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은혜를 자각한 사람의 책임 - 히브리서 12:12~17[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1-14 15:38
조회
911
2024년 1월 1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은혜를 자각한 사람의 책임
본문: 히브리서 12:12~17



히브리서는 세련된 언어로 구성된 한 편의 장중한 설교문과도 같아서 어느 대목을 보든 묵직한 교훈으로서 성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저 지당한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기 쉽습니다. 본문 말씀 또한 그렇게 받아들여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그저 지당하고 평범한 교훈으로 지나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성격, 곧 신학적 입장을 잘 드러내 주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 말씀은 히브리서 전체의 결론을 구성하는 말씀의 한 대목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으로 삼은 첫대목은 12장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기에 앞서 그 전반부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여러분은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으십시오. 그래서 절름거리는 다리로 하여금 삐지 않게 하고, 오히려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12:12~13) 이것은 의학적인 의미에서 신체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상황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겪고 있는 어려움 때문에 지쳐 있고 무력해져 있는 상태를 비유하는 것으로, 그로부터 벗어나 공동체가 온전한 몫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의 결론에 접어든 12장은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겪고 있는 고난의 의미를 새깁니다. 그것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덕을 닦는 훈련으로서 의미를 지닙니다. 그 교훈의 귀결은 정의의 평화로운 열매라는 것입니다(12:5~11). 고난의 의미를 새기며 단련하는 결과는 정의와 평화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 목표를 향하여 스스로 단련하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 말씀에 이어지는 것이 본문 말씀입니다. 그 맥락에서 볼 때 똑바로 걷는다는 것은 정의로운 평화의 열매를 맺기 위해 정진하는 것을 뜻합니다. 공동체가 내외적으로 겪는 어려운 때문에 회의와 좌절에 빠지지 않고 정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 말씀에 이어지는 14절 이하의 말씀은 앞부분의 결론을 다시 환기하며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12:14). 정의로운 평화의 열매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평화를 이루는 것으로 구체화되어 있고, 그것은 곧 거룩함에 이르는 길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정의로운 평화에 대한 소망은 성서의 오랜 이상을 이어받고 있지만, 초기 그리스도교의 서신에서 놀랍게도 중심적인 개념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겪고 있는 내외적인 상황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피 튀기는 권력의 욕망과 제국의 폭력적 지배가 압도하는 현실에서 늘 불안해해야 했던 사람들의 열망을 나타냅니다. 더불어 그 와중에 공동체 내부에서마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갈등을 겪어야 했던 현실에서 진정한 공동체를 바랐던 이들의 열망을 나타냅니다. 그 내외적 상황을 유념하고 있지만, 본문 말씀은 특별히 공동체 내적 관계를 유념하고 있습니다. 평화 없는 세계 현실 한복판에 사는 사람들로서 공동체 안에서 평화를 먼저 이뤄내는 토대를 역설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평화롭게 지내라는 말씀은 서로 존중하고 용납하는 관계를 지향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그저 일반적이 교훈이 아니라 얼마나 뼈저린 상황 가운데서 나온 말씀인지 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자명하게 인지하고 있는 진리를 투명하게 바라보고 마음 편히 수용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늘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더욱 불투명한 상황 가운데서 진리를 추구하고 진실을 따르고자 분투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의견이 달라 갈등과 불화에 빠지는 상황을 숱하게 경험했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로 그 상황 가운데서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이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교회 공동체의 이상으로 전해지고 있는 진실을 우리는 헤아려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그렇게 분투하는 가운데 정의로운 평화의 열매를 추구하는 삶과 거룩함을 직결시키고 있습니다. 거룩함이 일상의 삶과 괴리된 특별한 체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평화의 열매를 맺는 삶과 직결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자임한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는 것이라 할지라도, 사람 편에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는 그 궁극적 경지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주의하십시오.”(12:15a) 이 말씀이 왜 필요했을까요? 순전히 논리적으로 따져 하나님의 은혜의 무조건성을 생각하면, 이 말은 불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나 품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혜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필요한 까닭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 은혜를 누리는 사람의 각성과 그에 따른 삶의 태도를 강조하고자 한 데 있습니다. 은혜를 누리는 사람답게 사는 삶에 대한 강조입니다.
