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랑을 이루는 언행일치의 삶 - 요한계시록 3:7~13[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12-10 15:22
조회
869
2023년 12월 1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사랑을 이루는 언행일치의 삶
본문: 요한계시록 3:7~13



요한계시록은 성서 가운데 특별한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선과 악의 극단적 대결 구도와 고도의 상징성을 띠고 있어서 한편으로는 껄끄럽게 느껴지고 또 한편으로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시대 전후로 매우 강력하게 영향력을 끼친 묵시적 세계관, 곧 종말론적 세계관이 지니는 기본 성격을 이해하면, 그 큰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1세기 전후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희망을 선포하는 신앙고백에 해당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절박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사람의 아들의 도래와 함께 열리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절절한 믿음이 그 핵심입니다. 박해와 혼란 등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의 기대 또한 극단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서신이지만 특별히 계시록이라 이름이 붙은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뤄지기까지의 여정을 비밀스러운 상징적 언어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전하는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과는 구별되는 저자 요한은 유배지 밧모 섬에서 계시를 받고, 그 계시를 일곱 교회에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가운데 빌라델비아 교회에 전하는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에 전하는 말씀은 기본적으로 칭찬과 책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두 교회(사데, 라오디게아)에 대해서는 칭찬이 빠져 있고, 두 교회(서머나, 빌라델피아)에 대해서는 책망이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해당하는 빌라델피아를 향한 말씀에는 칭찬만 있을 뿐 책망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박해와 혼란의 시기를 잘 견디며 신실한 신앙을 지키고 있는 교회를 향한 격려의 말씀입니다.

각 교회에 전하는 말씀의 첫마디는 항상 말씀을 선포하는 분의 권위를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분은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 또는 사람의 아들로 일컬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문을 열고 닫는 열쇠를 쥔 분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구약의 예언서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표상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겼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그 열쇠를 쥐고 있는 분은 말씀의 선포자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보아라, 내가 네 앞에 문을 하나 열어 두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다. 네가 힘은 적으나,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보아라, 내가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을 네 손에 맡기겠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다. 보아라, 내가 그들이 와서 네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인내하라는 내 말을 네가 지켰으니, 온 세상에 닥쳐올 시험을 받을 때에, 나도 너를 지켜 주겠다. 시험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려고 닥치는 것이다.”(8~10)
이 말씀에 빌라델피아 교회가 처한 상황과 그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하였는지 밝혀져 있습니다. “네가 힘은 적으나,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이 말씀은, 빌라델피아 교회가 미약하지만 신실한 믿음을 굳건하게 지켰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규모가 작았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규모에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유력한 존재들과는 거리가 먼 구성원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세속적 가치관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유력한 세력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에 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지 않게 그분에 대한 믿음을 신실하게 지키고 있다는 것이 칭찬의 이유입니다. 어떤 뜻과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규모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 상식을 넘어 세상 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그다음 말씀에서 암시되고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을 네 손에 맡기겠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다. 보아라, 내가 그들이 와서 네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요한계시록은 기본적으로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박해받는 그리스도인의 상황을 바탕으로 합니다. 제국의 질서에 동화되지 않고 신실한 믿음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는 믿음을 지킨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입니다. 일곱 교회에 전하는 말씀을 선포한 이후 일곱 개의 봉인을 떼어낼 때마다 벌어지는 상황(6장 이하)을 보면 확실히 그 맥락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거짓말하는 유대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들을 사탄의 세력이라고까지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공동체가 직접 대면했던 이들이 바로 이들이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로마의 공권력과 직접 마주한 상황이 아니라 유대인들과의 갈등이 현실적으로 닥친 문제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언어가 전반적으로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어째서 이들을 두고 사탄의 세력이라고까지 했을까요? 이들은 스스로 유대인이라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이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뜻을 따른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지만 사실은 당대의 세계를 지배하는 가치관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자신들의 안위가 보장되는 한 제국의 질서와 가치관을 그대로 따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들과 달리 신실한 믿음을 지켰기에 오히려 거짓말하는 그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리라 선포합니다. 더불어 아무도 빌라델피아 교회의 면류관을 빼앗을 수 없고 영화로운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며, 나아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 몸에 새기게 될 것이라 합니다. 진정한 하늘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힘은 적으나,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하지만 사실은 거짓말하는 사람들과 달리 ‘인내하라는 내 말을 지켰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의 진실을 따르며 모든 적대를 극복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언행일치의 삶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지킨 신실한 믿음은 언행일치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답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제국의 질서가 보장하고 권장하는 지배의 욕망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온전히 섬김으로써 서로를 사랑하는 그 삶을 신실하게 따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비장한 언어 가운데 숨겨진 참삶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요한계시록이 숱한 상징적 표상을 동반한 하나의 엄격한 문학적 양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름이 지니는 상징성에 주목하며 상상력을 펼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필라델피아’(Philadelphia)는, ‘형제자매애’ 또는 ‘평등’을 뜻합니다. 그 이름을 지닌 교회답게 명실상부한 교회의 미덕을 칭송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에도 같은 이름의 도시가 있습니다. 미국의 처음 수도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이 내용이 담긴 미국 독립선언서가 작성된 곳으로, 미국의 독립기념관과 자유의 종으로도 유명합니다.
그 도시의 이름을 그대로 내건 영화 <필라델피아>가 있습니다. 톰 행크스와 덴젤 워싱턴 주연으로, 유능하지만 성소수자인 변호사가 해고를 당연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법정영화입니다. 영화는 평온한 도시의 풍경과 그 도시의 사회적 약자들의 풍경을 교차하면서 시작됩니다. 애초 경쟁자였던 변호사에게 의뢰하여 법정 공방을 벌여가는 과정이 중심이지만, 사회적 시선과 가족의 태도 역시 밀도 있게 그려집니다. 마리아 칼라스의 아리아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는 생명이오, 천국이 너희 안에 있다. ... 나는 사랑이다.”라고 주인공이 외치는 장면은 다시 보고 싶은 명장면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편견을 극복하고 서로를 포용하고 존중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사람은 그 누구나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생각할 수 있도록 강렬한 메시지를 주는 영화입니다.

