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결여가 가져오는 관계의 변화 - 고린도전서 1:26~31[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1-07 17:17
조회
922
2024년 1월 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결여가 가져오는 관계의 변화
본문: 고린도전서 1:26~31



새해 첫 주일입니다. 동시에 오늘은 천안살림교회 창립24주년기념주일입니다. 새해 첫 주일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때, 더불어 교회공동체의 꿈을 새삼 확인하는 때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 복음의 진실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교회공동체의 존재근거와 존재방식을 일깨워 줍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고린도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처음 부름받았을 때의 처지를 환기합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기합니다(1:26).
이것은 고린도교회뿐만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여러 교회에 공통되는 상황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상당수는 그렇게 사회적으로 미약한 사람들이 중심을 이뤘습니다. 물론 점차적으로 교회 안에는 다양한 계층들이 존재하게 되었고 사도 바울 시대에도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예컨대 고린도교회의 경우 회당장 그리스보와 같은 사람도 있었고(사도 18:8), 그 도시의 재무관 에라스토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로마 16:23). 하지만 초기 교회 구성원의 대다수는 사회적으로 유력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노예 신분이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7:21).
특별히 당시 고린도라는 도시의 성격을 살펴보면 교회 구성원의 상황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전통적인 교역도시로서 고린도는 매우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얽혀 사는 도시였습니다. 기원전 2세기 중반 로마에 대항한 그리스세력의 저항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고린도는 로마에 의해 잔혹하게 파괴되어 거의 한 세기 가까이 폐허로 남아 있다가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재건되었습니다. 재건된 고린도는 전적으로 로마식 도시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전통적 질서가 완전히 해체된 고린도는 뿌리 뽑힌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들기에 더욱 적합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퇴역군인, 상인, 도망노예 및 해방노예(법적으로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으나 소유주가 없는 노예 등을 다수 포함) 등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도시가 평화스러운 코스모폴리탄 도시라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에는 매일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겉으로는 번성하고 화려했을지 모르지만, 부유한 이들이 상업적 이익에 몰두할 때 그들을 떠받치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달픈 삶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처음 구성원은 그 밑바닥 사람들이 중심을 이뤘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그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어떤 면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 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여러 가르침이 들어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형국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상황 가운데서 공동체 구성원의 공통기반이자 동시에 원점에 대해 환기하며 그것이 갖는 중대한 의미를 덧붙여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27~29)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진실로, 매우 익숙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억압받고, 보잘 것 없는 백성을 선택하시어 약속의 상대로 삼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가장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선포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서도 사회적으로 유력하지 않은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공동체는 각별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유력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도 자신을 자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뜻을 지닙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을 확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조건이 진정으로 구원의 사건에 동참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요체라는 것을 말합니다. 결여된 존재들로서 완전한 구원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신학적 통찰입니다.
사도 바울은 결여를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조건이라고 선포합니다. 자신의 결여를 통해 상대를 헤아리고 나아가 하나님에 이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이치이기도 합니다. 세상 어떤 것도 자족적인 것은 없습니다. 서로 결여를 채워주고, 서로 떠받쳐 주며 살아가는 것이 생명의 이치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결여를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부족한 구석, 아픈 구석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유대를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또한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현존하는 사회적 구조나 질서 또는 제도와는 구별되는 대안적 삶의 관계를 말합니다. 현실로 존재하는 질서는 결여를 참지 못합니다. 그 질서는 누구에게든 뭔가 자격을 갖추어야만 한 자리를 내어 줍니다. 그 질서 안에서 결여된 존재는 아예 배제의 대상이 되거나 기껏해야 동정의 대상, 시혜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그 질서 안에서 결여된 존재는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오히려 그 결여를 진정한 공동체의 존립조건으로 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없기에 겸손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결여를 자신의 존재근거로 삼습니다. 결여된 존재, 결여된 구석이 있기에 서로 마음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공동체성이 형성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진실을 더욱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의와 거룩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진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믿고,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주님을 자랑하라고 합니다(1:30~31).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의와 거룩함은 구원의 완전한 의미를 구성합니다.
그리스도가 지혜가 된다는 것은, 유대인이 추구하는 기적과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와는 명백히 구별되는 도(1:22~25)를 새삼 환기합니다. 그런 것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드러났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일까요?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데 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 자신의 업적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인정받는 것을 뜻합니다. ‘비천한 것’, ‘멸시받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을 하나님이 선택하였다는 것을 다시 환기한 것입니다. 인간사회의 법칙은 업적에 의해 인정을 받는 것이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바울에게서는 주로 도덕적인 정화를 의미합니다. 의롭다 인정받고 나아가 윤리적 주체로서 당당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역시 스스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삶 자체가 거룩하게 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인간적 의지를 배제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룩하게 되는 가능성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찾고 그것을 체화하는 차원을 바울은 강조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예수가 구원이 된다는 것은, 앞서 말한 것들이 갖는 의미를 종합하는 의의를 지닙니다. 그 모든 것이 성취될 때 그것을 일러 구원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은 주술적이거나 제의적인 차원으로 결코 환원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의 요체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야말로 궁극적 구원에 이르게 하는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비우는 것이야말로 채우는 것이라는 진실, 한계를 인식해야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진실, 내 것이 별거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다른 사람과 더불어 풍요로움을 누리는 진실을 일깨워 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지니는 역설, 인간과 세상을 바꾸는 가장 급진적인 지혜를, 본문 말씀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배적인 삶의 질서는 그 지혜를 싫어합니다. 뭔가 내세울 것이 있어야 그 존재가치가 인정됩니다. 어쩌면 인간이 현실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가 갖춘 것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은 불가피한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그것을 끊임없이 상대화하며 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나만의 성취가 아니라는 진실을 일깨워 주며, 그럼으로써 타인을 받아들이며,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새롭게 맞이하는 한 해를 또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내가 누리는 삶이 나만의 노력으로 이뤄지지 않은 진실을 새기기 바랍니다. 끊임없이 나의 결여를 채워주는 그 누군가의 손길로 가능하다는 진실을 새기기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가 오늘로 24주년을 맞이했고 이제 25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종종 이야기했지만, 원래 목회 계획이 없었던 사람이 목회를 하게 되고, 교회를 시작하면서 가장 절감한 것이 ‘은총’, ‘은혜’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격려, 그리고 지금까지 공동체를 구성해온 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봉사가 이 공동체를 ‘살아남게’ 하였습니다.
오늘 주어진 말씀을 따라 거듭 우리의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바를 확인합니다. 각기 가진 것의 양적 총합으로서 교회보다는 서로에게 결여된 것을 상호보완함으로써 질적으로 다른 관계를 형성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른의 경륜과 젊은이의 활력이 서로를 보완하고, 높은 안목으로 통찰하는 지혜와 바닥에서의 경험이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 그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제4기 장로를 피택하는 절차를 예정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그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함께 마음을 모으고 지혜를 모으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어떤 말도 더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모두 자기를 자랑하기에 급급한 현실 가운데서 진실로 자랑할 것을 자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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