교지도자들의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역설한 점에서 공통적이었습니다. 당시 번영했다고 하지만, 오늘에 비교하면 새발의 피도 안 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들의 질타는 무섭습니다.
특별히 그 출신 자체가 미천한 아모스와 미가의 질타는 더욱 놀랍습니다. 당대의 예언자 가운데 이사야가 귀족출신으로 그 언어가 현란하다면, 아모스와 미가는 목동과 농사꾼 출신으로 그 언어가 매우 직설적이고 통렬합니다.

본문 말씀은 남유다왕국의 부패상을 고발하고 심판의 선언을 하는 내용과 달리 구원의 희망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세계의 구원을 선포하는 말씀의 첫머리는 이사야의 말씀(2:1~5)과 그 문구 또한 그대로일 정도로 일치합니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말씀입니다.
“그 날이 오면,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주님의 산이 산들 가운데서 가장 높이 솟아서, 모든 언덕을 아래로 내려다 보며, 우뚝 설 것이다. 민족들이 구름처럼 그리로 몰려올 것이다. 민족마다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4:1~3)
여기까지는 이사야서와 미가서의 내용이 다르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 정의와 평화가 이뤄진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이뤄진 세계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존재해 온 세계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원리에 따라 이뤄지는 세계입니다.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국제연합(UN) 본부 앞에도 새겨져 있는 이 말씀은, 새로운 세계의 원리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죽임의 전쟁을 위해 사용되었던 무기들은 이제 살림의 평화를 위한 도구로 바뀝니다. 상대를 공격하고 정복해야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원리에서 서로 돕고 협력함으로써 살아가는 원리로의 전환입니다. 이 점에서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의심의 여지 없이 한결같습니다. 왜 성서의 예언자들이 위대할까요? 왜 성서가 오늘날까지 세계를 구원하는 영감의 원천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요? 바로 이러한 통찰을 그 핵심적인 메시지로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대한 꿈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이상입니다.

그 꿈은 원대하고 이상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일상적 삶의 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4:4)
성서에서 그 의미상 가장 아름다운 명구를 꼽는다면 주저 없이 이 말씀을 그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에서 농사꾼 예언자 미가다운 희망의 선포가 도드라집니다. 이사야의 선포와 동일한 말씀은 미가의 고유한 선포라기보다는 당대에 공통된 메시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상적 삶의 평화를 노래하는 이 말씀은 농사꾼 예언자다운 미가의 고유한 선포입니다.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고, 그렇게 스스로 땀을 흘려 농사를 지은 만큼 그 결실을 누리는 삶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 소출은 넘쳐나거나 모자라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넘쳐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염려하는 흔적도 모자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하는 흔적도 없습니다. 자기가 땀 흘려 가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에서 거둔 소출을 바로 그 나무 아래서 누린다는 태평스러운 삶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렇게 거둔 소출을 빼앗길 염려도 없고 평화스러운 삶이 침해를 받을 염려도 없는 삶에 대한 소망이 간결하고도 간절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그 삶이 보장되리라는 구원의 희망에 관한 선포입니다.
이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 종식되는 거대한 평화의 지평이 일상적 삶의 평화 지평으로 축소된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새기고 있습니다. 나라들 사이에서 전쟁이 없어지는 것이 평화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소극적 의미의 평화일 뿐입니다. 적극적인 의미의 평화는 일상의 삶에서 이뤄지는 평화입니다. 누구든 자기가 흘린 땀의 결실을 빼앗기지 않고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는 정의 가운데 이뤄지는 평화야말로 진정한 평화입니다. 성서가 일관되게 증언하는 ‘정의로운 평화’, 곧 ‘샬롬’의 이상입니다. 모든 예언자들이 선포한 평화의 이상은 미가의 이 간결한 선포 가운데 온전히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다른 모든 민족은 각기 자기 신들을 섬기고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나, 주 우리의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분에게만 순종할 것이다”(4:5)
보기에 따라 미묘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 어떤 종교적 배타성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저마다 자주성과 독립성이 보장되는 평화의 세계를 그리는 맥락에 부합니다. 저마다 자신들의 신을 섬기듯, 우리는 우리의 평화로운 삶을 보장하는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평화의 이상을 노래하는 이 말씀을 마주하면서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지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 평화의 이상을 배반하는 오늘의 세계 현실 때문입니다. 그 평화의 이상을 노래했던 바로 그 땅, 그 땅의 후예들에게서 벌어지고 있는 참담한 사태 때문입니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첫 구절부터 명백히 시온의 영광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2:1~5)과 더불어 미가서의 본문 말씀은, 오늘날 이른바 ‘시오니즘’(Zionism)의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나라를 잃고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시온산 아래 옛 땅으로 복귀하고자 한 운동입니다. 그 열망을 따라 유대인의 후예들은 오늘날 현대 국가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참극으로 시작되었고 그 참극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과연 오늘 본문 말씀이 오늘 그 참극의 현장을 정당화하는 말씀이 될 수 있을까요?
예언자 미가는 시온산을 중심으로 하는 백성의 공동체에 대해 전혀 다른 전망을 동시에 표명하고 있습니다. 무너져 내린 시온을 선포하는가(3:12) 하면 본문 말씀에서처럼 말씀의 근원을 나타내는 표상으로서 백성 가운데 우뚝 선 시온을 선포하기도 합니다. 시온의 불가침성을 선포했던 이사야와는 명백히 대비되는 미가의 선포입니다. 미가가 일관성 없이 헷갈리는 선포를 하고 있을까요? 모순되는 선포의 성격, 이 선포의 혼종성은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무너지는 시온은 정의가 무너진 것을 뜻합니다. 우뚝 선 시온은 정의가 온전히 구현된 평화의 세계를 뜻합니다. 아주 명료한 선포입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정의가 실현되는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지, 그 반대의 경우라면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허깨비요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너져 내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미가는 억압받는 백성의 열망과 동시에 그 백성이 억압자의 역할을 하게 될 때 엇갈리는 상황을 이 메시지 가운데 동시에 그려내고 있습니다.
현대의 역사 가운데 펼쳐진 시오니즘은 어느 편에 가까울까요? 유대인들이 서구 제국들 가운데서 핍박을 받고 있을 때 시오니즘은 핍박받는 민족의 열망을 일깨우는 이상으로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들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을 내쫓고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상황을 정당화할 때 그것은 용인될 수 없는 이데올로기요 우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상황입니다.

