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 - 전도서 3:1~15[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12-31 16:54
조회
927
2023년 12월 3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
본문: 전도서 3:1~15



전도서는 매우 흥미로운 책입니다. 그 내용이 일반 상식은 물론 신앙 상식마저도 뒤집을 만큼 파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 ‘전도서’라고 되어 있어서 ‘전도’하기에 좋은 책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책 이름의 기원이 된 히브리어 ‘코헬렛’이 ‘전도자’로 번역되었지만, 사실은 모임 중에 가르치는 사람을 뜻합니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현인라는 뜻입니다. 그 현인의 가르침이 집약된 것이 전도서의 내용입니다. 전통적으로 그 현인을 솔로몬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달리 전도서는 아람어 또는 페르시아 외래어 등을 포함하고 있어 솔로몬보다 훨씬 후대의 작품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전도서가 파격적인 것은 신명기 이래로 지켜져 온 하나님의 공평함과 그에 따른 보상의 논리와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잠언이 가르치는 전통적인 종교적 경건과 상식적인 지혜와도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그와는 상반되고 있다는 진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의인이 받는가 하면,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을 악인이 받는다.”(8:14) 이렇게 현실의 정곡을 찌르고 있는 점에서 전도서는 욥기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합니다.
그러나 욥기가 고통 가운데 분투하며 부조리한 현실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반면 전도서는 달관의 경지에서 사람들이 아웅다웅하는 문제의 덧없음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표면적인 언어로 보면 허무주의적이고 냉소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사람들이 집착하는 문제의 덧없음을 일깨우는 것은 사람들을 전혀 다른 삶의 차원으로 인도합니다. 삶의 또 다른 차원, 곧 구조 또는 관계의 차원으로 인도하며 그 가운데서 삶의 의지를 일깨우는 것으로 인도합니다. 결코 내면의 평화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하는 셈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전도서 하면 곧바로 떠올릴 만큼 널리 알려진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전반부(1~9)는 객관적 서술로서 격언체로 각기 정해진 때의 현상을 말합니다. 후반부(10~15)는 주어가 바뀌어 그 때의 의미를 아는 사람의 깨달음과 삶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전도서 기자는 열 네 가지의 구분되는 때를 말함으로써 인생사의 이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와 죽을 때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말합니다. 심을 때와 뽑을 때는 농부가 농사를 짓는 이치를 말합니다. 죽일 때와 살릴 때, 허물 때와 세울 때는 나쁜 일과 좋은 일의 구별을 의미합니다. 울 때와 웃을 때, 통곡할 때와 기뻐 춤출 때는 인생의 굴곡을 말합니다. 돌을 흩어버릴 때와 모아들일 때는 어떤 상황을 말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추정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 중에서, 아마도 양과 짐승을 셀 때 그 숫자대로 자루에 돌을 담았던 고대의 관습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그럴 듯합니다. 껴안을 때와 껴안는 것을 삼갈 때는 사랑하는 사람의 관계를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찾아 나설 때와 포기할 때, 간직할 때와 버릴 때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찢을 때와 꿰맬 때는, 장례식을 하면서 슬픔을 표하는 방식으로 옷을 찢는 것과 장례식이 끝나고 옷을 꿰매는 것을 말합니다. 말하지 않을 때와 말을 할 때,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전쟁을 치를 때와 평화를 누릴 때 역시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지! 대개 고개를 끄덕일 만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그 때를 말하는 전도서의 결론은 이겁니다.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보탤 수 있겠는가?”(3:9) 그 의미를 생각하면 ‘좋은 때가 있는가 하면 나쁜 때도 있는 법, 그걸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니 그 때문에 놀라고 상처받지 말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반전합니다.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때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보면 숙명론이나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더 의미있는 삶을 강조합니다.
“이제 보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3:11~12)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 좌우되지 않는 현실이 명백히 존재하지만, 사람은 일어나는 현상의 이치를 따질 만한 감각을 지니고 있고, 이로 인해 끊임없이 그 이치를 캐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말은 새번역에서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영원을 사모한다는 것이 훨씬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원문의 의미상 시간 가운데 일어나는 현상의 전말을 헤아리는 지혜에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계와 우주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과 지혜를 말합니다. 결론은 역시 그 모든 것을 깨닫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역시 전도서는 인간이 노력해도 부질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질 법합니다.