오늘은 교회절기상 성서주일이자 동시에 인권주일입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 지키는 성서주일과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발표일과 가장 가까운 인권주일이 겹치는 것은 절묘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서의 대의를 생각하며 더불어 오늘의 인권 상황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 제37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상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 그늘진 곳에서 인간의 존엄을 믿으며 마땅한 권리를 위하여 애쓰는 이들에게 드리는 상입니다. 올해 수상자로 ‘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가 선정되었습니다. 그 시상식에 앞서서 한국교회 인권운동 50년을 되돌아보고 전망하는 포럼이 열렸습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이후 ‘NCCK인권위원회’가 탄생하여 오늘의 ‘NCCK인권센터’로 이어지기까지 내년이면 50년을 맞이합니다. 그 역사를 평가하며 인권 신장을 위하여 교회가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전망하기 위해 몇 차례 연이어지는 포럼입니다. 그 첫 발제를 맡아 함께 하였고, 시상식에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이전 수상자들, 그리고 올해 수상자 가족들 이야기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가슴을 울렸지만, 특별히 이태원참사유가족 가운데 한 어머니의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지난 1년간 가족들이 분투하는 가운데 참 ‘이상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상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자기 일도 아닌데, 자기 일인 것처럼 나서 가족들과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척 낯설었던 모양입니다. 가족들은 한결같이 자식과 형제자매를 잃고서 받는 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바로 그 연대의 의미로 받아들이며 힘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랑의 연대, 그것이 세상을 바꿉니다. 그 힘은 권력자의 그 어떤 횡포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원천입니다. 법을 제정하고 운용하며 통치를 하는 이들은 그것으로 자신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생각없이 말없이 그에 따르기만 하는 사람들로만 꽉 차 있다면 그들의 믿음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랑의 유대는 그 모든 권력과 지배의 논리를 이겨냅니다. 그 삶을 지켜내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삶을 지켜낼 수 있다면 우리는 좌절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답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제국의 질서가 보장하고 권장하는 지배의 욕망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온전히 섬김으로써 서로를 사랑하는 그 삶을 신실하게 따랐습니다. 그로써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그 이상을 저버리지 않고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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