오늘 착잡한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두고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해합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블레셋의 후예요 오늘날 이스라엘은 선민 바로 그 이스라엘이기에 두 세력의 대결은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명백한 역사에 대한 오인입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명이 블레셋에서 기원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로마가 주후 70년 유대국가를 완전히 멸망시킬 때 그 땅에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민족의 이름을 붙여 모욕을 주고자 했던 의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점에 블레셋이라는 민족은 없었습니다. 외래 세력으로 여겨진 그 민족은 이미 그 땅에서 동화된지 오래였습니다.
그런데도 오인된 그 대립구도가 여전히 통용되는 사연이 무엇일까요? 팔레스타인의 시인 자카리아 무함마드는, 그것은 “정치적 의도가 있는 거짓말”이라고 잘라 말합니다(<팔레스타인의 눈물>, 101).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외래주민의 후예는 다시 본래 자기네 고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논리로 현존하는 주민의 추방을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주민의 후예를 그렇게 추방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또 다른 시인 모그리드 바그리트는 탄식합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름 때문에 사람을 이토록 골치아프게 하는 나라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자기 땅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도 검문소에 걸려 운 나쁘면 몇 시간씩 대기해야 하는 사태를 일상으로 경험하며 내뱉는 탄식입니다(같은 책, 147). 우리는 현실을 호도하는 신화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엄연한 역사적 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만들어낸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요? 교우들의 독서 모임(필립 마플릿, <팔레스타인의 저항 – 이스라엘과 제국주의에 맞서 해방은 어떻게 가능한가?>)에서 아주 짧게 강의를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 시간 팔레스타인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할 수는 없습니다. 한두 마디로 그 역사를 집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중적 약속에서부터 비극은 잉태되었습니다. 애초 단일한 비종교적 세속통합국가의 독립이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었지만, 유대인과 아랍인에 대해 각각 상충되는 약속을 한 것이 문제였고, 결국 국제연합(UN)이 1947년 분할안을 승인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1947년 유엔 결의 당시 팔레스타인 판도는 어땠을까요? 아랍인 87.5%, 유대인 6.6%, 영국점유 5.9%였습니다. 물론 그 땅은 제국주의 침략 이전 아랍인과 유대인, 그리고 기독교인이 공존하는 땅이었습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 사람들 가운데는 기독교인이 상당수에 이릅니다. 1947년 유엔 결의 당시 땅의 분할은 56.47%를 유대국가에, 42.88%를 아랍국가에 할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부터 불공정합니다. 이스라엘의 일방적 점령은 이마저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두 가지 법을 따라 점령 체제를 굳혔습니다. ‘부재자 재산법’과 ‘귀환법’입니다. 부재자 재산법은 피난한 아랍인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그들이 귀환할 수 없도록 규제했습니다. 귀환법은 모든 유대인은 이주자로서 이스라엘로 돌아올 권리를 가지며 완전한 이스라엘 시민권을 갖는다는 것을 보장합니다. 팔레스타인 출신 사상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자기네 가족이 쫓겨난 집에,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를 역설한 사상가 마틴 부버가 살게 된 아이러니를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인종차별정책에 따라 분단된 팔레스타인 땅에는 천정만 열린 지상 최대의 감옥이 만들어졌습니다.

폭력행위에 동의할 수 없고 분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특정한 폭력행위를 문제시할 때는 그 근원을 동시에 살펴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전쟁에서 직접침략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그 근본원인과 대안까지 생각하여야 합니다. 더불어 그로 인해 고통을 겪는 사람이 누구인가 주목해야 합니다. 과연 어떤 상태가 과연 정의로운 것인지 근본적으로 헤아려야 합니다. 일상적 삶을 무너뜨리는 불의가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나의 평화가 타인의 평화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면 그것은 불의입니다. 정의를 외면한 시온은 무너져야 하고, 정의가 이뤄질 때 시온은 우뚝 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함부로 오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시온산은 평화의 상징이 아니라 분열과 갈등의 상징이 되어 있습니다. 가장 추잡한 지배의 욕망으로 오염된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현실을 두고 시온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을까요?
본문 말씀은 그 영광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지 일깨웁니다. 모두가 공평하게 누리는 삶의 평화를 이루는 것이 그 길입니다. 우리가 그 진실을 따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고, 더불어 그 진실을 구현하는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진실을 따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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