진짜 반전은 그 다음 말씀에서 일어납니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이제 나는 알았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한결같다. 거기에다가는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니 사람은 그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지금 있는 것 이미 있던 것이고, 앞으로 있을 것도 이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신 일을 되풀이하신다.”(3:12~15)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허무주의로 귀결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한계지어진 인간 삶을 진짜로 의미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근대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악마의 맷돌’로 비유한 사상가 칼 폴라니는, 구약성서의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인간이 한계를 깨닫고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도록 한 것을 꼽고 있습니다(<거대한 전환>).
전도서는 흔히 사람들이 갖고 있는 어떤 내세관이나 종말론적 세계관 같은 것을 지니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있는 것 이미 있던 것이고, 앞으로 있을 것도 이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신 일을 되풀이하신다.” 이 말씀은 전도서의 세계관, 역사관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성서가 강력하게 말하는 직선적 시간관과는 전혀 다릅니다. 굳이 말하면 순환적인 시간관이라고 할까요?
대개 이런 시간관은 숙명론과 결부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숙명론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매순간을 의미로 가득찬 삶을 누리도록 촉구하려는 뜻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이 얼마나 선명한 선포입니까? 그야말로 매 순간을 카이로스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돌고 도는 시간의 한 대목일지 모르지만 지금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금 맞이한 시간이 초유의 순간이라는 역설입니다. 그 만큼 매순간을 의미 있게 살라는 뜻입니다. 과거에 사로잡히거나 미래에 저당잡히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누리라는 뜻입니다.

본문 말씀의 뜻을 집약하면,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될 때 비로소 온전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지난 주간까지 일단락지은 성경공부 도마복음 다시읽기 시간에도 누차 함께 생각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알게 된 사람은 시체를 찾은 사람입니다. 시체를 찾은 사람은 세상보다 더 값진 사람입니다.”(도마 56) “누구든지 세상을 알게 된 사람은 몸을 찾았습니다. 몸을 찾은 사람은 누구나 세상이 그에게 값진 것이 아닙니다.”(도마 80) 세상을 알면 오히려 자유함을 누리는 것으로 함께 새겼습니다.
전도서의 본문 말씀은, 적어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때를 분별할 수 있다면, 설령 우주의 이치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기쁨과 의미로 가득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때를 분별하기 위해 애쓰는 가운데 의미 있는 삶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물론 우리는 그 기본적인 삶의 기쁨마저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많고, 또한 우리가 그 삶을 지향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삶을 누리는 데 숱한 장애가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 한계상황을 절감할 때 어찌해야 할까요? 마음먹기에 달렸을까요? 가장 솔깃한 해법입니다. 많은 종교가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전도서가 세상의 부조리를 들춰내는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 부조리한 현실을 돌파하라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 내가 지향해야 할 삶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본문 말씀은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습니까? 스스로 그 삶을 체득하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길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그 길을 함께 가기 위해 서로를 돕고 협력하는 공동체입니다.

2023년 한 해 마지막 주일입니다. 내일이면 2024년 새해를 맞이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돌고 도는 시간의 한순간이겠지만, 우리에게는 딱 한 번 번 맞이했고, 또 딱 한 번 맞이할 시간입니다. 각자에게 지난 해는 어떤 해로 기억되나요? 또는 지난 해 가장 기억되는 때는 어떤 순간이었나요?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특별히 기억되는 사건 또는 순간이 있다면, 어떤 면에서든 스스로의 삶에서 의미 있는 순간일 것입니다. 재연되기를 기대하는 순간이었다면 다시 그 순간을 맛볼 수 있기를, 떨쳐내버리고 싶은 순간이었다면 기필코 떨쳐내기를 바랍니다. 새롭게 맞이하는 시간이 오늘 말씀과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그 은총을 실감하고 있다면 감사할 일이요, 아니라면 실감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은총의 삶을 맘껏 누리는 새해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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