이로써 히브리서는 다른 서신, 특히 사도 바울의 서신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 점을 아주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정신과는 달라 보이는 서신들을 부록으로 제쳐두었습니다. 유다서와 요한계시록, 그리고 야고보서와 히브리서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다시 한번 환기하지만, 사도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을 주장했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 역설했습니다. 히브리서 역시 11장을 볼 것 같으면, 믿음의 의미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갈 가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의미로 그렇게 말했을까요?

말씀을 그대로 따라가며 그 의도를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또 쓴 뿌리가 돋아나서 괴롭게 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12:15b) 이 말씀에 이은 이야기는 그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에서의 이야기입니다. “또 음행하는 자나, 음식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긴 에서와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이 알다시피 에서는 그 뒤에 축복을 상속받기를 원하였으나,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구하였건만,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12:16~17). 은혜를 누리던 사람도 그로부터 벗어날 가능성, 그리고 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가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쓴 뿌리’라는 비유적 표현을 통해, 그리고 에서의 예증을 통해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쓴 뿌리’라는 비유적 표현은 근본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쓴 뿌리에서 돋아나온 싹이 자라면 사람들을 괴롭게 할 뿐 아니라 오염시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역시 생물학적 진실을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근원적인 악이 척결되지 않는 한 그것은 극심한 해악을 끼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독특한 비유는 구약 외경 마카베오상에 등장하는 표현과 아주 닮았습니다. 마카베오상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일러 ‘죄악의 뿌리’라 말하고 있습니다(마카베오상 3:10). 알렉산더 대왕 이후 분할된 제국의 영토를 통치했던 왕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가장 혹독한 통치자였습니다. 성서의 묵시문학이 그의 통치 시대를 연상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을 정도로 가혹한 통치자였습니다. 이름 자체가 그의 오만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에피파네스(Ephipanes)는 곧 신의 현현을 뜻합니다. 그 주제 넘는 짓을 보고 당대 사람들은 에피마네스(Ephimanes), 곧 ‘미친 놈’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너 바보야?’라는 말이 아무개의 이름으로 대치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죄악의 뿌리’는 곧 자기과시적 권력의 속성을 함축합니다. ‘쓴 뿌리’ 역시 이를 연상시킵니다.
이어지는 음행의 구체적 예증으로서 에서의 이야기는 언뜻 보면 가혹하다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긴 것이 그렇게 비난받아야 할 일인가 싶기는 합니다. 본래 창세기의 맥락에서 야곱과 에서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히브리서의 맥락에서 지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춥니다.
히브리서가 주목한 에서의 잘못이 무엇일까요? 당장 눈앞의 이익을 보고 대의를 잃어버린 태도를 말합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 곧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는다는 말도 있지만, 그보다는 견리망의(見利忘義), 곧 눈앞의 이익을 보고 옳음을 잊어버린다는 뜻이 함축하는 사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2023년 지난해 <교수신문>이 한해를 결산하는 사자성어로 꼽은 말이기도 합니다. 저마다 자기 눈앞의 이익에 매몰되어 대의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사회적 공공성이 무너지고 모두에게 각자도생의 가혹한 삶의 길만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히브리서가 주목하는 에서의 과오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고 그 ‘쓴 뿌리’가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 구하였건만,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은, 곧 그가 자신의 이익을 상실한 것을 두고 통탄해하였을지언정 진정으로 삶의 태도를 돌이킨 것은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영영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말한다기보다 그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무조건성을 믿는 오늘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히브리서의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본회퍼 목사가 이미 말했듯이, 그저 ‘값싼 은혜’만 통용되고 있는 오늘 교회의 현실에서 ‘값비싼’ 은혜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번 믿음을 가졌다 해서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거룩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것은, 업적과 자격의 논리로 단단한 아성을 쌓은 권력체제와 그에 편승하는 질서를 부정하고 모든 사람이 업적과 자격에 상관없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구원의 궁극적 지평을 전망한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렇게 쌓아진 아성을 무너뜨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세계를 믿고 바라는 사람들이 마땅히 지녀야 할 삶의 태도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이 바라는 궁극적 이상을 역설하고 있다면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이상을 실현해야 할 자각을 지닌 사람들의 책임적 태도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한복판에 존재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 긴장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진정으로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구현하는 가운데 서로 존중하고 용납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각자가 맡아야 할 몫이 무엇인지 헤아려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고 추구하는 가치가 정말로 저마다의 삶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마땅히 헤아려야 할 태도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지 아니하고 진정한 삶의 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가 그 의미있는 삶에 기여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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