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무엇을 바라는가? - 마태복음 11:2~1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12-17 16:20
조회
852
2023년 12월 1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무엇을 바라는가?
본문: 마태복음 11:2~10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본문 말씀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 서로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이례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관계가 긴밀하다고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 세례 요한은 선구자로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본문 말씀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관계는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긴밀하고 복잡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선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께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에 앞서 세례 요한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것은 상당 부분 입장을 공유하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례 요한은 악의 세계를 심판하실 하나님의 도래를 선포한 묵시적 종말론적 예언자였습니다. 이 예언자는 요단강 동편의 광야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세례 요한의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의 언행에서 그 흔적이 나타납니다. 예수께서는 여러 대목에서 요한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마태 11:7~9; 누가 7:24~26; 마태 11:11; 누가 7:28).

그러나 이후 예수의 행보는 요한과 달라집니다. 요한이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위한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렸다면, 예수는 새로운 세계로서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차원보다는, 거꾸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여를 기다리는 차원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잔치에 우리를 초청하고 있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강조점의 차이는 행동방식의 변화를 동반합니다. 예수께서는 금식을 하지 않고 잔치에 참여하며 사람들에게 그 잔치에 참여하도록 촉구합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생활했다면 예수는 민중들의 삶의 현장에서 더불어 행동하셨습니다(마태 11:18~19; 누가 7:33~34). 물론 요한도 민중들과 격리되어 고립된 생활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한과 그 제자들은 엄격한 금욕적 윤리를 지킨 반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민중들과 동화된 생활양식을 취했습니다. 그 차이는, 민중을 카리스마적 존재에 의존하게 하느냐 민중 스스로를 주체화하게 하느냐 하는 분기점이 됩니다. 요한의 길이 전자의 길이었다면, 예수님의 길은 후자의 길이었습니다.
줄여 말하면 세례 요한과 예수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입장을 공유하였지만 그 입장을 펼치는 방식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세례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 예수께서 공적인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마가 1:14) 그만큼 예수의 생애와 세례 요한의 생애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입장을 공유하되, 다른 국면에서 다른 방식으로 그 뜻을 펼친 두 사람의 관계를 말해 줍니다.

본문 말씀은 그렇게 시작된 예수의 활동이 한참 펼쳐지고 난 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여러 활동을 펼치고 있을 즈음 감옥에서 그 소문을 듣고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예수께 확인합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11:3) 이 물음은 선구자 세례 요한이 생각하는 ‘오실 그분’과 예수 사이에 모종의 괴리가 있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세례 요한은 ‘오실 그분’을 의의 심판자로 생각했습니다(마태 3:7~12).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심판보다는 하나님의 자비가 압도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11:4~5)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11:6) 예수님의 언행을 잘 이해하여 받아들인다면 복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주는 말로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일지 모르지만, 당신이 한 일을 보면 세례 요한도 틀림없이 이해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세례 요한과 같이 사려깊은 이가 걸려 넘어질 리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옳고 그름에 대한 심판이, 잘못에 대한 정죄에 그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이뤄져야 할 올바른 삶의 모범을 구현하는 데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오실 그분’을 잘못 짚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은 그 자체의 목적으로 끝나지 않고 궁극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데 있다는 것을 예수께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걸 이해하지 못해 넘어질 리가 없다고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최고의 찬사로 이어지는 말씀은 더더욱 그 진실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은 19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으로 완결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은 10절까지로 한정하였기에 한정된 그 맥락 안에서 의미를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고 난 후 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11:7~8)
이 말씀은 도마복음에도 나옵니다. 도마복음은 여기에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들은 화려한 옷을 입었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도마 78) 그러니까 도마복음에서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신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태복음 본문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러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이 사람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11:9~10) 이로써 마태복음은 이 말씀을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로 돌립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로 쉽게 변용될 수 있었다면, 이것은 두 사람의 공통점을 매우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는 셈입니다.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존재도 아니요 화려한 왕궁에 있는 권력자들과 같은 존재도 아닌,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서 세례 요한과 예수는 서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구체적인 행태는 세례 요한과 달랐지만,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같은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열망에서 확고합니다. 두 사람은 결코 왕궁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처럼 화려하게 꾸미고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거나 강압적인 위력으로 사람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며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복음서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차이를 주목하면서도 연속성과 공통점을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경합 관계가 아니라 세례 요한을 선구자로서, 그리고 예수님을 그 선구자가 닦아놓은 길에서 온전히 목적을 이룬 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이 세례 요한에 대한 찬사를 통해 당신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세례 요한과 같이 위대한 이가 당신의 활동을 오해할 리가 없으니 염려 말라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옳고 그름을 가르는 심판의 진정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든 청중에게 환기해 주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르는 심판, 곧 정의를 세우는 일은 모든 생명을 살리는 데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속살이요 알맹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그 뜻을 더욱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영화 <막달라 마리아 – 부활의 증인>은 그 진실을 매우 실감나게 그리고 있습니다. 제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남자 제자들, 특히 가룟 유다와의 대비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심판에 있지 아니하고 생명을 살리고 사랑하는 삶의 기쁨에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진실은 우리에게 중대한 진실을 일깨워 줍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흔들리지 말 것을 촉구하며, 또한 왕궁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현혹하는 이들에게 휘둘리지 말 것을 일깨워 줍니다. 스스로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느냐,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것을 촉구합니다. 고통을 겪는 이들의 처지에 공감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에 함께함으로써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진실을 체득하고 이루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대림절 셋째 주일, 우리는 모두 이 땅 위에 정의가 이뤄지기를 갈망합니다. 그것은 곧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 일이 이뤄지기를 소망하는 것이며, 그 일에 우리가 동참하기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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